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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군대 이야기
“군대 안 갔다오면 사람 새끼 아이다!”, “절대 빨갱이는 하지마라!”를 약주만 하시면 달고 사셨다. 논산훈련소에서부터 운전병 하셨다는데, 늘 큰 차만 모셨단다. 운전을 잘 하셔서 높은 분들 승용차나 짚차를 몰 기회가 많았었는데, 한 번도 몰지 않으셨단다. 아니다. 53년에 한 번 딱 몰았다셨다. 전쟁 중이라 어쩔 수 없이 연대장 차를 몰았는데, 그날 사고가 나버려 김해의 육군공병학교로 후송되셨단다. 전우들이 중공군에, 인민군에게 죽어가는데 사나이로 태어나서 쪽팔리게 후송되었다고 자살까지 생각하셨단다. 근데 큰 일대 사건이 생겼다. “모친 별세 급거 귀향 요망!” 전보가 전쟁 중이라 늦어진 탓에 당신께서 꺼이꺼이 목메어 울며 사랑하셨던 어머님의 임종을 보지 못한 것이다. 전쟁의 상흔과 어머님의 임종을 보지 못한 천형으로 아버지는 정신병자가 되셨다.
“부모불효 사후회”, “소불근학 노후회”를 늘 읊조리셨다. 회심곡을 틀어놓고 우시다 한 대지비, “불효자는 웁니다!” 한곡 부르시고 한 대지비, 그렇게 악으로 깡으로 술을 사랑하셨다. 담배 함부로 끊는 놈, 술 함부로 끊는 놈은 사람새끼가 아니라고 하셨다. 출세가 아니라 입신양명해야 한다고 하셨다. 벼슬에 나가려면 고운 최치원 선생님이나, 연암 박지원 선생님 정도 퇴수의 각오가 늘 되어 있을 때 나가라고 하셨다. 두 분은 공교롭게도 안의태수를 지내셨다. 연암도 별로 안 치셨는데 북학파라서 사대주의자라 하셨다. 다산도 하치라셨는데 그가 천주학에 빠졌기 때문이라셨다. 차라리 약전이가 낫다고 하셨다. 우리 수산대를 일본놈들(41년 관립)보다 훨씬 먼저 만든 게 약전이란다. 왜 그가 자산도에 귀양 가서 '자산어보'를 썼기 때문이란다. 나 말고는 아버지 구라를 아무도 몰랐다. 그래서 선친은 늘 예뻐하셨다.
아버지의 자식 차별
우리 일족 중에서 내가 가장 가방 끈이 길다.
장남 유국태(65년생) 김해농고 1년 중퇴. 검정고시 책만 사다 놓고 늘 술과 씨름하신다. 그것도 말술로.
차남 류광태(67년생) 김해고, 부산수산대학교 12학기(수산의대) 등록 후 꼴찌다음으로 졸업, 부경대 정치언론학과 3년만에 졸업 차석(?) 졸업(논문을 안 쓰고 졸업해서 사실은 나이롱이다.) 울 아들은 4.38의 졸업평점을 가볍게 비웃는다. 야간에 밤이슬 맞으면서 교수들과 술 먹고 딴 학점이란다. 사실이다. 원래 씨도둑질 못한다고, 애비 닮아 독설가다.
유혜정(69년생-호적상) 김해여중, 태광실업 산업체 부설학교 야간부 상과 1년 중퇴. 울 혜정이도 가출 소녀다. 아버지가 한일여실 야간 가라 캤는데, 권력과 돈이 좋은 지 태광실업 야간 가서 졸업 못했다. 지 운명이다.
류원정(72년생-호적상) 한일여실 야간부 문과(?) 졸업. 한국 최고 명문 방통대 중퇴.
아버지가 제일(?) 사랑한 딸이다.
유열림(또끼띠, 일명 모심기띠) 한일여고 야간부 상과 중퇴. 효도한다고 바빠서 검정고시책은 늘 먼지가 그득했다가, 최근 만학으로 명문 마산고를 졸업했다.
* 잠깐 또 삼천포로 간다. 아버지는 나한테만 늘 사천성이라고 표현하셨다.
아버지는 늘 가방끈이 짧은 사람 편이셨다. 그래도 한학을 하셨는지라 한학자들과 교유가 깊었다. 그렇지만 실학자의 후손이라 ‘이용후생’ 하셨다.
