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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아비담심론 제11권
11. 택품②[2], 보살ㆍ상보의 업ㆍ살바다ㆍ중음ㆍ유와 무ㆍ성문승에는 부처는 없다
[보살]
【문】어떤 경지에 한해서 보살이라고 말하게 되는가?
【답】
가령 여러 상호(相好)를 닦고
방편으로 그 업을 일으키고
여기서부터 더욱 증진하면
이를 보살이라 부른다.
만약 어떤 중생이 있어 한 끼의 밥을 보시로써 결정심을 일으키고 무외(無畏)를 발해
“나는 마땅히 부처가 되리라”라고 하며,
능히 상보(相報)15)를 일으키고 그 업을 증장시킨다면, 이런 사람에 한해서 보살이라 부른다.
능히 이로부터 비슷한 모습으로 상속되는 업을 짓는 까닭이니,
만약 이와 같지 않다면 다만 헛된 이름만 있을 뿐이다.
보살은 비록 처음에 불퇴심(不退心)을 일으키기는 해도 이는 보리(菩提)의 길을 결정지은 것이지 취(趣)가 결정된 것은 아니다.
취(趣)는 도(到)라 할 수 있으니, 취와 같은 이름인 것이다.
즉 상보의 업이 지어지고 나면 이것이 모든 조건이 결정된 것이다. 그런 까닭에 상보의 업에 한해서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그는 네 가지 인연에서 벗어난 사람이기 때문이니.
이른바 악취(惡趣)에서 벗어나는 일과, 남자가 아닌 세계에서 벗어나는 일과, 천한 씨족(氏族)에서 벗어나는 일과, 불구(不具)의 근에서 벗어나는 일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한 가지 인연, 즉 태어나면서 얻는 성질의 숙명을 아는 인연을 얻게 되면 태어나면서 자신의 숙명을 알게 되기 때문에 법문을 들으면 곧 그것을 받아들여 간직하게 되며, 이에 부수된 일들도 믿고 받아들여 중생들의 허물에서 벗어나게 된다.
3아승기겁(阿僧祗劫)을 건너고 다시 다음 백 겁 가운데에서 상보의 업을 심으니, 다만 석가모니는 제외된다. 석가모니 보살은 구 겁(劫)을 제외한 나머지 구십일 겁 동안 정진하셨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두개의 삼아승기(二阿僧祗)는 겁아승기가 아니다. 이른바 겁아승기(劫阿僧祗)와 생아승기(生阿僧祗)와 선행아승기(善行阿僧祗)가 된다”고 하였다.
[상보(相報)의 업]
【문】상보(相報)의 업에는 어떠한 특성이 있는가?
【답】신업과 구업과 증상의업(增上意業)이 있다.
또한 이는 생각하는 지혜의 특성을 지니지 듣는 지혜의 특성을 지니지 않으니, 뒤떨어기 때문이다.
또한 닦는 지혜도 아니니, 욕계는 정해진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이는 염부제(閻浮提洲)에만 존재하는 종류[種]이지 다른 지방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또한 이는 남자에게만 해당되지 여자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또한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셨을 때만 존재하지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시지 아니하셨을 때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또 부처님을 만난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이지 부처님을 만나지 아니한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업을 지은 것에 연하는 것이지 다른 것에 연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하나의 사원(思願)은 서른두 가지의 상(相)을 심는 업으로, 그후의 갖가지 업으로 가득 채워진다”라고 하였다.
또 다른 사람은 말하기를
“하나에의 마음을 한 가지 행ㆍ한 가지 연으로 고정하여 수많은 사원이 눈앞에 나타난다.
그리하여 발바닥이 평평하여 편안하게 머물 수 있는 과보를 얻기를 염원하기도 하고 정수리에 육계(肉髻)가 생기게 되기를 원하기도 한다”라고 하였다.
그 하나하나의 상에는 백가지 복이 뒤따르게 되니, 그 복의 한량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한 사람의 전륜성왕(轉輪聖王)이 지닌 복을 하나의 복의 양이라 부른다”고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한 분의 제석천(帝釋天)의 복이다”고 하였고,
또 한 설에 의하면
“겁(劫)이 이루어졌을 때 모든 중생들의 업이 더욱 불어나 기세간(器世間)을 낳으니, 이것을 복량(福量)이라 부른다”고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부처님의 경지에 가까운 보살을 제외한 그밖의 모든 중생들의 복락자재(福樂自在)한 업 이것을 일복량(一福量)이라 부른다”고 하였다.
