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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退溪)선생 유적지(遺跡地) 풍수기행
2014년 2월 19일 연합회 선답을 위하여 대전에서 일행과 함께 7시경에 출발하여 10시경에 첫 번째 행선지인 도산서원 주차장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합류하기로 한 서울 팀이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잠시 퇴계선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본다.
문순공(文純公) 퇴계(退溪) 이황(李滉)선생(1501~1570)은 진성이씨(眞城李氏) 후인이다. 진성이씨는 조선조에서 문과급제자 58명을 배출했으며 퇴계선생은 이 문중이 낳은 석학이다. 시조 이석(李碩)공의 6대손으로 부(父)는 진사(進士) 식(埴)공이고 조부(祖父)는 진사(進士) 계양(繼陽)공이며 증조(曾祖)는 정(禎)공이고 고조(高祖)는 부정(副正) 운후(云侯)공이며 5대조는 송안군(松安君) 자수(子脩)공이다.
퇴계선생은 성리학을 집대성한 대학자로 34세 때 벼슬길에 나아간 후 30여 년 동안 예조판서, 대제학, 우찬성, 판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주자(朱子)의 이기론(理氣論)을 더욱 발전시켜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사단(四端)은 이(理)에 발(發)하여 기(氣)가 이에 따르는 것(理發而氣隨之)이며 희로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欲)의 칠정(七情)은 기에 발하여 이가 그 위에 타는 것(氣發而理乘之)이라는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을 주장했다.
그의 문인들 가운데 유명한 학자로 기대승(奇大升), 정탁(鄭琢), 류성룡(柳成龍), 이이(李珥), 성혼(成渾), 정구(鄭逑), 조목(趙穆), 이담(李湛), 권문해(權文海), 김성일(金誠一) 등이 있으며 뒷날 유자의 최고 영예인 문묘에 배향되었다. 퇴계의 손자 이안도(李安道)는 성리학의 대가이고 그의 후손에서 저서를 낸 학자가 50여명에 달한다.
이윽고 서울 팀이 도착하여 함께 매표소를 지나 도산서원을 향하였다. 산과 강이 만나는 비탈에 난 길을 따라 아름다운 풍광을 감상하며 소풍 나온 아이처럼 들뜬 마음으로 상쾌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풍수지리라는 색안경을 끼고 산천을 보아야 하니 감상에 젖을 여유는 없었다. 도산서원 바깥마당에 이르러 전경을 올려다보니 고풍스러운 자태가 아름다웠다. 이곳 경북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위치한 도산서원은 퇴계(退溪)선생이 1561년에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세웠고 사후 4년만인 1574년에 도산서원(陶山書院)을 세웠다고 한다.
마당에서 본 도산서원은 마을을 형성할 공간으로는 다소 좁고 음택 자리로는 넓으나, 절터나 서원자리로는 적당한 넓이라 생각된다. 이곳 지형의 형태는 후현무(後玄武)와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가 감싸 안은 삼태기처럼 생겼다. 우백호는 이중으로 유정하게 감쌌으나 좌청룡은 이곳 넓이에 비하여 다소 고압(高壓)하게 느껴졌다.
몸을 돌려 전주작(前朱雀)을 보니 넓게 펼쳐진 외명당(外明堂)에 조그만 독봉(獨峰)이 특이하였다. 이것은 시사단(試士壇)이라 하는 곳인데 1792년에 정조가 퇴계선생의 학덕을 기리고 지방 선비들의 사기를 높이 주고자 특별 과거인 도산별과(陶山別科)를 보인 장소라 한다.
그러나 풍수상으로는 좋게만 볼 수 없다. 글에 보면 명당은 평탄하고 둥글어야 하며 그 곳에 작은 섬 같은 독봉(獨峰)이 혈(穴)에서 보이면 눈병이나 아녀자의 유산 및 양자(養子)를 초래할 수도 있다고 염려하였다. 차라리 높고 크게 솟아 안산(案山)의 역할을 하면 좋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마당 한쪽에 우물정자(井) 형태의 석물로 단장한 우물이 이채로웠다. 서원에 오르는 중심 계단 첫 번째 오른쪽 건물이 바로 도산서당(陶山書堂)인데, 퇴계 선생이 4년에 걸쳐 지은 건물로 몸소 거처하며 제자들을 가르친 곳이라 한다. 소박한 모습이 선비의 청빈함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좁은 마당에 있는 깊은 연못은 눈에 거슬렸다. 풍수상으로 좋지 않다. 그리고 서당 위치가 남동쪽으로 고압(高壓)한 청룡 밑으로 치우치고 계곡 물길에 접하여 의아하게 느꼈는데 아마도 식수인 우물 가까이에 있고자 하기 때문인 것 같다.
