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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론 제14권
12. 정론[8]
12.31. 출입식품(出入息品)
아나파나(阿那波那)는 열여섯 가지의 행(行)으로서
들숨과 날숨의 길고 짧은 것을 생각하고 숨이 몸에 퍼지는 것을 생각하여
모든 몸의 작용을 제거하고 기쁨을 깨닫고 즐거움을 깨달으며
마음의 작용을 깨달아서 마음의 작용을 제거하고
들숨 날숨을 생각하여 마음을 깨달아서 마음을 기쁘게 하고, 마음을 껴잡게 하고, 마음을 해탈하게 한다.
들숨 날숨을 생각하는 것은 무상함에 다라서 관하고 끊음과 여읨가 없어짐에 따라서 관하면서 들숨 날숨의 길고 짧은 것을 생각한다.
[문] 어떤 것을 숨의 길고 짧은 것이라 하는가?
[답] 사람이 산에 오를 적에 만일 무거운 짐을 졌으면 고달프게 숨이 가쁜 것과 같이
수행하는 이도 역시 그러하여 거친 마음을 지니고 있으면 그때에는 숨이 짧다.
거친 마음이라 함은 초조하고 산란해진 마음을 말한다.
숨이 길다 함은 수행하는 이가 고른 마음을 지니고 있으면 숨이 긴 것이다. 왜냐하면 마음이 고르면 그에 따라서 숨도 또한 고르게 되기 때문이다. 곧 이 사람이 피로가 풀리기 때문에 숨도 따라서 고르게 됨과 같으며 그 때에는 숨도 길게 쉬게 된다.
숨이 몸에 퍼진다 함은 수행하는 이가 몸이 허무하다는 것을 믿고 이해하면 온갖 털구멍에서 바람이 드나드는 작용을 본다.
몸의 작용을 제거한다 함은 수행하는 이가 경계의 힘을 얻으면 마음이 안온해지기 때문에 거친 숨은 사라지면서 그때에는 수행하는 이의 몸에 대한 생각을 갖춘다.
기쁨을 깨닫는다 함은 이 사람은 이 선정의 법에 따라서 마음에 큰 기쁨을 일으킨다. 본래부터 기쁨이 있기는 하였으나 그렇게 될 수는 없었는지라 그럴 때를 이름하여 기쁨을 깨닫는다고 한다.
즐거움을 깨닫는다 함은 기쁨으로부터 즐거움을 일으킨다. 왜냐하면 만일 마음에 기쁨을 느끼면 몸은 편안하여지고 몸이 편안하면 즐거움을 얻게 된다.
경전 중에서
“마음이 기쁘기 때문에 몸이 편안하고 몸이 편안하면 즐거움을 느낀다고 함과 같다.
마음의 작용을 깨닫는다 함은 기쁨의 허물됨을 보는 것이니, 탐욕을 내는 까닭이다.
탐욕은 바로 마음의 작용이며, 마음으로부터 일어나기 때문이다.
느낌 안에서 탐욕을 일으키기 때문에 느낌 그것을 마음의 작용으로 본다.
마음의 작용을 제거한다 함은 수행하는 이가 느낌으로부터 탐욕이 생기는 허물을 보고 제거하기 때문에 마음은 안온하여지고 또한 거친 느낌을 아주 없애기 때문에 마음의 작용을 제거한다”고 한다.
마음을 깨닫는다 함은 수행하는 이가 느낌의 맛을 제거하기 때문에 마음의 적멸함을 보고서 가라앉지도 않고 들뜨지도 아니한다.
이 마음이 때로 가라앉게 되면 그럴 때는 기쁘게 하고,
만일 마음이 도로 들뜨면 그럴 때에는 껴잡게 한다.
만일 두 가지 법을 다 여의면 그때에는 버려져야 한다.
그러므로 마음으로 하여금 해탈하게 한다고 말한다.
수행하는 이는 그와 같이하여 마음이 고요하고 안정되기 때문에 무상하다는 행을 일으키며 무상한 행으로써 모든 번뇌를 끊는 것이니, 그것을 끊음의 행[斷行]이라 한다.
번뇌가 끊어지기 때문에 마음이 곧 싫증내어 여의게 하는 것이니, 그것을 여읨의 행[離行]이라 한다.
마음이 여의어지기 때문에 온갖 사라짐을 얻는 것이니, 그것을 사라짐의 행[滅行]이라 한다.
이와 같이 순서에 의하여 해탈을 얻기 때문에 열여섯 가지 행으로 내쉬는 숨과 들이 쉬는 숨을 생각한다고 한다.
[문] 무엇 때문에 들숨과 날숨을 세는 것을 거룩한 행[聖行]이요, 하늘의 행[天行]이요, 맑은 행[梵行]이요, 배우는 이의 행[學行]이요, 배울 것 없는 이의 행[無學人]이라고 말하는가?
