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식론은 기본적으로 삼세실유론에 대한 비판을 바탕으로 논의하고 있다.
유식론을 삼세실유론과 비교해 보면, 실유론은 삼세가 모두 실유라고 주장하는 데 비하여, 유식론은 식이 실유이며 식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실유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아함경에서는 ‘무엇이 있다, 무엇이 없다’라는 주장은 삿된 소견이라고 한다. 이러한 아함경의 내용에 비추어 보면 유식론도 삿된 소견에 속할 수밖에 없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것에 대하여 살펴 보기로 한다.
1. 유식론 개관
<유식이십론>에서는 유식론을 다음과 같이 개관하고 있다.
“대승에서 3계(界)는 오직 식(識)뿐이라고 안립한다.
경전에서 3계는 오직 마음[心]이라고 말씀하기 때문이다.
심(心)ㆍ의(意)ㆍ식(識) 및 요별[了]은 명칭의 차이이다.
여기서 ‘마음[心]’의 의미는 심소(心所)도 포함한다.
‘오직[唯]’이란 외부대상만을 부정하며, 상응법[心所]은 부정하지 않는다. 내부의 식이 일어날 때에 외부대상으로 사현(似現)한다. 현기증이나 눈에 백태가 있는 사람이 머리털이나 파리 등을 보는 것과 같다. 여기에는 진정한 대상이 전혀 없다. 곧 이 취지에 대해서 어떤 사람들이 비판을 시설한다.”
유식론에서 논파하고자 하는 것은 설일체유부의 삼세 실유의 주장과 그 학파와 유사한 주장을 펴는 인도의 사상들이다. 아함경의 내용은 설일체유부 등에서 주장하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아비달마구사론>에서는 일체법을 색법(色法)ㆍ심법(心法)ㆍ심소법(心所法)ㆍ심불상응행법(心不相應行法)ㆍ무위법(無爲法)의 다섯 부류로 나누었다.
<유식이십론>을 참고하면 유식론에서 부정하는 것은 색법이 있다는 것이다.
2. 18계에서
먼저 아함경의 6내입어, 6외입처, 18계를 표로 보이면 다음과 같다. [잡아함경_238. 인연경]
18계 | 12입처 | |||
6내입처 | 6외입처 | 6식[인식] | ||
눈 | 빛깔 | 안식 [눈의 인식] | ||
귀 | 소리 | 이식 [귀의 인식] | ||
코 | 냄새 | 비식 [코의 인식] | ||
혀 | 맛 | 설식 [혀의 인식] | ||
몸 | 감촉 | 신식 [몸의 인식] | ||
마음[意] | 법 | 의식 [마음의 인식] |
유식론에서는 심(心)ㆍ의(意)ㆍ식(識)은 동의어이며, 명칭의 차이라고 한다. [이러한 견해는 설일체유부와 같다.]
그리고 6식에 더하여 제7식(말나식)과 제8식(아뢰야식)이 있다. 그리고 18계를 식과 식 아닌 것[색]으로 나누었다.
먼저 유식론의 식의 개념은 아함경과는 꽤 다르다는 것을 지작할 수 있다.
의(意)는 지각의 주체로서 눈 등과 같은 6내입처에 속하는 것이다. 식(識)은 6내입처와 6외입처를 인연으로 생긴 것이다. 곧 눈으로 빛깔 알고, 나아가 마음으로 법을 아는 것이다. [식의 발생과 개념에 대새서는 <잡아함경_238. 인연경(因緣經)>을 참고하시오.]
곧 아함경의 식은 눈 등의 몸으로 아는 것과 마음으로 아는 것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아함경의 식은 마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의(意)는 심(心)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으나, 유의해야 할 것이 있다. 심(心)은 인식의 주제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탐내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 자비로운 마음 등과 같이 마음의 작용을 가리키가도 하기 때문이다. [意는 manas의 중국어 번역이고, 心은 citte의 중국어 번역이다. 영어 번역에서는 mana와 citte 둘다 mind로 번역하였다.]
