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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출가와 행자 수행, 그리고 동국대 시절
채인환
1.
나의 고향은 북한의 북강원도 원산이다. 1931년에 태어나서 1950년까지 그곳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성장했다. 고향집에서는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부모 밑에 4남 3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서 형제가 매우 우애 있게 지냈고 부모덕에 세상의 험한 꼴 모르고 유복하게 잘 살았다.
그래서 4살 되는 생일날부터 할아버지에게서 매일 「천자문」부터 배우기 시작하여 8세 때 원산 용동소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동몽선습 명심보감 소학 논어 맹자 등 한학의 기초를 착실히 닦을 수가 있었다. 할아버지는 채씨의 본관지인 강원도 평강에 선조 대대로 사시다가, 나라가 개화기로 접어들자 외부 문물의 유입처가 되어 한참 발전기에 들었던 원산으로 가족들을 이끌고 정착하였다.
그리고 미곡 도매상을 경영하여 생활기반을 다지셨고, 두 아들의 장남인 나의 아버지를 원산상업학교(5학년제)를 졸업시켜 원산에서도 유수한 사업가로 활약케 하였고, 차남인 나의 삼촌은 원산중학교(5년제)를 나와 일본에 유학시켜 동경의 메이지대학을 나오도록 뒷받침하셨던 선견지명이 있으신 어른이셨다. 키가 훨씬 크시고 흰 수염이 길게 허리까지 드리운 풍채로, 밖에 출입할 때는 반드시 갓을 갖추어 쓰시고 두루마기 차림이셨다.
생업에서 은퇴하신 할아버지는 어린 손자를 위하여 매일 오후 2시면 당신 방에 불러서 앉은뱅이책상 왼쪽 작은 접시에 왕방울만한 눈깔사탕 하나 놓고, 오른쪽에는 싸리 회초리를 놓고 어제 배운 것을 외워보라 하셨다. 막힘없이 좔좔좔 외우고 그 뜻을 풀이해서 말씀드리면, 끄덕 끄덕 점두하시고 그 다음을 새로 가르쳐 주시고는 마치고 나갈 때 눈깔사탕을 주시었다. 그러면 나는 사탕을 입안에 넣어 한쪽 볼이 불룩하도록 물고는 저녁 먹을 때까지 녹여 먹으면서 놀곤 하였다.
그러다가 단 한 번 실수한 일이 있었다. 어느 날 공부를 마치고 나오자 집밖 거리에서 갑자기 피리 북 꽹과리 소리를 요란하게 울리면서 한 무리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 소리에 끌려서 남사당패가 공연하는 장소까지 따라가서 정신없이 구경하다가 어두워져 저녁 먹을 때가 훨씬 지나서야 집에 돌아왔다. 늦은 저녁을 먹자 녹아 떨어져 잠이 들고 다음날 아침 늦게까지 늦잠을 잤으니, 공부할 시간이 충분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날 할아버지 앞에서 배운 것을 겨우 외우기는 하였으나 더러 더듬거리기도 하였더니, 그제야 “이 놈, 이리 오너라.” 하고 옆에 세워놓으셨다. 그리고는 종아리를 걷게 하고 회초리로 사정없이 세차게 세 차레 때리시고는 오늘은 공부 없으니 내일 다시 잘 제대로 외워 받쳐라하신 일이 할아버지에게 글 배우는 동안 한번 있었다. 소학교에 입학하자 할아버지는 얼마 뒤에 돌아가셨다.
나는 지금 돌이켜 보니, 소학교 6년 졸업하고 원상상업학교 5년 졸업할 때까지 가정에서 별일 없이 지난 것처럼 이 세상을 사는 모습이 모두 그런 것이려니 하고 생각하였으니, 참으로 세상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그야말로 철부지, 좋게 말한다면 천진난만, 달리 말한다면 천둥벌거숭이 같은 상태로 자랐다고 하겠다. 그러다가 마침내 1950년 6·25사변이 일어났고, 전쟁상태는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원산은 다음해에 1·4후퇴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다.
