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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사론 제13권
40) 삼삼매처(三三昧處)
삼삼매(三三昧)라 하는 것은,
공삼매(空三昧)와 무원삼매(無願三昧)와 무상삼매(無相三昧)를 말한다.
[문] 마땅히 하나의 삼매라 말해야 한다.
가령 십대지(十大地)와 십심(十心)과 심수법(心數法)으로 생기는 법, 오근(五根)ㆍ오력(五力)ㆍ칠각지(七覺支)ㆍ팔도지(八道支:八正道)의 경우 하나의 삼매로 설명되고 있지만,
마땅히 두 가지 삼매라 말해야 한다.
즉 설명에 따르면 유루(有漏)와 무루(無漏)ㆍ상속과 비상속ㆍ계(繫)와 비계(非繫)로 분류하는 것이 그것이다.
또 마땅히 네 가지의 삼매라 말해야 한다.
설명에 따르면, 욕계에 속하는 삼매와, 색계에 속하는 삼매와, 무색계에 속하는 삼매와, 아무 곳에도 속하지 아니하는 삼매로 구분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또한 다섯 가지 삼매라 말해야 한다.
설명에 따르면, 욕계에 속하는 삼매와, 색계에 속하는 삼매, 무색계에 속하는 삼매, 계(繫)를 끊거나 끊지 않는 것 따위의 다섯 가지로 구분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또 마땅히 여섯 가지 삼매라 말해야 한다.
설명에 따르면, 욕계에 속하는 삼매와, 색계에 속하는 삼매와, 무색계에 속하는 삼매와, 유학(有學)의 경지에 속하는 삼매와, 무학의 경지에 속하는 삼매와, 유학도 아니고 무학도 아닌 경지에 속하는 삼매 등 여섯 가지로 구분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또 마땅히 아홉 가지 삼매라 말해야 한다.
설명에 따르면, 증상상(增上上)의 삼매와, 증상중(增上中)의 삼매와, 증상하(增上下)의 삼매, 또 중상(中上)의 삼매와, 중중(中中)의 삼매와, 중하(中下)의 삼매, 또 하상(下上)의 삼매와, 하중(下中)의 삼매와, 하하(下下)의 삼매 등 아홉 가지로 구분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또 마땅히 열여덟 가지 삼매라 말해야 한다.
즉 유루(有漏)의 세계에 아홉 종류의 삼매가 있고, 무루의 세계에도 아홉 종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동시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삼매가 존재하는 것인데,
어찌하여 하나의 삼매를 범위를 넓혀서 세 가지 삼매로 건립하고 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삼매를 줄여서 세 가지 삼매로 건립하는가?
[답] 세 가지 일 때문에 세 가지 삼매로 구분한 것이다.
첫째는 행이며, 두 번째는 불원(不願)이며, 세 번째는 연 때문에 세 가지로 구분한 것이다.
첫 번째 행이라 하는 것은 공삼매의 행에 두 가지 행이 있다. 공(空)의 행과 비아(非我)의 행이 그것이다.
두 번째 불원(不願)이라고 하는 것은 유(有)를 원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문] 만약 불원이 무원삼매(無願三昧)라고 한다면 도(道)도 역시 원하지 아니 하는 것인가?
[답] 아니다. 왜냐 하면 무원이라는 것은, 성인의 도며 능히 유를 제거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유를 원하지 아니하게 되는 것이다.
성인의 도라 하는 것은, 도(道)조차도 원하지 아니하는데 하물며 유를 원하겠는가?
세 번째로 인연이라 한 것은 무상삼매(無相三昧)에서는 열 가지 형상에 집착하는 법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열 가지의 형상에 집착하는 법이라 하는 것은, 색ㆍ소리ㆍ냄새ㆍ맛ㆍ감촉의 다섯 가지 세계의 형상과,
남자의 모습, 여자의 모습이라는 두 가지 중생의 모습과,
태어나고 늙고 죽는 세 가지 유위(有爲)의 세계에서의 유위의 모습을 말하며,
이 무상삼매는 그 가운데 한 가지 형상에도 집착하는 것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 열 가지 형상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무상삼매라 말하는 것이며,
이것을 두고 세 가지 일, 즉 행과 불원과 연 때문에 세 가지 삼매라 말한다고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결을 제거하기 때문에 삼삼매(三三昧)라고 한다.
공삼매(空三昧)는 몸에 대한 편견을 제거하게 되고,
무원삼매(無願三昧)는 계도(戒盜)를 제거하게 되고,
무상삼매(無相三昧)는 의심을 제거하게 된다.
이렇게 결을 제거하는 까닭에 삼삼매라고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가 건립한 가운데 말하는 공삼매라 하는 것은 곧 공삼매일 뿐 그것은 무원삼매도 무상상매도 아니다.
또 그가 무원삼매라 한 것은 그것이 곧 무원일 따름이지 공삼매도 아니고 무상삼매도 아니다.
또 그가 말한 무상삼매는 무상삼매일 뿐 공삼매도 아니고 무원삼매도 아니다.
[문] 왜 세 가시 삼매를 따로따로 말하는가?
[답] 햄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공삼매의 행이라 하는 것은 무원의 행이 아니며 무상의 행이 아니다.
같은 이치로 무원삼매의 행이라 하는 것은 공삼매의 행이 아니며 무상삼매의 행이 아니다.
또 무상삼매의 행은 공삼매의 행이 아니며 무원삼매의 행이 아니다.
이렇게 행이 각기 다르기 때문에 따로따로 세 가지 삼매를 말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다른 설명에 따르면,
공삼매가 곧 공삼매인 동시에 무원삼매이기는 하지만 무상삼매는 아니며,
무원삼매라 하는 것도 곧 무원삼매인 동시에 공삼매이지만 무상삼매는 아니며,
무상삼매라 하는 젓은 곧 무상삼매일 따름이지 공삼매도 아니고 무원삼매도 아니라고 하였다.
[문] 왜 두 가지 삼매는 아울러 설명하고 한 가지 삼매는 따로 설명하는가?
[답] 동시에 얻게 되고 함께 결(結)을 제거하기 때문에 아울러 말한다.
동시에 얻는다고 하는 것은, 만약 공삼매에 의거하여 증득하는 경우 역시 무원도 얻게 된다.
또한 만약 무원삼매에 의거하여 증득하는 경우 역시 공삼매도 얻게 된다.
함께 결을 제거한다고 하는 것은, 이 두 가시 삼매는 함께 모두 결의 종자를 끊고 제거하는 작용을 갖추고 있다. 이것을 두고 동시에 얻고 함께 결을 제거하기 때문에 두 삼매와 아울러 한 가지 삼매를 따로 말하게 된다고 하는 것이다.
다른 설명에 따르면,
“공삼매는 곧 공삼매인 동시에 무원삼매이며 무상삼매다”라고 말하고 있다.
[문] 무슨 이유로 모든 삼매를 아울러 말하는 것인가?
