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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의 경전 ‘御書’에서 배운다 (68) 백미일표어서(白米一俵御書) (상)
무한한 희망,
무량의 힘을 여는 ‘지(志)’
사람의 마음만큼 위대한 것은 없습니다.
마음에는 무한(無限)한 희망이 있습니다.
마음에는 무변(無邊)한 복덕을 담을 수 있습니다.
마음은 무량(無量)한 힘을 발휘합니다.
개인의 숙명전환도 민중의 행복 실현도 평화사회 창출도 모두 인간의 마음을 변혁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일심(一心)의 묘용(妙用)’①입니다.
마음에는 불가사의한 작용이 있습니다.
니치렌대성인(日蓮大聖人)께서는 “마음의 불가사의를 가지고 경론(經論)의 전요(詮要)로 하느니라.”(어서 564쪽) 하고 말씀하십니다. 불법(佛法)은 이 마음의 무량한 보장(寶藏)을 열기 위한 가치창조의 가르침입니다.
‘마음만이 중요’합니다.
모든 것은 ‘마음[志]’으로 결정됩니다.
그때 그 순간, 마음이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결의하고 어떻게 행동을 일으키는가. 그에 따라 결과는 얼마든지 바뀝니다. 그것이 ‘신심’입니다. 일념삼천입니다.
진정으로 한 인간의 크기는 그 마음에 무엇을 간직하고 있느냐에 따라 정해집니다.
모든 것은 조그마한 수료증에서
나는 젊은 날에 은사 도다 조세이(戶田城聖) 선생님에게 검호의 수행과 같은 엄격한 교학 강의를 받았습니다.
선생님은 강의가 끝나면 고급종이는 아니지만 조그마한 ‘수료증서’를 주셨습니다. 보잘것없는 증서였지만 내게는 무상(無上)의 보배가 되었습니다.
교학뿐 아니라 만반에 걸친 학문을 선생님께 배웠습니다. 내가 전 세계의 지도자들과 평화를 위한 대화를 펼친 것도 ‘도다 대학’의 훈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 모든 행동은 도다 선생님에 대한 보은 감사의 일념에서 비롯됩니다. 제자의 승리가 스승의 승리라고 정하고 위대한 스승을 선양하고자 꿋꿋이 싸워온 인생입니다.
어쨌든 행복해지는 것도 불행해지는 것도 타인이나 환경이 결정짓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일념(一念), ‘마음[志]’이 결정짓습니다.
성훈에 비추어 진심 어린 감사와 보은으로 살아가는 마음은 강합니다. 그 복운으로 인해 참된 영광을 승리로 열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백미일표어서>를 배독하며 행복과 승리의 인생을 여는 일념의 자세를 배워 나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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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일심(一心)의 묘용(妙用) : 중생의 생명에 갖춰진 본유(本有)의 불가사의한 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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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어서 1596쪽 4행 ~ 10행)
사람은 식(食)에 의(依)해 생명(生命)이 있으니 식(食)을 재(財)로 함이라.
목숨이라고 하는 것은 일체(一切)의 재보(財寶) 중(中)에 제일(第一)의 재보(財寶)로다, 편만삼천계(遍滿三千界) 무유치신명(無有直身命)이라고 설(說)해져서,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에 가득찬 재보(財寶)도 목숨과는 바꿀 수 없나이다.
그러므로 목숨은 등화(燈火)와 같으며 식(食)은 기름과 같으니, 기름이 다 하면 등화(燈火)도 꺼지고, 식(食)이 없으면 목숨이 끊어지느니라.(중략)
그러므로 옛날의 성인(聖人)·현인(賢人)이라고 함은 목숨을 부처에게 바치시고 부처가 되었습니다.
<현대어역>
사람은 음식에 의해 생명을 이어갈 수 있다. 그러므로 음식이 재보다.
목숨이라고 하는 것은 일체의 재보 중에 으뜸가는 재보다. ‘편만삼천계 무유치신명’이라고 경문에 설하듯이, 설령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찬 재보가 있더라도 목숨과는 바꿀 수 없다.
