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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당집 제14권[1]
[강서 마조 화상] 江西 馬祖
회양懷讓 선사의 법을 이었고, 강서에서 살았다. 선사의 휘는 도일道一이며, 한주漢州의 시방현十方縣 사람으로서 속성은 마馬씨이다. 나한사羅漢寺에서 출가하여 회양에 의해 마음의 눈을 뜬 뒤로는 남창南昌에서 교화를 폈는데, 매번 대중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대들은 지금 각자 자신의 마음이 곧 부처임을 믿어라. 이 마음이 곧 부처의 마음이다. 그러므로 달마達摩 대사께서 남천축국南天竺國에서 오셔서 최상승最上乘의 일심법一心法을 전하시어 그대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셨다. 또 그대들이 뒤바뀌어 이 일심의 법을 제각기 지니고 있음을 믿지 않을까 봐 여러 차례 『능가경』의 문장을 인용하여 중생들의 마음 바탕을 인증해 보이셨다.
그러므로 『능가경』에서 말하기를,
‘부처님께서는 마음을 설명하시는 것으로 조종을 삼으셨고, 문 없음으로써 법문을 삼으셨다’ 하였다.”
선사가 또 말했다.
“무릇 법을 구하는 이는 구하는 바 없이 구해야 하나니, 마음 밖에 따로 부처가 없고, 부처 밖에 따로 마음이 없다. 선善을 취하지도 말고, 악惡을 버리지도 말아야 하며, 더럽고 깨끗한 양쪽 모두에 의지하지 않고 죄의 성품이 공함을 통달하면 생각마다 그 죄성이 있을 수 없나니, 제 성품이 없기 때문이다. 삼계는 오직 마음뿐이요, 삼라만상森羅萬像은 한 법이 찍힌 것으로 무릇 보이는 물질은 모두가 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는 마음 스스로 마음이라 하지 못하고, 형상에 의해서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대들은 언제라도 현상 그대로가 진리임을 말하되, 도무지 걸림이 없어야 한다. 보리의 도과道果도 그러하여서 마음에서 난 것을 형상이라 하는데, 형상이 공空임을 알기 때문에 생生이 곧 불생不生인 것이다. 만일 이 뜻을 체득하면 그저 때에 따라 옷을 입고 밥을 먹고, 성인의 태胎를 기르면서 인연에 따라 시간을 보낼 수 있으리니, 다시 무슨 일이 더 있으랴? 그대들은 나의 가르침을 받고 게송을 들어라.”
마음 바탕을 때에 따라 말하나니
보리도 또한 그러할 뿐이다.
현실과 이치에 모두 걸림 없으면
생生이 곧 불생不生이다.
홍주洪州 대안사大安寺의 주지가 경과 논을 강론하는 좌주였는데, 오직 마조馬祖만을 비방하였다. 어느 날 밤 3경更에 귀신 사자가 와서 문을 두드리니,
주지가 물었다.
“누구인가?”
사자가 대답했다.
“귀신 세계의 사자인데, 주지 스님을 데리러 왔소.”
주지가 사자에게 말했다.
“내가 이제 67세인데 40년 동안 경과 논을 강하여 대중들로 하여금 지니게 하였으나 오직 말다툼만을 일삼았고 수행은 미처 하지 못했으니, 하룻밤 하루 낮만 말미를 주어 수행하게 해주시오.”
사자가 대답했다.
“40년 동안 경론을 강의하기를 탐하면서도 수행을 못했다면 이제 다시 수행을 해서 무엇에 쓰겠는가?
목마른 뒤에 우물을 파는 격이니, 무슨 소용이 있으랴?
주지가 아까 말하기를,
‘경론 강하기만을 탐하여 대중들로 하여금 지니게 했다’ 하는데, 옳지 못하다.
무슨 까닭인가?