부처님과 무학(無學)의 법이 곧 보리(菩提)이니, 즉 진지(盡智)와 무생지(無生智)가 그것이다.
살타(薩埵)16)가 이 지혜를 구하는 까닭에 그것을 보리살타(菩提薩埵)17)라 부르며,
이 보리를 얻어 모든 법을 깨닫게 되는 까닭에 이름하여 부처[佛]라 부르는 것이다.
비록 상보(相報)의 업 뒤에 전륜성왕(轉輪聖王)을 얻는다 해도 그 성왕의 모습이란 나머지 업의 과보임을 알아야 한다.
[살바다(薩婆多]
【문】몇 종류의 살바다(薩婆多)가 있는가?
【답】
한 종류는 이분(異分)의 차별이고
혹은 상(相)의 이(異)라고 하며
혹은 분분(分分)의 이(異)라고 하고
다시 이(異)의 이(異)가 된다고 한다.
이것이 네 종류의 살바다이다.
‘한 종류는 이분(異分)의 차별이다’라고 했는데,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18) 곧, “모든 법이 세계를 좇아 전개될 때 분(分)을 달리하고 일을 달리하는 것은 아니다.
마치 우유가 변해서 낙(酪)이 되면 그 맛의 요익함을 버리게 되지만 그 색깔은 버리지 아니하는 것과 같다.
또한 금이나 은으로 만든 그릇이 깨져서 다른 그릇을 만들 경우 본래의 형태는 버리게 되지만 그 빛깔은 버리지 아니하는 것과 같다.
법이 미래에서 현재에 이르는 것도 또한 이와 같다.
그러니 마땅히 알아야 하니, 이것이 바뀌고 변하는 살바다(薩婆多)인 것이다.”
또한 ‘상(相)의 이(異)라고 한다’고 한 것은 과거의 법은 과거의 모습과 합치하지만 미래와 현재의 모습에서 떠나지 아니한다.
마치 사람이 하나의 색에 집착하면 다른 색에는 집착하지 아니하는 것처럼,
그 역시 이와 같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이 말에는 허물이 있다.
만약 과거의 모든 법이 미래와 현재의 법의 모습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라면 마침내는 어디에서 이루어지겠는가?
또한 합치한다는 내용이라면 세계가 어지러워진다. 가령 사람이 한 색에 집착하여 한 색에 애착을 느끼고 그것을 행하기도 하고 성취하기도 하면서 다른 나머지에 대해서는 성취하면서도 행하지 아니하게 될 것이다. 그런 까닭에 그것을 세계가 어지러워진다고 말한 것이며, 비유 역시 서로 어긋난다.
‘분분(分分)의 이(異)라고 한다’고 했는데,
“모든 법이 세간을 좇아 전개될 때 각기 분분(分分)이 달라지지 일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곧 어지럽지 않게 건립된 세계이다. 왜냐 하면, 업이 다르기 때문이다.
법이 아직 업을 짓지 않은 것을 미래라 하고 업을 짓는 것을 현재라 하고 이미 업을 짓고 난 뒤를 과거라 한다.
‘이(異)의 이(異)가 된다’고 했는데,
말하기를
“여러 법이 세계를 좇아 전개될 때 앞과 뒤가 서로 기다리는 것이지 일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며, 분(分)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마치 한 여인을 ‘여자’라고도 부르고 ‘어머니’라고도 부르는 것과 같다.
앞뒤가 서로 기다리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즉 여자를 보면 그가 어머니임을 알게 되고 어머니를 보면 여자인 것을 알게 된다”라고 한다.
하지만, 이 말은 가장 어지럽게 건립된 세계이다. 그는 과거세의 한 찰나에 삼세가 존재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는 앞에서 일어난 모습을 보는 것을 미래라 하고 뒤에 일어난 모습을 보는 것을 현재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문】여러 스승들이 설한 진리[諦]의 무간등(無間等)은 각각 다르다.
살바다(薩婆多)19)와 바차부(婆蹉部)20)에서는 차례로 진리의 무간등을 설명하였고 담무득(曇無得)21) 등은 하나의 무간등만을 설명하였다.