영화 「국제시장」의 흥남부두 철수작전 장면에서 볼 수 있듯이, 원산에서도 시민들이 생명 걸고 피난길을 찾는 아수라장이 벌어졌다. 군함으로 UN군이 철수하는 경로에 들지 못하였던 원사항구에서는 부둣가에 피난하려는 군중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으나, 겨우 일부사람들이 필사적으로 항구에 정박해 있던 어선이나 상선을 타고 원산항 영흥만의 외곽에 있는 여러 무인도까지 간신히 나와서 그 곳에 집결해 있었다.
날은 차츰 어두워지고 시작하고 항구의 배들은 거의 떠나가고 없는데, 항구부두의 끝 편에 아직 배가 남아있는 것이 눈에 띄어서 형과 둘이서 그 곳으로 달려가서 사람들을 헤치고 겨우 앞으로 나서니 사람을 가득 태운 작은 발동선이 막 떠나려는 참이었다. 옆에 있던 형이 먼저 훌쩍하고 배에 간신히 뛰어 들어갔고, 나도 뒤따라 뛰어들려는 찰나 발동을 걸고 있던 배가 떠나고 말았다. 그 순간 내 머리에는 저 배에 나도 타야만 한다는 일념뿐이지 이것저것 헤아릴 틈이 없었다. 갑자기 풍덩하는 물소리가 크게 일어났고, 부둣가 사람들이 일제히 “야! 사람이 바다에 빠졌다.” 외치고, 떠나가던 배에서 저 사람 건져가자 하는 사람들 외침에 가던 배가 잠시 멈췄고, 그 사이에 겨울옷차림 그대로 물에 빠진 사람이 헤엄쳐서 배에 닿았고 이어서 끌어올려졌으니, 그게 바로 나였다. 후에 절에 들어와서 ‘백척간두에 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라는 말이 있음을 알고, 바로 그때가 그것이었구나.’하고 납득하였다.
겨울바다에 뛰어들어 흠뻑 젖은 채 배로 끌어올려져 몇 시간 뒤에 한 무인도에 도착하였고, 그곳에는 먼저 나온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몸을 말리지도 못하고 젖은 채 한겨울의 강추위 속에 하룻밤을 얼어 지냈더니 양손 양발이 모두 지독한 동상에 걸리고 말았다. 그래서 걷지도 못하고 손을 쓰지도 못하고 있는 몰골이 하도 처량했던지, 한 중년부인이 아무런 약품이나 의료기구도 없는 형편이지만 이대로 두었다가는 손발을 잘라야하는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니 우선 응급조치로 민간요법이라도 해보아야하겠다면서 나를 치료해주었다.
그분은 귀하게 가지고 나온 얼마 안 되는 곡류가운데서 메주콩 얼마를 꺼내고, 또 갖고 있던 앞치마를 찢어서 작은 주머니 네 개를 만들어서, 그 주머니 속에 각각 한 홉 가량의 생콩을 넣고, 그것에 각각 양손과 양발을 넣게 하여 손목 발목을 묶어주었다. 이렇게 생콩 속에 손발을 넣고 약 24시간쯤 지나면서 부터는 동상에 걸려서 퉁퉁하게 부었던 곳에서 얼음물이 술술 빠져나오기 시작하더니 며칠 후에는 물이 다 빠져서 손발이 쭈그렁이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신기하였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내손을 보면서, 그때 만일 누군지 모르는 그 아주머니의 따뜻한 인정과 치료를 받지 못했더라면 지금 이 손을 잃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다시금 그분의 온정에 감사하고 있다.
이 섬에서 구조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1주일 후에 다행히 군함과 연락이 되어 군함에서 보낸 상륙작전용 배를 타고 군함에 수용되었고, 강원도 현 동해시 묵호항에서 내려졌다. 함께 배에 타고 나온 친형(동아대 명예교수)과 둘은 묵호항에서 강릉으로 걸어서 대관령을 넘어, 정선을 거쳐 제천으로 왔다.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겨우 중앙선 철도선로까지 도착했으나, 기차나 자동차 등은 다니는 것이 하나도 없었고, 도로에는 피난민 행렬이 이어져 있어 그 속에 합류하게 되었다.