[답] 바람이 허공 안을 가면 허공의 모습은 빨리 무너지는 현상을 일으킨다.
무너지는 현상은 곧 공이면, 공은 바로 거룩한 행이기 때문에 성인의 행이라 한다.
깨끗한 하늘의 행이라 하고 적멸한 데에 이르게 되기 때문에 맑은 행이라 하고,
법을 배워 얻게 되기 때문에 배우는 이의 행이라 하고,
배울 것 없는 이가 되기 때문에 배울 것 없는 이의 행이라 한다.
[문] 만일 부정(不淨)을 관찰하면 몸을 깊이 싫어하고 여의어 빨리 해탈을 얻거늘 어찌하여 열여섯 가지 행을 닦을 필요가 있는가?
[답] 부정관(不淨觀)으로 아직 욕심을 여의지 못하여 스스로가 미워하고 싫어하면 몸과 마음은 곧 혼미하고 답답해져서 마치 약을 너무 과하게 복용하면 도리어 병이됨과 같다.
이와 같이 부정관은 미워하고 싫어하는 마음내기를 기뻐하여 마치 발구말[跋求沫]의 강변의 여러 비구가 부정관(不淨觀) 때문에 미워함과 싫증을 몹시 내어 독약을 마시고는 높은 데서 떨어지는 등의 여러 방법으로 자살함과 같다.
그러나 이 행은 그렇지 않아서 욕심을 여의면서도 싫증을 내지 않기 때문에 수승하다고 한다.
또 이 행은 얻기 쉬우며 스스로가 몸을 반연하기 때문이거니와 부정을 관하는 행은 잃기 쉽다.
또 이 행은 세밀하여 스스로가 몸을 무너뜨리기 때문이거니와 부정관의 행은 거칠어서 모습을 무너뜨리기가 어렵다.
또 이 행은 온갖 번뇌를 부수지만 부정관은 음욕만을 부술 뿐이다. 왜냐하면 온갖 번뇌는 다 생각[覺]으로 인하여 생기지만 내쉬고 들이쉬는 숨을 생각하면 모든 생각을 끊게 되기 때문이다.
[문] 들숨과 날숨은 몸에 속하는 것인가? 마음에 속하는 것인가?
[답] 몸에도 속하고 마음에도 속한다. 왜냐하면 태중에 있을 적에는 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알아라. 몸으로 말미암는다.
만일 제4선 등과 무심정(無心定)에 든 사람이면 숨이 없다.
그러므로 알아라. 마음으로 말미암는다.
[문] 숨은 일부러 일으키는 것이 아닌지라 마음으로 말미암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숨은 뜻[意]으로 말미암아 일어나지 아니함이 마치 마음으로 다른 일을 생각할 적에도 숨은 항상 들고 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밥이 저절로 소화되는 것과 같고 그림자가 스스로 바꾸어지는 것과 같아서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답] 숨은 일부러 일어나는 것도 아니요, 생각으로 말미암지도 않아서 다만 여러 가지 인연의 화합 때문에 일어날 뿐이다.
만일 마음이 있으면 잇고 마음이 없으면 바로 없다.
그러므로 알아라. 마음으로 말미암는다.
또 마음의 차별에 따르는 것이니, 마음이 거칠면 숨이 가쁘고 마음이 차분해지면 느리다.
또 들숨과 날숨은 땅[地]으로 말미암기도 하고 마음으로 말미암기도 한다.
만일 들숨과 날숨의 땅에 있고 역시 들숨과 날숨의 땅의 마음이 있으면 그때에는 숨 쉬는 땅이 있으니 이른바 욕심 세계와 3선천이다.
만일 숨을 쉬는 땅에 있으면서도 숨 쉬는 땅의 마음이 없거나 무심정에 있으면 그때에는 숨이 없다.
만일 숨을 쉼이 없는 땅에 있으면 그 때에도 숨이 없다.
[문] 숨이 일어날 때에는 내쉬는 숨이 먼저인가, 들이 쉬는 숨이 먼저인가?
[답] 태어날 때에는 내쉬는 숨이 먼저이고 죽을 때에는 마지막에 들이수니다. 제4선에서도 내쉬고 들이 쉬는 것이 역시 마찬가지다.
[문] 숨 쉬기를 생각하는 것은 어떻게 해야 구족하다 할 것인가?
[답] 수행하는 이가 만일 이 열여섯 가지 행을 얻으면 그때에 구족하다고 한다.
어떤 논사는 말하기를
“여섯 가지 인연 때문에 구족하다”고 하는데
이른바 수(數)와 따름[隨]과 그침[止]과 관(觀)과 반연을 바꿈[轉緣]과 청정(淸淨)이다.
수라 함은 내쉬고 들이 쉬는 숨을 세되 하나로부터 열까지 세는 것으로 말한다.
수에는 세 종류가 있다.