경전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기를,
‘스스로를 제도한 뒤에 남을 제도하고,
스스로가 해탈한 뒤에 남을 해탈하게 하고,
스스로를 조복한 뒤에 남을 조복시키고,
스스로를 고요하게 한 뒤에 남을 고요하게 하고,
스스로가 편안한 뒤에 남을 편안하게 하고,
스스로가 때[垢]를 여읜 뒤에 남의 때를 여의게 하고,
스스로가 깨끗한 뒤에남을 깨끗하게 하고,
스스로가 열반에 든 뒤에 남을 열반에 들게 하고,
스스로가 즐거운 뒤에 남을 즐겁게 하라.’ 하였는데,
그대는 자신조차 편안하고 고요하게 하지 못했는데, 어찌 남으로 하여금 도업道業을 이루게 할 수 있으랴?
그대는 또 듣지 못했는가?
금강장金剛藏보살이 해탈월보살에게 말하기를,
‘내가 바른 행을 닦은 뒤에야 남으로 하여금 바른 행을 닦게 하나니,
무슨 까닭인가?
만일 스스로가 바른 행을 닦지 못하고서 다른 이로 하여금 수행하게 함은 옳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였는데,
그대는 생사의 더러운 마음으로 입을 놀려 따지기만 하여 불교를 잘못 전하여 어리석은 중생을 속였다. 이 까닭에 저 세계의 왕이 그대에게 화가 나서 나로 하여금 그대를 잡아서 곧 저 가운데 도수刀樹 지옥에 넣어 그대의 혀를 끊으라 했으니, 끝내 면할 도리가 없을 것이다.
그대는 또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보지 못했는가?
‘말로써 설한 법을 작은 지혜들은 망령되게 분별하나니, 그러므로 장애를 일으켜서 자기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 자신의 마음조차 알 수 없는데, 어찌 바른 도를 알리오. 그들의 뒤바뀐 지혜 때문에 온갖 죄악을 늘린다’ 하였다.
그런데 그대는 40년 동안 구업口業을 지었으니, 지옥에 들지 않고 어찌하리오. 또 옛 경전에도 분명한 기록이 있는데,
‘말로써 모든 법을 말하여도 실상實相을 나타내지 못한다’ 하였다.
그대는 망상妄想의 마음을 가지고 입을 놀려 헛소리를 지껄였으니, 그러므로 반드시 죄를 받아야 한다. 그저 자신을 탓할지언정 남을 원망하지는 말라.
이제 서둘러 가자. 만일 늦으면 저 왕께서 나를 꾸짖을 것이다.”
이에 둘째 사자가 말했다.
“저 왕께서 벌써 이런 사실을 아실 터이니, 그로 하여금 수행하게 해준들 무슨 방해가 있겠는가?”
그러자 첫째 사자가 말했다.
“만일 그렇다면 하루쯤 놓아주어서 수행하도록 허락합시다. 우리들이 돌아가서 왕에게 아뢰어 허락해 주시면 내일 다시 오겠고, 만일 허락하지 않으시면 잠시 뒤에 다시 오겠소.”
사자들이 물러간 뒤에 주지가 이 일을 생각했다.
‘사자 귀신이 허락은 했으나 내가 하루 동안 어떻게 수행을 할 수 있겠는가?’
아무런 계책이 없어서 날이 밝기를 기다릴 겨를도 없이 개원사로 달려가서 문을 두드리니, 문지기가 말했다.
“누구시오?”
“태안사 주지인데 대사께 문안을 드리러 왔소.”
문지기가 문을 열어 주니, 주지는 곧 마조馬祖 화상에게로 가서 앞의 일을 자세히 진술하고, 오체투지五體投地한 뒤에 말했다.
“죽음이 닥쳐왔는데, 어찌하여야 되겠습니까? 바라옵건대 화상께서 저의 남은 목숨을 자비로써 구제해 주십시오.”
이에 선사가 그를 자기의 곁에 서 있게 하였다. 날이 저물자 사자 귀신이 태안사로 가서 주지를 찾았으나 찾지 못하고, 다시 개원사로 와서 주지를 찾았으나 찾지 못했다. 이때 선사와 주지는 사자를 보았으나 사자는 선사와 주지를 보지 못했다.
