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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9. 영문 밖으로 나가자 2018. 11. 30. 이현래 목사 [히브리서 13장 13~15절]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가자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영문 밖으로 나가자.” 영문은
우리말로 하면 성문이다. 옛날에는 도시마다 성이 있었는데 성 밖은 천민들이 사는 곳이었다. 서울은 사대문 안을 장안이라고 했고, 사대문 밖은 천민들이 사는 곳이었다. 내가 서울에 있을 때 교회가 독립문 영천이라는 곳이 있었는데 서대문 밖이었다. 영문 밖이었다. 그곳이 서대문 형무소가 있어서 형장이 되기도 했었고, 무당들과 같은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다. 그래서 일제 강점기 때 일본사람들이 형무소를 지었는데, 그 유명한 서대문 형무소이다. 나는 서대문 형무소 북쪽에 살았었는데, 옛날 같으면 백정 무당 같은 사람들이 살았던 곳이었다. 히브리서의 “영문 밖으로 나가자.”는 말은 예루살렘 밖으로 나가자는 말이다. 예루살렘을 서울이라고 한다면 영문 안에는 귀한 사람들이 살고, 밖에는 천민들이 살았다. 예수님께서는 영문 밖으로 나갔다. 오늘날 이 말씀을 생각한다면 좀 곤란한 말이지만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어떤 울타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 버린 곳, 이런 곳이 될 수 있다. 예수님을 생각할 때도 사람들은 좋아하는 것만 쏙 뽑았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대해서도 효능을 말할 때,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만 말했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독생자까지도 아끼지 않고 주셨다.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서 희생하셨다.’고 하니까 얼마나 고상한가. 사람들은 십자가 사건에서 이런 것들을 취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다 그렇게 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죽은 것에 대해서 그 죽음에 대해서는 많이 가져가지 않았다. 내가 요즘 자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뛰어내리지 못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이유가 그런 것들 때문이다. 사람이 죽었으니 뛰어내리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하나님 아들이라는 사람이 뛰어내리지 못했다는 것은 종교적으로 생각하면 부끄러운 일이 된다. 사탄은 늘 사람을 그렇게 송사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그러면 뛰어내려보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다.”고 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그러면 돌로 떡을 만들어 먹어 보아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다.”고 항상 이래왔다. 이것이 더 근원적으로 올라가면 에덴동산에서 마귀가 와서 아담에게 무슨 이야기를 했겠는가? “이것을 먹지 말라고 하더냐? 먹으면 정녕 죽는다더라. 아니다. 네가 이것을 먹는 날에는 네 눈이 밝아져서 선악을 아는 일에 네가 하나님같이 될 것이다.”라고 해서 먹었다. 우리가 그 전의 상태를 생각해 본다면 아담에게 하나님은 최선의 배려를 해주었다. 만유 가운데서 오직 사람에게 자신을 유임하려고 했기 때문에 그 안에 자신의을 표현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내장해 두었다. 지금 컴퓨터를 움직이면 사람이 하고 싶은 것이 다 들어있다. 자동차를 운전해보니까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는 것이 다 있다. 처음 자동차는 정말 엉성했다. 미국에 가니까 자동차 발전사 박물관을 만들어놓았다. 처음 내연기관은 여기 있는 쓰레기통만 했다. 그것을 얹어서 달구지 같은 것을 움직였던 것이다. 그것이 계속 개선되고 개선되어서 현재의 자동차가 되었다. 지금의 자동차는 없는 것이 없다. 사람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갖추었다. 차세대 자동차는 무인자동차로 한다고 한다. 미국에서 그것을 연구하고 있는 형제에게 들었는데, 무엇이 조금 부족해서 못하고 있다고 한다. 무인자동차는 전부 센서라고 한다. 옛날처럼 전선이 왔다갔다 하는 것이 없어지고, 기계식으로 작동하던 것이 센서를 통한 전기 신호로 작동한다고 한다. 앞으로는 선이 없어지고 전부 센서로 움직인다고 한다. 미국에는 무인자동차가 허가되어 움직이고 있는 것이 있는데, 대형화물차가 대륙을 횡단하면서 하루 이틀도 간다고 한다. 밤에 그 차만 무인으로 다닐 수 있게 허락되었다고 한다. 그 차를 운전하는 사람들은 중간에 자고 먹고 가고 한다고 한다. 고속도로에서 잠을 자야하니까 모텔이 생겼다고 한다. 그것이 지금은 사람이 없이 화물을 싣고 다닌다고 한다. 그런데 승용차를 해보니까 아직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한다. 30~50cm까지만 센서가 작동을 하고 이 거리 안에 있는 것을 잘 감지하지 못하여 사고가 날 수 있기 때문에 아직도 연구 중이라고 한다. 앞으로 이것이 완성되면 운전자가 없이 자동차가 움직이게 된다. 자동차가 이렇게 발전했다. 자동차 산업이 비행기 다음으로 최첨단 산업이다. 자동차를 만드는 나라에서는 비행기를 만들 수 있다고 한다. 자동차 공업이 공업의 꽃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사람 속에 자기를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내장해 두었다. 자동차 속에는 사람이 조작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내장해 두었다. 이제는 무인자동차로 개발해서 선도 필요 없게 만든다고 한다. 자동차 하나에 컴퓨터 한 대가 움직이는 것과 같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사람을 얼마나 잘 만들어놓았겠는가? 그런데 그것이 만족스럽지 않았다는 것이다. “네가 하나님 같이 될 것이다.”