어느 것이 진실한 이론인가?
【답】그것은 지금 마땅히 5지(支)로서 여실히 설명할 필요가 있다.
5지(支)란 첫 번째는 종(宗)이며 두 번째는 인(因), 세 번째는 비유, 네 번째는 합(合), 다섯 번째는 결(結), 여섯 번째는 의(義)이다.
내용은 아래에 설하는 게송과 같다.
차례로 무간등이니
지(智)와 제(諦)는 모습이 다르기 때문이다.
병만 보고 옷은 보지 못하니
이 때문에 그 역시 그러하다.
[수행자는 먼저 고무간등이고 마침내 도제에 이르게 된다]
수행자는 먼저 고무간등(苦無間等)이고 마침내 도제(道諦)에 이르게 된다.
【문】왜 그러한가?
【답】지(智)와 제(諦)는 모습이 다르기 때문이다. 고제와 집제와 멸제와 도제의 지는 각기 다른 모습이다.
그 행(行相)이 다른 까닭이니,
만약 행이 고의 지혜라면 이 행은 다른 지혜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만약 그렇지 아니하다면 네 가지 지(智)를 세우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진리(諦) 역시 모습이 다르다. 핍박당하는 것이 고의 모습이고 생기(生起)는 집의 모습이며 적멸(寂滅)은 멸의 모습이며 출리(出離)는 도의 모습인 것이다. 다른 지(智)와 다른 상(相)의 진리이지 일무간등이 되는 것은 아니다.
비유하면 물병을 볼 때 옷은 보지 않는 것과 같으니, 병과 옷은 다른 모습이기 때문이다. 모습이 다르기 때문에 병을 보았을 때 옷은 보이지 않고 옷을 보았을 때 병은 보이지 않는다.
사제(四諦)의 관계도 역시 이와 같다. 즉 모습이 다른 진리에 대해서 고를 볼 때는 나머지를 보지 못한다. 그리고 이와 같이 일체를 설명할 수 있으니, 그런 까닭에 차제무간등(次第無間等)이 되는 것이다.
‘한 무간등을 설한다’라고 했는데 그것은 제(諦)에 있어서 하나의 무간등(無間等)을 설한다는 것이다. 왜냐 하면 성현(聖賢)을 믿는 까닭이다.
세존께서 설하신 바와 같다. 곧,
“비구는 고(苦)에 대해 의심이 없으며 집에 대해서도 역시 의심이 없고 멸ㆍ도에 대해서도 역시 이와 같다.”
마치 등(燈) 하나가 그릇을 뜨겁게 하고 심지를 불태우고 기름을 소진하고 어둠을 깨뜨리는 네 가지 일을 함께 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한 지혜로 고를 알게 되면 마침내 도를 닦기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하나의 무간등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 진혜와 진리의 모습이 다르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모든 지혜는 한 지혜의 모습으로 모든 법의 경계에서 무아행(無我行)을 짓는다.
마치 세존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다. 곧,
“일체법은 무아이다. 지혜 있는 자는 능히 보나니, 그 괴로움을 싫어할 때 이것이 곧 도(道)이며 청정함이다.”
진리의 모습도 역시 이와 같다.
병과 옷이 서로 다른 모습이라고 말한다면 그것도 또한 그렇지 않다. 왜냐 하면 자상(自相)에 대한 무간등은 비분(非分)이기 때문이다. 공통된 모습의 경계에 대한 무간등으로서 자상은 아니다. 즉 색 등의 5음은 허물어지는 모습으로허물어지는 모습은 곧 덧업는(無常) 모습이다공경계지(共境界智)의 일무간등이 된다.
만약 다르다면 스스로 허물이 낳는 것이다.
차제무간(次第無間)을 주장하는 자는 말하기를
“그대가 현성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곧 밀어이다. 이 말에는 나머지 뜻이 있으니, 세존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다. 곧,
‘만약 고제에 의심이 없으면 모든 진리[諦]에도 의심이 없어진다.’이는 의문을 품고 수행하는 사람을 위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만약 그에게 고제에 대하여 무간등이 생긴다면 그의 의심은 끝까지 행해지지 아니할 것이다. 이는 비수멸인 까닭이다. 그밖의 이설을 제거하기 위한 까닭에 세존께서는 급고독수다라(給孤獨修多羅)를 설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이다.