어떤 스님이 이 일을 들어 용화龍華에게 물었다.
“주지는 그때 어디로 갔었기에 사자가 찾지 못했습니까?”
용화가 말했다.
“우두牛頭 화상이니라.”
스님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그 당시 국사께서는 매우 훌륭하였겠습니다.”
용화가 말했다.
“남전南泉 화상이니라.”
어느 날 공양 끝 무렵에한 스님이 와서 위의를 갖추고 법당으로 올라와 선사를 뵈니,
선사가 물었다.
“지난밤에는 어디에 있었는가?”
“산 밑에 있었습니다.”
“밥은 먹었는가?”
“아직 먹지 않았습니다.”
“부엌에 가서 밥을 찾아 먹어라.”
그 스님이 대답하고 부엌으로 가니, 그때 백장이 전좌典座의 소임을 맡았었는데, 선뜻 자기 몫의 밥 반을 그에게 나누어 주어 공양하게 하였다. 그 스님은 밥을 다 먹고 어디론가 가 버렸다. 그 뒤 백장이 법당으로 올라가니,
선사가 물었다.
“아까 밥을 먹지 못한 스님이 있었는데, 그대가 공양 좀 시킬 수 있겠는가?”
“예, 벌써 공양을 마쳤습니다.”
이에 선사가 말했다.
“그대는 뒷날 무량한 복을 받는 사람이 될 것이다.”
“화상께서는 어찌하여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그는 벽지불辟支佛의 지위에 이른 스님이기 때문에 그리 말했노라.”
“스님께서는 범인凡人으로서 어찌하여 벽지불의 절을 받으셨습니까?”
이에 선사가 대답했다.
“신통변화로는 그러하지만 만약 불법을 한 구절을 이야기하라면 노승만 못하느니라.”
선사가 어느 날 승상에 올라서 앉자마자 침을 뱉으니,
시자가 물었다.
“화상께서는 조금 전에 무슨 연유로 침을 뱉으셨습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노승이 여기에 앉으니, 산하대지山河大地와 삼라만상森羅萬像이 모두 여기에 있더구나. 그래서 그것이 싫어서 침을 뱉었느니라.”
“이는 좋은 일일 터인데 화상께서는 어찌하여 싫어하십니까?”
“그대 편에서는 좋겠지만 나로서는 싫으니라.”
“이는 어떤 사람의 경지입니까?”
“이는 보살의 경지니라.”
나중에 고산鼓山이 이 인연을 들어 말했다.
“옛사람은 그러했지만 여러분들은 보살의 경지도 아직 얻지 못했으면서 저 보살들을 싫어한다. 비록 싫은 것이라 해도 먼저 보살의 지위를 증득한 뒤에 싫어한 것이라야 싫어함이 된다. 노승은 보살의 지위를 알지도 못했으니, 어떻게 그러한 일을 싫어하랴?”
서천西川에 황삼랑黃三郞이라는 이가 있었는데, 두 아들을 마조馬祖에게 귀의하게 하여 출가시켰다. 한 해 남짓 지나서 그 아들들이 집으로 돌아왔는데, 아버지가 두 스님을 보자마자 살아 있는 부처님을 보는 듯하여 절을 하면서 말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나를 낳은 이는 부모요, 나를 이루어 준 이는 벗이다’ 했는데, 두 스님은 나의 벗으로서 이 늙은이를 이루어 주시오.”
두 스님이 말했다.
“아버지께서 비록 나이가 많으시나 그러한 마음이 있으시다면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노인은 몹시 기뻐하였는데, 이로부터 이 거사는 두 스님을 따라 마조에게 갔다. 그 스님들이 그 동안의 일을 자세히 이야기하니, 대사는 곧 법당으로 올라갔다. 황삼랑도 법당 앞으로 나아가니, 대사께서 꾸짖으면서 말했다.