는 말에 넘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정녕 죽을 것이다.”라고까지 말해놓았는데 어떻게 그렇게 쉽게 넘어갔겠는가? 그 이상의 어떤 것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넘어 갈 수 없는 것이다. 사탄의 말 속에는 그 이상의 것이 있으니까 넘어간 것이다. 그것이 어디로 내려갔는가? “돌로 떡을 만들어 먹어라.” 하는 대로 내려갔고, “십자가에서 뛰어내려봐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다.” 하는 대로 내려갔다. 이 문제는 아주 근원적이다. 십자가에서 뛰어내리느냐? 못 뛰어내리느냐? 이것은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해결하는 아주 근원적인 문제다. 이 문제의 해결 없이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회복될 수 없다. 문제의 근원이 거기에 있는데 그 문제는 살짝 덮어놓고 다른 것으로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가 회복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지금 기독교에서는 개혁운동이나 개혁주의를 부르짖는 교파가 있다. 아주 보수적이고 정확하게 믿는 사람들이다. 나는 개혁주의라는 것이 뭔지 몰랐었다. 온갖 것을 개혁하는 것이 아니고, 개혁주의라는 것이 종교개혁시대의 종교개혁가의 신앙을 다시 찾자는 말이었다. 개혁주의로 돌아가자는 말은 지금의 상태는 많이 빗나갔다는 말이다. 그런데 개혁주의가 아니고 그보다 더 위 단계가 있는데 그것이 환원주의이다. 종교개혁으로 인해서 만족하지 못한 사람들이 환원운동을 하게 되었다. 이것은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뜻이다. 그래서 다는 모르지만 브레드런 쪽이나 그리스도 교회 쪽으로 가보면 초대교회에서 하던 방식으로 그대로 하기는 한다. 그리스도 교회에서는 주일날에는 여자들이 꼭 머리에 수건을 쓰고 성찬을 꼭 해야 한다. 안 하면 예배를 드린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런 사람들 집에 식사 초대를 받아서 가보고, 신학교 교장을 초대해서 우리 교회에서 말씀도 해보았는데 굉장히 경건했다. 아주 성서적인데 또 한편으로는 아주 교리적이다. 가장 보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말씀도 아주 정확하고 아주 잘한다. 하마터면 내가 그 집안으로 장가갈 뻔했다. 그 집에 초대받아서 식사도 해봤는데 식사 시간도 아주 경건했다. 원탁에 앉았는데 기도할 때 모든 가족끼리 다 손을 잡고 기도했다. 그런 장면은 처음 보았다. 굉장히 경건하게 보였다. 그 사람들은 생활자체도 아주 경건하다. 분위기만 보면 여기가 진짜겠다는 생각이 든다. 장가를 들 뻔했는데 내가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아서 못했다. 결혼을 해야겠다는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만났기 때문에 시들해지고 말았다. 좋은 길이 있었는데 하지 않았다. 이 사람들은 환원운동이라고 한다. 어디로 돌아간다는 말인가? 초대교회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우리 교회 집사님 한 분이 그 교회 처녀와 결혼했다. 3대인가 4대인가 된 사람이다. 결혼을 하면서 둘이 약속을 했다. 남편이 내가 남편이니까 먼저 1년만 우리 교회에 같이 나가자. 그래서 아니면 나도 좋다고 약속했다. 결혼을 하고 나서 우리 교회를 나오게 되었다. 이 자매가 생글생글 웃으면서 아무 일없이 나왔었다. 1년 되니까 우리는 그런 말을 다 잊었다. 그런데 어느 날 교회를 오는데 남편이 혼자 왔다. 왜 혼자서 오냐고 물으니까 오늘이 1년 전에 약속한 그날이라는 것이다. 아내는 1년 내내 따라가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뭣이 문제인가? 여자가 말하기를 예배를 드린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주일날 성찬식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금 캐톨릭 사람들도 미사에 참석하지 않으면 대죄에 해당한다고 한다. 고해성사를 한다든지 할 때는 그것을 반드시 고백해야 하고, 그에 대한 벌금을 내거나 노동을 하거나 어떤 벌을 받아야 한다고 한다. 아주 현실적이다. 그것을 하고 나면 해결이 된다. 연말이 되면 대부분 고해성사를 해야 한다고 한다. 막연하게 기도하라고 하는 것보다 아주 현실적이다. 청소를 열흘 하라고 하면 청소를 열흘 하고 나면 자기가 잘못한 것에 대해 벗어나는 것이다. 오히려 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막연하게 기도하라고 하면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모르고, 하나님이 대답했는지 안했는지도 모르니까 평생 기도만 하고 있다. 그런데 캐톨릭 사람들은 일단 신부님에게 용서를 받았으니까 속에 맺힌 것이 없다. 그것도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하고 보니까 초대교회의 의식도 따라가야 한다. 여자들은 머리에 수건을 꼭 쓰고 주일 마다 꼭 성찬을 해야 하고 하는 이런 의식과 절차들이 있다. 그래서 생활도 굉장히 경건하게 한다. 유명하다는 교파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무시하면 안 된다. 아주 경건하다. 그러면 우리는 초대교회를 본받으면 되는가?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후에 또 하나가 생겼다. 지방교회가 생겼다. 우리가 말할 때는 지방교회라고 하지만 자기들이 말할 때는 회복교회라고 한다. 무엇을 회복한다는 것인가? 진짜 교회를 회복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Recovery, 성경도 ‘회복역’이고, 지방교회라고 말하는 곳이 ‘Recovery Church’이다. 위트니스 리 쪽이 ‘회복 교회’이다. 이 사람들도 성경 연구를 굉장히 많이 했다. 위트니스 리가 쓴 ‘라이프 스터디’가 있는데 이것을 보신 분들도 있겠지만 나도 여기에서 성경을 많이 배웠다. 그만큼 성경을 해석한 책을 보지 못했다. 그만큼 성경을 깊이 연구한 사람들이고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기독교 목사님들 가운데 그렇게 성경을 많이 아는 분들은 없다고 생각한다. 신학공부는 많이 했겠지만 성경을 그렇게 연구한 분들은 많지 않다. 