[답] 이 삼매에서는 모든 것이 공(空)이며 영구불변한 존재는 없다고 비관하게 된다.
중생들은 영구히 존재하는 것이 없는데도 영구히 존재한다고 헤아리고 영구히 머물러 변화하지 아니한다고 헤아리는 까닭에 세 가지 삼매를 아울러 함께 말하게 되는 것이다.
즉 무원삼매는 무원삼매인 동시에 또한 공삼매이며 또한 무상삼매인 것이다.
[문] 왜 이 삼매에서는 원(願)이 없는가?
[답] 이 삼매에 들면 음욕과 노여움과 어리석음을 원하지 아니하게 되고 또한 다가올 미래의 세계의 유(有)를 받아들이기를 원하지 아니하게 된다. 그런 까닭에 이 삼매에는 원이 없는 것이다.
다음 무상삼매라 하는 것도 그 자체로 무상삼매인 동시에 또한 공삼매이기도 하고 무원삼매이기도 하다.
[문] 왜 이 삼매에서는 상(相)에 대한 집착이 없어지는가?
[답] 이 삼매에 들게 되면 색ㆍ소리ㆍ냄새ㆍ맛ㆍ감촉에 대한 집착이 없어진다. 그런 까닭에 이 삼매에서는 상(相)에 대한 집착이 없는 것이다.
[문] 세 가지 삼매에 어떤 성품이 있는가?
[답] 행음(行陰)이라는 성품이 있다.
그 경계를 말한다면 혹 삼계에 연계되기도 하고 혹 삼계에 속하지 아니하는 경우도 있다.
그 경지를 말한다면, 혹 열한 가지 경지일 경우도 있고 혹 아홉 경지에서 일어나는 경우도 있다.
그 근거를 말한다면, 삼계에 근거한다.
그 행을 말한다면, 공삼매에는 두 가지 행이 있으니, 공행(空行)과 비아행(非我行)이 그것이다.
무원삼매에는 열 가지 행이 있으니, 무상행(無常行)에 원인으로 본연(本緣)을 익혀 해탈하는 길로 나아가는 것이다.
무상삼매에는 네 가지 행이 있으니, 진행(盡行)ㆍ지행(止行)ㆍ묘행(妙行)ㆍ이행(離行)의 네 가지 행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서 마땅히 사구(四句)의 논리(論理)로 분별하여야 한다.
[문] 공삼매에서도 역시 공행(空行)을 행하는가?
[답] 혹 경우에 따라서는 공삼매에 들어도 공행을 행하는 것이 아닌 경우가 있다.
[문] 어떤 경우가 공삼매에 들어도 공행을 행하는 것이 아닌 경우인가?
[답] 공삼매에 들어서 비아행(非我行:無我行)을 행할 때 이것은 공삼매에서 공행을 행하는 것이 아니다.
[문] 어찌하여 공의 행이 공감매가 아닌가?
[답] 공삼매에서 공행(空行)을 행할 매 모든 법과 서로 호응하게 되면 이것을 공행을 행하여도 공삼매는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문] 어떤 것이 공삼매인 동시에 공행을 행하는 경우인가?
[답] 공삼매에서 공행을 행하는 것, 이것은 공삼매인 동시에 공행을 행하는 일이다.
[문] 어떤 경우가 공삼매가 아닌데도 역시 공의 수행을 행하는 것인가?
[답] 만약 곧 이 종류를 취할 경우 마땅히 공삼매에서 다른 행과 서로 호응하는 법을 행하는 것이라 말해야 한다.
그러나 만약 곧바로 이 종류를 취하지 아니하는 경우에는 마땅히 이 행과 같은 행을 제외하고 말해야 한다.
이와 같이 이미 행하였거나 앞으로 수행할 행은 공행의 경우 세 가지로 사구 분별(四句分別)하여야 한다.
또 무아행(無我行)의 경우에도 역시 세 종류의 사구 분별로 설명된다.
이렇게 공삼매의 행은 여섯 종류의 사구 분별로 설명되는 것이다.
무원삼매의 행에는 서른 가지 행이 있으며 무상삼매의 행은 아울러 설명할 경우 열두 가지의 행이 있고 사구 분별할 경우에는 마흔여덟 가지의 행으로 분별된다.
다음 그 연을 말한다면, 공삼매는 고제(苦諦)와 인연하고, 무원삼매는 삼제에 연하고, 무상삼매는 멸제와 연한다.
다음 그 염처(念處)를 말한다면, 공삼매와 무원삼매는 사념처와 연하고, 무상삼매는 법념처(法念處:法無我)에 연한다.
그 지혜를 말한다면, 비록 삼매란 본질적으로 지혜는 아니지만,
공삼매는 법지ㆍ미지지ㆍ고지ㆍ등지 등 네 가지 지혜와 서로 호응하고,
무원삼매는 법지ㆍ미지지ㆍ등지ㆍ지타심지ㆍ고지ㆍ집지ㆍ도지 등 일곱 가지 지혜와 서로 호응하고,
무삼삼매는 법지ㆍ미지지ㆍ멸지ㆍ등지 등 네 가지 지혜와 서로 호응한다.
선정의 측면에서 말하면, 삼매가 곧 선정이다.
그 받는 감각[受]의 측면에서 말하면 낙근(樂根)ㆍ희근(喜根)ㆍ사근(捨根) 등 세 가지 감각과 서로 호응한다.
[문] 이러한 삼매는 과거의 일이라 해야 하는가, 미래의 일이라 해야 하는가, 현재의 일이라 해야 하는가?
[답] 과거의 일이라 해야 하고 미래의 일이라 해야 하고 현재의 일이라 해야 한다.
[문] 과거에 연유한 일이라 해야 하는가? 미래에 연유한 일이라 해야 하는가? 현재에 연한 일이라 때야 하는가? 세계에 연한 일이 아니라 해야 하는가?
[답] 공삼매와 무원삼매는 과거에 연유한 일이라 해도 되고 미래에 연하는 일이라 해도 되고 현재에 연한 일이라 해도 된다.
무상삼매는 세계와 연하는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한다.
[문] 이름에 연하는 것이라 해야 하는가? 이지에 연유하는 것이라 해야 하는가?
[답] 이름에 연유하는 것이라 해도 되고 이치에 연유하는 것이라 해도 된다.
[문] 자기 생각에 연유하는 것이라 해야 하는가? 다른 사람의 생각에 연유하는 것이라 해야 하는가? 어떤 생각에도 연유하는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하는가?
[답] 공삼매와 무원삼매는 사기 생각에 연유하는 것이라 해도 되고 다른 사람의 생각에 연유하는 것이라 해도 된다.
무상삼매는 생각에 연유하는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한다.
이것이 세 가지 삼매의 성품이다.
이미 삼매의 종류와 모습, 본래의 특성을 말하였으므로 마땅히 그 행을 말해야 할 것이다.
[문] 왜 삼매라고 말하는가? 삼매에 어떤 뜻이 있는가?
