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는 군살 빼기 좋은 기회"
유니콘 기업에도 대량해고 붐
인재들 넘치는 실리콘밸리도
변화하고 혁신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낙오자로 전락
실리콘밸리는 참 살기 좋은 곳이었습니다. 온화한 날씨, 풍부한 물자, 돈 많이 버는 정보기술(IT) 회사들과 스타트업들, 그리고 그런 안정적인 직장에 다니는 다양하고 똑똑한 사람들. 이 모든 것이 모여 있는 곳이 실리콘밸리라고 저는 생각해 왔습니다. IT 회사에 다니는 엔지니어들의 외형만 보고 '어떻게 저렇게 좋은 회사에서 연봉을 많이 받고 불편함 없이 행복하게 잘살 수 있을까' 부러워한 적도 많았습니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그랬습니다.
하지만 코로나19 사태 이후 저는 좋은 시절에는 볼 수 없었던 급격한 변화를 이 지역에서 목격하고 있습니다. '큰 회사'라는 의미로 쓰였던 '유니콘(기업가치 10억달러 이상)' 호칭을 받은 실리콘밸리 스타트업들은 엔지니어들을 단칼에 수백 명씩 해고하기 시작했고, 일부 벤처 투자자들은 이미 투자한 회사들을 관리하느라 바빠서 신규 투자는 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큰 회사들에도 해고의 공포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회사가 살아야 한다면 언제 내보내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 미국 사회의 전반적인 고용문화이기에, "나 모르는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에 24시간 이메일을 체크한다"고 말하는 대형 IT 회사 엔지니어도 있습니다. 실리콘밸리에서 30년 일해 온 기술마케팅 전문가 조성희 씨(57)는 이렇게 전합니다. "대형 IT 기업들은 이런 위기가 오기를 대비했을 수 있다. 그들에게 지금은 회사에 불필요한 군살을 뺄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 때문이다." 실리콘밸리의 백전노장 존 체임버스 전 시스코 회장은 한 온라인 이벤트에서 덩치가 크고 작음은 생존의 조건이 될 수 없고, 지금 이 시기에 맞게 회사를 바꾸느냐 아니냐가 생존의 조건이라고 했습니다. 뒤집어 말하면 위기 상황에서 큰 회사들도 살아남기 위해 필요치 않은 인재를 해고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호황기에는 부러워 보였던 실리콘밸리의 엔지니어들이 코로나19 불황기에 들어서는 부럽지 않아 보입니다. 노동조합 등의 보호는 기대할 수 없고, '일자리'가 가장 큰 복지인 미국, 특히 실리콘밸리에서 해고는 참으로 비참한 일입니다. 호황기에는 스타트업이나 다른 기술기업에도 취업할 수 있겠지만 불황에는 재취업도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수년을 보낸다 치면 제아무리 박사학위가 있어도 신기술 트렌드에 뒤처지면서 다시 일할 기회를 얻기 어려울 수도 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자신을 개발하고 발버둥치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운 곳이 실리콘밸리라는 점을 코로나19 사태로 알 수 있었습니다.
혁신은 때로는 많은 사람을 비참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좋을 때도, 나쁠 때도 기업은 혁신과 변화를 추구하며, 그에 적응하지 못하는 낙오자들을 남깁니다. 이 법칙에는 실리콘밸리에 있는 똑똑한 사람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아니, 어려운 상황에 처해 보니 어쩌면 그들이 더 절벽 위에서 일하고 있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위기에 드러난 실리콘밸리의 이면을 본 저는 다시 상황이 좋아지더라도 이곳에서 일하는 이들을 부러워만 하긴 힘들 것 같습니다.
자료 : 매일경제 [실리콘밸리 = 신현규 특파원 rfrost@mk.co.kr]2020.03.31. 오전 1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