나는 그 책을 통해서 성경에 대한 많은 것을 도움 받았다. 그런데 Recovery(회복)하면 어디까지 갈 것이냐는 것이다. 어디까지 회복할 것이냐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읽으면서 경험해본 바로는 이스라엘의 역사는 엄격히 말하면 출애굽기부터이다. 그렇다면 출애굽으로 돌아갈 것인가? 그렇다면 도로 율법주의가 되는 것이다. 율법주의를 떠나려면 그보다 더 위로 올라가야 된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율법이 없는 시대다. 율법하고는 상관없는 계시가 있다. 내가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 관한 책을 읽고, 내 인생과 내 사역이 뒤바꿔졌다. 이것이 초대교회처럼 되냐 종교개혁처럼 되냐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순수하게 인격적인 문제이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율법 이전이니까 순수하게 인격적인 문제이다. 그것이 나를 뒤엎었다. 많은 사람에게 그 책을 권했는데, 읽고 그렇게 된 사람이 없었다. 읽어보고 별 것이 없다고 했다. 나에게는 굉장한 충격이었다. 그런데 그것만 가지고도 안 되는 것 같다. 더 올라가야 될 것 같다. 그래서 창세기 1,2장으로 돌아가면 정말로 근원이 나온다. 말은 몇 가지 없지만 정말 근원이 나온다. 나는 근원으로 회복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왜 아담이 선악과를 먹었는지 알게 된다. 그래야 어디로 회복되고 고칠지를 알게 된다. 병을 알아야 약을 만들지 병을 모르는데 어떻게 약을 만들겠는가. 인생에 대한 해답은 하나님의 창조 안에 다 있다는 것이다. 이 안에 해답이 다 있다는 것이다. 여기를 가려면 영문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영문 안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성을 쌓아 놓았으니까 굳어져 있고 제한되어 있는 세계이다. 저녁 몇 시에는 문을 닫고 아침 몇 시에는 문을 열고 하는데 이렇게 서울 장안을 관리한다. 그 시간에는 다른 곳으로 나가면 안 된다. 그런데 생명에게 가장 나쁜 것이 제한이다. 생명은 생명대로 자라는 길이 따로 있다. 그것을 다른 방법으로 제한하면 생명은 그냥 죽어버린다. 콩나물을 보면 물을 주면 싹이 난다. 그런데 그대로 놔두면 콩나물이 죽어버린다. 흙에 심겨져서 싹이 났으면 가지가 나고 열매가 나서 생육하고 번성해서 땅에 충만했을 텐데, 콩나물로 만들어져 버리면 콩은 콩나물밖에 안 된다. 생명은 영문 안에서는 자랄 수 없다. 이것이 지금까지 인간의 역사다. 유대인들이 그렇다. 결국 유태교는 영문 안에 있는 종교가 되어버렸다. 심지어는 지금도 이방인들에게는 구원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의 성문은 지금도 그렇게 튼튼하다. 그 안에서는 새로운 것이 나올 수 없다. 껍질을 깨야 새로운 것이 나오는데 껍질을 깨지 못하니까 새로운 것이 나올 수 없다. 고산지대에 사는 식물 중에 주목이 있는데 겨울에 얼어야 된다. 그래야 봄이 되면 껍질이 깨져서 발아가 된다. 보통 땅에 심으면 껍질이 깨지지 않아서 발아가 안 된다. 생명은 꼭 그 생명이 자랄 곳에 있어야 한다. 대구 앞산에 가면 주목들이 있는데 여름에 더울 때 보면 까만 망을 씌워 놓는다. 왜냐하면 나무가 더우면 안 되니까 그늘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생명은 자기 환경이 굉장히 중요하다. 아무데서나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생명에 맞는 환경이 있어야 한다. 소나무는 우리나라 어느 지역에서나 다 자라지만 어느 지역에서는 자라고 어느 지역에서는 못 자라는 나무들도 많다. 제주 한라산이 남한에서는 수종이 가장 많은 곳이라고 한다. 한 600종이 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제주도는 산이 높기 때문에 산 아래와 위가 온도 차이가 많다. 아열대지방이라 할 수 있다. 대만이 위도(높낮이)에 따라서 밑에는 여름이고 위에는 겨울이라고 한다. 생명은 절대적으로 환경이 필요한데 다른 환경에 들어가면 변질되기 쉽고 심하면 죽는다. 예수님이 영문 안에서 환영받지 못했는데, 우리가 영문 안에서 환영받는 것은 불가능하다. 성질상 그렇다. 우리는 끝없이 영문 밖으로 나가야 된다.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가자.” 굉장히 중요한 말이다. 우리는 영문 안에서 안주하고 싶다. 다 영문 안에 살고 싶다. 왜냐하면 거기는 이미 안정되어 있는 곳이다. 그런데 이 예수의 생명은 영문 안에서는 살아날 수가 없는 생명이다. 그리고 어떤 제도가 있으면 그 제도에 묶여버리고 만다. 생명의 말씀이 무엇인가에 묶여버리고 만다. 그러면 더 이상 발전되지 않는다. 지금 캐톨릭도 그렇고 개신교도 그렇다. 캐톨릭은 다 알다시피 확고한 제한이 있는 그런 곳이다. 그것을 탈피해 나온 것이 개신교다. 캐톨릭의 제도에서 박차고 나온 것이 개신교다. 개신교가 또 개신교로 울타리가 되어 버리면 거기서는 또 생명이 살 수가 없다. 나는 처음에 개혁주의라고 해서 그것을 터지고 나오는 것이 개혁주의인가 했더니 그것이 아니고 오히려 강화해 나가는 것이 개혁주의인 것 같다. 나는 자세히는 모른다. 영원한 생명은 영원한 환경 안에 있어야 된다. 우리가 어디 매이면 고정되어서 거기서 죽는 것이다. 개신교는 무엇을 주장했는가? 첫 째 사람은 안 된다. 두 번째는 성서만이 우리의 신앙의 유일한 표준이다. 셋째 하나님께로 가는 길은 믿음밖에 없다. 이것이다. 사람은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이 개신교 사람들에게 꽉 박혀 있다. 왜? 교황에게 속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처럼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아니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개혁가들은 사람은 절대로 안 된다고 못을 박아놓았다. 이 문제로 굉장히 핍박을 많이 받았다. 나는 사람 되려고 예수 믿는 사람이지 천당 가려고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다. 자연히 사람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었다. 그랬는데 저 교회는 사람을 뭐라고 한다거나 사람에게 주님이라고 한다는 식으로 되어서 비난을 많이 받았다. 나는 우리 교회를 지나면서 지금은 너무너무 감사하게 생각한다. 내가 참 특이한 형제들을 만났다. 