“장자(長者)여, 사성제(四聖諦)에서는 차례로 무간등하느니라.”
이와 같이 자세히 설명되는 것이다.
거기에서 설해진 등불에 관한 설법의 경우, 등불에는 많은 특성과 많은 업의 허물이 있다. 나는 등이 하는 일을 취하지 아니한다.
만약 구분할 경우 그때 등은 스스로 등이란 이름을 버리게 된다.
이는 앞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그 밝음은 색입(色入)에 속하며 그 힘은 능히 어둠을 깨뜨리고 그 열은 촉입(觸入)에 속하여 능히 다른 일을 짓는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결정된 뜻이 허물어진다. 그러나 지혜는 이와 같은 것이 아니다.
만약 지혜도 이와 같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곧 허물이 있다.
만약 같은 모습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면 이것도 그렇지 않다. 행이 다르기 때문이다.
무상행(無常行)의 지(智)는 다르다. 고(苦)ㆍ공(空)ㆍ무아(無我) 등의 행 역시 그 지혜는 각각 다르니, 이와 같은 비유가 가능하다.
만약 그렇지 아니하다면 해탈의 문은 없을 것이다. 허물어지지 아니하는 행 이것이 해탈의 문이다잡관(雜觀)을 괴(壞)라 표현하는데, 세 가지 해탈은 관이 다르기 때문에 불괴(不壞)이다.
가령 그대가 말하듯이 ‘일체법을 연하여 무아행(無我行)을 삼는다’고 함은 모든 법을 한꺼번에 모두 비추어 보기 때문에 이것은 부정사유(不定思惟)의 분야가 된다.
정사유(定思惟)의 행은 각기 별도의 진리를 연한다. 그런 까닭에 ‘그 뢰로움을 싫어할 때가 곧 도청정(道淸淨)이다’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단순히 싫어하는 행으로 멸제ㆍ도제를 연할 수는 없으니, 멸제와 도제는 즐겨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모든 연이란 모든 것에 통하는 것이 아니니,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무아(無我)의 행으로 이 무아행을 행할 수 없는 까닭이니, 독자성은 스스로 비추어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역시 두 가지의 결정적인 특성도 없다.
또한 상응을 관찰하지도 않나니, 함께 한 가지 행과 한 가지 연이기 때문이다.
또한 공유하는 것을 관찰하지도 않나니, 함께 한 과보이고 한 가지의 결정적인 행이기 때문이다.
또한 말하기를
“모든 행이 무상(無常)하다고 해도 역시 무상행은 멸무간등을 이루지 못하니, 멸이란 영원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마땅히 알아야 하니, 그 행은 멀리 진리를 향하는 까닭에 말하는 것이다”라고 한다.
말해진 바와 같이 이 중생들이 긴긴 밤을 몸ㆍ입ㆍ뜻으로 악행(惡行)을 성취함을 관해 이르기를,
“이 중생은 곧 지옥과 그밖의 악한 세계의 중생들로, 실은 이것은 인간이 아니라 지옥이다”라고 한다.
지옥을 향해서 가고 있기 때문에 이같이 말한 것이다.
행의 경우도 이와 같다.
다시 또한 이것이 공(空)에 대한 무간등이라면 무원(無願)이나 무상(無相)을 말한 것이 아니다.
그곳에서 일체법의 경계는 비분(非分)이기 때문에 허물이 있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그런 까닭에 일체법의 무아행(無我行)은 부정사유인 것이다.
정해진 사유는 유루연(有漏緣)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해탈의 문은 소멸된다.
만약 자상에 대한 무간등은 비분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왜냐 하면 비추어 보기[觀] 때문이니, 이 비추어 보는 것은 자상과 공상에 대한 것이다. 즉 핍박당하는 모습은 곧 고(苦)의 모습이며, 3제(諦)를 비추어 보기 때문에 이는 자상이다.
또 음(陰)을 비추어 보기 때문에 이는 공통된 모습이다. 이와 같이 해서 일체를 알아야 하니, 모두 마음의 눈으로 비추어 보기 때문에 자상과 공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왜냐 하면, 관찰은 허물어지지 않는 까닭이니,
이는 앞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중음(中陰)]
앞에서 중음(中陰)은 뒤에 곧 설명할 것이라 하였으니, 지금부터 그것을 설명하겠다.
