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d morning 36!
문산이 춥습니다. 9시 현재 영하10도네요.
지난번 히말라야영화얘길 잠깐 했습니다. 어쩌면 단조로울 수 있는 주제인데도 히말라야는 꽤 잘 만든 영화입니다. 일단 영화를 보면서 잠깐씩은 조는 버릇(?)이 있는 우리 집사람이 졸지를 않고 때때로 눈물을 훔쳤으니 말입니다.
사실 저는 이 영화를 두 번 봤습니다. 개봉하자마자 집사람과 동네근처 영화관에서 그리고 지난 주 토요일 아차산 등산을 마치고 우리친구 여덟 명이 단체로 봤습니다. 사실 제가 볼 영화를 선택하기 때문에 히말라야가 아닌 다른 영화를 만지작거렸으나 제가 그냥 두 번 보기로 마음을 고쳐먹고 예매를 했던 것입니다.
처음도 그랬고 두 번째 보면서도 저는 15년 전에 멕시코 근무 할 때 땀삐꼬(Tampico)라는 도시에서 봤던 ‘버티칼 리미트(Vertical Limit)' 란 미국영화를 많이 떠 올리며 비교했습니다. 결론으로 ’히말라야‘는 잘 만든 영화로 스토리전개나 촬영기법 등에서 버티칼 리미트에 결코 뒤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영화내용을 이야기한다면 버티칼 리미트가 좀 더 주제설정에 앞섰다는 생각이듭니다.
버티칼 리미트를 본지가 하도 오래돼서 내용이나 장면 전개 등이 가물가물하지만 제 기억 속에 남아있는 내용은 이렇습니다,
유명한 산악인인 아버지가 아들, 딸과 함께 에베레스트 등반을 갑니다. 그리고 눈 덮인 산을 오르는 도중 사고가 발생합니다. 줄 한 가닥에 아버지와 딸과 아들이 같이 매달렸습니다. 자일 한 가닥으로는 세 사람이 지탱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아버지는 침착하고 냉정한 어조로 아들에게 자신에게 묶인 자일을 자르라고 강요합니다. 아들은 떨리는 손으로 칼을 듭니다. 삶과 죽음을 결정짓는 찰나의 순간. 동생은 오빠를 향해 안 된다고 비명에 가깝게 소리치며 만류하지만 결국 아들은 줄을 끊고 자신과 누이는 목숨을 구하게 됩니다. [사람은 이렇게 평생을 후회할 그러나 어쩔 수 없는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사고이후 아들은 산을 버리고 은둔사진작가로 살아가고 여동생은 다큐멘터리 방송팀원으로 일하며 두 남매는 서로 연락을 끊고 살아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매는 에베레스트에서 다시 만나게 되고 동생이 조난을 당하고 오빠가 버티칼 리미트(생명체가 살 수 없는 수직 한계점)의 깊은 골짜기로 빠져들며 실종된 동생을 구하는 영화입니다. * 한 번 더 보고 싶은 영화입니다.
지친 나에게 힘이되는 사진
오늘도 뇌 충전하시며 즐거운 하루 보내십시오!
오늘의 뇌 충전 프로그램
1. 크게 심호흡 세 번 깊게 하기
2. 식구들과 조용한 곳에서 식사하기
3. 슬픈 내용의 작품 주1회 감상하기(히말라야 안보신분은 이 영화도 괜찮음)
4. 시3편 읽기
오늘의 시 3편
편지 - 윤동주 -
그립다고 써보니 차라리 말을 말자
그냥 긴 세월이 지났노라고 만 쓰자
긴 긴 사연을 줄줄이 이어
진정 못 잊는다는 말을 말고
어쩌다 생각이 났었노라고 만 쓰자
그립다고 써보니 차라리 말을 말자
그냥 긴 세월이 지났노라고 만 쓰자
긴 긴 잠 못 이루는 밤이 오면
행여 울었다는 말을 말고
가다가 그리울 때도 있었노라고 만 쓰자
서시 - 윤동주 -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가을편지` - 고은 -`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세요
낙엽이 쌓이는 날
외로운 여자가 아름다워요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세요
낙엽이 흩어진 날
모르는 여자가 아름다워요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모든 것을 헤메인 마음 보내 드려요
낙엽이 사라진 날
헤메인 여자가 아름다워요.
