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가아발다라보경 제3권
36. 성지(聖智)에는 성자성이 있다
대혜가 다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의 말씀처럼 이런 저런 망상으로 이런 저런 성품이라고 망상을 부리지만 그것은 자성이 있는 것이 아니며, 단지 망상자성(妄想自性)일 뿐입니다.”
대혜가 다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만일 망상자성일 뿐이며 성자성(性自性)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면, 세존께서 ‘번뇌는 청정하여 성품이 없다’고 이렇게 말씀하신 것도 허물이 되는 것 아닙니까?
왜냐하면 모든 법의 망상자성은 성품이 아니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그렇다, 그렇다. 네가 말한 것과 같다.
대혜야, 어리석은 범부가 성자성(性自性)이 있다고 하며 망상을 진실이라고 하는 것과는 같지 않다. 이는 망상자성일 뿐, 성자성의 모습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대혜야, 성지(聖智)에는 성자성이 있으니, 이는 성인의 지혜와 견해와 지혜로운 눈으로 이와 같은 성자성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대혜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만약 성인들이 그들의 지혜와 견해, 천안(天眼)도 육안(肉眼)도 아닌 혜안으로써 이와 같이 성자성을 알아서 어리석은 범부의 망상과는 다르다면,
세존이시여, 어떻게 어리석은 범부가 이러한 망상을 여읠 수 있겠습니까?
성인의 경계[聖性事]는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저들은 전도된 것도 아니고 전도되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는 성인의 경계인 성자성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며,
모습이 있음과 없음을 벗어나는 것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성인은 또한 이와 같은 망상을 이와 같이 보지 않으니, 자상경계(自相境界)를 경계로 삼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저것도 역시 성자성의 모습이니, 망상자성(妄想自性)이 이와 같이 나타난 것입니다.
인(因)이 있다고도 없다고도 말씀하시지 않으셨기 때문이니, 이른바 자성의 모습이 있다는 견해에 떨어졌기 때문이며, 다른 경계는 저들과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이와 같은 무궁한 허물이 생깁니다.
세존이시여, 이는 성자성의 모습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또한 망상자성이 성자성의 모습으로 인해 있는 것도 아닌데, 저들이 어떻게 망상이고 망상이 아닌지, 여실(如實)하게 망상을 알 수 있겠습니까?
세존이시여, 망상과 자성상(自性相)은 다른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인(因)이 비슷하지도 않은 망상자성상(妄想自性想)을 저들은 왜 각각 망상이 아니라고 합니까?
어리석은 범부는 여실하게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중생을 위해 망상을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
‘이는 망상의 모습과 같아 여실하게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존께서는 중생들이 있다는 견해와 없다는 견해로 사물의 자성(自性)에 계착하고, 성지(聖智)가 행하는 경계에 계착하여 있다는 견해에 떨어지는 것을 막으려고 법은 공(空)하여 성품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성지(聖智)의 자성사(自性事)를 말씀하십니까?”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법은 공(空)하여 성품이 아니라고 말한 것이 아니며, 또한 있다는 견해에 떨어져 성지(聖智)의 자성사를 말한 것도 아니다.
중생이 없다는 말을 듣고 두려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성자성(性自性)을 말했고,
중생이 끝없는 옛날부터 성자성의 모습에 계착하고 성인의 자성경계에 계착하는 모습을 보고 법이 공하다고 말한 것이다.
대혜야, 나는 성자성(性自性)의 모습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대혜야, 나는 단지 스스로 얻은 여실한 공법(空法)에 머물러 미혹되고 산란한 상견(相見)을 벗어나고, 자기 마음이 나타낸 성품이라거나 성품이 아니라는 견해를 벗어나며, 3해탈을 얻고 여실히 증명되는 바를 증명하며, 성자성에 대해 스스로의 깨달음으로 반연하고 관찰하여 머묾을 얻으며, 있고 없다는 견해의 모습을 벗어난다.