다시 중앙 계단으로 나가 서원을 향하여 오르는데 계단의 기울기가 다소 가파르니 지형이 평탄하지 못함을 알 수 있다. 거기에다 일직선으로 곧게 출입구를 내어 수성(水城)이 직거(直去)하니 산림집이라면 가난을 못 면할 상이다. 서원에 올라 보니 남향으로 계좌정향(癸坐丁向)에 정수구(丁水口)였다. 만약 자좌오향(子坐午向)을 했더라면 정음정양법으로는 양룡(陽龍)에 양향(陽向)으로 합법하고, 88향법으로도 자왕향(自旺向)으로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다시 내려가서 물길(水城)을 보니 순전(脣氈)이 절벽 낭떠러지 같이 가파르고 그 아래로 강물이 좌수도우(左水倒右)하여 가까이 흐르니 할각수(割脚水)의 형태를 띠고 있어 불안하였다. 순전은 부풀어 풍만해야 하고 물길도 면궁(眠弓)으로 환포 되어야 좋은데, 가파른 살기(殺氣)에 무정한 물길이 못내 아쉬웠다.
도산서원을 뒤로 하고 두 번째 행선지인 퇴계선생 묘소를 향하였다. 차에서 내려 가파른 계단을 힘겹게 올라 선생 묘 앞에서 마음속으로 존경의 예를 표하였다. 혈장(穴場) 주변을 살피고자 한 바퀴 돌아보니 혈장의 좌우와 앞이 급하게 경사진 낭떠러지 같이 보여 불안하였다. 마치 고층 아파트에서 내려다 본 것처럼 현기증이 났다. 이처럼 가파른 지형을 글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峻急者 山勢峻急而不能立步也 凡立穴處貴 其平坦柔緩 忌其峻急直硬~”. 좋은 자리는 혈장의 좌우와 앞이 가파르지 않고 완만하여 사람이 굴러 떨어져도 다치지 않을 정도로 경사가 완만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룡(來龍)을 보고자 뒤로 올라 밟아 보니 기복(起伏) 굴곡(屈曲) 속기(束氣)는 있으나 뚜렷한 지각(枝脚)이 없으니 용(龍)이 아닌 호종사(護從砂)인 노(奴)가 아닌가 생각되었다. 혈(穴)을 맺는 용(龍)이라면 지각(枝脚)과 더불어 혈성(穴星)에 개면(開面) 개수(開手) 개구(開口)가 있어야 한다.
내려오면서 순전에 해당하는 묘 자리 아래의 줄기를 살펴보니 그 끝이 왼쪽으로 돌고 있었다. 이것은 왼쪽의 어딘가를 보호하는 호종사의 형태로 의심할 만하다. 훌륭하신 분의 음택이 그 명성에 걸맞지 못함이 못내 아쉬웠다.
차에 올라 세 번째 목적지인 퇴계선생 생가인 태실을 향하였다. 생가 앞에서 보니 뒷동산이 개장(開帳)하여 유정하게 받쳐주고 있고 앞에는 전답이 펼쳐져서 배산임수의 국세를 이루었다. 집 뒤로 돌아가 뒷동산을 살펴보니 생가가 위치한 곳으로 약간 솟은 내맥(來脈)이 집터 중심으로 이어져 있고 양 옆으로 골진 곳을 피하여 올바르게 생가 터를 잡았다.
뒤에서 집터를 내려다보고 나경을 꺼내보니 축입수(丑入首) 축좌미향(丑坐未向)에 우수도좌(右水倒左)한 손수구(巽水口)로 88향법상 양향(養向)에 해당하여 합법하였다. 집 앞으로 돌아와 대문을 들어서니 바깥마당이 넓게 있고 노송정(老松亭) 건물이 보였다. 그러나 바깥마당과 노송정은 뒷산 골진 곳에 해당하여 좋은 터로 보이지 않았다.