곡 맞는 수[等數]와 넘는 수[過數]와 모자라는 수[減數]이다.
꼭 맞다 함은 열을 세고 열이라는 것이요,
넘는다 함은 열하나를 세고서 열이라 하는 것이요,
모자란다 함은 아홉을 세고 열이라 하는 것이다.
따름이라 함은 수행하는 이의 마음이 들숨과 날숨에 따른다는 것이요,
관이라 함은 수행하는 이가 숨을 몸에 매어 두어서 구슬을 꿰는 실 보듯이 하는 것이오,
그침이라 함은 마음을 들숨과 날숨에 머무르게 하는 것이요,
반연을 바꿈이라 함은 몸이 마음을 반연하는 것을 바꾸어서 느낌(受)으로 하여금 마음을 반연하게 하는 것이니 마음의 법을 앞에 나타나게 하는 것도 또한 그러하다.
청정이라 함은 수행하는 이가 온갖 번뇌의 모든 어려움을 떠나서 마음이 청정함을 얻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반드시 정해진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행 중에는 반드시 셈과 따름의 두 가지 법을 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수행하는 이가 다만 마음을 숨 쉬는 가운데 멈추어서 모든 생각을 끊게 하기 때문에 만일 열여섯 가지를 행하면 구족하다고 한다.
또 이 구족한 모습은 결정되지 않아서 무딘 근기의 행할 바와 영리한 근기에서면 구족한 것이 아니다.
[문] 이 날숨ㆍ들숨은 경전 중에서 무엇 때문에 “음식”이라 말하였는가?
[답] 만일 숨쉬는 것이 일정하게 고르면 몸에 쾌락을 얻는 것이 마치 좋은 음식을 먹으면 더욱 몸이 편안해짐과 같다.
그러므로 음식이라고 한다.
[문] 이 열여섯 가지 행 중에서는 모두가 들숨과 날숨을 생각하는가?
[답] 이것을 사람들은 다섯 가지 쌓임을 파괴하고 붙인 이름을 제거한 다음이면 다시 무슨 들숨ㆍ날숨을 셀 필요가 있겠는가?
그것은 몸을 생각한다고 하는 것이니,
네 가지로 몸을 생각하기 때문에 몸을 생각[身憶]한다고 한다.
[문] 생각을 과거를 반연하고 숨은 바로 현재이거늘 무엇 때문에 생각한다고 하는가?
[답] 이것은 붙인 이름을 파괴하는 지혜를 생각한다는 이름으로써 말한 것이다.
모든 심수법(心數法)은 다시 모양으로 이름을 붙이는데, 마치 열 가지 생각[十想] 따위와 같다.
또한 먼저와 뒤의 행한 바를 생각하기 때문에 생각이라 한다.
[문] 숨의 길고 짧음 따위 안에서는 거룩한 행을 말하지 않고 어찌하여 행이 없는데 생각하는 곳이라 하는가?
경전 중에서
“만일 수행하는 이가 들숨과 날숨을 배우면 길거나 짧거나 몸에 퍼지거나 몸의 작용을 제거하거나 하는 그때를 몸을 생각하는 곳이라 한다”고 하였다.
[답] 이것을 첫 방편의 도라 한다. 마음이 청정하게 되기 때문에 나중에는 끊음의 도[斷道]라 한다.
또 이 중에는 무상함 따위의 행이 있다.
이 경전에서 말하지 않았을 뿐이요,
다른 경전에서는 말하였으니,
“행자는 들숨과 날숨 안에서 몸의 나는 모양과 사라지는 모양과 또는 나고 사라지는 모양을 관하라”고 하였다.
또 말씀하기를
“몸의 무상함 등을 관하라”고 하였다.
다만 넷째 번 안에서는 무상 등의 행이 구족하기 때문에 말한 것이다.
12.32. 정난품(定難品)
이 선정이 만일 장애되는 모든 고난을 여의면 큰 이익을 이룬다. 선정의 난이라 함은 이른바 거친 기쁨이다.
경전 중에서
“내가 거친 기쁨을 냄이 마음의 장난되는 법이다”라고 함과 같다.
수행하는 이는 이 거친 기쁨을 내지 않아야 하리니 탐착 따위의 허물이 있어서 선정의 마음을 어지럽히기 때문이다.
[문] 법에 따라서 기쁨을 내거니 어떻게 나기 않게 할 수 있는가?
[답] 수행하는 이가 공을 생각하면 기쁨을 내지 않는다. 중생이라는 생각[想]이 있기 때문에 기쁨을 낸다. 다섯 가지 쌓임은 공이어서 중생이 없거니 어떻게 기뻐할 것이 있겠는가?
또 수행하는 이는 생각하되
“인연 때문에 갖가지 법이 생기나니 이른바 광명 따위이다. 그 중에서 무슨 기뻐할 것이 있겠느냐”고 해야 한다.