[답] 세 가지 일 때문에 삼매라고 말한다.
첫째는 등지(等持)이고, 두 번째는 상속이고, 세 번째는 연에 묶이는 것이다.
평등하다고 하는 것은, 중생들이 오랜 시일 동안 심소법이 순서대로 생기지 않는지라 그것을 바로잡아 진실되게 하려면 삼매에 연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 상속한다고 하는 것은, 중생들이 오랜 시일에 걸쳐 심소법이 순서 없이 생기게 되며,
가령 선(善)한 마음이 생기면 문득 악한 마음과 무기(無記)의 마음도 있게 되고,
또 악한 마음이 생길 경우에도 문득 선한 마음과 무기의 마음도 있게 되며,
또 무기의 마음이 생길 경우에도 문득 선한 마음과 악한 마음도 있게 된다.
그렇기에 이 마음을 오로지 차례차례로 선한 모습에 묶어 두고 상속되게 하여 악한 마음과 무기의 마음을 제거하려면 오직 삼매에 연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연에 묶인다고 하는 것은, 중생들이 오랜 시일에 걸쳐 심소법이 색과 소리와 냄새와 맛과 감촉으로 흩어지므로 이것을 거두어들여 한 연(緣) 속에 묶어 두려고 한다면 삼매에 연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두고 세 가지 일 때문에, 즉 등지(等持)하고 상속하고 연에 묶어 두기 위해서 삼매를 말하게 된다고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첫째는 거두어들이고, 두 번째는 흩어지지 아니하게 하고, 세 번째는 버리지 아니하는 세 가지 일 때문에 삼매라고 말한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첫째는 일념, 두 번째는 흩어지게 하지 아니하고, 세 번째는 상속하는 세 가지 일 때문에 삼매라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부처님께서 경전에서 말씀하신 바에 따르면, 세 가지 삼매는 세 가지 해탈의 문(門)이라고 하셨다.
[문] 세 가지 삼매란 공삼매와 무원삼매와 무상삼매를 말하는 것인데,
해탈의 문도 역시 공삼매와 무원삼매와 무상삼매를 말하고 있으니,
이 두 가지 말에 어떤 차별이 있는가?
[답] 삼매라 하는 것은 유루의 삼매와 무루의 삼매가 있으나, 해탈의 문은 오로지 무루의 세계다. 이것이 차별이다.
[문] 그 논리에는 다시 다른 논리가 생기게 된다.
왜 삼매에는 유루ㆍ무루의 경지가 있고, 해탈문은 오로지 무루의 세계인 것인가?
[답] 그것이 해탈의 문이다.
해탈의 문이란 유루의 경지일 수가 없고 또한 얽매이고 묶여 있는 세계여서는 안 된다.
그런 까닭에 삼매에는 유루ㆍ무루가 있지만,
해탈의 문은 오로지 무루의 경지인 것이다.
[문] 해탈의 문이라 하는 것은 증득했기 때문에 해탈문이라 하는 것인가?
유루가 다하였기 때문에 해탈문이라 하는 것인가?
만약 증득했기 때문에 해탈문이라고 한다면, 이는 마땅히 고법인(苦法忍)과 서로 호응하는 것이 해탈의 문이 될 것이고 다른 것은 해탈의 문이 아닐 것이다.
또 만약 유루가 다하였기 때문에 해탈의 문이라고 한다고 한다면, 이는 마땅히 허물어지지 아니하는 금강삼매(金剛三昧)와 서로 호응하는 삼매를 해탈의 문이라 해야 할 것이며, 다른 것은 해탈이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답] 해탈이라 하는 것은 증득했기 때문이고, 또만 유루가 다하였기 때문에 해탈이라 하는 것이다.
[문] 만약 증득하고 유루가 다하였기 때문에 이것이 해탈의 문이 된다고 한다면, 마땅히 고법인(苦法忍)과 서로 호응하는 삼매를 해탈문이라 해야 할 것이며, 다른 삼매는 해탈이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답] 모든 것에 증득하였고 모든 유루가 다하였기 때문에 해탈문이라 이름지은 것이다.
[문] 왜 문이라 이름하였는가?
[답] 어떤 방면으로 향해 가는 길을 문이라 표현한다.
비유하면 마치 용감하고 건장한 사나이가 방패를 손에 잡고 스스로를 가리며 지극히 날카로운 칼로 그와 원수인 집안을 해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수행하는 사람도 삼매로 한 방편을 향해 매진하면서 날카로운 지혜의 칼로 번뇌라는 이름의 원수진 집안을 해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어떤 방면을 향해 가는 까닭에 문이라 표현한 것이다.
부처님의 경전의 말씀에 따르면 세 가지 삼매를 화관[鬘]이라 하였다.
[문] 왜 부처님은 세 가시 삼매를 화관이라 하였는가?
[답] 뛰어나게 공경 받게 되고 지극히 묘하기 때문이다.
마치 어떤 사람이 화관을 머리 위에 쓰게 되면 그 모습이 묘한 까닭에 다른 사람이 공경하는 대상이 된다. 이
와 같이 수행하는 사람도 세 가지 삼매라는 이름의 화관을 머리 위에 쓰게 되면 경지가 묘한 까닭에 하늘과 인간 세계에서 뛰어난 공경을 받게 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뛰어나게 공경 받기 때문에 세 가지 삼매를 화관이라 한다고 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가령 어떤 사람이 머리에 화려한 화관을 쓰고 있으면 바람에 머리카락이 어지럽게 날리지 아니하는 것처럼,
이와 같이 성인이 세 가지의 삼매를 머리에 쓰고 있으면 선근의 공덕으로 거칠고 미세한 삼매를 방해하는 각ㆍ관의 바람이 그의 마음을 어지럽힐 수 없게 된다.
그런 까닭에 화관에 비유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가령 어떤 사람이 실타래에 꽃을 묶어 화관을 만들어서 쓰면 오래 쓰고 있어도 속히 풀리고 흩어지지 아니하는 것처럼,
이와 같이 성인이 삼삼매를 공덕에 묶어 두면 화관처럼 오래 삼매에 머물러도 속히 잃거나 잊지 아니하게 된다.
그런 까닭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가령 사람들이 꽃을 엮어서 화관을 만들어 쓰면 모습이 많이 바로잡히게 된다.
이와 같은 이치로 성인이 세 가지 삼매로 공덕이라는 이름의 화관을 쓰면 마음을 많이 바로잡아 증득하여 과보를 얻어 결을 제거하고 누(漏)가 다하게 된다.
이런 일로 인하여 부처님이 경전에서 말씀하시기를,
‘사리불(舍利弗)이여, 성인의 제자는 삼삼매라는 화관을 성취하면 악을 제거하고 선(善)을 수행하게 되느니라’라고 하였다.
이런 까닭에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것은 세 가지 삼매로 널리 사자후(獅子吼)를 하게 되는 것을 말한 것이다.