물론 탐냄이나 어리석음 등의 마음의 작용들은 지각의 주체인 마음에 영향을 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지각의 주체인 마음은 마음이 작용과는 다르기 때문에 구별하에 생각해야 할 것이다. 마음을 마음의 작용과 구별하는 것은 지각의 주체인 눈을 눈병이 난 것과 구별해야 하는 것과 같다.
유식론에서 색과 식을 구별하는 것도 아한경의 내용과는 차이가 있다.
<아비달마구사론>에서는 색법(色法)과 심법(心法)을 구별하였는데, 색법은 눈과 빛깔,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감촉이다. [<장아함경_10. 십상경>에서는 10색입이라 하였다.] 이러한 구별은 상캬(sāṃkhya) 학파[수론(數論)]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곧 안(眼)ㆍ이(耳)ㆍ비(鼻)ㆍ설(舌)ㆍ피(皮)의 오지근(五知根)과 심근(心根)으로 구별하였다.
이러한 구별을 6입처에 한정하여 살핀다면, 유식혼에서는 사람을 몸(눈ㆍ귀ㆍ코ㆍ혀ㆍ몸)과 마음[의]으로 구별하여 설한 것이다. [눈ㆍ귀ㆍ코ㆍ혀ㆍ몸도 다른 이의 지각으로 보면 빛깔ㆍ소리ㆍ냄새ㆍ맛ㆍ감촉으로 지각할 수 있으니, 12처의 10색을 모두 몸이라 할 수 있겠다.]
이렇게 보면 유식론은 마음을 몸(과 바깥의 사물)과 구별하고, 오직 마음 뿐이며 몸과 바깥의 것은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런데 아함경에서는 6내입처를 말함으로써 마음을 몸과 동등한 지위에 놓고 있다.
3. 12연기법에서
12연기법에서 식은 세 번째 요소이고 마음[의]은 6입처의 하나이므로 다섯 번째 요소이다. 색은 행으로 말미암아 생기고 마음은 명색으로 말미암아 생긴 것이다. 그리고 식은 명색의조건이 되고, 마음은 접촉의 조건이 된다. 따라서 12연기법에 따르면 식과 마음이 동일한 것일 수 없다.
그런데 만일 식과 마음을 동의어라고 한다면, 12연기법의 순서는 성립하지 않게 된다. 이것은 유식론과 12연기법의 순서가 상충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중아함경_097. 대인경(大因經)>에서 보면 식과 핵은 함께 있으며, 서로서로 의존하고 있는 요소들이다.
“아난아,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식의 원인, 식의 성취, 식의 근본, 식의 인연은 곧 이 명색이다.
무슨 까닭인가?
명색을 인연하여 곧 식이 있기 때문이다.
아난아, 이것을 명색을 인연하여 식이 있고 식을 인연하여 또한 명색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말을 보태고 거듭 말을 보태어 설명하고 전하고 전하여 설명하며 주장할 만한 것이 있게 되니,
그것은 곧 ‘식과 명색은 함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식이 없으면 명색이 있을 수 없고, 명색이 없으면 식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곧 식과 명색은 서로서로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유식론은 이러한 12연기법의 식과 명색의 관계와 서로 어긋난다. 유식론에서는 삭은 식의 전변으로 생긴 것이라고 보는데, 12연기법에서는 색이 없으면 식도 없다는 것이라고 하니 색 없는 식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유식론에서는 12연기법의 요소들을 과거<무명, 색>와 미래<태어남, 죽음>과 그 사이에 있는 현재로 나누었다. 식은 햔재에서 가장 먼저이며, <식, 명색, 6입, 접촉, 느낌, 애욕, 취함, 존재>의 순서로 되어 있다. 그러면 현재에서 볼 때, 현재의 모든 것은 식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유식론은 이러한 삼새와 연관지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같기도 하다. 그러나 12연기법의 요소들을 그렇게 구분하는 기준에 관한 근거가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4. 심소법과 관현하여
아함경에서는 인식과 접촉, 느낌ㆍ생각ㆍ의도ㆍ애욕, 기억ㆍ번뇌 등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잡아함경 213, 238, 323-332 (합침), 중아함경_181. 다계경]
6인식 | 6접촉 | 6느낌ㆍ6생각ㆍ6의도ㆍ 6애욕 | 6기억ㆍ6번뇌 |
내입처와 외입처의 인연으로 생기는 것 | 내입처와 외입처와 인식이 화합한 것 | 6접촉으로 생기는 | 6외입처에 대한 |
여기서 느낌ㆍ생각ㆍ의도ㆍ애욕, 기억ㆍ번뇌 등은 유식론에서는 마음과 상응하는 것[심소]에 해당한다. [그리고 느낌ㆍ생각ㆍ의도는 5음에 속하는 것이다.] 곧 유식론에서는 느낌ㆍ생각ㆍ의도ㆍ애욕, 기억ㆍ번뇌 등을 마음과 관련하여 일어나는 법으로 본 것이다.