춘천에서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서 맨손지고 대구로 내려온 사람들을 만났다. 굉장히 취직하기 어려운 학과를 나온 형제들인데 교수가 어떻게 사정하고 로비를 해서 영창피아노에 취직을 했다. 대학 졸업한 사람을 거기다 취직시키려니 굉장히 어려웠다. 왜냐하면 일본에서 기술을 그대로 받아서 피아노를 만들었으니까 고급 인력이 필요가 없었다. 목재가공학과를 나온 사람이 필요가 없으니까 그것을 사정사정해서 취직을 시켰다. 그 취직을 해서 몇 달 다니다 말고 무작정 대구로 내려온 형제들이 춘천 형제들이다.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서 내가 네게 지시할 곳으로 가라고 한 것을 그대로 한 것이 춘천 형제들이다. 어떤 사람은 자기 집안이 완전히 감리교 중심부에 있는 집안이다. 자기 삼촌이 감독도 한 집안이다. 당연히 대학교를 졸업하면 신학교를 갈 사람이다. 이*규형제가 그런 사람인데 그것을 다 내팽개치고 왔으니 집안에서 얼마나 문제가 많았겠는가. 나는 그렇게 못하는데 무작정 와서 같이 살자고 하니까 어떻게 하겠는가? 그렇다고 돈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간신히 초창기는 이*승 형제가 새벽에 영어학원에 나가서 강습료를 받아서 간신히 생활을 하고 먹고 살았다. 그 다음에는 집사람이 내려와서 양장점을 해서 그래서 먹고 살았다. 아무것도 없는 그런 속에 들어왔다. 충주 교회도 그랬다. 그런데 허리를 다쳐서 재봉을 못하게 된 그런 상황이었다. 형제들은 할 일도 없는 형편이었다. 그때 마침 준교사 시험이 있다는 정보를 받게 되어 일 년씩 준비를 해서 합격을 하게 되었다. 우리 형제들이 합격한 후 그 제도가 없어졌다. 그 제도가 아니었으면 우리 형제들은 정말 취직할 데가 없는 형제들이다. 그런데 딱 한번 했는데 공부한 사람들은 다 합격했다. 그런데 두 사람이 하지 않고 있었다. 이 사람들은 취직을 못하게 되었는데 한해 더 시험을 봐서 두 사람이 마저 합격하고 그 다음부터는 준교사 제도가 없어졌다. 그래서 전부 먹고 산 것이다. 그러니까 자연히 월급을 받으면 나에게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모두 한 식구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먹고 살았다. 어떤 사람들은 자랑스럽게 말한다고 다른 믿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월급을 받아서 목사님께 갖다드린다고 자랑스럽게 말한 것이다. 이것이 다른 사람들이 들을 때는 재산을 갈취하는 사이비가 아닌가 생각했으니 상당히 오해를 많이 받았다. 그때 형편은 그럴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그것이 아니면 무엇을 먹고 살겠는가? 그리고 결혼을 해서 나갈 때까지 그렇게 하다가 결혼을 하니까 분가를 모두 했다. 한 가족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집단생활을 하려고 했던 것도 아니고, 부득이 어쩔 수 없으니까 집단생활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뒤로 생활을 볼 때, 꼭 갈릴리 사람들 같다. 따라다니는 것을 보니까 마치 내가 꼭 예수님 같이 된 것 같았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따라온 방식과 똑 같았다. 주님이라고 형제들이 말을 안했지만 할 수도 있는 그런 관계였다. 나도 가면서 이렇게까지 나를 따라 올 수 있는가 할 정도였다. 그러면서 무엇을 알게 되었는가? 갈릴리 사람들을 알게 되었다. 갈릴리 히스토리를 우리가 직접 재현하고 있었다. “어디든지 가겠습니다.” 하고 따라왔고, “죽을지라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하고 따라왔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렇지 않은데 저렇게 까지 나를 신뢰하고 따라오는가 싶기도 하여 뜨끔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엄숙한 부담감을 갖게 되기도 했다. 또 예수님의 속사정을 내가 경험하기도 하고, 제자들이 이래서 그랬구나 하는 것을 경험하기도 했다. 사도행전이 알아지고 복음서가 알아졌다. 이랬구나. 이래서 그런 소리를 했고, 이래서 죽을지라도 부인하지 않겠다고 했고, 이래서 누가 크냐는 소리가 나왔고, 이래서 우리 아들을 하나는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달라는 소리가 나왔다는 것을 실제적으로 경험하게 되었다. 이것을 를 쓰면서 우리 교회적으로는 굉장히 중요한데 쓸려고 하니까 오해받기가 굉장히 쉽기 때문에 쓰지 않고 빼놓았고, 오늘 여기서 처음 이야기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가서 헛소리하면 나는 난처하지만 참 좋은 경험이었다. 예수님은 어떤 마음이었을까도 알게 되고, 제자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이것도 알게 되었다. 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보고 다 도망갔을까 그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어려서부터 듣기는 베드로가 가야바 법정에 있는 예수를 보고 겁이 나서 도망갔다고 들었다. 베드로는 비겁하다고 했는데 우리가 경험해보니까 비겁한 것이 아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왔는데 법정에서 조롱을 한다. 얼굴에 씌워놓고 병사들이 때리면서 “내가 누구냐? 알아맞추어 보라.”고 조롱한다. 이런 속에서 대성통곡을 해도 시원찮을 판에 “네가 찬송 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라고 질문할 때 다른 데는 다 대답을 하지 않다가 왜 “그렇다.”고 하느냐 말이다. 그 꼴이 되어서 무슨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대답할 수 있는가? 그러니까 얼마나 실망을 했겠는가. 생각해봐라. 자기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고 왔는데 그 지경이 되어서 매를 맞고 있는 속에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 하고 조롱하는데 그렇다고 왜 대답을 하느냐는 것이다. 차라리 그것도 말을 하지 않았으면 괜찮은데 얼마나 실망을 했겠는가? 우리가 잘못 보았구나, 잘못 짚었구나, 이런 생각이 누구나 난다. 너 예수 따라 다니던 사람이 아니냐고 하니까 당연히 나는 아니다 나는 모른다. 저 사람을 모른다고 했다. 모른다는 말이 맞는 말이다. 