“쯧, 서천의 황삼랑이 아닌가?”
“예, 그렇습니다.”
“서천에서 여기까지 왔는데, 황삼랑은 서천에 있는가, 홍주洪州에 있는가?”
“가정에는 두 가장이 없고, 나라에는 두 왕이 없습니다.”
“그대의 나이는 얼마인고?”
“85세입니다.”
“비록 그렇다 치더라도 나이는 왜 따지는가?”
“만일 화상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일생을 헛되이 보낼 뻔하였습니다. 화상을 뵌 뒤에는 칼로 허공을 긋는 것 같습니다.”
“만일 진실로 그러하다면 어디를 가나 진실에 맡겨라.”
황삼랑이 어느 날 대안사大安寺에 이르러 마루 앞에서 통곡을 하니,
양亮 좌주가 물었다.
“무슨 일로 통곡하십니까?”
황삼랑이 대답했다.
“좌주를 위해 웁니다.”
“나를 위해 울다니, 무슨 뜻입니까?”
“황삼랑이 마조馬祖께 의지해 출가해서 가르침을 받자마자 문득 깨달았다는 말을 들으셨을 터인데, 여러분 좌주들은 공연한 이야기나 지껄여서 무엇을 하시렵니까?”
좌주가 이 말에 발심하여 곧 개원사開元寺로 가니, 문지기가 대사에게 말했다.
“대안사의 양 좌주가 와서 대사를 뵙고자 하고, 또 불법을 묻고자 합니다.”
이에 대사가 문득 법상에 오르니, 좌주가 와서 대사를 뵈었다.
대사가 좌주에게 물었다.
“듣건대, 좌주는 60본本 경론을 강講했다는데, 사실인가?”
좌주가 대답했다.
“그러하옵니다.”
“어떻게 강하는가?”
“마음으로 강합니다.”
“아직은 경론을 강할 줄 모르는군.”
“어째서 그렇습니까?”
“마음은 주인공이요, 뜻은 조연이라 했는데, 어찌 경론을 강할 줄 알겠는가?”
“마음이 강할 수 없다면, 허공은 강할 수 있습니까?”
“허공은 강할 수 있느니라.”
좌주가 뜻에 맞지 않아 당장 나와서 섬돌을 내려서려다가 크게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절을 하고 사례하니, 대사가 말했다.
“이 아둔한 중아, 절은 해서 무엇 하려는가?”
양 좌주가 일어나니 등에 땀이 줄줄 흘렀다. 밤낮으로 엿새 동안 대사의 곁을 떠나지 않고 모시다가 후에 좌주가 선사에게 말했다.
“제가 화상의 곁을 떠나 스스로의 수행 길을 살피려 하오니, 바라옵건대 화상께서 오래오래 세상에 계시어 많은 중생들을 제도해 주십시오. 안녕히 계십시오.”
좌주가 본사로 돌아와서 대중들에게 고했다.
“내 일생 동안의 공부를 앞지를 이가 아무도 없다고 여겼더니, 오늘 마조 대사께 꾸지람을 맞고서야 망정妄情이 몽땅 사라졌다.”
그리고는 학도들을 모두 물리치고 한 번 서산으로 들어간 뒤에는 다시는 소식이 없었다. 양 좌주가 이런 시구를 남겼다.
30년 동안 아귀 노릇을 하다가
오늘에야 사람의 몸을 회복했네.
푸른 산에는 원래 외로운 구름의 벗이 있는데
동자가 다른 이를 따라 다른 사람을 섬겼네.
장남漳南이 이 일을 들어서 물었다.
“허공이 경을 강하면 어떤 사람들이 듣는가?”
스님이 대답했다.
“아까 잠시 남을 따라 기뻐했었습니다.”
장남이 말했다.
“무슨 뜻인가?”
“만일 다른 사람이라면 바로 거두시라 했을 것입니다.”