또 수행하는 이는
“기뻐할 바의 법은 이내 무너지는 것이다”라고 보면 거친 기쁨은 곧 사라진다.
또 수행하는 이는 다시 큰 일을 구하되 광명 등의 법으로써 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기쁨을 내지 아니한다.
또 수행하는 이는 사라지는 모습의 이로움을 보기 때문에 광명 등의 모양으로는 기쁨으로 삼지 아니한다.
또 이 수행하는 이는 적멸을 닦아 익혀서 번뇌를 끊으려 하기 때문에 기쁨을 내지 아니한다. 이러한 인연들로서 거친 기쁨을 없앤다.
또 두려워하는 선정의 장난이 있다.
수행하는 이는 두려워할 만한 반연을 보기 때문에 두려운 생각을 낸다.
세간에 있는 두려워할 만한 것을 행자는 모두 보되 그일 안에서 다 자세하게 무상하여 부셔진다고 관찰해야 하며 따르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좌선하는 법 중에서 이런 인연이 있으면 두려워할 만한 일을 보게 되기 때문이니, 이런 일로써 두려움을 내지 않아야 한다.
이런 일은 허망하여 모두가 공하다.
마치 “요술장이가 범부를 속임과 같아서 진실이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두려움을 여읜다.
또 공의 법에 의지하면 두려움이 없다.
또 이러한 생각을 하되
“나는 수행하는 힘 때문에 이러한 기이한 현상을 느낀다. 두려워하지 않아야겠다”고 하라.
또 스스로 생각하기를
“내 몸에 계행과 다문 등의 공덕이 구족하게 있다. 해를 당할 만한 인연이 없기 때문에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한다.
또 이 수행하는 이는 도를 즐겨함이 깊기 때문에 신명을 아끼지 않거니 무슨 두려워할 바가 있겠는가?
또 이 사람의 마음은 항상 바른 기억에 있다. 그러므로 두려움은 편의로 얻지 못한다.
또 용맹하고 굳센 모습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한다. 두려워함은 비겁하고 연약한 모습이다. 이와 같은 따위로써 두려움을 없앤다.
또 편안하지 아니한 선정의 장난이 있다.
이른바 수행하는 이에게 냉병과 열병 따위가 있거나 혹은 몹시 피곤하다거나 잠을 설치는 등의 여러 탐욕과 근심과 질투 등의 여러 가지 번뇌가 있어서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게 되면 선정을 잃는다.
그러므로 수행하는 이는 스스로 몸과 마음을 보호하여 편안하게 하여야 한다.
또 기이한 모습[異相]으로 선정을 장애하는 것이 있으니 이른바 때 묻은 모습이다.
또한 때 묻지도 아니한 모습으로서 선정을 어지럽히는 것이 있는데, 보시하는 따위의 모습과 같은 일이다.
또 일정하지 못한 것으로서의 선정의 장애가 있다.
이른바 정진의 빠름과 더딤이다. 빠르면 몸과 마음이 피곤해지고 더디면 선정의 모양을 취하지 못하여 다 같이 선정을 잃게 된다.
마치 새끼를 붙잡을 때에 급하게 하면 다치고 느슨하게 하면 날아가 버리는 것과 같다.
또 거문고 줄을 고를 적에 너무 팽팽하거나 너무 느슨해도 다 같이 소리가 되지 않는 것과 같다.
또 만일 정진을 빠르게 하면 끝마치기가 어렵다.
부처님이 아나율에게 말씀하시되
“너의 정진은 지나치다. 나중에는 나태하게 되라라”고 하심과 같다.
왜냐하면 만일 정진이 과하면 일은 성취하지 못하고 도리어 나태한데 떨어지며 정진이 만일 더디면 그 일 역시 성취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결같이 못한 것[不等]이 선정을 장애한다고 한다.
또 생각없는 것이 선정의 장애이니,
착한 법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설사 착한 법을 생각한다 하여도 받아들일 바는 아니다.
또 선정의 모습을 생각하지 않으면서 밖의 물질을 생각하면 이것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다.
수행하는 이는 한 마음으로 정진하면서 받아들일 방법을 생각해야 함이 기름 바리를 들 듯하여야 한다.
또 뒤바뀜이 선정을 장애하는 것이나
욕심이 많은 사람이 자비심을 받아 행하고 진심이 많은 사람이 부정관을 닦아 익힌다.
위의 두 가지 사람은 12인연을 관하며 또 가라앉은 마음 가운데서는 그침[止]을 닦고 들뜬 마음 가운데서는 정진을 행하며 이 두 가지 마음 가운데서는 평등[捨]을 행하는데 이것을 뒤바뀜이라 한다.
또 말이 많으면 선정을 장애하는 것이니
이른바 거친 생각과 세밀한 생각이 많은 것이다.
거친 생각과 세밀한 생각은 이는 말을 하는 근본이 되기 때문이며
또 마음은 멈춰 있기를 즐기지 않고 억지로 반연에 매달려 있게 되기 때문이다.
