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 44칙 화산화상의 북솜씨
“깨달음은 북을 치는 것처럼 무심의 경지”
{벽암록} 제44칙은 화산 무은화상(891∼961)의 "쿵쿵 쿵더쿵!" 법문을 싣고 있다.
화산화상이 수시했다.
"글을 배워 얻은 지식을 문(聞)이라 하고 다 배워 더 배울 것이 없음을 인()이라 한다.
이 두 가지를 초월한 것, 그것을 진과(眞過)라 한다."
한 스님이 "그 진과란 어떤 것입니까"하고 물었다.
화산화상은 "내게 북 솜씨가 있지 - 쿵쿵 쿵더쿵!"이라고 답했다.
"그럼 진과도 초월한 성제(聖諦)의 제일의(第一義)란 무엇입니까"하고 스님이 또 질문했다.
화산화상은 이번에도 "쿵쿵 쿵더쿵!"이라고 말했다.
"우리의 이 마음이 곧 불심(佛心)임은 잘 알고 있으니까 그건 그대로 두고,
비심비불은 어떤 겁니까"하고 또 다시 파고들었다.
화산화상은 그래도 "쿵쿵 쿵더쿵!"이라고 답했다.
단념하지 않고 스님이 "부처님이나 달마 같은 한층 훌륭한 분이 오신다면 어떻게 맞겠습니까"하고 물었다.
화산화상은 끝까지 "쿵쿵 쿵더쿵!"이라고 말했다.
'북 잘 친다'는 무애한 지혜상징
불도를 가르치는 뛰어난 방법
화산화상은 무은(無殷 884~960)선사로 설봉의존(雪峰義存)에게 출가하여 11년간 시봉하고, 설봉이 입적한 뒤에 구봉도건(九峰道虔)선사의 법을 계승하고 길주 화산의 대지원에서 교화를 펼친 선승이다.
그의 전기는 서현(徐鉉)이 지은 비문이 있고,
{조당집} 12권, {전등록} 17권, {오등회원} 6권, {선림승보전} 5권 등에 전하고 있다.
{조당집}에는 화산화상의 법문과 선문답이 많이 수록되어 있지만 이 공안은 보이지 않는다.
화산화상의 법문을 잠간 들어보자.
'대개 불도를 가르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니, 각자가 자신의 주인이 되는 법을 알아야 한다.
옛날부터 노숙들이 제자들에게 사문이란 하루 24시간을 잠깐이라도 주인을 잃어버려서는 안 되고, 한 시각도 등져서는 안 된다.
상근기는 한번 퉁기면 곧 지혜가 작용하지만, 중하(中下)근기는 공훈에 떨어진다.
밤낮으로 부지런히 애써서 망심과 의식을 텅 비워서 인연의 연결이 끊어진 길과 같이 되도록 하라.
설사 그렇게 된다고 할지라도 역시 남의 말을 빌린 것임을 면하지 못하리라.'
불도수행은 일체의 시간을 깨달음의 지혜로운 생활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법문이며,
남의 말에 의거하지 말고 자신이 체득한 경지의 법문을 설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화산화상이 대중을 위하여 다음과 같이 설법했다.
'배우고 익히는 습학을 들음(聞)이라 하고, 배움이 없는 것(絶學)을 가까움(隣)이라고 한다.
그러나 습학과 절학을 초월해야 참된 초월이라고 할 수 있다.'
화산의 설법은 승조의 저술로 주장하는 {보장론}에,
'불도를 배움에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진(眞)이라 하고,
두 번째는 인(隣)이라 하고,
세 번째는 문(聞)이라고 한다.
습학은 문이라고 하고,
절학(絶學)은 인이라고 하고,
습학과 절학을 초월한 것을 진이라고 한다'는 일절에 의거한다.
습학(習學)은 {논어}에 '배우고 때대로 익히면 기쁜 일이 아니겠는가'라는 말에 의거하여 점차적인 수행(漸習)의 입장이고,
절학은 {노자} 20장의 '절학무우(絶學無憂)'에 의거한 돈오의 입장을 말한다.
그리고 인은 {회남자(淮南子)}에 '여덕위인(與德爲)'에 의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보장론}에는 불도 수행에 '진(眞), 인(隣). 문(聞)'의 세 종류를 세우고,
불도수행을 배우고 익히며 아직 완전히 자신의 몸에 베이지 않았기 때문에 문을 습학이라고 설하고 있는데 점착적인 수행(漸修)을 말한다.
절학은 {증도가}에서 '일체의 작위성이 끊어지고 불도수행에 배움의 대상이 없어진 한가한 도인(絶爲無學閑道人)'이라고 읊고 있는 것처럼,
불법도 모두 배웠고 습학과 작위도 초월한 무애자재한 경지를 체득한 돈오의 입장이다.
{노자}의 절학(絶學) 무위(無爲)를 선수행의 경지에서 말한 것이다.
불교의 수행을 계(戒), 정(定), 혜(慧) 삼학으로 종합하고 있는 것처럼,
삼학의 수행을 대상으로 수행하지 않고 완전히 끝낸 깨달음을 체득한 아라한을 무학(無學)의 성자라고 한다.