피난 물결은 그야말로 남부여대(男負女戴)였다. 가족들은 서로 도우며 남으로 남으로 걸어가는 도중에, 때로는 산속에 숨어 있다가 먹을 것을 찾아 나온 북한군 패잔병들의 습격을 받기도 하였다. 그들은 피난민들이 지닌 얼마 안 되는 식량과 보따리를 털어가다가, 갑자기 쌕… 하는 소리가 나면 그대로 길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아마도 패잔병이 준동한다는 첩보에 접했던지, 미군 전투기가 다다다… 기총소사를 내뿜고 날아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패잔병들을 향해 쏘아대고 한 뒤에 한참 후 겨우 일어나 살펴보면 여기 저기 총탄 맞은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면서 그곳을 허겁지겁 피해서 달아날 수밖에 없는 처참한 상황이었다.
그때에 지옥이란 죽은 뒤에 있는 것만이 아니라, 지금 이 눈앞의 현실상황이 그야말로 생지옥이요 아수라 아귀의 삼악도가 펼쳐지고 있으니, 이 세상에는 이런 세계가 또 하나 있다는 것을 깊이 느꼈고, 그런 세상을 살아서 생생하게 보고 겪었던 것이다. 그런 봉변을 당하면서 죽지 않고 살아남은 모진 목숨은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는 남쪽을 향해 가면서 밥을 얻어먹고, 그것도 없으면 물 있는데서 물배를 채우며 가다가 혹 빈집이 있으면 들어가 그대로 골아 떨어져 자고, 때로는 며칠씩 쉬기도 하면서 걷고 걸어서 대구근방에 도착했다.
그때 풍문에 대구를 통해서 들어가는 해인사에는 북한 게릴라부대가 점거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래서 대구에서 마산 쪽으로 가다가 화원·영산·진영을 거쳐 구로다리를 건너 마침내 최종 목적지인 부산에 들어간 것은 57년 초여름쯤이었다. 부산에서 수소문 끝에 다른 피난 경로를 통해 먼저 영도에 게시던 부친과 상봉하였으니, 가족 가운데 성인 남자 셋만이 피난할 수 있었고 나머지 가족들은 고향에 남아 이산가족이 되었다.
부친과 형은 오랫동안 가족들을 염려하면서 이상가족 상봉의 기회가 있을 때마다 꾸준히 신청하였으나 끝내 상봉의 희망을 이루지 못하고 얼마 전에 두 분이 다 돌아가셨다. 피난처인 부산에서 부자 셋이 일시적으로 만났으나, 함께 지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제각기 살길을 찾아야만 했고, 그래서 나도 혼자서 닥치는 대로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52년을 맞게 되었다.
2.
52년 여름에 우연히 부산 토박이 할머니 한 분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이야기 끝에 피난할 때 아수라 아귀 지옥 세상을 보고 겪었다는 감상을 말했더니, 할머니는 끝까지 조용히 들어주시고는.
“학생 지금 심정이 그러하거든 불도를 닦아볼 생각이 없느냐?”
고 물으셨다. 나는 그 때까지 불교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었던 터라,
“할머니, 불도란 어떤 것이며 어떻게 닦는 것인가요?”
하고 물었더니, 할머니는 간단하게 불도수행 즉 참선에 관하여 설명하시었다. 그리고는,
“내가 열흘 후에 참선 수행하는 선원이 있는 절에 갈 것이니, 그동안 잘 생각해서 결심이 되면 안내하여 함께 갈 용의가 있네.”
하셨다. 그때는 몰랐지만 이 할머니는 부산의 부유한 집안의 어른이며, 장성한 아들들이 부산 유수의 사업가로 활약하고 있으며, 할머니는 불심이 장하셔서 부산의 대표적 선원 몇 곳을 후원하고 있는, 이른 바 부산불교의 대보살님임을 뒤에야 알게 되었으니 나는 불교에의 좋은 안내자를 만난 것이다.
할머니하고 헤어진 뒤에 열흘 간 내 딴에는 여러 가지로 진지하게 생각하여 고민하였으나 아직 결심하지 못한 채 약속한 열흘 되는 날 아침 전화를 받았다. 그 노보살님이,
“학생 그래 결심이 섰느냐?”
하는 말 한마디에 나도 모르게
“네, 할머니 따라겠습니다.”