또 대혜야, 보살마하살은 모든 법이 생기지 않는다는 주장[宗]을 세우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성품[性]은 성품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저 인(因)으로 모습이 생기므로 모든 법은 생기지 않는다고 주장한다면, 이 주장은 곧 무너진다. 모든 법이 생기지 않는다는 주장을 세우면 주장이 무너진다고 한 것은 그 주장이 상대를 두고 생겼기 때문이다.
또 생기지 않는다는 주장 역시 모든 법의 안에 들어가기 때문이며,
무너지지 않는 모습이 역시 생기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법이 생기지 않는다는 주장을 세운다면, 이것은 말하자마자 곧 무너진다.
대혜야, 있고 없음이 생기지 않는다는 주장을 세운다면, 이 주장은 모든 성품에 들어가므로 모습이 있다거나 없다는 것을 얻을 수 없다.
대혜야, 만일 저들이 생기지 않는다고 주장한다면 모든 성품이 생기지 않는데 주장을 세운 것이 되므로 그 주장은 무너진다.
모습과 성품이 있거나 없는 일이 생기지 않기 때문에 주장을 세우면 안 된다.
오분론(五分論)에는 잘못이 많기 때문이며, 전전(展轉)하는 인(因)이 다른 모습이기 때문이며, 짓는 것[作]이 되기 때문이니, 주장을 세우면 안 된다.
모든 법은 생기지 않으므로 공(空)하고, 이와 같이 모든 법의 자성(自性)이 없으므로 주장을 세우면 안 된다.
대혜야, 그러나 보살마하살이 모든 법은 환과 같고 꿈과 같은 성품이라고 말하는 것은 나타나지 않는 모습이 나타나기 때문이며, 견각(見覺)의 허물이기 때문에 모든 법은 환과 같고 꿈과 같은 성품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러나 어리석은 범부가 이 말을 듣고 두려워하는 것을 벗어나게 하려고 할 경우는 제외한다.
대혜야, 어리석은 범부는 있다는 견해와 없다는 견해에 떨어지니, 저들이 두려움으로 마하연(摩訶衍:대승)을 멀리 벗어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이때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자성도 없고 말할 것도 없고
사물[事]도 없고 상속함도 없다.
그것은 어리석은 범부의 망상이니
죽은 시체의 악각(惡覺)과 같다.
모든 법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은
저 외도의 주장이 아니다.
끝까지 이르러도 생기는 바 없으니
오직 성품과 연(緣)으로 성취되는 것이다.
모든 법이 생기지 않는다고
지혜로운 이는 생각을 짓지 않는다.
이 주장은 생기는 것을 인(因)하니
깨달은 이는 모두 없앤다.
비유하면 병난 눈으로 보면
허망하게도 아른거리는 머리카락이 보이니
성품이라고 계착하는 것도 그러하여
어리석은 범부의 그릇된 망상이다.
3유(有)를 시설하나
사물의 자성이 없다.
사물의 자성을 시설하여
생각하므로 망상을 일으킨다.
상사(相事)로 언교(言敎)를 시설하니
뜻이 어지러워 심하게 흔들린다.
불자는 능히 뛰어넘어
모든 망상을 멀리 벗어난다.
물이 아닌데 물이라는 모습을 받아들이니
이것은 갈애(渴愛)로 생긴 것
어리석은 범부, 이와 같이 미혹하나
성인이 보는 것은 그렇지 않다.
성인의 견해는 청정하여
3해탈과 삼매가 생기니
생사를 멀리 벗어나고
두려움 없이 유행(遊行)한다.
무소유(無所有)를 수행하고
성품도 성품 아닌 것도 없으면
성품과 성품 아닌 것이 평등하리니
이로부터 성과(聖果)가 생긴다.
무엇이 성품이고 성품이 아니며
무엇을 평등하다고 하는가.
저 마음이 알지 못하기에
안팎으로 심하게 요동치는 것이니
만일 저것을 무너뜨릴 수 있다면
마음이 곧 평등하게 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