경의 설명에 따르면 존자 사리불이 구살라(拘薩羅) 지방을 유행(遊行)하다가 어느 숲 속에 머물렀는데 그 숲 속에 사리불이 있는 장소와 멀지 아니한 곳에 한 외도가 역시 그 산 속에 머물고 있었다.
그 때 백성들은 사월 명절을 맞이해 모여서 놀이를 하였는데 외도가 조금 어떤 일이 있어서 산에서 내려가서 인간 사회에 이르렀다가 그들의 명절의 모임에서 많고 풍족한 술과 고기를 얻게 되어 술에 취하여 술병을 끼고 본래 있던 숲 속으로 돌아왔다.
그는 멀리서 존자 사리불을 보고 나서 사리불을 업신여겨 생각하기를,
‘몹시도 기이한 일이구나. 나도 역시 숲 속에 머물고 있고 그도 역시 숲 속에 머물고 있으며,
나도 역시 출가한 사람이고 과도 역시 출가한 사람이며,
나도 역시 처(妻)와 색을 버린 사람이고 그도 역시 처와 색을 버린 사람인데,
나에게는 이와 같은 즐거움이 있거늘 그에게는 저와 같은 고생이 있다니…’라고 생각하고, 곧 게송을 지어 말하였다.
나는 좋은 술 마셔 취하고
지금 또 한 병 지니고 있네.
산과 땅 풀과 나무들
이를 보니 모두가 같은 금빛이로다.
이에 존자 사리불은 생각하기를,
‘이 죽도록 여읜 범지(梵志:바라문)도 능히 이러한 게송을 읊을 수 있거늘, 내가 어찌 게송으로 대답 못하겠는가?’라고 생각하고 곧 게송을 지어 말하였다.
나는 무상(無相)의 술을 마시고
공삼매(空三昧) 술병 지니고
산과 땅 풀과 나무들
이를 보기를 침 뱉아 버리듯 하네.
존자 사리불은 이 게송 가운데서 사자후(獅子吼)를 한 것이다.
즉 ‘나는 무상의 술을 마신다’라고 한 이것은 무상삼매(無相三昧)를 표현한 말이고,
‘공삼매의 술병 지니고 있다’라고 한 것은 공삼매를 표현한 말이고,
‘산과 땅 풀과 나무, 이를 보기를 침 뱉아 버리듯 하네‘라고 한 것은 무원삼매(無願三昧)를 표면한 말이다.
이와 같이 존자 사리불은 이 게송 가운데서 사자후를 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은 경선에서 세 가지 삼매를 화관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문] 죽고 여윈 사람이란 목숨의 뿌리[命根]가 없어 생각도 없고 중생의 수에 포함되는 것이 아닌데, 그 범지는 목숨도 있고 생각도 있는 사람인데 왜 사리불은 죽어 여윈 사람이라 말하였는가?
[답] 그를 업신여기는 뜻으로 죽어 여윈 사람이라 말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혜명(慧命)의 뿌리가 없는 까닭에 ‘죽어 여윈 사람’이라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설명에 따르면, 이 삼삼매의 설명에는 많은 무상(無相)이 있다.
혹 공삼매를 무상이라 말하는 경우도 있고,
또 혹 견도(見道)를 무상이라 말하는 경우도 있고,
또 혹 의심이 없는 경지를 무상이라 말하는 경우도 있고,
혹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를 무상이라 말하는 경우도 있고,
혹 무상을 곧 무상이라 말하는 경우도 있다.
이 가운데서 “흑 공삼매를 무상이라 말한다”라고 하는 것은,
경의 설명에 따르면,
“나는 본래 무상삼매를 지어 무상삼매로 행하는 사람이다”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내가 짓고 행하는 것”이라 한 것은 자기는 지금 문득 한 곳에 멈추어 아무 욕망도 일어나지 아니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즉 어떤 비구가 “공(空)의 법을 길이 생각하여 문득 중생의 모습을 잊어버리고 남자ㆍ여자의 차별상을 보지 아니한다는 것이 공삼매를 무상(無相)이라 말한다”고 하는 예다.
또한 공삼매를 무상이라고 말한다고 하는 것은,
경의 설명에 따르면,
“어떤 비구가 공해탈(空解脫)의 문을 얻었으나 자신은 스스로 그 사실이 무슨 과보인지 무슨 공덕인지를 알지 못하였다.
그는 생각하기를,
‘누가 나를 위하여 이 삼매의 과보와 공덕을 알려 줄 수 있을까?’라고 하다가,
다시 생각하기를,
‘존자 아난은 부처님께서 칭찬하시는 사람이며 부처님께서 인가(印可)하신 사람이니 아난 존자는 반드시 나를 위하여 이 삼매의 과보와 공덕을 알려 줄 것이다’라고 생각하다가,
또다시 생각하기를,
‘만약 내가 아난 존자가 있는 곳을 찾아가,
≺이 삼매에 어떤 과보와 공덕이 있는가?≻를 묻는다면,
혹 존자 아난이 도로 나에게,
≺스님은 이 삼매를 얻었습니까?≻라고 물어 볼 수도 있다.
그 때 내가 만약 말한다 하더라도 어떻게 그 공덕을 보여 줄 수 있겠으며, 내가 만약 말할 수 없다면 어떻게 상좌 비구를 속일 수 있겠는가?
또 내가 만약 말없이 그 곳에 머물고 있다면, 어떻게 상좌 비구의 마음을 건드려 어지럽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그 비구가 다시 생각하기를,
‘나는 마땅히 존자 아난을 따라다니는 사람을 찾아가야 하겠다.
그렇게 하면 혹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존자 아난으로부터 이 일에 관한 말씀을 들은 것을 알 수 있을지 모르겠다’라고 생각하였다.
이에 그 스님은 6년 동안 그 곳을 찾아가 존자 아난을 따라다녔으나 이 일에 관한 이야기를 듣지 못하였다.
이에 그 비구는 훗날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오른편 어깨를 드러내고 두 손을 앞에 모아 공손히 아난 존자를 향해서 말하기를,
‘아난 존자시여, 이 삼매라 하는 것은 부지런히 정진하고 수행하면 불어나지도 아니하고 줄어들지도 아니하여 마치 물이 한 자리에 머물듯 머문다고 하며, 그렇게 머무는 까닭에 해탈하게 되고 해탈하는 까닭에 삼매에 머물게 된다고 하니, 이 삼매에는 어떤 과보와 어떤 공덕이 있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아난 존자가 물었다.
‘스님, 그대는 이 삼매를 얻었습니까?’
그 스님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아난 존자시여, 이 삼매를 얻었습니다.’
이에 아난 존자가 설명하였다.
‘스님, 이 삼매라 하는 것은 부지런히 정진하여 수행하면 불어나지도 아니하고 줄어들지도 아니하여 마치 물이 안정되게 한 곳에 머물듯 머물게 됩니다.
머무는 까닭에 해탈하게 퇴고 해탈하는 까닭에 머물게 됩니다.