하고 얼른 대답하였다. 노보살님을 따라간 곳은 부산진 서면에서 산 쪽의 백암산 중허리에 있는 선암사라고 하는 소림선원이 있는 절이었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역사는 신라의 원효·의상대사가 활약하던 시기에 창건된 유서깊은 고찰이며, 근대의 일제강점기 말에는 경허스님의 제자로 유명하였던 선지식의 한 분이신 혜월대선사가 주석하여 크게 부산불교신도들을 교화하신 절이었다.
이곳에 범어사 계통의 연봉스님이 해방 이후 주지로 있다가 일사후퇴로 피난민들이 부산에 몰리며 전국의 유명한 선원의 이름 있는 선객들도 부산에 모이게 됨에 그분들이 정진할 선원이 필요하게 되자, 당시의 불교경남교무원에서 주선하여 연봉주지가 피난 온 선원 수좌들에게 선원 사찰로 넘겨줌으로써 제방의 선지식들과 수행납자들이 이곳에 모여 치열하게 참선정진하는 선원으로 소문난 사찰이었다.
이 선원의 큰 후원자였던 노보살님을 따라 음력 7월의 여름날 아침에 땀을 흘리면서 산길을 올라갔다. 이 선암사가 현재는 절 바로 밑까지 아파트촌이 가득 차 있으나, 그 당시만 하여도 산 아랫마을인 당감동에서 절까지의 약2키로 정도 되는 산길에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들어차 있어서 대낮에도 어두컴컴한 좁은 산비탈 길을 올라가야했다.
처음으로 아무것도 모르고 따라 나섰지만 절에 가서 앉고 보니, 그 날이 바로 불교계 최대의 행사 중 하나인 임진년 음력 7월 보름으로 조상천도의 백중날이고, 선원의 여름안거가 해제되는 날이었다. 절에는 백중법회에 참석한 신도들이 가득하였다. 약 백 명 정도 수용하는 법당에는 선원에서 정진하다가 하안거 해제를 맞은 45명의 수좌들이 앉아 있었고, 한편에는 약 60여 명의 신도들이 들어가 있었으며, 나머지 4백여 명의 신도들은 법당 앞마당에 덕석을 깔고 머리위에는 검은 차양을 친 자리에 앉아있었다.
나는 늦게 갔어도 노보살님 덕에 용케도 법당으로 들어가 기둥 옆에 앉아서 호기심어린 눈으로 무엇이 벌어지는지 하고 긴장한 채 법회에 참석하였다. 법회는 순서대로 「천수경」 독송하고, 불전에 공양을 올리는 예경이 끝난 다음에 법당 가운데에 차려진 법상에 소림선원의 조실스님이신 향곡대선사가 법상에 등단하셨다.
그 당시의 그 법상이란 요새 각 사원에서 사용하는 것 같은 조각으로 장식된 튼튼하고 훌륭한 붙박이 법상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보통으로 쓰는 네발만 달린 허술한 상을 임시로 가져다 놓고, 그 위에다 흰 보자기를 덮어서 다리를 가린 참으로 허술한 법상이었다. 몸집이 남달리 우람한 향곡스님이 올라앉으시자 법상은 찌그덕거렸고, 몸을 흔들 때마다 금시 무너질 듯 불안하였다.
그러나 향곡스님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법대로 주장자를 들어 보이시고는 세 번을 주장자로 법상을 소리 나게 울린 뒤에 아주 우렁찬 목소리로,
“창천(蒼天) 창천.”
하고 외치시더니,
“그래 임진년 여름안거 정진을 마치고 오늘 해제를 맞이하는 선원 대중들 가운데 누가 이 뜻을 바로 아는 이가 있는고? 있거든 한마디 일러라.”
하셨다. 그러자 선원 대중 가운데서 키가 큰 중년의 한 스님이 자리에서 일어나 뭐라 뭐라고 대답하였으나, 문외한인 나는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대답을 듣자 법상의 향곡스님은 한마디 하셨다.
“그것 가지고는 안 되지.”