법정에 와보니까 어제까지 알던 그 사람이 아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보고 나는 저 사람을 따라다니던 제자라고 하겠는가? 지금 생명을 걸고 있는 판인데, 죽냐 사냐 하는 판인데, 그 소리를 하겠는가? 그러니까 모른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다. 작은 비자가 와서 그렇게 묻는데 겁이 나서 그랬다는 것이다. 그랬으면 왜 밖에 나가서 대성통곡을 하겠는가? 닭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하는 말이 생각나서 대성통곡을 하고 울었다고 한다. 왜 울었는가? 회개의 눈물이 아니고 너무너무 억울해서 우는 것이다. 도대체 알 수 없는 사람이다. 지금 와서 보니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다. 3년 동안 따라 다녔는데, 그 사람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다. 얼마나 답답하고 억울하겠는가? 그러니까 우는 것이다. 회개해서 울었다면 베드로 같은 사람은 다시 뛰어 들어갈 사람이다. 나는 저 사람과 함께 죽겠다하고 뛰어 들어갈 사람이다. 그런데 회개가 아니었다. 너무너무 억울하고 너무너무 답답하여 대성통곡하고 울었다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런 경우에는 이렇게 되겠구나.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고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왔는데, 저 모양 저 꼴이 되어서 “네가 찬송 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고 물으니까 “그렇다.”고 네가 말했다고 대답을 하니까 기가 막히지 않겠는가. 십자가에 뛰어내리지 못한 예수를 보고 버리고 가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 사람들이 나쁜 사람도 아니고, 그 사람들이 배신자도 아니다. 누구라도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도 그렇게 하지 않을 사람이 없다. 십자가 밑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여자들밖에 없었다. 여자들은 야심이 없기 때문에 남아 있었다. 여자들은 예수를 따를 때 그런 것으로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남아있는 것이다. 그냥 인정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그런데 뭔가 한번 해보겠다고 왔던 사람들은 완전히 실망을 하고 가버렸다. 그것도 그 사람들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너무 정상적인 사람들이다.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것이 비정상이라고 생각한다. 보통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존경하겠지만 나는 그런 사람을 보면 도망치고 싶다. 그런 사람은 같이 못산다. 그 자리에서 “죽을지라도 내가 따라가겠습니다.” 하는 사람과는 내가 같이 살 수 없다. 여러분도 생각해보라. 그런 사람과 숨 쉬고 살겠는가? 최*선 목사라고 하는 분이 있다. 사람들이 그분을 너무 존경해서 제자가 되려고 따라간 사람이 수없이 많다. 들어가서 못 견디고 나오고나오고 했다. 생활을 같이 할 수 없어서다. 기도하러 들어가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기도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끼니때를 모르고 하고 있으니 젊은 사람들이 따라 가보겠다고 갔다가 배고파서 못 견딘다. 선생님이 기도하고 있는데 자기 혼자 밥을 먹을 수는 없다. 최*선 목사를 만나보니 너무너무 충만해서 산다. 낮인지 밤인지 모르는 사람이다. 한 겨울에도 맨발 벗고 다닌다. 장화를 잘라서 맨발로 그것을 신고 다닌다. 불덩어리 같은 사람이다. 우리 신학교에서 사경회를 한다고 모셨다. 밤에 내가 지키고 있는데 들어오셨다. 궤도를 하나 짊어지고 얼굴이 해같이 빛났다. ‘목사님 계십니까?’하고 들어왔다. 다음날 아침에 식사시간에 식사 대접하려고 찾으니까 어디 가고 없다. 새벽부터 어디를 나가버렸다. 궤도 하나를 들고 새벽부터 나가서 동네에 길바닥에 궤도를 펴고 전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찾아다가 식사를 시켰는데 사경회에 왔다는 분이 3일 동안 시간마다 같은 말밖에 안한다. 설탕이 왜 달아? 다니까 달지. 소금이 왜 짜? 짜니까 짜지. 이 이야기를 계속하는데 얼굴이 해 같이 빛나는 것이다. 매일 똑같은 소리만 하고 있으니까 학생들이 지겨워 죽으려 한다. 나는 그때 그것을 보면서 저 사람 속에 뭐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사람 속에 뭐가 들어 있구나. 우리가 모르는 뭐가 있구나. 나는 충만해도 그렇게 충만한 사람을 처음 보았다. 돈 한 푼만 생기면 전부 엽서를 산다. 엽서에 깨알같이 글씨를 써서 자기 아는 사람에게 계속 보낸다. 천당 불신지옥 예수직통 이런 것을 써서 아는 사람들에게 전국으로 보낸다. 마누라도 같이 못살고 제자들이 된다고 들어왔던 사람들도 다 도망치고 못산다. 김포 공항 쪽에 땅이 거의 그 사람 것이었는데, 그렇게 돌아다니니까 땅이 남아나겠는가?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버리고 공항동 교회라고 조그만 교회만 있다. 그렇게 하니까 신자도 없다. 같이 붙지를 못하니까 교회도 안 된다. 혼자 기도하고 있으면 밤인지 낮인지 모르는데 어떻게 같이 살겠는가.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게 된 사람을 “나는 죽을지라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같이 못 산다. 참 좋을 것 같지만 같이 살 수 없다. 예수님도 그 놀라운 예수님과는 같이 못산다. 참 좋을 것 같다.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니까 여자들 같으면 식사 준비를 안 해도 되고, 예수님이 그때그때 주면 되고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데 같이 살 수가 없다. 사람이 비슷해야 같이 살지 너무 차이가 나면 못 산다. 나는 성경에 나타난 그 사람들이 너무 진실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아주 순수하게 있는 그대로의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전혀 꾸밈도 없고 허식도 없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다. 