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살영락경 제9권
25. 유수품(有受品)
[취함 없음]
[이 경의 10. 인연품(因緣品))의 12연기법에서 보면 수(受)는 취함(取)를 가리킨다.]
이때에 용진(勇進)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부처님이시여, 이제 부처님께서 매우 깊은 법과 여러 성현의 율[賢聖律]에 들어가는 문을 설하심을 들었나이다.
이 법을 듣고 알아서 요달한 자는 집착도 보지 않고 또한 해탈도 보지 않고,
공무법(空無法)에서 손(損)한 바가 없어서 온갖 법의 좇아온 바가 있고 좇아간 바가 있음을 보지 않나니,
만일 선남자나 선여인이 이 법의 좇아온 바가 없고 좇아간 바가 없음을 깊이 관하면, 그대로 밝게 통달하니 그 이름을 해탈이라 하나이다.
일체 모든 법은 각각 달라서 그 말하고 보는 바가 모조리 각각 흩어져서 합하여 짝함이 없으며,
다시 온갖 법에서 상념(想念)을 내지 아니하여 이루는 바가 있으며,
또한 다시 해탈이 있음을 염(念)하지 않는 자는 관하는 모든 법이 안에도 있지 않고 밖에도 있지 않으며,
또한 멀리에도 있지 않고 또한 가까이에도 있지 않나이다.
지혜를 얻은 보살은 본래 없음[本無]을 깊이 깨닫고, 이것을 안 이는 잘난 체하는 마음을 버리고 교만을 일으키지 않으니,
이것을 선남자와 선여인이 온갖 선한 법[善法]에서 해탈을 얻어서 문득 나고 멸함이 없는 경지[無生滅地]에 머물게 되었다고 하나이다.
‘그 머묾’이란 머묾이 있음을 보지 않고, 다시 온갖 법에 머물면서도 머무는 바가 없으며, 또한 온갖 법을 보아도 보는 바가 없으니,
이것을 소위 선남자나 선여인이 그 성행(性行)을 바르게 하여 그릇되고 삿됨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이르나이다.
그 바른 소견[正見]을 짓는 이는 문득 안의 성품[內性]에서 색상(色相)을 관하여 요달해서 색을 두지도 않고 또한 색을 보지도 않으면서 색이 있나이다.
왜냐하면 온갖 법을 알아서 본래 공하여 형상 없음을 관하고, 그 본래의 공함이 색과 같으면서 색이 있지 않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온갖 법에서 받음이 있지도 않고 또한 받음이 없지도 않으니, 이것을 소위 선남자와 선여인이 온갖 법에서 해탈을 얻음이라 이르나이다.”
이때에 용진보살이 이 유수품(有受品)을 설할 때,
13억 중생이 이 법을 듣고 나서 모두 불기유순법인(不起柔順法忍)을 얻고 이구동성으로 각각 이 설법을 칭송하였다.
“오늘 용진보살이 온갖 집착을 여의고 또한 우리들로 하여금 이 법을 이루게 하였다.
우리들 인자(仁子)들아, 마땅히 이 법으로 나머지 사람을 가르쳐서 우리와 다름이 없게 하고 모조리 해탈을 얻게 하여 마침내 집착이 없게 하자.”
이때에 부처님께서 용진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대저 열반의 마음은 안에도 있지 않고 밖에도 있지 않으며, 또한 다시 두 중간에도 있지 않다.
다만 받음 있는[有受] 보살의 나고 멸함이 없는 곳은, 여러 보살의 마음과 도가 평등하여 둘이 없고 또한 약간도 없느니라.
도의 마음이 적합하게 평등하여 약간도 없다함은 온갖 사람에게 반드시 평등하여 둘이 없는 마음이니,
이것을 소위 보살이라 이르며,
그 까닭에 이름하여 평등하여 차별이 없다고 말하느니라.”
이때에 좌중에 있던 5백 천자(天子)가 여래의 받음이 있고 받음이 없는 평등한 법을 듣고서 온갖 번뇌[塵垢]가 다하면서 법안(法眼)의 청정함을 얻었다.
다시 비구ㆍ비구니ㆍ우바새ㆍ우바이 5백여 무리가 모두 수다원 도를 얻었고, 다시 한량없는 수의 하늘ㆍ용ㆍ귀신ㆍ건달바ㆍ아수라ㆍ가루라ㆍ긴나라ㆍ마하라가ㆍ사람과 사람 아닌 것이 뜻을 대승(大乘)에 두고 나아가 모두 위없는 평등한 도의 뜻을 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