이에 장남이 말했다.
“그대는 역시 불을 잡을 뜻이 있구나.”
선사가 상당하여 양구하고 있으니, 백장이 면전에 있던 자리를 치워 버렸다. 그러자 곧 자리에서 내려왔다.
어떤 이가 물었다.
“어떤 것이 불법의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바로 그대의 목숨을 놓아 버릴 곳이니라.”
“4구句와 백비百非를 떠나서 서쪽으로부터 오신 뜻을 바로 보여 주십시오. 번거로이 여러 말씀을 하실 필요 없습니다.”
선사가 대답했다.
“내가 오늘은 아무 생각도 없어서그대에게 말해 줄 수 없으니, 서당西堂에게 가서 물어라.”
그 스님이 서당에게 가서 앞의 일을 자세히 말하니, 서당이 말했다.
“그대는 어찌하여 화상께 묻지 않는가?”
“화상께서 저더러 상좌께 물으라고 하십니다.”
이에 서당이 손으로 머리를 짚으면서 말했다.
“내가 오늘 몹시 머리가 아파서 그대에게 말해 줄 수 없으니, 해(海:백장) 사형께 가서 물어라.”
그 스님이 백장百丈에게 가서 앞의 일을 자세히 이야기하고 물으니, 백장이 말했다.
“나는 그 경지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
그 스님이 다시 와서 선사에게 말하니, 선사가 말했다.
“장(藏:서당)의 머리는 희고, 해(海:백장)의 머리는 검도다.”
선사가 인편에 선경산先徑山 도흠道欽에게 글을 보냈는데, 글 속에는 다만 원상圓相만이 그려져 있었다. 경산이 이를 보자마자 붓을 들어 원상 안에다 한 획을 보탰다.
어떤 사람이 이 일을 충忠 국사에게 전하니, 국사가 말했다.
“흠欽 대사가 또 마馬 대사에게 속았구나.”
어떤 사람이 선사의 앞에서 네 획을 그었는데, 위의 한 획은 길고 아래의 세 획은 짧았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가 길다고 해서도 안 되고 셋이 짧다고 해서도 안 됩니다. 이 네 구절을 떠나 스님께서 말씀해 주십시오.”
이에 선사가 한 획을 긋고 말했다.
“길다고도 말할 수 없고, 짧다고도 말할 수 없으니, 그대에게 대답해 주었노라.”
충 국사가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다르게 대답했다.
“어째서 나에게 묻지 않았던가?”
어떤 좌주가 선사에게 물었다.
“선종에서는 어떤 법을 전하고 있습니까?”
선사가 도리어 좌주에게 물었다.
“좌주는 어떤 법을 전하고 있는가?”
“40본 경론을 강의할 수 있습니다.”
“대단한 사자후獅子吼가 아닌가?”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선사가 “쉬쉬” 하고 소리를 내니, 좌주가 말했다.
“그것도 법입니다.”
“그게 무슨 법인가?”
“사자가 굴을 나서는 법입니다.”
그러자 선사가 한동안 침묵했다. 좌주가 말했다.
“이 역시도 법입니다.”
“무슨 법인가?”
“사자가 굴에 있는 법입니다.”
그러자 선사가 물었다.
“들지도 않고 나지도 않는 것은 무슨 법인가?”
좌주가 대답을 못하고 마침내 하직하고 문밖을 나서니, 선사가 불렀다.
“좌주여.”
“예.”
“이것이 무엇인가?”
좌주가 대답이 없으니, 선사가 말했다.
“이 아둔한 중아.”
후백장後百丈이 다음과 같이 대신 말했다.
“보았는가?”
선사가 어떤 스님에게 물었다.
“어디서 오는가?”
스님이 대답했다.
“회남淮南에서 왔습니다.”
선사가 다시 물었다.
“동호東湖의 물이 찼던가?”
“아직입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비가 왔는데도 아직 차지 않았구나.”
이에 도오道吾가 말했다.