스님, 이 삼매는 지혜의 과보며 지혜의 공덕입니다.
스님은 오래지 아니하여 아마도 곧 지혜를 얻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부지런히 정진하고 수행한다’라고 하는 것은, 용맹하여 뜻을 오로지 한 곳에 집중하는 것을 말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부지런히 정진하고 수행한다’라고 말한 것이다.
‘불어나지도 아니하고 줄어들지도 아니한다’라고 한 것에서 불어나지 아니하는 것은, 열반을 말한 것이며 줄어들지 아니한다는 것은 생사윤회를 말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불어나지도 아니하고 줄어들지도 아니한다’라고 말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불어나지 아니한다’고 하는 것은 아(我) 즉 나에 대한 집착을 제거하기 때문이며,
‘줄어들지 아니한다’라고 하는 것은 이 아집이 제거되었기 때문에 줄어들지 아니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불어나지도 아니한다고 하는 것은 아견(我見)이 제거되기 때문이며,
줄어들지 아니한다고 하는 것은 ‘내가 존재한다’라는 편견이 제거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불어나지도 아니하고 줄어들지도 아니한다’라고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물과 같이 고요히 머문다’라고 한 것은,
샘의 구멍에서 물이 솟아나 샘을 덮게 되어도 그 구멍은 버리지 아니하는 것처럼,
그 삼매도 삼매에 연하여 과보가 생기지만 그 연(緣)은 버리지 아니하는 것이다.
‘스님, 이 삼매는 지혜의 과보며 지혜의 공덕입니다’라고 한 것은,
증득하면 과보를 얻고 누(漏)가 다하게 되는 까닭에 지혜의 과보, 지혜의 공덕이라 말한 것이다.
이에 그 스님은 아난 존자의 훌륭한 방편ㆍ비유의 설법을 듣고 마음속에 큰 기쁨을 품게 되어 그 법문을 외우고 익히고 받아 간직한 뒤 아난 손자의 발에 절하고 아난 존자의 주위를 맴돈 다음 그 곳을 떠났다.
그 후 그 스님은 아난 존자가 내려 준 가르침에 인연하여 홀로 고요하고 적막한 곳에 편안히 앉아 마음이 방일하지 아니하였고 부지런히 정진하면서 유행을 마치자 마침내 법을 알게 되어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성취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공삼매를 무상이라고 말하는 이치이다.
다음 견도(見道)를 무상(無相)이라고 말한다고 하는 것은,
경의 설명에 따르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목건련(目犍連)아, 저 제사범(提舍梵, 提舍尼:顯示ㆍ說罪僧)이 너를 위하여 여섯 번째의 무상행(無相行)을 닦은 사람이라 알려 주지 아니하더냐?
여섯 번째로 무상행을 닦는 사람은 견법(堅法)을 굳게 믿는 사람이다.
이 뜻은 여섯 번째로 무상행을 닦는 사람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 무상이란 이치를 헤아릴 수도 없고 시설할 수도 없다.
혹 이곳에 머물기도 하고 혹 저곳에 머물기도 하고,
혹 고법인(苦法忍)을 무상이라 하기도 하고 혹 고법지(苦法智)를 무상이라 하기도 하고,
혹 고미지인(苦未智忍)을 무상이라 하기도 하고 혹 고미지지(苦未知智)를 무상이라 하기도 하고,
후 집법인(集法忍)을 무상이라 하기도 하고 혹 집법지(集法智)를 무상이라 하기도 하고,
혹 집미지인(集未知忍)을 무상이라 하기도 하고 혹 집미지지(集未知智)를 무상이라 하기도 하고,
혹 멸법인(滅法忍)을 무상이라 하기도 하고 혹 멸법지(滅法智)를 무상이라 하기도 하고,
혹 멸미지인(滅未知忍)을 무상이라 하기도 하고 혹 멸미지지(滅未知智)를 무상이라 하기고 하며,
혹 도법인(道法忍)을 무상이라 하기도 하고 혹 도법지(道法智)를 무상이라 하기도 하고,
혹 도미지인(道未知忍)을 무상이라 하기도 하고 혹 도미지지(道未知智)를 무상이라 하기도 한다.
이렇게 무상이라 하는 것은 헤아릴 수도 없고 건립할 수도 없다.
그런 까닭에 견법을 굳게 믿는 것을 여섯 번째로 무상행을 닦는 사람이라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이 가운데서 밝힌 것은 견도(見道)를 무상(無相)이라 말씀하신 것이다.
[문] 왜 이 견도의 경지를 무상이라 말씀하셨는가?
[답] 견도의 경지는 빠른 길이다.
빠른 길은 한 곳에 머물지 아니하기 때문에 견도의 경지를 무상이라 말한 것이다.
다음 혹 의심이 없는 경지[無疑]를 무상이라고 말한다고 하는 것은,
경의 설명에 따르면,
“존자 구다(瞿多)여, 탐욕한 모습도 있고 노여워하는 모습도 있고 어리석은 모습도 있다.
만약 이런 모습이 없다면 이것을 무상(無相)이라 하며 이것을 무의(無疑)라 한다”라고 하였다.
이 가운데서 말한 것은 의심이 없는 것이 곧 무상이라는 것이다.
[문] 왜 의심이 없는 것을 무상이라 말하는가?
[답] 결사(結使)는 물러서는 인(因)이 결합하여 성립된 상(相)이기 때문이다.
의심이 없으면 줄어들거나 물러나지 않기에 의심이 없는 것을 무상이라 하는 것이다.
혹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의 경지를 무상이라고 한다는 것은,
경의 설명에 따르면,
“모든 무소유처의 경지를 넘어선 것이 비상비비상처이며 그 곳에서 노닐 곳이 성취된다”라고 하였다.
이 가운데서 말하는 것은 비상비비상처가 곧 무상의 경지라는 것이다.
[문] 왜 비상비비상처를 무상이라 말하는가?
[답] 그 곳에서는 생각도 정해진 것이 아니고 생각 아닌 것도 정해진 것이 아니다.
생각이 정해지지 아니하였다고 하는 것은 칠상(七想)의 삼매와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며,
생각 아닌 것도 정해지지 아니하였다고 하는 것은 무상삼매(無相三昧)와 같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생각이 소멸하면 삼매가 둔해지기 때문에 날카롭지 아니하고 민첩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다음 무상을 곧 무상삼매라고 말한다고 하는 것은,
경의 설명에 따르면,
“세 가지 삼매라 하는 것은 공삼매ㆍ무원삼매ㆍ무상삼매를 말한다”라고 하였다.
이 가운데서 말하고 있는 것은, 상(相)에 대한 집착이 없는 것이 곧 무상삼매라는 것이다.
부처님의 말씀에 따르면 “공삼매는 존귀한 사람이 거처하는 곳이다”라고 하셨다.
[문] 무슨 까닭으로 공삼매는 존귀한 사람이 거처하는 곳이라 하였는가?