그런데 아함경에서는 이것들이 마음에만 관련된 것이 아니다.
먼저 6접촉의 6은 6내입처를 가리키는데, 곧 눈ㆍ귀ㆍ코ㆍ혀ㆍ몸ㆍ마음이다. 예컨대 눈의 접촉은 논과 빛깔과 눈의 인식이 화합한 것이고, 나아가 마음의 접촉은 마음과 법과 마음의 인식이 화합한 것이다. [잡아함경_213. 법경]
6느낌ㆍ6생각ㆍ6의도ㆍ6애욕의 6도 당연히 6내입처를 가리키는데, 곧 눈ㆍ귀ㆍ코ㆍ혀ㆍ몸ㆍ마음이다. 예컨대 6느낌은 눈의 접촉으로 생기는 느깸 내지 마음의 접촉으로 생기는 느낌을 가리킨다.
그리고 6기억ㆍ6번뇌의 6은 6내입처를 가리키는데, 곧 빛깔ㆍ소리ㆍ냄새ㆍ맛ㆍ감촉ㆍ법이다. 예컨대 6번뇌는 빛깔에 대한 번뇌 내지 법에 대한 번뇌를 가리킨다. 그런데 빛깔ㆍ소리ㆍ냄새ㆍ맛ㆍ감촉ㆍ법은 6내입처인 눈ㆍ귀ㆍ코ㆍ혀ㆍ몸ㆍ마음에 비치어 드러난 것이므로 결국 6번뇌도 6내입처와 관련하여 일어난 것이다.
요컨대 느낌ㆍ생각ㆍ의도ㆍ애욕, 기억ㆍ번뇌 등은 유식론에서는 마음에 상응하는 것이라고 했지만, 아함경에 의하면 몸[눈ㆍ귀ㆍ코ㆍ혀ㆍ몸]과 마음에 상응하는 것들이다. 따라서 아함경에서는 몸은 마음과 동등한 지위를 차지하는데 비하여, 유식론에서는 몸의 역할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몸은 마음과 분리하기 어렵고 거꾸로 마음도 몸과 분리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몸과 마음은 함께 동시에 작동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관점에 따라서는 마음의 역할을 몸의 멱할에 우선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바로 유식론이 그러하다.
그런데 유식론을 그대로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다음의 물음에 대답해야 할 것이다.
“민일 마음만 있고 몸이 없다면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이 어떻게 보일까?”
사실 우리가 경험하고 알고 있는 세상의 모습은 몸이 없다면 성립하지 않는 것들이 아주 많다. 색은 몸이 있음으로 생기는 것들이 아주 많고, .느낌ㆍ생각ㆍ의도ㆍ애욕, 기억ㆍ번뇌 등도 그러하다.
[이에 대해서는 <일체유심조 비판, 아함경에 비추어 보다>를 참고하시오.]