우리 형제들과 같이 살면서 그런 것을 경험했다. 나를 뭐가 볼 것이 있다고 와서 같이 살겠는가? 내가 생각해도 이상했다. 저 젊은 사람들이 어쩌려고 나에게 왔는가싶으니까 나도 책임질 수도 없어서 내가 책임지겠다는 말을 한 번도 못해봤다. 내가 뭘 직장을 주겠다고 하겠는가? 무엇을 보장해주겠는가? 한 번도 그런 이야기를 못해봤다. 그래서 뭘 알았는가? “하늘로도 맹세하지 말고 땅으로도 맹세하지 말라.”는 그 말이 생각났다. 이것은 맹세 못할 일인 것이다. 그러니까 헌금 했다가 도로 찾아간 사람도 있다. 헌금을 했는데 나중에 마음이 변해서 도로 내달라고 해서 두 사람인가 내 준적이 있다. 내주어야지 안주면 어떻게 하겠는가. 만만하니까 나에게 온 것 같다. 같이 살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인 것 같다. 이번에 어떤 자매도 고등학교 때 나를 처음 보았는데, 저분과 같이 살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따라와 있다고 한다. 알고 보면 내가 위대해서 따라온 것이 아니다. 저 사람과 같이 살면 나도 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이번에 그 자매가 교회에서 말씀을 했는데 교회를 너무너무 깊이 알게 되었다고 한다. 말씀을 준비하는데 100번을 읽고 썼다고 한다. 읽을수록 깊이가 있더라는 것이다. 100번을 읽고 10번을 썼다고 한다. 수요일 저녁에 대표 간증을 했다. 그렇게 하고 나서 어제 보따리를 잔뜩 지고 왔다. 뭔가 했더니 이것저것 먹을 것을 잔뜩 싸 가지고 왔다. 이러 저러 했는데 이제야 내가 확실하게 알았다고 했다. 그렇게 봇짐을 싸 가지고 왔다. 요즘 그런 것도 얻어먹는 재미가 아주 고소하다. 아주 야물고 똑똑한 자매이다. 그런데 남편이 일편단심 대구로만 오고 싶어 했다. 결혼하기 전에 대구에 있었고, 나와 한 방에서 자기도 했다. 맨날 코피를 흘려서 군대 가면 어떻게 군대생활을 제대로 하겠나 했더니 공병대에 들어가서 3년 동안 질빵매고 반타작하다 왔다. 그래서 너 코피 흘리지 않았느냐고 하니까 군대 가니까 코피가 안 나더라고 했다. 이런 형제가 야무진 자매와 결혼을 했는데 일편단심 대구에만 오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자매는 똑똑해서 서울에서 장사하면 잘되는데, 대구에 가면 뭘 할 것이냐, 직업도 없고 할 것도 없고 아무 것도 없는데 뭘 할 것이냐는 것이다. 이 형제가 말을 잘 못하니까 뒤로 노름에 빠졌다. 왜 노름을 하느냐고 물으니까 그냥 왜 하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때 1년에 2000만원인가 펑크가 났다. 아버지가 교장을 하셨는데 아주 점잖으시다. 외아들인데 아버지가 갚아 주었다. 그러면 그 다음에 또 그렇게 했다. 한전에 다니다가 그것도 그만 두고 노름을 안 하면 낚시를 하러 다녔다. 나는 속으로 그 형제가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하도 안 되니까 할 수 없이 자매와 대구로 내려 온 것이다. 대구에 와서는 한 번도 노름을 안했다. 이번에 그 자매가 와서 형제가 아니었으면 나는 대구에 못 왔을 것이라고 말했다. 형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대구로 왔다. 똑똑 하니까 여기 와서도 돈 벌이를 잘한다. 지금도 잘하고 있다. 그 형제도 아무 사고도 내지 않고 아파트 관리소에 취직을 해서 잘 살고 있다. 이런 사람들을 내가 만났다. 내가 특이한 사람들과 산 것이다. 예수님 제자들과 똑 같다. 한 쪽에서는 지금 십자가로 가고 있는 길인데, 자기 어머니까지 따라와서 “선생님이 등극하게 되면 하나는 오른 편에 다른 하나는 왼 편에 앉게 해 주십시오.”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얼마나 순진한가! 정말 순수한 사람들이다. 나는 그때 그 경험을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고 하나님이 내게 이것을 경험시켜 주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단에 있는 사람들이 나왔다. 사이비에 있는 사람이 나온다. 그를 따라 다니는 사람들이 소문을 어떻게 내는가? 자기들의 교주는 안 죽는다, 영생한다고 한다. 그래서 이 사람들도 안 죽는다고 믿고 있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에는 자기가 육신이 죽지 않는다는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미친놈이 아니고서는 하겠는가? 사실은 영생한다는 말을 했을 것이다. 그 말을 안 죽는다고 알아듣는 것이다. 그래서 밖에 나가서 우리 교주님은 안 죽는다고 선전하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게 알아듣기가 쉽다. 그 과정에서는 그렇게 알아듣기가 쉽다. 따라 다니는 사람들은 어쩌면 아주 순진한 사람들이다. 뺀질뺀질한 기독교인보다 훨씬 낫다. 나는 생각할 때 많이 아는 사람보다 훨씬 낫다. 순진하다. 하나님이 아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볼 때는 정말 잘못된 사람이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보는 것이지 행동이 잘못되고 잘되는 것을 보시는 분이 아니다. 영문 안에는 이런 재미있는 일이 없다. 완전히 규격화되어 있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 영문 안이다. 옛날 우리나라에 장안에 사는 사람들은 다 양반들이다. 시시한 사람들은 거기에 못 산다. 이 사람들은 고정되어서 다른 것이 아무 것도 안 되는 것이다. 종교는 더군다나 그렇다. 종교 양반들은 고치기가 아주 어렵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니고데모다. 니고데모는 예수에게 와서 점잖은 대화를 하려고 생각했다. “선한 선생님이여!” 이렇게 하니까 예수님이 단번에 하는 말이 “왜 나를 선하다고 하십니까?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니고데모는 끝까지 거듭나지 못했다. 그렇지만 예수 주변을 맴돌고 다녔다. 위성처럼 돌아다녔다. 한 번 그렇게 굳어진 사람들은 정말 어렵다. 엎치락 뒷치락 해도 순수한 사람이 되지, 그렇게 굳어져 버리면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고 아무 것도 안 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실 때 영문 안에 있는 사람들을 지키려고 오신 것이 아니고, 새로운 세계를 열려고 왔다. 