【문】중음(中陰)은 있는 것인가? 아니면 없는 것인가?
【답】
알아야 하니, 중음은 있는 것이니
이는 세존의 말씀이다.
비유하면 마을 사이에 길이 있는 것과 같나니
그것은 곧 모든 것의 지나침[過]이다.
여기에서는 중음이 있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왜냐 하면 이것은 세존께서 말씀하신 일이기 때문이다.
세존의 말씀에 따르면
“사부(士夫)가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일곱 취에는 중반열반(中般涅槃)이 있다”고 하셨다.
만약 중음이 없다면 중반열반도 없을 것이다. 만약 중간 하늘이 있어 그로부터 반열반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하늘 세계로 가는 일에 대해서는 말씀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존께서는 수다라에서 사천왕(四天王)의 하늘에서 비상비비상에 이르기까지 설하시면서도 중간 하늘이 있다고는 말씀하시지 않았다.
다른 해석도 또한 허물이 있다.
즉 만약 살아서 반열반한다고 말한다면 부생천(復生天)이라는 표현이 있겠는가?
이와 같이 모든 것이 그러하니, 아나함(阿那含)의 경우도 역시 마땅히 이와 같이 허물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그것은 망상(妄想)으로 한 말이다.
만약 수명의 중간에 반열반한다고 말한다면 그것도 그렇지 않다.
울단월 및 후변(後邊)의 보살22)을 제외하고 많은 중생들은 타고난 수명을 다하지 못한 채 죽는데, 그렇다면 이것이 모두 중반열반이겠는가? 그런 까닭에 이러한 견해에는 허물이 있는 것이다.
【문】이 중음이란 어떤 것인가?
【답】비유하면 마을 사이에 길이 있는 것과 같다.
마치 한 마을에서 다른 한 마을에 이르듯이 이와 같이 사음(死陰)으로부터 생음(生陰)이 되니, 사음에서 생음으로 향해 가는 일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아습파라연경(阿濕波羅延經)23)에서 “가령 저곳에서 오는 것과 같다”고 설하듯이, 이와 같이 자세히 설명되는 것이다.
만약 중음이 없다면 가고 오는 일이 없게 된다. 그런 까닭에 마땅히 중음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가령 다음과 같이 말하기 한다.
“유여(有餘)의 설을 제거하기 위하여 수다라가 있는 까닭이니,
이른바 세존께서 수다라와 게를 설해 말씀하시기를
‘오무간(五無間)지옥에 떨어질 죄를 짓고 나서 차례로 무간지옥에 태어난다’라고 하셨다.
다시 또한 범지(梵志)를 위해 게송을 지어 말씀하시기를
‘늙고 병들어 표류하여 염라대왕 있는 곳에 이르니, 범지여, 머물 곳 없고 또한 살아갈 양식도 없느니라’고 하셨다.
그런 까닭에 중음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렇지 않다.
왜냐 하면, 지은 업으로 태어날 곳이 무간지옥인 까닭에 수다라(修多羅)와 게송으로 설법하신 것이다. 즉 무간지옥에 떨어질 업을 짓게 되면 반드시 먼저 무간지옥에 떨어지는 업보를 받고 그 다음에 나머지 다른 업보를 받게 된다. 또한 반드시 지옥의 세계 속에 태어나지 다른 세계에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대가 이해한 바에 따르자면, 세존께서는 수다라에서 말씀하시기를
“오무간지옥에 떨어질 업을 짓고 나면 다음 차례는 지옥 속에 태어난다”고 하셨다.
그렇다면 반드시 다섯 무간지옥에 태어나게 된다는 것인가?
아니면 둘, 셋, 네 곳의 지옥에 태어난다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죄로 다시 또 다른 지옥에 태어난다는 것인가?
이 경과 게송의 참뜻을 알아야 한다.
가령 그림자와 같으니, 이른바 달은 지극히 먼 곳에 있는데도 그 그림자는 물 속에 나타나는데, 이것은 저 달이 찾아와서 물 속에 이른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이 사음(死陰)과 생음(生陰)도 저 그림자와 같은 것이다.