이상의 논의를 고려할 때, 유식론은 아함경에 비추어 볼 때 몸의 역할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5. 4식 등에서
연기법에서 만일 나가 없다면, ‘누가 존재하고 태어나고 죽으며, 누가 보고 들으며 느끼는가’하는 의문이 들게 된다. [이 문제는 연기법에서 가장 이해라기 어려운 부분이리고 생각된다.]
예컨대 <잡아함경_297. 대공법경>에서는 이러한 의문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태어남을 인연하여 늙음과 죽음이 있다고 하면, 혹 어떤 사람은,
‘그 누가 늙고 죽으며, 늙고 죽음은 누구에게 속한 것인가?’ 하고 따져 묻는다.
그러면 저들은 곧,
‘내가 곧 늙고 죽는다. 지금의 늙고 죽음은 내게 속한 것이고, 늙고 죽음은 바로 내가 그렇게 되는 것이다’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중아함경_062. 빈비사라왕영불경>에서는 이러한 의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그때 모든 마갈타 사람들은,
‘만일 색이 무상(無常)한 것이고 각ㆍ상ㆍ행ㆍ식도 다 무상한 것이라면, 누가 활동하고 누가 고락을 받을 것인가?’ 하고 생각하였다.
세존께서는 곧 마갈타 사람들의 마음속을 아시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범부는, 들은 것이 없어 나를 나라고 인식하므로 나에 대하여 집착한다.
그러나 필경 나라는 것도 없고 내 것이라는 것도 없으니, 나라는 마음도 비우고 내 것이라는 마음도 비워야 한다.
법이 생기면 생기는 것이고 법이 멸하면 멸하게 되니, 다 인연 때문에 모여 괴로움이 생기는 것이다. 만일 인연이 없으면 모든 괴로움은 곧 멸하고 말 것이다.
중생은 인연이 모여 서로 이어지면서 곧 모든 법을 내는데[生], 여래는 중생이 서로 이어가면서 나는[生] 것을 보고 곧, ‘남[生]이 있으면 죽음이 있다’고 그렇게 말하셨다.”
요컨대 이 말씀은 ‘모든 것은 인연으로 말미암아 생기고 없어진다’는 것이다.
또 <잡아함경_372. 파구나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이때 파구나(頗求那)라는 비구가 부처님 뒤에서 부채질을 해드리다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누가 이 식(識)을 먹습니까?”
부처님께서 파구나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식을 먹는 사람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내가 만일 식을 먹는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면, 너는 마땅히 그렇게 물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식(食)은 곧 음식[食]이라고 말하였다.
따라서 너는 마땅히, ‘어떤 인연으로 식이라는 음식이 있습니까?’ 하고 그렇게 물어야 하고,
그러면 나는 곧, ‘능히 미래의 존재를 초래하여 서로 이어져 발생하게 하며, 존재가 있기 때문에 6입처(入處)가 있고, 6입처를 인연하여 접촉이 있다’고 대답할 것이다.”
이어서 “누가 접촉하는 것입니까?” “누가 느끼는 것입니까?” “누가 사랑하는 것입니까?” “누가 취하는 것입니까?” “누가 존재하는 것입니까?”이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동일한 방식으로 서술한다.
위에서 “누가 이 식(識)을 먹습니까?”라는 질문은 “누가 아는 것입니까?”라는 질문으로 바꾸어 볼 수 있다. 식(識)은 아는 것[인식]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질문들은 ‘식, 접촉, 느낌, 사랑, 취함, 존재’ 등이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따라서 아함경의 중도에 따르자면 그 질문들은 모두 잘못되었음을 말한다.
그리고 제기된 의문들에 대한 바른 대답은 ‘일체는 모두 인연법으로 말미암아 생기고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들에 대하여 ‘식, 접촉, 느낌, 사랑, 취함, 존재’ 등은 인연법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며, 본래부터 있는 것은 아니다.