[답] 존귀하신 분이 흔히 그 가운데서 노니시기 때문이다.
삼천 대천 국토에서 부처님이야말로 공덕 가운데서 가장 존귀하신 분이다. 그 분이 흔히 이 경지 가운데서 노니셨다.
두 번째로 존귀하신 분은 사리불(舍利弗)이신데 그 분도 흔히 이 경지 가운데서 노니셨다. 이것을 두고 존귀한 사람이 거처하는 곳이라 한 것이다.
흔히 이 가운데 노니신 곳을 공삼매라 부르며 이곳이 존귀하신 분이 거처하는 곳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공삼매라 하는 것은 이 법에서는 여러 사람이 함께 거처하지 아니하는 까닭에 공삼매는 존귀한 사람이 거처하는 곳이라고 말한 것이다.
비록 백 년을 이 경지에 있다고 하더라도 외도의 법이란 다만 그 이름 때문에 작은 성취밖에 이루지 못한다. 외도의 법이란 어리석은 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법을 닦는 사람은 비록 칠 년 밖에 이 경지에 있지 아니한다 하더라도 그는 존귀한 사람이란 이름을 얻게 된다. 존귀한 법을 성취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공삼매라 하는 것은 외도의 법과 함께 거처하지 않는 까닭에 존귀한 사람이 거처하는 곳이라고 표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문] 무원삼매와 무상삼매는 이 경지가 외도의 법에도 있는가, 없는가?
[답] 비록 근본적으로 무원ㆍ무상의 삼매는 없다고 하더라도 혹 엇비슷한 무원행(無願行)은 있다.
그러나 비슷한 행이란 거칠고 추한 행이다.
또 무상삼매의 행과 비슷한 행은 지(止)의 행이다.
그러나 아흔여섯 가지 종류의 외도들의 술법에도 공삼매(空三昧)와 비슷한 것은 없나니, 하물며 이 공삼매에 있어서랴.
공삼매라 하는 것은 외도의 법과 함께 거처하지 않는 까닭에 존귀한 사람이 거처하는 곳이라 말한 것이다.
혹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정(定)에 머무는 까닭에 공삼매는 존귀한 분이 거처하는 곳이라 말한 것이다.
이는 중생들은 아직도 공임을 관하지 못한 까닭에 항상 어지럽게 달려가고 날뛰며 미쳐 달리면서 멈추지 아니한다.
마치 물이 어지럽게 요동치는 것처럼 생각도 이와 같이 한 곳에 머물지 아니하게 된다.
그러나 만약 공법(空法)을 관하고 나면 안정되게 머물고 이동하지 아니함이 마치 수미산처럼 흔들리지 아니하게 된다.
이것을 두고 안정되게 머무는 까닭에 공삼매는 존귀한 사람이 사는 곳이라고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모든 사랑스러운 것과 미운 것, 편리한 것과 불편한 것, 좋은 것과 나쁜 것, 즐거운 용구(用具)와 괴로운 용구 등과 함께 하지 아니하는 까닭에 공삼매는 존귀한 분이 거처하는 곳이라고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경의 설명에 따르면,
“사리불 국자의 어머니가 죽으니 제자들이 가사를 반환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 때 흑치(黑齒) 비구가 늘 존자 사리불과 뜻이 맞지 아니하였는데 그는 생각하기를,
‘내가 곧 그에게 가서 이 흉한 일을 문상해야겠다’라고 생각하고,
곧 사리불 존자가 있는 곳을 찾아가,
‘사리불이여, 아시는가? 어머니가 죽자 제자들이 가사를 반환하고 집으로 돌아갔는데 이유를 알고 싶다’고 하였다.
이에 사리불이 설명하였다.
‘흑치 비구야, 이것을 안다고 한들 어떻게 하겠는가?
그대가 말한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일은 존재하는 생명체의 본질이다.
누가 태어나서 죽지 아니하는 사람이 있겠는가?
네가 말한 제자들이 가사를 반환하고 집으로 돌아갔다는 것은 이는 범부(凡夫)들의 본성으로 그들의 마음은 항상 이동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오직 한 분 성인만이 마음이 항상 달라지고 흔들리지 아니한다≻고 하시며, 아난에게,
≺진리를 인견(忍見)한 사람으로서 계율을 어기거나 계율을 반납하여 환속한다는 이런 일은 없노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을 듣고 흑치 비구는 생간하기를,
‘비록 이런 말을 하지만 마음은 반드시 즐겁지 아니할 것이다’라고 생각하였다.
그 때 사리불 존자는 이 일을 보고 나서 이튿날 새벽에 옷을 가다듬고 발우를 지니고 사위국(舍衛國)에 들어가서 탁발[分衛]하였다. 탁발하고 나서 식사를 마치고는 의발을 거두고 손발을 씻고 좌구(坐具)를 오른편 어깨 위에 걸치고 안타림(安陀林) 숲 속에 들어가 좌선(坐禪)하였다.
사리불 존자는 안타림에서 좌선할 때 생각하기를,
‘세간에는 자못 곧 내 마음에 일어나는 시름과 근심과 고뇌를 변하게 하고 바꾸게 할 만한 지극히 좋고 묘한 일도 있을까?’라고 생각하다가,
다시 생각하기를,
‘세간에는 내 마음에 일어나는 시름과 근심과 고뇌를 곧 바꾸게 할 만한 좋고 묘한 일은 없다’라고 생각하였다.
그 때 존자 사리불은 해가 저물 때가 되어서 좌선에서 일어나 안타림(安陀林)에서 나와서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을 찾아갔다.
이 때 이난 존자는 멀리서 사리불 존자가 오는 것을 보고서 말하였다.
‘잘 오셨습니다. 사리불 존자시여, 어니서 오시는 길이며 어디에서 좌선을 하셨습니까?’
그 때 사리불 존자는 대답하였다.
‘아난이여, 안타림에서 오는 길이며 그 곳에서 좌선하였습니다.’
그러자 아난 존자가 다시 물었다.
‘사리불 존사시여, 안타림에서 어떻게 좌선하셨습니까?’
사리불 존자가 대답하였다.
‘아난이여, 나는 안타림에서 사유하였는데 각(覺)ㆍ관(觀)이 일어났습니다.’
이에 아난 존사가 물었다.
‘어찌하여 사리불 존자께서 각ㆍ관이 있는 삼매에 드셨습니까?’
‘아난이여, 나는 안타림에서 좌선할 때 생각하기를,
≺세간에는 나에게 일어나는 시름과 근심의 고뇌를 바꾸게 할 만한 지극히 좋고 묘한 일도 있을까?≻라고 생각 하였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셨을 때 어떤 결론을 얻었습니까?’
‘아난이여, 나는 생가하기를,
≺세간에는 나에게 일어나는 시름과 근심과 고뇌를 바꾸게 할 만한 지극히 좋고 묘한 일주 없다≻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사리불 존사께서는 부처님을 지극히 존경하시고 사랑하시지 아니하십니까?’