세상에 대한 울분이 많아 늘 말술이셨지만(충은 했는데 효를 못한 것), 섬세하고 자상하고 인자하신 분이셨다. 유학과 실학을 하신 분이라 붙어드실 때도 제법 있었지만 오래 하지는 않으셨다.
자식 인물평
장남: 무가 승하고, 상에만 강하고 야망만 커서 그릇되게 간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놈이다. 쿠데타 세력의 주구가 될 위험성이 있다. 그러나 결은 니보다 좋은 아다. 가가 니보다 노래 기교는 낫다. 울 형은 김해시, 군 노래자랑대회 주촌면 대표 출신이다.형은 간이 배밖에 나온 분이라 불 같은 성격이 장난이 아니지만, 노래할 때는 결이 참 고운 분이다.
중학교 은사 송정 선생(노무현, 박연차 섹서폰 선생. 새총놀이 하다가 애꾸눈이 되어 사람을 지휘봉 안테나로 막 때리시는 분이다.) 심사위원장으로 나오시자 심약해져서 김범용의 '바람 바람 바람'을 부르다 박자를 놓쳐서 땡했다. 노래자랑대회에 지각할 까봐 자연을 멋삼아 휘적휘적 걷는 것과 짐 자전차밖에 모르던 분이 처음으로 내 등 뒤를 꼭 잡으시고, 오트바이를 타셨다. 내 작은 효도였다. 가끔 멋을 내실 때는 중절모까지 쓰시는 신식빠이롱 멋쟁이셨는데, 대회장에 가실 때는 재건국민복에 새마을모자를 쓰셨다. 소작농임에도 농민임을 늘 자랑스럽게 생각하셨다. '농자천하지대본'. 울 아버지가 제일 좋아하는 표현이다. 그날은 술 안 하시기로 공약하셨는데 빌 공자가 되어버렸다. 차별하는 장남이 떨어져서 자셨다고 우기셔서 엄마랑 또 대판 했다. 모친이 김해 김씨라 우리집은 한판 붙으면 집이 다 거덜난다. 근데 늘 져주셨다. “내가 왕녀를 우째 이길꼬!” 하셨고, 때론 백말띠한테 쥐가 우째 당할꼬!”하시며 슬며시 꼬리를 내리셨다. 아버지의 무능을 자책할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여자 이기는 거하고는 상종도 하지 마라!” 하셨다.
차남: 문이 승하고, 무는 국태보다 못하다. 그래서 좋다. 권투 글러브를 통해 명문 김해농고 권투부(귀띠이 새파란 1학년 때 경남도대표) 스파링 파트너로 단련시키셨다. 난 모래로 가득 채운 샌드백을 치지 않아서 늘 혼났다. 말랑말랑한 스프링 펀치볼이 이상하게 좋더라. 그래서 나는 호색한이다. 호색하는 건 좋은데, 늘 화대 주고 하라고 하셨다. 혼또를 좋아하셔서 홍안사(비구승이 있는 절. 양동산성 아래 있다.) 비구승이나 수녀님, 내삼교회 전도사 사모님을 범할 정도 배짱이면 그것도 (백주대낮에 벌판에서) 남의 년을 건드리라 하셨다. 그렇지 않으면 차라! 또 아이면 모, 예쓰까? 노까? 아버지는 가방끈을 문과 위주로 주셨다.
아들 둘이는 그래도 호적에 바로 올려주셨다. 그것도 음력으로! 그래서 나는 생일을 두 번 한다. 자손 대대로 일관되게 사랑해온 술 먹고 싶어서!
장녀: 간이 배밖에 나온 년이다. 큰 일 낼 년이다. 기갈이 세서 걱정이다. 근데 속정은 많다. 그래서 나는 혜정이가 제일 좋다 하셨다. 혜정이는 아버지 서거 후 동네 앵콜대회에 나가 한혜진의 '갈색추억'을 가슴으로 불러서 대상을 받아 그 때 당시 제일 큰 냉장고를 엄마한테 선물한 년이다. 가시나는 숟가락만 잡아도 장구를 친다. 우리집은 쩨쩨하게 안 산다. 화통하게 산다. 젓가락으로 장단 안 맞춘다. 가끔씩 울 엄마는 장고를 치시지만! 아버지는 장고만 잡으시면 깃발 날리셨다. 그래서 울 아버지는 여성팬이 많았다. 술 먹고 온갖 폐악을 져도 아버지한테 잘 안 해주는 여자들은 거의 없었다. 아버지는 사고도 대장, 사과도 늘 대장이셨다. 술 드신 다음 날은 꼭 면도하고, 의관을 정제해서 사과 방문 하셨다. 사과를 가끔씩 거부한 자들은 내가 죽창 들면 꼭 찔러 죽일 거다. 왜냐면 그들은 대부분 남들에게 기생하는 기생충이거나 밥버러지들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그런 고결한 분이셨다. 한결같은 분이셨다. 꽃을 함부로 꺾지 말고, 꽃으로도 사람을 때리지 마라 하셨다. 그래서 울 아비는 좌익을 싫어하셨다.