중생이 태어나는데 무슨 중음의 작용이 필요하겠느냐고 한다면 그 역시 그렇지 않다.
왜냐 하면 달과 물은 함께 지나가는 것이고 함께 존재하는 것이지만 사음과 생음은 함께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그 주장에는 잘못이 있는 것이다.
안식(眼識)과 발바닥의 신식(身識)의 비유 역시 이와 같다.
만약 먼저 생음을 취하고 사음을 버리는 일이 마치 자벌레와 같다고 한다면, 이 역시 그렇지 않다.
왜냐 하면 태어날 곳이 다르지 않고 두 인식이 합쳐져서 지나가는 길목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중음은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설해지고 있듯이 네 종류의 살바다(薩婆多)가 있다.
[유(有)와 무(無)]
【문】모든 존재는 유(有)인가? 무(無)인가?
【답】
알아야 하니, 일체는 존재하나
일체에 모습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일체에는 일체가 없으니
다른 모습의 법이 없는 것이다.
이 유(有)라는 것은 살바다(薩婆多)24)에서 내세우는 학설이다. 여기서 일체(一切)라 하는 것은 십이입(十二入)을 말하는 것이다. 그 모든 입(入)에는 독자적인 모습이 있을 뿐 다른 모습이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모습이 지어지는 바가 다르기 때문이다.
또한 짓는 업도 다르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일체에는 일체가 없다’라고 한 것은 학법(學法) 가운데는 학법만 있고 무학법(無學法)은 없으며, 무학법 가운데는 무학법만 있고 학법은 없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비유하면 허공 속에는 아무 자취가 없는 것과 같은 이 같은 비유인 것이다.
【문】여기서는 유(有)를 설하는데 어찌하여 무(無)가 있는가?
【답】다른 모습의 법은 없는 것이다. 가령 눈의 모습은 이것이 눈의 입처로서 다른 입처의 모습은 없는 것과 같다. 모습이 다르기 때문이니, 그런 까닭에 일체법을 서로 뒤섞이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일체의 세계는 모두 존재하니
그 응하는 곳과 어긋나지 않는다.
이는 모니의 말씀으로
성문승에는 부처는 없다.
삼세(三世)에 살바다(薩婆多)25)가 있다는 것은 살바다(薩婆多)의 주장이다.
【문】왜 그러한가?
【답】현재의 세계는 과거와 미래를 비추어 보기 때문에 마련된 세계다. 만약 과거와 미래가 없다면 현재의 세계도 없다. 현재의 세계가 없다면 유위(有爲)의 법도 또한 없나니, 그런 까닭에 삼세가 존재한다는 말에 잘못이 있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만약 구원한 옛날이 과거이고 다가올 앞날이 미래이니 이것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현재의 세계만이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그렇지 않다. 왜냐 하면, 업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업도 있고 보도 있다”고 하셨는데,
이것은 업보란 더불어 현존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업이 현재에 있다면 그 보(報)는 미래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또 만약 과보가 현재에 있다면 그 업은 과거의 세계에서 이미 지어졌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가령 세속의 설자(說者) 역시 “지은 자는 얻을 수 없다고 말한다”고 하며,
가령 “세속에도 업이 있고 그 과보도 있다고 말한다”고 한다면 이 역시 그렇지 않다.
세존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지은 자는 얻을 수 없다”라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이 역시 세속의 설이 되겠는가?
신구(神口)로 말씀하신 바는 제일의공(第一義空)의 경전이거늘 그대는 망상으로 이것이 존재하는 까닭에 저것이 존재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비유일 따름이다.
만약 그대의 말처럼 영구한 옛날이 과거이며 앞으로 다가올 세계가 미래이다. 이는 존재[有]가 아니니, 오직 현재만이 존재한다고 한다면 다음과 같이말해서는 안된다. 곧,
“나 역시 능히 현재일 수 있는 것은 이미 가버린 세계에서는 미래에 해당하고 앞으로 다가올 세계에서는 과거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이는 지혜 있는 사람의 말씀이 아니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만약 신근(信根) 등 5근(根)26)이 없다면 나는 이를 범부의 무리라고 말한다.
만약 학인(學人)이 번뇌에 결박당했다면 신근 등의 5근(根)이 눈앞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도와 번뇌는 함께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과거도 있고 미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만약 이와 다르다고 한다면 아마도 성인은 범부가 되어야 할 것이다.