옆문을 통하여 태실이 있는 안채로 들어서니 ㅁ자 형태의 구조인데 안마당 중앙에 태실을 안치하여 어색하게 보였다. 안마당에서 나경을 꺼내보니 정문은 미방(未方)이고 측문은 진방(辰方)이며 안방은 계방(癸方)이고 부엌은 임방(壬方)이었다. 즉 곤문(坤門) 감주(坎主) 감조(坎灶)로 삼요(三要) 배치가 불합(不合)하였다. 그래서 진방(辰方)에 측문을 내고 정문은 사용하지 않고 측문을 사용하니 손문(巽門)이 되어 합법하게 된 것 같다.
생가를 나와 뒷동산 너머에 있는 조부모 묘를 향하였다. 조부모 묘 입구에서 보니 좌청룡 우백호가 감싸고 가운데로 내려온 줄기가 용호(龍虎)보다 짧으니 일단 기대해 볼만하다고 생각되었다. 재실에서 하차하여 혈장(穴場)에 올라보니 상중하로 세분의 묘가 있었다. 아래에는 퇴계 선생의 모친인 춘천박씨(春川朴氏)의 묘이고, 가운데에는 조부인 이계양(李繼陽)공 의 묘이며, 위에는 조모인 영양김씨(英陽金氏)의 묘이다.
혈장(穴場)을 돌아보고 뒤로 올라가 보니 내룡(來龍)이 기복(起伏)과 굴곡(屈曲) 그리고 속기(束氣)는 좋았다. 그러나 가늘고 길며 기운을 이끌만한 크게 뭉친 곳이 없으며 지각(枝脚)도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따라서 풍만하지 못하여 귀(貴)는 있으나 부(富)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내려와 만두(巒頭)에서 혈장을 내려다보니 가지열매 모양으로 약간 좌선(左旋)하고 있었다. 뇌두(腦頭) 즉 승금(乘金)에서 혈(穴)까지의 거리가 긴 편으로 혈로 들어오는 기운이 약해 보였다.
상중하 세 곳을 살펴보면 위에 있는 조모 묘는 위에 좌우로 선익(蟬翼)이 있고 청룡 쪽으로 약간 두터우니 이것이 혈증(穴證)이 되겠다. 가운데의 조부 묘는 청룡 쪽으로 약간 오목하고 부풀지 못하였으니 혈증이 부족하였다. 아래에 있는 모친 묘는 백호 쪽으로 약간 부풀었고 청룡 쪽으로도 선익사(蟬翼砂) 형태의 흔적이 있어 혈증이 되었다.
따라서 이 세 곳 중에 굳이 우열을 가린다면 춘천박씨의 자리가 가장 좋고, 그 다음으로 위에 있는 조모 자리가 그 다음이며, 가운데에 있는 조부 자리는 가장 부족하게 생각되었다. 나경을 꺼내보니 자좌오향(子坐午向)이었다.
전면을 바라보니 용호(龍虎)가 좌우로 환포하여 좋으나 내당(內堂)의 관쇄(關鎖)가 부족하여 아쉽다. 수성(水城)은 내당(內堂)의 원진수(元辰水)가 순수국(順水局)으로 부족하나, 외당(外堂)의 수성(水城)이 우수도좌(右水倒左)의 횡수국(橫水局)이고, 비록 멀지만 안산(案山)이 응대(應對)하여 다소 보완 되었다.
후손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며 하산하였다. 대전으로 오는 차속에서 생각해보니 오늘 둘러본 네 곳 중 생가 터가 가장 인상 깊었다. 그리고 운전하느라 고생한 재하 김홍길 선생이 고마웠다.
첫댓글 민중원 회장님 소중한 글 잘 보았습니다. 감산에 어머님 병환으로 참석하지못해 내심 서운했는데 회장님 글을 보니 마음이 위로가 됩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대한민국 풍수 발전을 위해 힘쓰시는 모습에 경의롤 표합니다. 장원기드림.
회장님의 풍수에 대한 강평과 기행문이 입문자인 제게 한층 쉽게 이해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현지답사가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라는 것도 알게된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회장님의 소중한 글 가슴에 담고 갑니다
잘 보았습니다. 갈 기회가 되면 유익한 자료가 될 것 같습니다.
잘 보았습니다..도움이 마니 됩니다..
갈 기회가 있으면 다시한번 읽어보고 가야겠습ㅈ니다.
잘 읽었습니다. 좋은 글과 좋은 사진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