차녀: 심성이 너무 고운 아다. 꼭 가방끈 길게 해주고 싶은데, 내 자존심이 허락 안 한다. 나도 야를 참 좋아한다. 우리집은 애비, 애미를 닮아서 다 글재주가 좋은 편이다. 딸 중에서는 야가 제일 필력이 좋다. 나도 인종차별주의자라 야를 제일 귀히 여기셨다. 아버지는 그만큼 무보다는 문을 사랑하신 분이다. 야도 진짜 효녀다. 90년 아버지 서거 후 큰오빠를 함부로 아버지잽이라고 늘 씨부리고 다닌다. 내 5, 6학년 때 은사셨던 밀양 수산 출신이신 박세열 선생님이 담임을 하신 덕에 학적부에만 야하고 나만 ‘류’로 바로잡혀있다. 야도 호적에는 ‘유’로 되어있다. 아버지는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양 효지시야” 늘 달고 사셨다. 나하고 야한테만. 다른 자식들에게는 “함부로 뜯어고치면 안 된다!”라고만 하셨다.
막둥이: 울분과 열정이 많아서 주체를 잘 못 한다고 하셨다. 모심기 할 때 낳아서 내가 모심기띠라고 늘 놀렸는데, 놀리면 빙그레 웃으시면서 놀리고 나면 늘 업어주라 하셨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시며. 그래서 제일 많이 업어주었다. 늘 바쁘신 엄마 대신에. 토끼라서 심성이 제일 좋다 하셨다. 니는 양이라서 좌익을 하면 양처럼 더럽게 변할 운명이라고 하셨다.
울 아버지는 인간 차별의 화신이다. 나만 사람 취급했다. 내만 서당에 갔었고, 한학을 했다. 따라가 한학하면 집안 망친다고 서당 출입을 못하게 하셨다. 물론 세경은 늘 아버지 노가다였거나 보리쌀이었다. 좁쌀로 바친 적도 있다. 무능하시고 차별이 심해서 자식 중 4할이 가출했다. 형은 북파공작원도 하셨다. 우리집은 일일삼성을 기본으로 했는데, 다들 다독, 다작, 다상양하는 편이다. 그 중에서 내가 문재가 제일 낫다셨다. 울 엄마는 유학이 밥 미 주나를 달고 사셨다. 상재가 뛰어난 어머님은 유학을 할려면 제대로 붙어무야지, 왜 하필 실학이냐시며 표독스럽게 아버지를 늘 공격하셨다. 그 때마다 내하고 둘째만 아버지 편이 되어 주었다. 그러면 "야야 됐다. 하나면 족하다. 니 엄마 편들어라. 여자는 약자다 ."하시며 남몰래 우셨다.
불멸의 혼 석기 아제
아버지하고 갑이시다. 죽이 척척! 술도 담배도 말도 걸디 건 분이다. 내 첫사랑의 아버지다. 나는 첫사랑이 수천명이다. 그때그때 다르다.
아버지는 2등과 3등을 좋아하셨다. 1등은 하지마라 하셨다. 교만해진다고. 가방끈 길이로 사람 힘들게 하면 지옥 가서 평생 책 심부름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럴 땐 가끔 불교신자셨다. 어느날 내가 실수로 1등을 해오자, 학교에 다녀오신 후 아버지는 자연산 원목 지게 작대기로 나를 패셨다. 무력도 출중하셔서 사람을 개패듯이 패시는 무자비한 분이다. 산수에 뺄셈과 나눗셈 잘 해서 겨우 이주현 (부산대 경영학과 졸업. 현재 참 교사이며, 남편은 부산대 경영학과 나오신 대학 선배다.)을 제끼고 해온 건데, 뺄셈, 나눗셈 잘 해서 약아빠지게 여자를 이겼다고(그것도 맨날 내하고 사돈 맺기로 한 니 장래 여편네를). 푹군처럼 군림하셨다. 그 다음부터 나는 늘 반과 전교에서 2,3등을 맴돌았다.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숫자셨기에. 그래서 공부 못하는 친구들과 놀 시간이 많아서 좋았고 행복했다. 낚시에 미쳐서 4등을 한 적이 있는데, 야구는 4번타자가 최고다 하시며 또 빙그레 웃어주셨다.