새로운 세계를 열려면 영문 안에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새로운 세계는 항상 영문 밖에서 시작되었지 영문 안에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오늘 우리에게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가자.” 그리고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오직 예수로만 찬미를 드리려면 영문 안에서는 안 된다. 바로에게 있으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왜 데리고 나가려고 하느냐?”고 바로가 물으니까 모세가 “우리는 여호와를 섬기는 백성인데 사흘 길쯤 나가서 제사를 드려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는 제사를 드릴 데가 없느냐? 여기서 제사를 드리라.”는 것이다. 그러자 “아닙니다. 우리는 사흘 길쯤 나가야 됩니다.”라고 했다. 제사만 드린다면 바로의 말이 옳다. 어디서 제사를 못 드리겠는가? 그런데 이것은 아무리 하나님 백성이라고 하더라도 바로의 나라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안 되니까 나와야 된다. 나와야 하나님 나라가 되든지 말든지 하지 그 안에서는 도저히 바로를 개혁시킬 방법이 바로를 바꿀 방법이 도저히 없다. 이것은 비근한 예지만 내가 C.C.C.에 있을 때 우연하게 내게 말씀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그때 나는 정말 무명무실한 사람이었다. 이름도 성도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었다. C.C.C.의 고정 멤버도 아니고 중간에 아무도 모르게 갑자기 들어간 사람이었다. 4년 동안 있었지만 어떻게 들어왔느냐고 물어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것도 난감할 뻔하였다. 물어 봤더라면 구질구질하게 대답하면서 난감할 뻔하였다. 아무도 물어본 사람이 없었다. 다 궁금하였을 것이다. 어디서 왔는가? 왜 C.C.C.에 왔는가? 궁금했겠지만 아무도 나에게 물어보지 않았다. 그런 사람인데 갑자기 그날 말씀할 사람이 빠져서 나에게 논길을 걸어가는데 하라는 것이다. 심천 미루나무 숲에서 모임 할 때인데 그래서 말씀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고, 또 어떻게 해서 그렇게 말씀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그렇게 할 때마다 반응이 굉장히 좋았다. 심천 미루나무 숲에서도 전국에서 간사들이 모두 모였다. 그런데 갑자기 말씀할 사람이 잘못되었는지 나에게 논길을 걸어가면서 하라고 했다. 거기서 말씀했는데 그때 춘천 형제들이 계기가 되어 온 것이다. 그때 두 사람인가 왔었는데 내가 생명은 자란다는 이야기를 했다. 한 10분 정도였다. 옆에 포플러 나무가 있기에 봐라, 이 나무가 생명이 있으니까 이렇게 자라지 않는가? 생명이 없는 것은 자랄 수 없다고 이야기를 했다. 그것이 꽂혀서 춘천으로 돌아가서 간사에게 이야기해서 나를 거기로 초청했던 것이다. 그때 처음으로 타 지역 원정을 나갔다. 그래서 춘천 형제들이 오게 되었다. 만일 거기서 오래 있었더라면 퍼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뭔가 변화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가로막는 사람이 생겼다. 그래서 내가 오히려 C.C.C.를 나오게 되었다. 어디 가서 그런 경우를 두 번 당했다. 내가 있던 교단에서도 잘 나가다가 당했다. 너무 잘나갔는데 누군가가 와서 모함을 해버렸다. 그래서 내가 나오게 되었다. C.C.C.에서도 잘나가는 판에 쫓겨나게 되었다. 이것이 내가 영문 밖으로 나오게 되는 좋은 기회였다. 그 이후로 누구도 나를 막는 사람이 없었다. 나가라 들어가라 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얼마나 자유로운가! 그냥 흘러가는 대로 할 수 있었다. 찬송가도 엉뚱한 찬송가가 나온 이유가 그것이다. 내가 일부러 바꾼 것이 아니다. 류*영 형제가 갑자기 간증을 한다고 하더니만 엉뚱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자기가 아는 것은 형무소를 간 것밖에 없는 데 유행가 곡조에 머리가 좋아서 자기가 좋아하는 말을 붙여서 노래를 불렀다. 처음에는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뒤로 생각하니까 저것이 찬송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 마음에 있는 그것이 찬송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니까 맞았다. 그래서 재미있는 노래가 있으면 거기에 가사를 붙여서 부르게 된 것이 우리 교회 찬송가가 된 것이다. 원래 찬송가가 그런 것이지 별 것이 있는가? 몇몇 성도들이 부르다가 부르는 사람이 많이 생기니까 찬송가가 된 것이다. 어디 하늘에서 떨어진 것인가? 요즘에는 판권 문제가 있어서 조심해야 한다고 한다. 잘못하면 큰 벌금을 맞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우리는 그런 것 전혀 생각 없이 불렀다. 나는 영문 밖으로 쫓겨나서 영문 밖에서 정말 자유롭게 일생을 살았다. 조심할 필요도 없이 살았는데 잘못 된 것이 없는 것 같다. 조심하지 않고 살았어도 생명을 따라 사는데 잘못 된 것이 없는 것 같다. 영문 밖으로 나가자. 영문 밖을 두렵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영문 밖에 주님이 계신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길은 영문 밖으로 나가는 길이다. 그래서 끝없이 개혁해야 되고 끝없이 주님을 따라가야 된다. 영이신 하나님을 따라 가는데 무슨 제한이 있겠는가? 어찌 될지 모른다. 사람들이 그것을 제한하고 있다. 영이신 하나님을 제한해 놓고 그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이다. 그 하나님이 어디로 튈지 아는가? 구름기둥이 뜨면 뜨고, 앉으면 앉아야 하는 것이 우리의 길이다. 정해진 길이 있어서 가는 길이 아니기 때문에 구름기둥이 뜨면 같이 뜨고, 구름기둥이 앉아 있으면 앉아 있는 이 훈련이 40년 걸린 것이다. 40년이 헛된 시간이 아니었다. 어리석은 시간 같지만 헛된 시간이 아니었다. 주님과 함께 가는 그 길은 어리석은 것 같은 데 지혜로운 길이다. 