대승보살도의 수행에서 십신(十信),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廻向), 십지(十地), 등각(等覺), 묘각(妙覺)의 52위를 설정하고 있는데,
십지보살은 습학의 경지(聞), 51위 등각은 절학(絶學), 최상의 묘각은 일체를 초월한 참된 깨달음(眞)을 체득한 입장으로 구분하고 있다.
등각은 최상의 묘각과 같은 경지지만 엄격히 묘각과 구분하고 있다.
등(等)은 같다는 의미인데, 절학의 인과 같은 표현이다.
화산화상은 선은 불도를 배우고 익히는 습학(聞)과 부처의 깨달음의 경지와 비슷한 절학()까지 완전히 초월한 참(眞)된 깨달음을 체득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때 어떤 스님이 '무엇이 습학과 절학을 초월한 참된 깨달음(眞過)의 경지입니까?' 라고 질문하자,
화산화상은 '나는 북을 잘 친다(解打鼓)' 라고 대답했다.
북을 잘 치는 것이 어째서 습학과 절학의 경지를 초월한 참된 깨달음의 경지인가?
선원에서 식사시간, 노동시간 등 시간을 알리는 신호로 북을 친다.
원오는 화산의 대답을 '쇠막대(鐵)'라고 착어하고 있다.
이빨도 들어가지 않는 물건으로 일체의 사량분별을 초월하도록 한 말이다.
스님은 또 '무엇이 불법의 근본 진리(眞諦)입니까?'라고 질문하자,
화산화상은 역시 '나는 북을 잘 친다'라고 대답했다.
또 '마음이 부처(卽心是佛)라는 것은 묻지 않겠습니다.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非心非佛)는 것은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하자,
화산화상은 역시 '나는 북을 잘 친다.'라고 대답했다.
습학과 절학의 경지를 초월한 참된 깨달음(眞過)이나, 불법의 근본 진리(眞諦)나, 마조의 설법에서 주장한 마음과 부처의 문제를 제시하여 질문하고 있지만,
화산화상의 입장은 한결같이 '나는 북을 잘 친다(解打鼓)'는 한마디로 대답한다.
설사 이러한 문제를 여기서 아무리 논의해 본들 습학과 절학의 경지에 정체되고 있는 한계를 벗어날 수가 없고, 참된 깨달음이나 불법의 진실은 체득 할 수가 없다.
스님은 또 '깨달음의 경지까지 초월한 사람(向上人)이 오면 어떻게 지도하시겠습니까?'라고 질문하였다.
이 스님은 세 번째 질문까지 모두 논의가 되지 않는 대답을 하는 화산화상에게,
'나와 같이 일체의 습학과 절학의 경지는 물론, 부처나 조사의 경지까지 모두 초월한 향상인을 어떻게 지도 하겠습니까'라고 최후의 질문을 던지고 있다.
화산화상은 역시 '나는 북을 잘 친다.'라고, 역시 반문 할 수가 없는 한마디로 대답했다.
원오는 '화산화상이 북을 잘 친다고 한 말의 의미를 아는가?'라고 문제를 제시하고,
스스로 '아침에 서천에 도달하고, 저녁에 동토에 돌아온다'고 착어하고 있다.
즉 스님의 질문에 네 번 모두 똑같이 대답한 화산화상은 인도와 중국을 아침저녁에 왕복하며 흔적도 남기지 않고 무애자재한 지혜작용을 자신이 북을 치는 지금의 일에 몰입한 것을 찬탄하고 있다.
설두스님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한 사람은 연자방아 돌을 끌고,
한 사람은 흙을 운반한다’
는 말은 귀종선사가 노동시간에 유나에게 연자방아의 돌은 마음대로 끌지만,
중심의 나무는 흔들리지 않도록 하라는 법문과, 목평선도(木平善道)는 처음 찾아오는 스님에게 삼태기에 세 번 흙을 운반 하도록 한 고사인데,
화산의 북을 치는 일처럼 학인을 지도하는 똑같은 수단을 소개하고 있다.
'큰 지혜작용(大機)을 드러내려면 천 균(鈞)짜리 활이어야 한다.'
귀종과 목평, 화산화상처럼, 상근기인 향상인을 지도하기 위해서는 일체의 차별 견해를 초월하고,
정법을 설하기 위해서는 천근의 활로 화살을 날리는 큰 지혜의 힘을 발휘해야 한다고 읊고 있다.
'일찌기 상골산(설봉산) 노스님(설봉)이 공을 굴렸다지만,
화산화상이 북을 칠 줄 안다는 것만 같겠는가'
설봉화상은 화산의 스승인데, 그도 언제나 나무로 만든 공을 세 개 가지고 굴리며 학인들을 점검했다.
귀종, 목평, 설봉화상의 지혜작용이 화산의 '북을 치는 지혜작용'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찬탄하고 있다.
'그대에게 알리노니, 제멋대로 해석하지 말라'고 학인들에게 화산의 '북을 치는 일'을 제멋대로 분별하지 말라고 주의하고 있다.
'단 것은 달고, 쓴 것은 쓰다'는,
습학(習學)과 절학(絶學)을 초월한 참된 깨달음은 북을 치는 것처럼,
자기와 북이라는 차별대상도 없이 무심의 경지에서 자기 일을 하는 도인이라고 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