‘아난이여, 나는 부처님을 지극히 사랑하고 존경하고 있습니다.’
‘만약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다면 곧 시름과 근심과 고뇌가 일어나지 아니하시겠습니까?’
‘아난이여,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다 하더라도 나에게는 시름과 근심과 고뇌는 일어나지 아니할 것입니다.
다만 생각하기를,
≺부처님께서 너무 속히 열반에 드셨고 세간의 눈이 너무 빨리 없어졌구나≻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에 아난 존자가 말하였다.
‘훌륭하고 훌륭하십니다. 사리불 존자시여,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다 하더라도 시름과 근심과 고뇌가 일어나지 아니할 것입니다.
왜냐 하면 그와 같이 나도 그렇게 될 것이기 때문이며 이는 나에 대한 집착을 극도로 끊은 경지이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이것을 두고 모든 사랑하는 것, 사랑의 대상이 아닌 것, 편리하고 불편한 것, 좋고 나쁜 것, 즐거운 용구, 괴로운 용구들과 함께 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공삼매는 존귀한 분이 거처하는 곳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또한 경의 설명에 따르면,
“부처님께서 기수급고독원에서 노니실 때 아난 존자가 한 곳에서 좌선하면서 생각하였다.
‘한때 부처님께서 니감(尼鉗)이라는 이름의 석씨(釋氏) 종족들이 사는 성에 유행하셨는데 그 때 나는 부처님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들었었다.
≺아난아, 나는 흔히 공삼매(空三昧)에서 노니느니라.≻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예전에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의 뜻을 잘 알고 잘 받아 간직하여야 할까?’
이에 아난 존자는 해 저물 때에 좌선에서 일어나 부처님 계신 곳에 이르러 부처님의 발아래 절하고 물러나서 한쪽에 머물면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부처님이시여, 부처님께서 예전에 니감이라는 이름의 석씨 종족이 사는 성을 유행하셨을 때 저는 부처님으로부터,
≺아난아, 나는 흔히 공삼매에서 노니느니라≻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예전에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을 잘 알고 잘 받아 간직할 수 있습니까?’
아난 존자가 부처님을 향해서 이와 같이 말하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아난아, 그와 같이 말하였느니라. 아난아, 내가 한 말을 너는 잘 알고 잘 받아 간직하고 있구나. 왜냐 하면 나는 지금도 흔히 공삼매에서 노닐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문] 만약 아난 존자가 잘 알고 잘 받아 간직하고 있다면, 무엇 때문에 부처님께 물었는가?
만약 그것을 물었는데도 잘 알고 잘 받아 간직하였다고 할 수 있는가?
[답] 잘 알고 잘 받아 간직한 것이다.
[문] 만약 잘 알고 받아 간직하고 있었다면 왜 물었는가?
[답] 그 때 아난 존자는 석씨 종족이 허물어짐으로써 근심과 슬픔으로 마음속이 안정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그 이치를 설명한다면, 그 때 어리석은 유리왕(流離王)이 가유라위성(迦維羅衛城)을 정벌하여 그 종족을 모두 허물었다.
아난 존자는 어리석은 유리왕이 가유라위성을 정벌하여 우리 석씨 종족을 모두 허물었다는 말을 듣고 이튿날 아침 한 비구와 더불어 도반이 되여 그 성에 들어가 보니, 본래 성은 마치 하늘의 궁전과 같았었는데, 지금은 언덕의 무덤과 같았고 담장과 누각과 벽ㆍ내부 담장ㆍ창문 등이 모두 이미 허물어졌으며, 그 곳에 있던 갖가지 꽃나무ㆍ과일 나무ㆍ장원(莊園)의 큰 집들이 모두 이미 꺾이고 부러져 가로ㆍ세로로 땅을 덮고 있었고, 수많은 꽃과 못, 연꽃 못, 푸른 연꽃 못이 모두 기울고 허물어지고 고갈되었으며, 이상한 종류의 기이한 새들, 오리ㆍ기러기ㆍ원앙새ㆍ비둘기ㆍ앵무새ㆍ공작새ㆍ참새들이 공중에 날아다니고 있으면서 연기와 불에 그슬려 갈 곳 없이 배회하면서 공중에 있었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남녀들이 그의 부모를 잃고 통곡하면서 슬피 울며 아난 존자의 뒤를 따랐다. 그 때 우담바라꽃이 피는 정원 안에는 7만 명의 현인ㆍ성인들이 몸이 절반 땅에 묻혀 있었고 큰 향상(香象)은 무쇠 손잡이에 잠겨 있었다.
아난 존자는 이런 모습을 보고 나서 더욱 슬프고 쓰린 생각이 더해졌다.
부처님께서 이 때문에 그 곳으로 가셨으니,
여러 비구들에게 앞뒤로 에워싸인 가운데 모든 근(根)이 적멸하게 안정되어 생각과 행동이 흔들리지 아니함이 마치 산지(山地)와 같았으며,
마음가짐이 마치 기름 사발을 들고 있는 것처럼 조심스러웠고,
말과 같은 오근(五根)을 잘 제어하여 마치 청정한 금산(金山)과 같은 자세로 그 성 안에 들어가셨다.
이에 아난 존자는 멀리서 부처님을 바라보니 묘한 광채가 몸에서 발하였다.
아난은 이 모습을 보고 생각하기를,
‘몹시 기이한 일이구나. 태어난 땅이 함께 허물어지고 종족이 모두 멸망하여 나에게는 이와 같은 근심과 슬픔이 있는데도 부처님께서는 마치 큰 산과 같이 기울고 비탈진 곳이 없으니…’라고 생각하였다.
그 때 부처님께서는 아난 존자의 생각을 아시고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흔히 공삼매에서 노닐거늘 너에게는 마음에 대한 집착[相]이 있구나.
나는 구족하게 적멸하고 고요한 모습을 갖추었거늘 너는 사람들에 대한 집착이 있구나.
나는 법상(法想)을 구족하였느니라”라고 하셨다.
그 때 아난 존자와 다른 스님들은 친족을 잃고 마음속에 근심과 슬픔을 품어 걸음을 걸을 수 없었다.
이 때 부처님께서는 이곳과 인연이 있었던 까닭에 사람들 사이를 유행하시면서 차례로 사위국(舍衛國)으로 되돌아오셔서 사위국의 기원정사(祇洹精舍) 급고독원에 계셨다.
그 때 아난 존자는 근심하고 슬퍼하는 마음이 제거되고 적막하고 고요한 곳에서 생각하기를,
‘예전에 한 시기에 부처님께서 석씨 종족이 사는 니감성(尼鉗城)을 유행하셨는데 그 때 나는 부처님으로부터,≺
아난아, 나는 흔히 공삼매에서 노니느니라≻라는 내용의 말씀을 들었다.