그러므로 목숨은 마치 등불과 같고 음식은 기름과 같다. 기름이 다 하면 등불은 꺼진다. 음식이 없으면 목숨이 끊어진다. (중략)
그러므로 옛 성인 현인이라는 사람은 목숨을 부처에게 바치고 부처가 되었다.
‘목숨’이야말로 ‘제일의 재보’
이 어서는 대성인께서 신도가 보내온 정성어린 공양에 보답하려고 쓰신 편지입니다. 쓰신 해와 날짜, 받은 사람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이 어서에서는 목숨을 지탱하는 귀중한 백미를 공양하신 것은 그대의 목숨을 지탱하는 귀중한 백미를 공양하신 것은 그대의 목숨을 공양한 것과 같으며, 최대의 공덕이 있다는 것을 자세히 가르치고 성불은 틀림없다고 격려하십니다.
첫머리에 공양한 여러 가지 물건을 적고 있습니다.
“백미(白米) 일표(一俵), 모우(毛芋) 일표, 하태(河苔) 한바구니”(어서 1596쪽) 라고 귀중한 백미와 함께 들과 산을 돌아다니며 채취한 토란, 강에서 채취한 민물 김을 보낸 것 같습니다.
거기에는 ‘대성인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다.’는 정성이 가득 담겨져 있습니다. 대성인께서는 그 정성어린 ‘마음[志]’을 불법의 눈으로 최대로 상찬하십니다.
먼저, 모든 사람은 의복과 음식을 재보로 여긴다고 말씀하십니다. 의복과 음식이 재보인 까닭은 ‘제일의 재보’인 목숨을 지탱하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전 우주를 가득 채운 재보보다 목숨이 더 존귀하다. 목숨이야말로 “제일의 재보로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제일’이라 함은 어떤 것과 비교해서 가장 소중하다는 말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존귀하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 한 사람의 생명보다 소중한 재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음으로 대성인께서는 ‘목숨’을 등불에, ‘음식’을 기름에 비유하십니다. 등불은 기름이 다 하면 꺼져버리듯이 존귀한 생명도 그것을 지탱하는 음식이 없으면 끊어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목숨을 지탱하는 음식을 공양하는 것은 목숨을 공양하는 일과도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대성인께서는 그 의미를 선명하게 하려고 부처를 공경하여 소중한 재보를 바치는 ‘공양’의 의의를 밝히십니다.
모든 부처와 신을 공경할 때에는 그 이름 앞에 ‘나무(南無)’라는 말을 붙입니다. ‘나무’는 인도 말의 음(音)을 한자로 옮긴 것으로 ‘귀명(歸命)’이라고 번역됩니다.
‘귀명’이란 ‘자기 목숨을 부처에게 바친다’는 의미이며,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제일의 재보’인 목숨을 바치는 것이 최고의 공양으로서 옛 성인, 현인이 목숨을 부처에게 바치고 성불한 일을 밝히십니다.
그 예로 설산동자(雪山童子), 약왕보살(藥王菩薩)②, 쇼토쿠태자(聖德太子), 덴지천황(天智天皇)③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설산동자와 약왕보살은 불도수행에 전념하는 성인(聖人)입니다. 쇼토쿠태자와 덴지천황은 부처와 법을 지키고 전하려는 현인(賢人)입니다.
가장 소중한 목숨을 부처와 정법(正法)에 바친다면 성불의 길이 열리는 것은 틀림없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현인·성인의 일이므로 우리들은 하기가 어려운 일이외다.”(어서 1596쪽) 하고 말씀하시듯 말법(末法)의 범부(凡夫)에게 같은 행동을 요구해도 도저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범부는 영구히 성불할 수 없는가. 결코 그렇지는 않습니다.