“흐르는 강물처럼” - Vietnam 3) -
농약공장 건설공사는 베트남실정에 맞춰서 크게 두드러진 문제없이 진행됐다. 채 한달이 안돼서 배관용접 트레이닝 스쿨(Training School)에서는 어찌 보면 베트남 최초일지도 모르는 용접사와 배관사를 배출하기 시작했다. 용접사 시험을 볼 때의 기억이 새롭다. 아크용접(SMAW) 4“ Pipe, 6G로 시험을 보는데 내가 옆에서 보고 있으니까 떨려서 시험을 못 보겠단다.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서 그 뒤로는 용접사 시험 볼 때마다 나는 시험장소에 얼씬도 안했다. 용접시편에 대한 RT검사도 검사지만 앞으로 파이프라인의 용접심(Welding Seam)에 대한 RT검사를 위해 X-ray 촬영기계를 찾아보라고 했더니 며칠 후 리라마(LILAMA)소장이 거의 집 채 만큼 큰 X-ray기계를 끌고 왔다. 몇 년도에 제작 된지도 모르게 오래돼 보이는 러시아제였었는데 어느 병원에서 사용하던 걸 어렵 게 어렵게 해서 들여왔다고 소장은 의기양양해 했다.
아무튼 이런저런 우여곡절을 겪으며 파이프 스풀(Pipe Spool)제작 작업이 착수됐고 연이어 현장에 스풀 설치작업도 진행됐다. 제철화학에서 온 배관반장은 베트남작업자들에게 철사 줄을 구부려가면서 스풀설치방향을 가르쳤고 성질 급한 용접반장은 답답하면 자신이 직접 용접을 해가며 작업을 진행했다.
어느 비 오던 날의 콘크리트 타설 작업도 기억에 남아있다. 농약공장은 철구조물 빌딩과 콘크리트 구조물 공장 동으로 나눠져 있었는데 그날은 콘크리트 공장동건물의 지붕 스라브 콘크리트를 타설 하는 날이었다. 호치민을 중심으로 하는 베트남 남부지방은 열대몬순기후로 5월부터 10월까지는 거의 매일 한 두 차례는 소나기가 왔다(그에 비해 12월부터 4월초까지는 거의 비가오지 않는 건기임)
호치민시에 몇 대밖에 없다는 소위 펌프카를 비싼 돈을 주고 어렵게 들여와서 레미콘 트럭 첫차 분 타설을 마악 시작하는데 어김없이 스콜(Squall/국지성 세찬 소나기)이 쏟아진다. 이미 예견했던 비이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잠시 오겠지 했는데 그날따라 억수같이 오며 그칠 줄 몰랐다. 국내외 현장 어디서나 콘크리트 타설 때 비가 오면 너나없이 모두 난감해진다. 잠시 오는 소나기나 보슬비정도야 문제될게 없지만 길게 굵게 내리면 콘크리트에 예상외의 수분이 더해져 강도상에 문제가 되기 때문에 당황하게 되는 것이다. 레미콘은 줄지어 빙글빙글 돌지 비는 줄기차게 내리지 타포린 천막천으로 타설한 부위를 덮어가며 계속 타설 작업을 진행하는데 클라이언트 측 기술고문관이 작업중단을 요구해온다. 모두 나만 쳐다보며 “어떻게 할까요?“ 하는 표정이다. 나는 통역을 사이에 두고 고문관과 대화를 나눈다.
나는 “지금 콘크리트 타설을 중단 할 수없다”
고문관: “콘크리트에 비가 섞이면 품질에 문제가 되니까 중단해야 된다”
나는 “최대한 타설 된 부위를 덮어가며 속행 할 것이고 차후에 강도 검사를 해서 문제가 되면 내가 책임지겠다”
처음 들여온 펌프카 며 현장밖에 까지 줄을 서서 윙윙대는 레미콘트럭들, 도저히 멈출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타설 작업은 흠씬 비를 맞으며 진행됐고 줄기차게 내리던 비가 그치자 작업도 끝났다. 나중에 결국은 호치민대학 토목공학과 교수를 찾아갔고 그분의 도움으로 난생 처음 들어보는 “슈미트 햄머(Schmidt Hammer)"라는 방법으로 그날 비에 젖어 작업된 콘크리트부위의 경도검사를 했고 검사기록서를 클라이언트(Client)인 코스비다(KOSVIDA)에 제출해서 일단락됐다.