이 말씀을 어떻게 하면 훌륭히 알고 훌륭하게 받아 지니게 되는 것인가?’라고 생각하고,
이에 아난은 해가 저물자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 계신 곳에 이르러 부처님의 발아래 절하고 물러나서 한쪽에 머물며 부처님께 아뢰기를,
“부처님이시여, 부처님께서 예전에 한때 석씨 종족이 사는 니감성이라는 곳을 유행하실 때 그 때 저는 부처님으로부터,
‘아난아, 나는 흔히 공삼매에서 노닌다’라는 뜻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말뜻을 잘 알고 훌륭히 받아들여 간직하게 됩니까?”라고 하였다.
이 때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그렇다. 그와 같느니라. 아난아, 내가 말한 것을 너는 잘 알고 훌륭히 받아들여 간직하고 있느니라.
왜냐 하면, 아난아, 나는 지금도 공삼매에서 노닐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셨다.
[문] 물은 사람이 어떻게 잘 알고 훌륭히 받아들여 간직하고 있는 것인가?
[답] 그것이 잘 알고 훌륭히 받아 간직한 일이 아니겠는가?
받아들여 간직함에 거꾸로 되지 아니하였고 받아들여 간직한 시기가 앞서지도 뒤지지도 아니하였으며 모든 것을 하나도 잊지 아니하였다.
다만 마음속에 근심과 슬픔을 품고 있었기에 그의 마음속이 안정되지 아니하였다. 그런 까닭에 물은 것이다.
다시 설명한다면 부처님께서,
“아난아, 나는 지금도 공삼매에서 노닐고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때 모든 스님들이 이 말씀을 듣고 생각하기를,
‘공삼매라는 것은 모든 부처님만 거처하는 경지이지 모든 성문(聲聞)과 벽지불이 거처하는 경지가 아니다’라고 생각하였다.
그 때 부처님께서는 모든 성문승(聲聞僧)들의 마음을 아신 후에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시기를,
“아난아, 모든 여기 있는 비구들은 흔히 공삼매에 노닐고자 하는 비구들이다.
아난아, 그런 비구들은 마땅히 마을에 대한 집착을 생각하지 아니하여야 하고 사람에 대한 집착을 생각하지 아니하여야 하며, 마땅히 적멸하게 고요한 모습만을 생각하여야 하느니라”라고 하셨다.
[문] 부처님께서 표현하신 어떤 것이 마을에 대한 집착이며, 어떤 것이 사람에 대한 집착이며,
어떤 것이 적멸하게 고요한 모습이며, 어떤 것이 경지의 모습이며, 어떤 것이 무량공처(無量空處)의 모습이며, 어떤 것이 무량식처(無量識處)의 모습이며, 어떤 것이 무소유처(無所有處)의 모습이며, 어떤 것이 무상(無相)의 뜻을 지닌 삼매며,
어떤 것이 유위(有爲)의 이치가 담긴 해탈이며, 어떤 것이 무위(無爲)의 이치가 담긴 해탈이며, 어떤 것이 누진(漏盡) 해탈인가?
[답] 마을에 대한 생각이라는 것은 현실로 가유라위성(迦維羅衛城)에 연유한 생각을 말한 것이며 사람에 대한 생각이라 하는 것은 현실로 살해된 석가 종족에 대한 생각이다.
적멸하게 고요한 모습이란 니구류수(尼拘類樹)의 정원에 대한 생각을 표현한 것이고,
결지의 모습이란 사선(四禪)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며,
무량공처에서 무소유처에 이르기까지의 모습이란 이 욕계와 색계를 제외한 세계를 표현한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마을에 대한 생각이라 하는 것은 욕계를 표현하신 것이다. 욕계란 마을과 같기 때문이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마을에서 찌르고 욕하고
속박하고 박해하는 일 버릴 수 있다면
비구는 고락(苦樂)에서 벗어나
산처럼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다음 사람에 대한 생각이라 하는 것은 범인들의 집착을 표현한 것이고,
적멸하게 고요한 모습이라 한 것은 이선(二禪)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며,
이곳은 현인 성인들이 묵연히 말이 없는 경지라 말한다.
다음 국토에 대한 생각이란 이미 소멸한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색과 연하기 때문에 곧 귀ㆍ코ㆍ손ㆍ발을 잘리는 일이 있게 되는 것이다.
다음 무량공처에서 무소유처에 이르기까지의 모습이란 욕계와 색계를 제외한 세계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을 마을에 대할 생각에서 무소유처에 이르기까지의 모습이라 말하는 것이다.
[문] 무엇 때문에 항상 마을에 대한 생각, 사람에 대한 생각을 하지 말라고 말하였는가?
[답] 이 두 가지 생각은 모는 비구로 하여금 마음속에 근심과 슬픔을 품게 한다.
그리하여 부처님은 곧 이러한 생각을 버리고 선법(善法)을 수행하라고 말씀하셨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항상 마을에 대한 생각, 사람에 대한 생각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문] 무엇 때문에 낮은 경지의 생각을 버리면 뛰어난 생각을 하게 되는가?
[답] 산란한 마음을 제어(制御)하기 때문이다.
만약 부처님도 낮은 경지의 생각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문득 뛰어난 생각을 하셨다면 문득 그 마음에는 산란함이 있게 될 것이다. 모든 부처님의 법은 항상 산란하지 아니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산란한 마음을 제어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쓸데없는 말을 금하시려는 때문이다.
낮은 생각을 버리면 뛰어난 생각을 하게 된다.
부처님의 상법(常法)은 말씀을 쓸데없이 되풀이하지 아니하신다”라고 하였다.
이런 이유 때문에 쓸데없는 말을 금하려고 낮은 경지의 생각을 버리면 뛰어난 생각을 하게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아난은 이것을 전도(顚倒)하지 아니하였고 여여(如如)하고 진실한 공삼매(空三昧)를 유위해탈(有爲解脫)ㆍ무위해탈(無爲解脫)이라 한 것이다.
[문] 어찌하여 이 가운데 유위해탈과 무위해탈이 있는가?
[답] 유위해탈이라 하는 것은 등의해탈(等意解脫)을 말하고,
무위해탈이라 하는 것은 무애해탈(無礙解脫)을 말하는 것이다.
[문] 왜 등의해탈이라 하는가?
[답] 적은 도(道)로 얻는 해탈이기 때문에 등의해탈이라 한다.
[문] 왜 무애해탈이라고 하는가?
[답] 무량한 도로 얻는 해탈이기 때문에 무애해탈이라 한다.
[문] 왜 무애해탈은 흔들리지 아니한다고 말하는가?
[답] 결(結)은 흔들리게 할 수 있다. 무애라는 것은 결로 인하여 흔들리지 아니하고 구르지 아니하고 물러서지 아니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무애해탈은 흔들리지 아니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구경(究竟)의 경지에 이르면 누(漏)가 다한다고 하는 것은 모든 번뇌가 다한 경지를 표현한 것이다.
세 가지 삼매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마친다.
또한 대장(大章)의 설명도 이것으로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