인연법(연기법)은 다음의 네 가지 명제로 구성된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어지면 저것도 없다. |
6. 3업ㆍ5계와 4념처에서
실제로 부처님의 말씀에서는 마음도 중요하지만 몸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예컨대 5계에서 살생과 도둑질과 간음과 술 마시는 것은 마음보다 몸과 더 관련된 계율이다.
이에 대하여 <성유식론>에서는 3업에 관한 서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문] 세존께서 경전 중에 세 가지 업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신체와 언어의 업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어째서 경전에 위배되지 않는가?
[답] 부정해서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색법이 아니라고 말할 뿐이다. [사(思)는 5음의 행(行)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의도’로 번역할 수 있다.] 능히 신체를 움직이는 사심소를 신업이라고 이름한다. 능히 언어를 일으키는 사심소를 어업이라고 이름한다. 살펴서 생각하고 결정하는 두 가지 사심소를, 의식과 상응하고 의식을 작용하게 하기 때문에 의업(意業)이라고 이름한다. 신체 행동과 언어를 일으키는 사(思)심소가 짓는 바가 있음을 업(業)이라고 이름한다.”
성유식론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몸의 업이 색법이 아니라 사심소라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몸의 업은 색법이 아니랄지라도, 몸의 업을 몸의 행위로 드러나며 몸은 명백히 색법이다. 몸이 없는데 어찌 살생과 도둑질과 간음과 술 마시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또 4념처에는 마음의 관찰과 함께 몸과 느낌과 법의 관찰도 있다. 느낌은 몸에서 비롯되는 것들이 있고, 법 가운데는 욕맘과 성냄 등이 일어나는 원인 가운데 많은 부분은 몸의 접촉에서 비롯되며, 졸음과 잠은 몸의 작용에서 비롯되고 몸의 모양으로 드러난다.
또 최상의 법을 증득하는 것도 마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몸과 마음이 함께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다.
7. 7식주에서
아함경에서을 식이 있는 곳을 욕계ㆍ색계ㆍ무색게에 따라 일곱 가지로 나누었다.
<중아함경_097. 대인경>의 내용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2처도 함께 정리해 둔다.]
7식주 | 제1식주 | 인간과 욕망이 있는 하늘[욕계천] | 인간 욕계6천 | 욕계 |
제2식주 | 브라만의 하늘[범천] | 초선천 | 색계 | |
제3식주 | 밝게 빛나는 하늘[황욱천] | 2선천 | ||
제4식주 | 두루 깨끗한 하늘[변정천] | 3선천 | ||
제5식주 | 끝없는 허공이 있는 하늘 | 공처천 | 무색계 | |
제6식주 | 끝없는 인식의 있는 하늘 | 식처천 | ||
제7식주 | 아무것도 없는 하늘 | 무소유천 | ||
2처 | 제1처 | 생각 없는 하늘[무상천] | 4선천 | 색계 |
제2처 | 생각 있는 것도 생각 없는 것도 아닌 하늘 | 비상비비상처천 | 무색계 |
여기서 모든 하늘들은 보통 중생들이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욕계의 하늘은 10선업을 닦아서 갈 수 있는 곳이며, 새계와 무색계는 선정에 듫으로서 도달할 수 있는 곳이다.
<중아함경_168. 의행경>에서는 아홉 가지 선정에 대하여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잡아함경_1175. 긴수유경> 에서는 문지기의 비유에서 4식주를 성주에 비유하고 있다.
“비유하면 어떤 변방에 있는 국왕이 성벽을 잘 쌓았는데, 그 문 아래는 견고하기 그지없고 얽혀있는 길들은 편편하다.
네 성문에는 네 명의 성문지기를 두었는데, 그들은 다 총명하여 드나드는 사람에 대하여 낱낱이 다 알았다.
그 성안의 네거리에는 평상을 펴놓고, 성주가 그 위에 앉아 있었다.