그 당시(1994년)호치민시에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노래방이 있었다. 술도 팔고 노래방기기를 보며 노래도 불렀는데 우리직원들이 좋아해서 우린 일주일에 한번이상은 그곳을 갔던 것 같다. 나는 키 작은 노래방주인마담이 부르는 ‘아름다운강산’에 매료되어 더 자주 갔었다.
우린 꽤 오랫동안 코스비다의 게스트하우스에 묵었었는데 아침식사는 게스트하우스의 월남아주머니가 한국식으로 차려줬고 점심은 호치민시내 한국식당에서 현장으로 배달해줘서 먹었다. 휴일점심은 숙소근처 쌀국수식당에서 거의 매번 베트남 쌀국수(Pho/퍼~)를 먹었다. 게스트하우스에는 코스비다 사장(제철화학의 부장)도 같이 머물었었는데 나와는 동갑이었고 학연지연을 따지다보니 그분은 내 고등학교 친구(지금은 고인이 된 안태국친구)하고 서울대 수학과 동문이었다. 나는 그때도 지금처럼 아침으로 고구마1알, 옥수수1자루에 약간의 과일을 곁들여 해결했는데 같이 식탁에 앉은 신사장은 매번 “지형, 그래도 지형이 나보다 더 잘 먹는 거요”하며 나를 부러워했었다. 신사장은 술을 좋아해서 거의 매일저녁 거나하게 반주를 즐겼는데 그러고 다음날 아침에 식탁에 앉으니 식욕이 당길 리가 없어서 말 그대로 숟가락만 들었다 놨다 하다 식사를 끝냈으니 내가 부러웠을 것이다.
나는 매일 아침5시에 일어나서 게스트하우스 대문 앞 골목길을 빗자루로 쓰는 일로 하루를 시작했었다. 말이 길이 막혀서 골목길이지 폭이 3m는 됐고 길이가 약100m나 되는 꽤 큰 길이었다. 이 길을 빗자루로 쓸고 나면 등짝은 혼곤히 젖어오고 이마엔 굵은 땀방울이 흘렀었다. 저녁시간의 골목길은 동네 아이들로 채워져서 왁자지껄했는데 아이들은 무슨 이상한 놀이들을 하고 있었다. 나는 시장에서 구슬을사다 아이들에게 나눠 주고 구슬치기와 비석치기 그리고 말 타기 놀이를 가르쳐줬는데 아이들은 언제나 내가 퇴근해 올 때를 기다릴 정도로 이 놀이들을 즐겼다. 그러던 어느 날 집사람이 다녀가고 싶다는 얘길 듣고 나는 숙소를 옮기기로 했다. 새 숙소는 베트남 전쟁 때 미군장교들의 숙소로 사용했다는 호치민시에서는 보기드믄 아파트였다. 그리고 이사 며칠을 앞둔 어느 날, 퇴근해서 골목을 들어서는데 골목길 가운데 베트남어로 뭐라고 쓰여 있는 현수막이 걸려있는 것이다. 무심코 지나치고 숙소로 들어서는데 득(Duc)이라는 게스트하우스의 잔일을 맡고 있는 청년이 나를 붙든다. “미스터 지, 저 현수막은 미스터 지, 이사 가지 말라고 동네주민들이 걸어놓은 것입니다” 라고 설명을 한다. 아침으로 골목길 청소하고 당신들 자녀들과 골목에서 놀아준 내게 색다르게 고마운 표시를 해줬다고 생각한 사건으로 두고두고 지금껏 기억하고 있다.
나는 베트남에 두 차례에 걸쳐서 1년 반을 있었는데 베트남은 우리와 같은 유교문화권이어서 가족에 대한 사랑이나 예의범절에 있어 우리나라에 결코 뒤지지 않았으며 가족간의 유대감이 아주 돈독했다. 가난했던 그 시절의 베트남에서 “오! 저 집은 제법 잘 사네!”라고 불리는 가정엔 그 가족구성원 중의 누군가 한 사람이 반드시 외국(주로 미국)에서 다달이 송금을 해 오는 집이었다. 그리고 베트남사람들은 눈썰미가 뛰어난 민족이었다. 한번 가르쳐주면 바로 다음에 그걸 응용하는 재주가 있었다. - 다음에 -
Have a good ti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