또 모양을 취하지 아니함이 선정을 장애하는 것이니,
모양에는 세 가지가 있다.
이른바 그치는 모양[止相]과 나아가는 모양[進相]과 버리는 모양[捨相]이다.
또 세 가지 모양이 있으니
선정에 드는 모양과 머물러 있는 모양과 일어나는 모양이다.
수행하는 이가 이와 같은 모양들을 잘 분별하지 않기 때문에 선정을 잃는다.
또 젠 체(慢)함이 선정을 장애하게 된다.
만일 “나는 선정에 들었지만 저 사람은 들지 못하였다”고 하면 그것은 젠 체한다고 한다.
만일 “저 사람은 능하나 나는 능하지 못하다” 하면 그것은 못난 체하는 것이며 만일 선정을 아직 얻지 못하고서도 스스로 얻었다고 하면 그것은 뛰어난 체하는 것이며,
미묘하지 못한 선정에서 미묘하다는 생각을 내면 그것은 그릇된 체[邪慢]라 한다.
또 탐욕 등의 법도 선정의 장애라 한다.
경전 중에서
“만일 수행하는 이가 한 가지 법을 성취하면 눈(眼)의 무상함을 관하지 못하리니 이른바 탐욕이다”고 함과 같다.
[문] 아직 욕심을 여의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가 눈 등의 무상을 관찰할 수 없는가?
[답] 이 말은 조금은 잘못이다. 현재에 탐욕을 일으키면 눈의 무상함을 관할 수 없다고 말해야 한다.
또 성취하는 중에도 역시 차별이 있다. 어떤 사람은 탐욕 따위가 두텁고 무거워서 항상 마음에 와 있으면 선정을 장애하거니와 만일 얇으면서 항상 있지 아니하면 장애가 되지 않는다.
또 경전 중에서
“10종의 세 가지씩의 나쁜 법은 모두 선정의 장애라 하며, 10종의 세 가지 씩의 깨끗한 법[白法]은 다 선정을 수순한다”고 하였다.
이른바 부처님의 말씀하신 바
“만일 세 가지 법을 끊지 아니하면 늙고 병들고 죽음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니, 탐심과 진심과 치심이다.
만일 세 가지 법을 끊지 아니하면 탐심과 진심과 치심을 끊지 못할 것이니, 몸에 대한 집착[身見]과 계에 대한 집착[戒取]과 의심[疑]이다.
다음에 세 가지 법이 있으니 삿된 생각[邪念]과 삿된 행[邪行]과 침체된 마음[沒心]이라.
다음에 세 가지 법이 있으니, 망녕된 기억[妄憶]과 개운하지 못한 지혜[不安慧]와 산란한 마음[亂心]이다.
다음에 세 가지 법이 있으니, 거들거림[調戱]과 감관들을 단속하지 않음[不守諸根]과 계행을 깨뜨림[破戒]이다.
다음에 세 가지 법이 있으니, 믿지 아니함[不信]과 삿된 계행[邪戒]과 게으름(懈怠)이다.
다음에 세 가지 법이 있으니 어진 사람을 반겨하지 않음(不喜善人)과 바른 법 듣기를 싫어함(惡聞正法)과 남의 허물 들추기를 기뻐함(喜出他過)이다.
다음에 세 가지 법이 있으니 공경하지 않음[不恭敬]과 함께 말하기 어려움[難可與語]과 나쁜 벗[惡知識]에게 배우는 것이다.
만일 세 가지 법을 끊지 아니하면 공경하지 아니함과 함께 말하기 어려움과 나쁜 벗을 끊지 못하리니 제가 부끄러움도 없고[無慚] 남부끄러움도 없고[無愧] 방일(放逸)하는 것이다.
만일 제가 부끄러움이 없음과 남부끄러움이 없음과 방일을 끊으면 공경하지 아니함과 함께 말하기 어려움과 나쁜 벗을 끊게 되며 내지 몸의 집착과 계행의 집착과 의심을 끊는다면 탐심과 진심과 어리석음을 끊어서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을 벗어나게 된다.
이 가운데서 늙고 병들고 죽음을 벗어난다 함은 남음이 없는 열반[無餘涅槃]을 말함이요,
탐심과 진심과 어리석음을 끊는다 함은 아라한의 결과로서 남음있는 열반[無餘涅槃]이며,
몸의 집착과 계행의 집착과 의심을 끊는다 함은 세 가지의 사문의 과위요,
삿된 생각과 삿된 행과 침체한 마음을 끊는다 함은 난(亂) 등의 통달한 위[通達位]의 착한 뿌리에 있는 것이다.