아버지는 양키 군부대 출신이시라 야구도 좋아하셨는데, 야구도 맨손으로 하라고 내가 그래 쫄라도 글러브 하나 안 사준 비정한 부친이다. 그러시면서도 늘 요소나 용성인비 비료푸대로 제일 크게 야구장갑을 만들어 주셨다. 그 땐 진짜 울고 떼썼다. 우니까 더 안 사주신다고 하셨다. 남자는 딱 세 번 울어라 해놓고 술만 드시면 늘 '불효자는 웁니다' 부르시면서 우시는 천하의 사기꾼이시다. 난 그래도 울 아버지가 좋다. 술 깨시면 늘 울지 않으셨으니까. 자신의 긍지와 자존심 때문에 애들을 불우하게 키워서 사랑하는 아내 고생 시키는 게 미안해서 술 안 드시고도 남몰래 늘 우셨다. 비닐하우스 뒤에서. 고목나무 아래서. 500년 된 포구나무 큰 구멍에 숨어서 꺼이꺼이 우셨다. 우리 어머이는 그런 아버지를 정말 사랑하셨다. 아버지의 고운 결을 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왕족이지만 소작농에게 시집와서 평생을 뼈빠지게 고생만 하신 ‘1등 제일주의자’ 울 어머님도 지극히 사랑한다.
그리고 나는 또 사랑한다. 권력은 늘 돈과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을 알게 해주신 소중한 분이시다.
아버님은 늘 그러셨다. 애미한테 잘 하라고. 인물은 못 나도 내가 거짓말해서 꼬셔서 결혼한 이유는 니 애미도 결이 좋은 사람이다 하셨다. 그래서 동네 어르신들이 무석이 술만 안 처무면 "무석이 부부가 가장 잉꼬부부"라고 하셨다. 그럴 땐 주로 개간을 할 때였다.
아버지는 개간을 좋아하셨다. 어머님도 내 손으로 뭔가를 새롭게 일구는 걸 좋아하셨다. 그 때마다 형은 늘 없는 편이었다. 원체 개구쟁이고 성격이 급해서 나가 노늘 걸 즐겨하셨기에. 그래서 아버지가 그냥 술, 담배만 좋아하시는 평범한 농사꾼으로만 알고 꼴랑 큰 소 두 마리 갖고 가출했다. 그 날 일기장에 그렇게 씨부려 놓았더라. 무식한 농사꾼이 가정은 안 돌보고 지 자존심만 챙기는 자라고. 개같은 소리를.
아버지는 시, 서, 화에 능하셨다. 개간을 하고 나면 어머니 주물러 주시면서 작대기로 소나무 한 그루를 그려주시거나 세상에서 가장 예쁜 당신이라며 매화를 그려주셨다. 그것도 단번에. 일필휘지를 좋아하셨다. 그럴 때면 울 어머니 얼굴에는 늘 고운 첫날밤의 새신부같은 미소가 스쳐지나가곤 했다. 한시도 하나쯤은 어머니 자존심 안 다칠 선에서 읊어주시곤 하셨다. 술 드시고 잃어버리셨지만(도둑이 가져갔던가?) 미군부대 부역을 하시면서 생긴 니콘 카메라도 한 없이 애끼셨는데, 애끼면 똥 된다고 술 드시고 헌납하셨다. 그 날도 천하의 이석기 아제하고 쐬주 꼴랑 대병으로 스무병 드셨다. 자연사랑이 지극하셔서 노상방뇨 하시다가 과태료 내셨다. 두 분다 뻔뻔한 분들이라 과태료는 잘 떼드셨다. 근데 술값이 떨어질 지언정 세금은 늘 연체하지 말라셨고, 몸소 보여주셨다. 그 애비에 그 아들이라고 본인은 차파리 출신이라 전국에 과태료 연체한 게 아직 수십장은 족히 남았을 거다. 차진구 처장님! 제발 좀 살리도. 소작농 아들도 정치 좀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