“찼습니다.”
운암雲巖이 말했다.
“담담湛湛하였습니다.”
동산洞山이 말했다.
“어느 겁엔들 줄어든 적이 있었습니까?”
선사가 다음날 아침 입멸하려는데,
그날 저녁에 원주가 물었다.
“화상께서 4대大가 평안하지 못하셨는데, 요즘은 어떠하십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일면불日面佛, 월면불月面佛이니라.”
분주汾州 화상이 좌주로 있을 때 42본 경론을 강하고
선사에게 와서 물었다.
“3승 12분교는 제가 대략 그 뜻을 압니다만 종문宗門의 뜻은 어떠하옵니까?”
선사가 좌우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좌우에 사람이 많으니 일단 가거라.”
분주汾州가 문을 나오는데 발을 문턱에 걸치자마자,
선사가 “좌주야” 하고 불렀다.
이에 분주가 돌아보면서,
“예” 하고 대답했다.
선사가 말했다.
“이것이 무엇인가?”
분주汾州가 당장에 깨닫고 절을 하고 일어나면서 말했다.
“제가 42본 경론을 강하면서 아무도 나를 이길 이가 없다고 여겼었는데, 오늘날 화상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일생을 헛되이 보낼 뻔하였습니다.”
선사가 백장百丈에게 물었다.
“그대는 어떤 법으로 사람을 가르치는가?”
백장이 불자를 세움으로써 대답하니,
선사가 다시 물었다.
“다만 그것뿐인가, 아니면 따로 있는가?”
백장이 불자를 던졌다.
어떤 스님이 이 일을 들어 석문石門에게 물었다.
“한마디의 말로써 마 대사의 두 뜻을 점칠 수 있는 길을 화상께서 말씀해 주십시오.”
석문이 불자를 들어 일으키면서 말했다.
“평소부터 어쩔 수 없었느니라.”
선사에게서 친히 법을 이어받은 제자 중 세상에 나와 교화를 편 이는 88인이고, 숨어서 지낸 이는 그 수효를 알 수 없다.
선사의 성품은 인자하고 모습은 준수하며, 발바닥에는 두 개의 바퀴무늬가 있고, 이마에는 주름이 세 가닥 잡혀 있다. 설법하며 세상에 머무르기 40여 년, 현현한 무리가 천여 명이다.
선사가 정원貞元 4년, 무진戊辰 2월 1일에 입적하니, 늑담氻潭 보봉산寶峰山에 탑이 있다. 칙명으로 대적大寂 선사 대장엄지탑大莊嚴之塔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배상裵相이 편액을 썼고, 좌승상左丞相인 호득흥護得興이 비문을 지었다.
정수淨修 선사가 송했다.
마조馬祖 도일道一 선사는
수행이 온전하여 금석金石과 같다.
근본을 깨달아 초연하고
가지를 찾아 애쓰셨다.
오랫동안 선정禪定하신 몸과 마음을
한꺼번에 내던져 버리고
남창南昌에서 크게 교화를 펴니
1천 척尺짜리 겨울 소나무 같구나.
[대주 화상] 大珠
마조의 법을 이었고, 월주越州에서 살았다. 선사의 휘는 혜해慧海이며, 건주建州 사람이다. 선사가 대중에게 말했다.
“그대들의 마음이 곧 부처이니, 부처를 가지고 부처를 찾지 말라. 그대들의 마음이 곧 법이니, 법을 가지고 법을 구하지 말라. 부처와 법이 화합한 것이 승가의 본체이니, 이를 일체삼보一體三寶라 부른다.
경에서 말하기를,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세 가지는 차별이 없다’ 하였으니,
몸과 입과 뜻의 업이 청정함을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신 것이라 하고, 3업業이 청정하지 못함을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것이라 한다.