만일 동방에서 사자가 찾아와 성문지기에게 성주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면, 그는 곧 성주는 성안 네거리의 평상 위에 앉아 있다고 대답한다.
그 사자는 그 말을 듣고 성주에게 나아가 명령을 받고 길을 돌려 돌아간다.
남ㆍ서ㆍ북방으로부터 멀리서 찾아오는 사신들도 문지기에게, 성주는 어디 있느냐고 물으면, 그는 성 안 네거리에 있다고 대답한다. 사자들은 그 말을 듣고 모두 성주에게 나아가 명령을 받아 가지고, 각각 제가 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느니라.”
“나는 이런 비유를 들어 말하였는데, 이제 그 뜻을 하나하나 설명해 주겠다.
여기에서 성이란, 사람 몸의 추한 색(色)을 비유한 것이다.
……(이 사이의 자세한 내용은 상자 안에 들어있는 독사로 비유한 경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
성을 잘 쌓는다고 한 것은 바른 소견을 말한 것이요,
얽혀 있는 길이 편편하다고 한 것은 6내입처(內入處)를 말한 것이다.
네 문이라고 한 것은 4식주(識住)를 비유한 것이요,
네 문지기라고 한 것은 4념처(念處)를 비유한 것이다.
성주라고 한 것은 의식이 받아들이는 것이 쌓인 것을 말한 것이요,
[아함경 번역에서는 식(識)을 ‘의식’으로 번역하였으나, ‘인식’으로 번역하는 것이 나을 듯하다. ‘의식’은 ‘마음[의]의 식’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사자라고 한 것은 바른 관찰을 말한 것이다.
참된 말이라고 한 것은 네 가지 진리를 말한 것이요,
길을 되돌아간다고 한 것은 8성도(聖道)를 말한 것이니라.”
8. 마무리
가장 공한 법과 세속의 법을 고려한다면, 세속의 법은 연기법이며 또 연기법은 곧 유위법다. 12연기법의 모든 구성요소돌과 마찬가지로, 식도 연기법으로 생기고 없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우식론의 ‘식만이 있다’는 진술은 유위법이며, 세속의 범으로 보면 당연한 진술이다. 그러나 세속법으로 보면 식뿐만 아니라 일체 세간이 있는 것이다. 띠라서 ‘식만이 있다’는 진술은 세속의 법으로 보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가장 공한 법의 처지에서 보면 식뿐 아니라 색을 비롯한 일체 세간이 모두 공한 것이다.
사실이 그러한데도 ‘식만이 있다’고 주장한다면, 몸과 관련하여 진술한 다른 모든 주요한 밥들을 간과하거나 경시함으로써 결국에는 부처님 말씀의 본 뜻에 어긋나게 될 것이다.
아함경에서는 식은 5음의 하나로서, 빛갈ㆍ느낌ㆍ생각ㆍ의도와 마찬가지로 무상하고 괴로움이며 나가 아니고 내 것도 아니라고 한다.
“빛깔은 무상하다. 모든 빛깔을 생성시키는 인과 연도 또한 무상하다.
무상한 인과 무상한 연에 의해 생긴 빛깔들이 어떻게 항상하겠느냐?
느낌ㆍ생각ㆍ의도도 마찬가지이며,
인식은 무상하다. 모든 인식을 생성시키는 인과 연도 또한 무상하다.
무상한 인과 무상한 연에 의해 생긴 식들이 어떻게 항상하겠느냐?
이와 같이 비구들아, 빛깔은 무상하고, 느낌ㆍ생각ㆍ의도ㆍ인식 또한 무상하다.
무상한 인식은 곧 괴로움이요, 괴로움은 곧 나가 아니며, 나가 아니면 또한 내 것도 아니다.”
가장 공한 법과 연기법(인연법)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시오.
법의 두 측면(2), 가장 공한 법 & 임시로 붙여진 이름
법의 두 측면(3), 인연법과 공한 법, 무루법ㆍ무위법ㆍ무생법ㆍ진여ㆍ언어 등 (도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