우리의 지혜로 만들어 가는 길이 아니고, 누군지 모르지만 이끄는 길을 가는 것이다. 하나님이 언제나 음성으로 부르는가? 생명 안에 흐르면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길이다. 나는 교회를 자세히 보고 있다. 어디로 흐르는가? 사람들이 어디로 흐르는가? 그것을 보면 생명이 어디로 흐르는가를 알게 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것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내가 강조한다고 되겠는가? 생명이 죽을 것이다. 나는 교회를 보면서 내가 받은 은혜가 너무 많고, 교회를 보면서 내게 많은 생각을 주었다. 내가 만일 목회를 하지 않고 혼자 있었다면 결코 나는 다른 것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무엇을 혼자 추구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사람이다. 사는데 별 지장이 없는 사람이다. 돈만 있으면 잘 산다.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런데 교회와 함께 살다 보니까 내가 모르고 생각지 않은 세계에 들어왔다. 나도 알고 보면 끌려가는 것이다. 내가 끌고 가는 줄 알지만 끌려가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이끄시고 형제들이 나를 이끌고 간다. 내가 무엇을 하려고 하면 이상하게 다 안 된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는데 내가 계획해서 하면 안 된다. 그래서 내가 계획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아도 가끔 가다가 계획을 하게 된다. 그런데 그것은 영락없이 실패한다. 참 이상하다. 하나님이 꼭 지켜보고 있다가 심술궂게 막는 것 같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막아 버린다. 그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막을 때는 막아 주시고 지킬 때는 지켜 주시고 피해야 할 때는 피할 바위를 주셨다. 그래서 그 노래가 참 좋다. 모래 바람이 불 때 큰 바위에 숨기시고, 손바닥으로 나를 덮어 주시고, 이것이 역력하게 보인다. 그것보다 감사하고 만족한 일이 없다. 내가 피할 수 없는데 피하게 해주시고 내가 도망 갈 수 없는데 나를 숨겨주신다. 충주에서 2년 동안 있었는데 한 번도 나에 대해서 물어 본 사람이 없었다. 참 신기한 일이었다. 물으면 내가 구질구질하게 대답해야 했다. 그것을 하지 않게 하려고 딱 가려 놓은 것 같았다. 충주에 2년 있었는데 아무도 내게 물어본 사람이 없었다. 한 교회에서는 6개월 동안 대리로 목회를 했고, 한 교회에서는 협력한다는 명목으로 같이 있었다. 그런데 아무도 물어 본 사람이 없었다. 우리가 그리스도만 전한다면 내 이력서를 볼 필요가 없다. 누가 물어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다른 것을 이야기하면 ‘저 사람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무엇을 좋아하는 사람인가?’ 꼬치꼬치 따지지만 내가 오직 그리스도만 말하게 되면 아무도 물어보는 사람이 없다. 너무너무 신기하다. 영문 밖으로 나가자. 그에게로 영문 밖으로 나가자.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니 장차 올 곳을 찾는다. 우리가 세상에 함께 살면서도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다는 것을 알고 살아야 한다. 예수님에게도 영구한 도성이 없었다. 영문 밖으로 나가서 십자가를 졌지 영문 안에서는 십자가를 질 수가 없다. 영문 안에는 안전하다. 안전하지만 거기서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가 없다. 어디 보면 그런 것이 나온다. 예루살렘을 바라보면서 예수께서는 “너희가 선지자를 죽이고.” 이렇게 탄식하는 데가 나온다. 영문 안에 있는 사람들이 다 사람을 죽였다. 영문 밖으로 내 몰았고 사형장으로 내 몰았다. 영문 안에 있는 사람들이 영문 밖에서 사람을 죽인 것이다. 종교의 역사가 다 그렇다. 주님은 우리를 다 영문 밖으로 인도하시기를 원하고 있다. 우리가 영구한 도성이 없는 세상에서 방황할 것이 아니라 주님이 가시는 영구한 도성으로 가게 되기를 원한다.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찬미의 제사를 드린다고 하는데 어디서 드리는가? 영문 밖에서 드린다는 말이다. 그때 진정한 찬미가 나온다. 우리 모든 분들이 부끄러운 예수가 자랑스러운 예수가 되도록 그렇게 되기 원한다. 영문 밖이 천민들이 사는 세계인데 가장 귀한 사람들이 사는 세계가 되도록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예수의 좋은 점을 자랑하려고 하면 안 된다. 그분의 부끄러움 속에, 그분의 연약함 속에, 우리의 구원의 자리가 있다. 우리가 그것을 피하면 안 된다. 내가 그분을 자랑하면 정말 내가 좋아진다. 거리낄 것이 없어진다. 뛰어내리지 못한 예수를 증거 하면 나에게 거리낌이 없어진다. 그래서 뛰어 내릴 수 있지만 안 뛰어내리는 예수를 증거 하면 우리에게 큰 문제가 생긴다. 왜냐하면 나는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모르는 세계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 언젠가는 탄로가 난다. 불안하다. 그런데 뛰어내리지 못한 예수를 증거 하면 내 자신이 첫째 안식이 된다. 너무 든든하다. 예수 안에 있는 나는 너무 든든하지 않은가? 내 안에 있는 예수를 증거 하더라도 우리는 불완전하다. 그런데 예수 안에 있는 나를 증거하고, 우리를 증거 할 때는 너무너무 당당해진다. 그러니까 거꾸로 이야기해야 한다. 그분을 진정으로 섬기고 사랑한다면 하나님 나라가 더 속히 올 것이고, 더 빨리 주님을 만나게 될 것이고,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하는 말대로 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할 때마다 늘 그 생각이 든다.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좀 더 가까이 와 주십시오.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모든 사람이 알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이런 기도가 저절로 나오게 된다.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