마치 성났을 때에는 기쁨이 없고, 기쁠 때에는 성냄이 없는 것과도 같아서, 오직 한마음뿐이고 작용 또한 두 바탕이 없다. 근본 지혜가 으레 그러하듯 무루無漏의 법을 눈앞에 나타내나니, 마치 뱀이 용으로 변할 때 그 비늘을 바꾸지 않고, 중생이 마음을 돌려 부처가 될 때에 그 얼굴을 고치지 않는 것과 같다. 본성은 본래 청정해서 닦아 이루기를 기다리지 않나니, 증득함이 있고 구함이 있다면 바로 증상만憎上慢과 같다. 진공眞空은 막힘이 없고, 응용應用은 때가 없어서 시작도 마침도 없다. 영리한 근기가 먼저 무등등無等等의 지혜를 활용하면 그것이 아뇩보리阿耨菩提요, 성품에 형상이 없는 것이 바로 미묘한 색신色身이다. 형상 없음이 곧 실상實相이요, 성품과 본체가 본래 공한 것이 곧 끝없는 법신法身이요, 만행萬行으로 장엄하는 것이 곧 공덕이니, 바로 만 가지 변화의 근본이어서 이르는 곳에 따라 이름을 세웠을 뿐이니라. 지혜와 작용이 무진한 것을 무진장無盡藏이라 하고,만 가지 법을 내는 것을 대법장大法藏이라 하며, 온갖 지혜를 갖추는 것을 지혜장智慧藏이라 하고, 만법이 동일한 진여인 것을 곧 여래장如來藏이라 한다.
경에서 말하기를,
‘여래如來라 함은 모든 법이 여여如如하다는 뜻이라서, 온갖 세간의 생멸법 가운데 어느 한 법도 이 여如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 없느니라.’ 하였느니라.”
왕王 장리長吏라는 이가 물었다.
“법사法師와 율사律師와 선사禪師 중 어느 쪽이 가장 수승합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법사法師는 사자좌에 걸터앉아 폭포 같은 웅변을 토하여 빽빽하게 모인 여러 사람들을 상대로 반야의 묘한 문을 열고 3륜輪이 공적空寂한 경지에 이르게 한다. 만일 용상龍象이 도사린 기틀이 아니면 어떻게 사람들을 감당하리오. 율사律師는 비니毘尼의 법장을 열어 명예와 이익을 쌍으로 행하고, 가지거나 범하거나 열거나 막아서 위의는 남의 모범이 된다. 세 번 거듭하는 갈마를 행하여 4과果의 첫 인연을 만드나니, 만일 전생에 덕을 쌓은 흰 눈썹[白眉]이 아니면 어찌 감히 섣불리 하리오. 선사는 추요樞要를 찾아내어 마음의 근원을 곧장 깨닫고, 들고나고 펴고 오므림이 자유로이 사물에 응한다. 현실과 이치를 모두 균등히 하여 한순간에 여래如來를 활짝 보고 생사의 깊은 근원을 뽑아 버려 현전의 삼매를 얻는다. 만일 선정에 안정하여 조용히 생각하는 이가 아니면 이 경지에 이르러서는 모두가 어리둥절하리라.”
어떤 좌주가 물었다.
“제가 선사의 뜻을 물으려는데 되겠습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맑은 못의 달그림자를 마음대로 만지작거려라.”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맑은 못에 얼굴을 대했을 때가 부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좌주가 어리둥절해서 다시 물었다.
“선사께서는 어떠한 법을 말해서 사람들을 제도합니까?”
“법이 있은 적이 없느니라.”
“선사는 한결같이 이러하군요.”
선사가 도리어 법사에게 물었다.
“어떤 법을 말하는가?”
“『금강경』을 20여 회 강하였습니다.”
“『금강경』은 누구의 말씀인가?”
“선사께서는 어찌 부처님의 말씀임을 모르십니까?”
선사가 말했다.
“만약 여래께서 설한 법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곧 여래를 비방하는 것이니, 그런 사람은 내가 말한 뜻을 알지 못한다. 만약 경전이 불설佛說이 아니라 한다면 그것은 곧 경전을 비방하는 것이니, 이것을 떠나 노승을 위해 법을 설하여라.”