망녕된 생각(憶)과 개운하지 못한 지혜와 산란한 마음을 끊는다 함은 네 가지 생각하는 곳을 닦는다는 말이요
거들거림과 감관들을 단속하지 않음과 계행 깨뜨림을 끊는다 함은 출가의 계를 받는 것이며,
어진 사람을 기뻐하지 아니함과 바른 법 듣기를 싫어함과 남의 허물 들추기를 기뻐함과 믿지 아니함과 삿된 계율과 게으름과 공경하지 아니함과 함께 말하기 어려움과 나쁜 벗에게 배움과 제 부끄러움이 없음과 남부끄러움이 없음과 방일을 끊는다 함은 재가한 이의 청정을 말한다.
왜냐하면 만일 사람이 홀로 있으면서 나쁜 짓을 하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을 제 부끄러움이 없다 하고
이 사람이 뒤에 차츰차츰 나쁜 마음이 더 늘어서 대중 가운데서 나쁜 짓을 하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을 남부끄러움이 없다 하고,
착한 법의 근본인 두 가지 깨끗한 법을 잃기 때문에 항상 나쁜 법에 따르는 것을 방일(放逸)이라 하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 나쁜 법을 성취함으로써 높으신 스승의 교훈을 받지 않으면 공경이 없다 하고
도리어 스승의 교훈을 어기면 함께 말하기 어렵다 하며,
그와 같이 하여 스승을 멀리하고 나쁜 사람을 가까이 하면 나쁜 벗에게 배운다고 한다.
이 가운데서 제 부끄러움이 없음으로부터 공경없는 일이 생기고 남부끄러움이 없음으로부터 함께 말하기 어려움이 생기며 방일로부터 나쁜 벗에게 배우는 일이 생기기 때문에 믿지 않게 되고 삿된 계법을 받으면 항상 게으르게 되며, 나쁜 사람에게 친근하면 그를 가르쳐서 믿지 않게 하면서 나쁜 짓을 하여도 과보가 없다고 말한다. 혹은 나쁜 짓을 하면 과보를 받게 된다는 것을 들으면 곧 닭이나 개 등의 법을 받아 행하면서 빨리 죄 없어지기를 희망하며 이 법을 받아 행하여도 이익이 있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게으름을 낸다.
게으르기 때문에 어진 사람을 좋아하지 않으면서 “진실하게 바른 행을 하는 이가 없다”고 말하며 또한 바른 법 듣기를 싫어하면서 “바른 법을 행하여도 다 삿된 법과 같이 이익되는 것이 없다”고 말하며, 마음이 혼탁하기 때문에 남의 허물 들추기를 좋아하면서 다른 이의 행하는 법도 모두가 자기와 같이 도무지 얻는 바가 없다”고 한다.
이와 같이 번뇌를 억제할 수 없기 때문에 마음은 거들거리게 되고, 거들거리기 때문에 감관들을 단속하지 못하면 계행을 깨뜨리게 된다.
계행을 깨뜨리기 때문에 망녕되이 생각을 내고 행은 지혜를 개운하게 하지 못하며, 마음은 산란하여 삿된 생각을 내고 삿된 생각을 내기 때문에 삿된 도를 행하며 삿된 도를 행할 때에는 이익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이 헷갈리게 된다.
마음이 선명하지 못하기 때문에 세 가지 번뇌[結]를 끊지 못하고 세 가지 번뇌를 끊지 못하기 때문에 탐심 등의 번뇌와 질병 등의 모든 쇠약한 일을 끊을 수 없게 된다. 이것과 서로 반대되는 것을 깨끗한 법이라 한다.
또 근심하는 것이 선정의 장애가 된다.
수행하는 이는 생각하기를
“나는 그렇게 많은 세월 동안에도 선정을 얻지 못하는구나”라고 한다. 그
러므로 근심 걱정을 하게 된다.
또 기쁜 맛에 탐착하는 것 역시 선정의 장애이다.
또 즐겁지 않은 마음이 선정의 장애가 되는 것이 있다.
비록 좋은 곳과 어진 스승 등의 인연을 얻었다 하더라도 마음은 역시 즐겁지 아니하다.
또 탐욕 등의 모든 번뇌[蓋]를 다 선정의 장애라 한다.
요약하여 말하건대 의복과 음식들까지도 선근을 감손하고 불선을 조장하면 모두 선정의 장애라 한다. 마땅히 깨달아서 힘껏 버리려고 해야 한다.
12.33. 지관품(止觀品)
[문] 부처님은 여러 경전 중에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시되,
“만일 아련야(阿練若)에 있거나 나무 밑에 있거나 혹은 빈 데에 있거나 간에 응당 두 가지 법을 생각해야 하리니, 이른바 지(止)와 관(觀)이니라”고 하셨다.
만일 온갖 선정 등의 법으로서 모두 다 생각해야 한다면 어찌하여 지와 관만을 말하는가?
[답] 지는 선정을 말하고 관은 지혜를 말한다.