또 만약 득(得)을 좇아 태어난다고 말한다면 이 역시 그렇지 않다. 무법(無法)을 얻는 것은 비분(非分)이기 때문이다.27) 그 근거하는 곳이 유(有)의 몫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문승에는 부처는 없다]
‘성문승에는 부처는 없다’고 했는데, 성문승은 부처를 포함하지 않는다. 왜냐 하면 삼보(三寶)는 줄어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세존이 성문승에 속한다면 마땅히 이보(二寶)만 있어야지 삼보는 아닐 것이다. 별체(別體)가 없는 까닭이다.
귀의ㆍ불괴정(不壞淨)ㆍ염 등도 역시 이와 같다.
해석에 잘못이 있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그런 까닭에 성문승은 부처에 포함되지 않는 것이다.
세존께서 경전에서
“교담미(★曇彌)야, 승에게 베푸는 일은 곧 나에게 공양하는 일이니라”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으니,
이 말씀은 비구승ㆍ성승(聖僧)ㆍ복전승(福田僧)을 말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세존께서는 그 삼승(三僧)에 속하는 것이다. 번뇌를 허문 까닭이고 성스런 까닭이며 최고의 복전이 되는 까닭이다.
성문승은 아니니, 스스로 깨달은 자이기 때문이다.
설령 넓은 글로 해설한다 하더라도
군생(群生)들은 큰 공포에 싸일 것이니
가장 뛰어나고 매우 깊은 모습을
나는 지금 다만 간략하게 설명하겠다.
만약 광범위하게 설명한다면 중생들은 무서워하고 두려워할 것이다. 그런 까닭에 지금 광범위한 설명은 하지 않겠다.
그 문장ㆍ문구의 심원(深遠)한 아비담(阿毘曇), 곧 밝고 청정한 지혜로 이해한 모든 이론의 음성의 오묘한 뜻을 여기에서 간략하게 설명하겠다.
옛날 여러 큰스님들이
무량한 뜻을 베풀어 설법하셨으니
나는 지금 이해하는 바에 따라
분별하여 일부분을 설하겠다.
나는 지금 법승(法勝) 존자가 말한 가운데서 적은 지혜로써 사량(思量)하고 선집(選集)해서 문장ㆍ문구를 만들어 세워 모아그분이 남긴 법문을 펴고 진술하는 데 도움말이 되게 하였는데, 이는 교만심으로 명예와 칭송을 얻고자 한 것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그분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해설하였다.
만약 번뇌가 생긴다면 성인은 이것을 유루라고 설했다. 그러나 멸제(滅諦)ㆍ도제에서도 역시 번뇌가 생기지만 그렇다고 유루는 아니니, 번뇌를 늘어나게 하는 분야가 아니기 때문이다.
무루연에서는 번뇌가 줄어들어도 불어나지 아니함은 앞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그런 까닭에 나는 유루를 불어나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렇다고 무루연에서 하(下)ㆍ중(中)ㆍ상(上)의 번뇌가 불어나지 않느냐 하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그 의지처가 불어나기 때문이다.
결정코 이 논(論)에 있어서
문장ㆍ문구의 미묘한 뜻을 안다면
저 지혜의 무리 가운데에서
용맹하여 두려움이 없을 것이다.
이 논의 문장ㆍ문구의 의미에 대해서 능히 결정적으로 알고 훌륭히 분별해서 설명한다면, 그는 모든 지혜 있는 대중 가운데에서도 마음에 겁이 나고 두려워하는 것이 없을 것이다. 법의 모습을 잘 분별하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논을 증익한 것에는
그 마음에 탐냄이 없나니
지혜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쉽고 빠르게
적멸의 즐거움 얻게 하기 위해서다.
경의 본래 지극히 간략한 의설(義說)은 그 뜻이 깊고 넓어 받아 간직하기가 어렵다.
마치 허공을 논한 것과 같아서 요별(了別)하기가 어려움은 앞에서 이미 설명한 일이다.
그런 까닭에 이 논의 원본에 덧붙여 더욱 보탠 것이며, 그 내용은 경전의 의미에 따라 요지(了知)하기 쉽게 하였다. 내용을 알게 됨으로써 번뇌는 즉시 끊어지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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