법사가 대답이 없었다.
이에 선사가 다시 말했다.
“이 뜻을 잠시 제쳐두고 그 이치는 그만두고라도 경에서 말하기를,
‘만일 32상相으로 여래를 본다면 전륜성왕이 곧 여래일 것이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만일 색色으로 나를 보려고 한다면 곧 여래를 볼 수 없는 것이다’ 하였으니,
경은 그만두고 대덕에게 묻노니, 일러 보라. 어떤 것이 여래인가?”
좌주가 대답했다.
“그 경지에 이르러서는 도리어 어리둥절해집니다.”
선사가 꾸짖으면서 말했다.
“경을 20여 회나 강했다면서 전혀 여래를 알지 못하는구나.”
그리고는 또 말했다.
“여래라 함은 모든 법의 여여如如한 뜻이라 했는데, 대덕은 어째서 모르는가?”
법사가 다시 물었다.
“만일 그렇다면 모두가 여여하겠습니다.”
선사가 대답했다.
“틀렸다, 틀렸다.”
“경에 그렇게 말했는데, 어째서 옳지 않다 하십니까?”
“법사는 여여한가?”
“예, 여여합니다.”
“목석木石이 여여한가?”
“여여합니다.”
“그대와 목석이 모두 여여하다는 말인가?”
“두 가지 여여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대덕은 초목과 무엇이 다른가?”
법사가 대답이 없으니, 선사가 탄식하면서 말했다.
“이 사람은 문답하기 참 어려운 사람이로다.”
어느 때에 어떤 속관(俗官:세속 관리)이 물었다.
“법사는 어째서 선법禪法을 믿지 않습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이름과 형상은 알기 쉬우나 지극한 이치는 보기 어렵기 때문이니라.”
어떤 행자行者가 물었다.
“마음이 곧 부처라 하는데,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선사가 도리어 물었다.
“그대는 어떤 것이 부처가 아니라고 의심하는가? 지적해 보라.”
행자가 대답이 없으니, 선사가 말했다.
“통달하면 온 경계가 그것이요, 깨닫지 못하면 영원히 어긋나서 멀어지느니라.”
『화엄경』을 강하는 좌주 몇 사람이 물었다.
“선사들은 어찌하여 청청한 푸른 대[竹]가 법신이요, 울창한 개나리꽃이 반야임을 인정하지 않으십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법신은 형상이 없으나 푸른 대를 상대하여 형상을 이루고, 반야는 알음알이가 없으나 노란 개나리꽃을 상대하여 형상을 나타내나니,
그 노란 꽃이나 푸른 대를 떠나서 반야와 법신이 있을 수 있겠는가?
경에서 말하기를,
‘부처님의 참 법신은 허공과 같아서 사물에 응하여 형상을 나타내는 것이 마치 물속의 달과 같다’ 하였으니,
노란 꽃이 반야라면 반야는 곧 무정지물과 같을 것이요,
푸른 대가 법신이라면 푸른 대가 중생을 제도할 수 있는가?”
좌주 몇 사람이 모두 입을 다물고 말이 없었다.
[백장 정 화상] 百丈 政
마조의 법을 이었고, 강서에서 살았다. 그의 행적을 보지 못해서 생애는 알 수 없다.
선사가 스님에게 말했다.
“그대가 나를 위해 밭을 일구어 주면 내 그대에게 큰 이치를 말해 주리라.”
스님이 말했다.
“밭을 다 일구었으니, 스님께서 큰 이치를 말씀해 주십시오.”
이에 선사가 두 손을 활짝 펴 보였다.
어떤 노숙이 창틈으로 햇살이 스며드는 것을 보고 물었다.
“창이 해 곁으로 갔습니까, 해가 창 곁으로 왔습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장로의 방에 손님이 오셨으니 가 보시는 것이 좋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