온갖 착한 법을 닦는 데서부터 생기는 것은 이 두 가지에 속하며
그리고 흩어진 마음에 있는 듣고 생각하는 등의 지혜도 역시 이 안에 포함되어 이 두 가지 일로써 도법을 이룩한다.
왜냐하면 지는 번뇌를 막고 관은 끊어 없애기 때문이다.
지는 풀을 붙잡는 것과 같고 관은 낫으로 깎는 것과 같으며
지는 땅을 청소하는 것과 같고 관은 똥을 치는 것과 같으며
지는 때를 문지르는 것과 같고 관은 물로 씻는 것과 같으며
지는 물에 불리는 것과 같고 관은 불에 익히는 것과 같으며
지는 종기에 달라붙는 것과 같고 관은 칼로 째는 것과 같다.
지는 맥을 짚는 것과 같고 관은 피를 따내는 것과 같으며
지는 마음을 억제하고 관은 너무 착잡한 마음을 일게 하는 것과 같으며,
지는 금(金)을 거르는 것과 같고 관은 불에 녹이는 것과 같으며
지는 먹줄을 퉁기는 것과 같고 관은 대패로 미는 것과 같으며
지는 족집게로 가시를 뽑아내는 것과 같고 관은 삭도로 머리를 깎는 것과 같으며,
지는 갑옷과 같고 관은 병기와 같으며
지는 반듯이 서는 것과 같고 관은 화살을 쏘는 것과 같으며
지는 옷에 묻은 때와 같고 관은 약으로 지우는 것과 같으며
지는 흙을 고르는 것과 같고 관은 도장을 찍는 것과 같으며,
지는 금을 다루는 것과 같고 관은 그릇을 만드는 것과 같다.
또 세간 중생들은 모두가 고통이거나 즐거움의 양쪽에 떨어지거니와 지로는 즐거움을 버리고 관으로는 고통을 여읜다.
또 7정(淨) 중의 정[戒淨]과 심정(心淨)은 지라하고 나머지 다섯 가지는 관이라 한다.
8대인각(大人覺) 중의 여섯 가지 각은 지라하고 두 가지 각은 관이라 한다.
4억처(憶處) 중의 세 가지 억처는 지라하고 넷째 억처는 관이라 한다.
4여의족(如意足)은 지라하고, 4정근(正勤)은 관이라 한다.
5근(根) 중의 네 가지 근은 지라하고, 혜근(慧根)은 관이라 한다.
5력(力) 또한 그와 같다.
7각분(覺分) 중의 세 가지 각분은 지라하고, 세 가지 각분은 관이라 하며, 염(念)각분은 두 가지에 다 속한다.
도분(道分) 중의 세 가지 갈래는 관이라 하는데 계는 또한 지에도 속한다.
또 지는 탐욕을 끊고 관은 무명을 제거한다.
경전 중에서
“지를 닦으면 마음을 닦는 것이요, 마음을 닦으면 탐욕의 느낌[戒]이 끊어지며 관을 닦으면 지혜를 닦는 것이요, 지혜를 닦으면 무명이 끊어진다”고 함과 같다.
또 탐욕을 여의기 때문에 마음이 해탈을 얻고 무명을 여의기 때문에 지혜가 해탈을 얻는다.
두 가지 해탈을 얻으면 다시는 그 밖의 일이 없기 때문에 두 가지만을 말한 것이다.
[문] 만일 지와 관으로 마음을 닦고 지혜를 닦으며 마음과 지혜를 닦기 때문에 탐욕과 무명을 끊는다면
무엇 때문에 결정을 지어서 지는 마음을 닦아서 탐애도 끊고 관은 지혜를 닦아서 무명을 끊는다 하는가?
[답] 마음이 산란하면 모든 마음은 물질들 속에서 상속하고 이 상속하는 마음이 지(止)를 얻으면 쉬게 되기 때문에 지는 마음을 닦는다고 말하고,
마음을 쉼에서부터 지혜를 내기 때문에 관은 지혜를 닦는다고 말하게 된다.
한 번 관을 내게 된 다음부터는 닦는 것마다 다 지혜를 닦는다고 말하게 되므로, 첫 번의 지혜도 관이라 하고 다음의 것도 지혜라 한다.
만일 경전 중에서
“지를 닦아서 탐욕을 끊는다”고 하면 그것은 막아 끊음을 설명한 것이다.
어떻게 그런 줄을 아는가?
물질 등의 바깥 욕심 안에서 탐심을 내는데 만일 지의 즐거움을 얻으면 다시는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경전 중에서
“수행하는 이가 깨끗한 기쁨을 얻을 때에는 깨끗하지 못한 기쁨은 버린다”고 함과 같다.
만일 무명을 끊는다고 말하면 그것은 영구히 끊는 것이다.
어떻게 그런 줄을 아는가?