말법의 일체 중생의 성불을 가능케 하는 민중불법의 확립이 바로 이 어서의 일관된 주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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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설산동자(雪山童子), 약왕보살(藥王菩薩) : 설산동자는 석존이 과거세에 보살행을 하던 때의 한 모습. 귀신으로 변신한 제석천(帝釋天)이 설산동자의 구도심을 시험하려고 했을 때, 귀신에게 몸을 내어줄 것을 약속하고 나머지 반게(半偈)를 들었다. 약왕보살은 법화경에 등장하는 보살의 한 사람으로 과거세에 일체중생희견보살(一切衆生喜見菩薩)이었을 때, 자신의 팔꿈치를 태워 부처의 등불로서 공양했다고 설해진다.
③ 쇼토쿠태자(聖德太子), 덴지천황(天智天皇) : 쇼토쿠태자(聖德太子, 574~622년)는 요메이천황(用明天皇)의 왕자이며 수이코천황(推古天皇)의 황태자, 섭정(攝政)이 되어 정치에 참여했다. 불교를 중시하는 시덴노사(四天王寺)와 호류사(法隆寺)를 건축했다. 손의 가죽을 벗겨 서사한 경전의 외제(外題)로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덴지천황(天智天皇, 626~671년)은 제38대 천황. 《부상략기(扶桑略記)》 제5에는 사원을 건립하기 위해 땅을 평평하게 다질 때 길이 5치(약 16센티미터)의 흰 돌이 발굴되었는데 밤에 빛을 발하기 때문에 덴지천황이 왼손 약지를 깎아서 공양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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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어서 1596쪽 14행 ~ 1597쪽 행)
그러나 부처가 된다는 것은, 범부(凡夫)는 지(志)라고 하는 문자를 심득(心得)하여 부처가 되는데, 지(志)라고 함은 무엇인가 하고 위세(委細)하게 생각해 보니 관심(觀心)의 법문(法門)이니라,
관심의 법문이라고 함은 무엇인가 하고 밝힌다면, 단지 한 벌 입고 있는 옷을 법화경(法華經)에 바치신 것이 몸의 살가죽을 벗기는 것이 됩니다.
굶주린 세상(世上)에 이것을 버리고 나면 오늘의 목숨을 이어 갈 것도 없을 때 단지 하나밖에 없는 양식(糧食)을 부처에게 바치는 것을 신명(身命)을 부처에게 바치는 것으로 되나이다.
<현대어역>
다만 부처가 된다는 것은 범부는 ‘지’라고 하는 문자를 심득하여 부처가 된다. ‘지’라고 함은 무엇인가 하고 자세히 생각해 보니 그것은 관심의 법문이다.
관심의 법문이라고 함은 무엇인가 하고 밝힌다면, 입고 있는 단 한 벌의 의복을 법화경에 공양하는 것이 몸의 살가죽을 벗기는 것이 된다.
굶주린 세상에, 이것을 공양하고 나면 오늘의 목숨을 이어 갈 것도 없을 때, 단지 하나밖에 없는 음식을 부처에게 공양하는 것이 신명을 부처에게 바치는 것이 된다.
‘지(志)’야말로 범부 성불의 핵심
어서에 “범부는 지(志)라고 하는 문자를 심득하여 부처가 되는데”(어서 1596쪽)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범부는 ‘지’로 성불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는 어떠한 일을 말하는 걸까요. 그것은 ‘관심의 법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관심’이라 함은 천태대사(天台大師)④의 《마하지관(摩訶止觀)》에 근거를 둔 법문입니다.⑤
‘관심’이란 ‘교상(敎相)’과 상대되어 단어로, 성불을 위한 실천을 말하는데 우리의 관점에서 관심의 실천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르키는지 대성인께서는 단적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즉, 입고 있는 단 한 벌의 옷을 법화경에 공양하는 것은 성인이 몸의 살가죽을 벗기는 것과 같다. 또 기근으로 자신의 목숨을 지탱하기도 어려운 때에 단지 하나밖에 없는 음식을 부처에게 공양하는 것은 목숨을 바치는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옛 성인의 불석신명(不惜身命)의 공양과 똑 같은 성불의 공덕이 있다.
이 실천의 핵심은 오로지 ‘지(志)’입니다.
만인성불의 가르침인 법화경과 그것을 설하는 부처를 일심으로 구도하고, 믿고, 지키려고 하는 ‘지(志)’만이 성불의 근본인(根本因)이 된다.
그러하기 때문에 “범부는 지라고 하는 문자를 심득하여 부처가 되는데”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마키구치 쓰네사부로(牧口常三郞) 선생님도 이 구절에 진하게 밑줄을 그으셨습니다.
어디까지나 묘법을 위해, 묘법을 가르치고 넓히는 스승을 위해 기원하고 활동하는 일, 그 자체가 성불의 직도(直道)입니다.
‘사명(使命)’은 ‘목숨(命)’을 ‘쓰다(使)’라고 씁니다.
무엇을 위해 존귀한 목숨을 쓰는가. 스승의 마음을 자기 마음으로 하여 광포를 위해 기원하고 뛴다. 그 사명에 뒷받침되는 실천이 바로 사람으로서 최고로 존귀한 행동이 된다. 그것은 바로 우리 존귀한 동지들의 행동 그 자체가 아닐까요.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자신의 일을 제쳐놓고서도 돕지 않고는 못 배긴다. 고뇌하는 사람이 있으면 곧바로 뛰어간다. 바쁜 속에서도, 좀 거리가 멀어도 좌담회에 달려온다.
자기 몸과 시간을 남의 행복을 위해, 광포를 위해 바치는 SGI 회원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의 모습에 대성인께서 최대로 찬탄하는 신심의 ‘지(志)’가 빛납니다.
그러므로 학회활동을 꾸준히 힘쓰는 사람은 반드시 ‘행복의 궤도’ ‘승리의 궤도’에 들어설 수 있습니다.
결코 마음은 지지 마라!
또 ‘지(志)’는 마음을 한 가지 목표에 집중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의 일념이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 입니다. ‘무엇을 위해’라는 근본 목표를 정해야 합니다.
우리로 말하면 자기 일념을 어본존과 광선유포에 맞추는 일입니다.
‘지’는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지’가 가진 힘으로 승리의 방향, 행복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인생은 좋은 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또 일과 병 등 여러 가지 이유로 마음껏 활동할 수 없어 고민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야말로 자신의 일념을 어본존에게 맞춰야 합니다. 도망치는 사람은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괴로워한다는 그 자체가 이미 마음을 신심에 맞추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괴로워하기 때문에 강해집니다. 아무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한 걸음, 아니 반걸음이라도 좋습니다. 도전이 중요합니다. ‘지’를 거듭하는 일입니다. 관철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관점에서 ‘지(志)’를 심득하는 일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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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천태대사(天台大師) : 538년 ~ 597년. 천태대사 지의는 중국 진·수나라 시대에 활약한 승려다. 《법화현의》 《법화문구》 등을 저술해, 남삼북칠 제종의 교리를 타파하며 법화경을 선양했고, 《마하지관》을 저술해 일념삼천의 관법을 확립했다.
⑤ 이 어서의 뒷 부분에 “지관(止觀)의 제(第)七의 관심(觀心)의 단바라밀(檀波羅蜜)이라고 하는 법문(法門)이니라.”(어서 1597쪽)라고 씌어 있다. 《마하지관》 제7권에서는 성불을 위한 일념삼천이라는 관심 수행을 할 때 방해물을 없애고 성불을 향한 길의 문을 열기 위해 육바라밀(六波羅蜜)을 실천하는 내용이 설해진다. 육바라밀의 제일이 ‘단바라밀’ 즉 ‘보시(布施) 수행의 완성’이며 ‘간탐(慳貪, 몹시 인색함)’을 없애는 실천을 설하고 있다. 이 보시의 실천에 ‘사(事)와 ‘이(理)’가 있다. 사의 보시는 소중한 재보인 신명을 바치는 일, 이의 보시는 인색한 마음을 없애는 일이 근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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