무명이 끊어지기 때문에 탐욕 등의 모든 번뇌는 아주 끊어져서 남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경전 중에서
“또한 탐욕을 여의기 때문에 마음이 해탈을 얻는다고 설명함은 그것을 막아 끊음이라 하고,
무명을 여의기 때문에 지혜가 해탈을 얻는 것은 그것을 영구히 끊음이라 한다”고 하였다.
또 두 가지의 해탈이 있으니, 시해탈(時解脫)과 불괴 해탈(不壞解脫)이다.
시해탈은 바로 막아 끊어진 것이요, 불괴해탈은 영구히 끊어진 것이다.
[문] 시해탈은 바로 5종 아라한의 샘이 없는 해탈이요, 불괴 해탈은 바로 무너지지 않는 법의 아라한의 샘 없는 해탈이거늘 무엇 때문에 막아 끊는 것만을 말하는가?
[답] 이것은 샘 없는 해탈이 아니다. 왜냐하면 시해탈은 지의 힘만으로 잠간 동안 번뇌를 막았을 뿐 아직 영영 끊지는 못한 것이요, 뒤에 도로 일어나기 때문에 샘 없는 것이 아니라고 하기 때문이다.
또 이 해탈은 시애해탈(時愛解脫)이라고도 하는데 샘이 다한 아라한에게는 사랑할 만한 것이 없다.
[문] 만일 그렇다면 성인이 사랑할 바의 계율은 없는가?
[답] 배울 것 있는 이들은 샘이 아직 다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나라는 마음이 때때로 일어나는지라 이 때문에 계율에 대하여 사랑을 내거니와
아라한은 나라는 마음이 아주 없어졌기 때문에 애욕을 내지 아니한다.
[문] 구제(瞿提) 아라한은 시해탈에서 여섯 번 물러나게 되었으므로 일곱 번째에는 또 물러나게 될까 두려웠기 때문에 칼을 가지고 자살까지 하였다.
만일 샘 있는 것을 잃었다면 자살하지 않았어야 한다. 그러므로 시해탈은 샘이 있다고 하지 않는 줄 알겠다.
[답] 이 사람은 수용하던 번뇌 끊는 선정을 잃었었고 이 선정 안에서 여섯 번이나 물러나게 되자 일곱 번째에는 도로 그 선정을 얻고서 이내 자살하려 하였는데, 그때에 바로 아라한의 도를 얻었었다.
그러므로 악마왕[魔王]은 “배우는 이가 죽었다”고 하면서
시체의 사방을 돌아다니며 두루 그의 식(識)을 찾다가 와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는 아직 샘도 끊지 못하고서 죽었습니까” 하였다.
부처님이 말씀하시되
“그 사람은 이미 애욕의 뿌리를 뽑고 열반에 들었느니라”고 하셨다.
[문] 만일 탐욕 끊는 것을 막아 끊는 것이라 하면
경전 중에서 말하기를
“탐심으로부터 해탈을 얻고, 진심과 치심으로부터 해탈을 얻는다”고 하였다.
또 말씀하기를
“탐심의 기쁨을 끊기 때문에 마음은 좋은 해탈을 얻는다”고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욕심 세계의 샘[欲漏]으로부터 마음은 해탈을 얻는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것은 다 임시의 해탈이라 하고, 진실한 해탈이 아니어야 할 것이다.
[답] 그 중에서도 무명의 끊어짐을 말하였기 때문에 이것은 마지막 해탈로 알 것이다.
만일 탐욕 끊는 것은 혹은 임시 끊음이라고도 하고 혹은 영구한 끊음이라 한다면
참된 지혜를 내지 못하는 동안은 임시의 끊음이지만 참된 지혜를 냄에 따라서 이것은 영구한 끊음이다.
지(止)로써 영구히 탐욕을 끊을 수가 없다.
만일 그렇다면 외도로 영구히 탐욕을 끊을 수가 없다.
만일 그렇다면 외도도 영구히 탐욕을 끊을 수 있을 터인데 사실은 그렇지 못하다.
그러므로 알아라. 임시로 끊는 것뿐이다.
[문] 경전 중에서
“지로써 마음을 닦고 관에 의하여 해탈을 얻으며, 관으로써 마음을 닦고 지에 의하여 해탈을 얻는다”고 하였다.
그 일은 어떠한가?
[답] 수행하는 이가 만일 선정으로 인하여 적멸을 반연하는 지혜를 내면 이것을 지로써 마음을 닦고 관에 의하여 해탈을 얻는다고 하며,
만일 흩어진 마음으로써 음계입(陰界入) 등을 분별하며 이로 인하여 적멸을 반연하는 지를 얻으면 이것을 관으로써 마음을 닦고 지에 의하여 해탈을 얻는다고 한다.
만일 염처(念處) 등의 통달하는 갈래를 얻어서 마음을 껴잡으면 지와 고나을 함께 닦는 것이다.
또 수행하는 이들은 모두가 이 두 가지 법에 의하여 마음을 없애는 해탈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