하시니까, 그 스님이 그 자리에서 달려 나와 향곡스님이 앉아 계시는 법상 밑에 한쪽 어깨를 들어 밀어 넣더니 법상에 앉은 향곡스님과 함께 훌렁 뒤집어엎으려 하였다. 그냥 있었으면 사단이 벌어질 순간이었으나, 법상에 앉은 향곡스님은 조금도 당황함이 없이, 그 스님의 등을 주장자로 가볍게 탁하고 내려치고는,
“안 돼. 안돼! 그것 가지고는 안 된다니까.”
하시니 그제야 그 스님은 어깨를 빼고 뒤로 몇 발짝 물러서더니 선채 합장하고 허리 굽혀 예를 올린 뒤에 제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그러한 선의 법거량을 바로 앞에서 지켜보고 있던 나는 그 순간 말할 수 없는 커다란 감명을 받았다. 법상의 조실스님과 젊은 스님의 문답과 행동은 내가 보기에는 조금도 가식이 없고 서로 칼을 맞대고 진검승부하는 기백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때에 나는 ‘아, 아. 이 세상에는 또한 이렇게 목숨 걸고 진실을 추구하는 참된 세계가 있는 것이로구나! 그렇다면 이 세계에 나의 모든 것을 걸만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순간적으로 출가 수행할 결심을 굳혔던 것이다.
그러자 향곡스님은,
“정진하는 수행자들에게 있어 화두 타파하여 견성하였을 때가 진정한 해제라 할 것이니 물리적 숫자에 불과한 결제니 해제니 하는 말에 구애받지 말고 꾸준히 계속해서 열심히 정진하기를 바랍니다.”
하는 말을 하였는데 나는 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법회가 끝난 뒤에 신도들과 함께 대중공양을 마치자 노보살님이 조실스님에게 인사하러 가자고 챙기신다. 뒤를 따라 조실방에 가서, 마침 점심 공양 마치고 앉아계시는 스님에게 아직 제대로 큰절 할 줄도 모르던 나는 노보살님 절하는 모습을 곁눈질로 보며 그대로 따라 삼배를 하였다. 노보살님이,
“이 학생이 불도수행 하겠다고 해서 같이 왔습니다.”
하고 말씀하시니, 향곡스님이 한 동안 아무 말 없이 물끄러미 나를 보고 계시더니 아주 쎈 경상도 사투리로,
“니, 뭘라꼬 중노릇 할라카노?”
하고 물으셨다. 그때 참으로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속담처럼 한마디 대답하였다. “네. 그 ‘창천, 창천’ 하는 것 알고 싶어서 절에 있으려고 합니다.”
라고 대답하였더니, 다시 더 말씀 없이 가만히 계시는 것을 보고 노보살님이 내 옆구리를 찌르면서 이만 인사드리고 나가자는 눈짓을 하셨다. 다시 삼배를 올리고 나가서 법당 앞 커다란 은행나무까지 가니, 노보살님 말씀이
“학생, 선원에서는 본래 있겠다고 해서 환영하는 법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가지 않는 사람을 내쫓는 법도 없어요. 여기까지 안내하여 왔으니, 이제부터는 학생이 하기 나름이요. 마음 바꾸지 말기를 바라며 나는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하니, 잘 견디어내기를 바란다.”
고 격려하고는 떠나가셨다. 혼자 남아 우두커니 은행나무를 등지고 서 있었더니, 저쪽에서 한 어른스님이 이쪽으로 오시다가 나를 보시더니, 아마도 미리 사정을 들으셨던지,
“이 사람이 가지도 않고 이렇게 있네? 절 밥은 한 끼라도 그저 먹는 법이 없어.”
하셨다. 나는 대답했다.
“네. 무엇이든지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그러면 저쪽 부목들 방에 가서 자고, 내일 아침부터 일꾼들과 산에 가서 나무하는 일을 거들어라”
이렇게 내가 절에서 처음 만나 지도받은 스님이 당시에 선암사 소림선원의 모든 것을 맡아 주지역할을 하시던 석암 혜수 율사스님으로 행자 생활 내내 지도를 받았다. 스님이 될 때에도 사미계를 주시고, 그 후에 나를 전법제자로 키워주시면서 이끌어주신 석암노사와의 첫 인연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그 이튿날 네 사람의 부목(절에서 나무하고 채소밭 가꾸고 각 방의 군불을 때는 일을 맡은 일꾼)들과 함께 자고 아침공양을 한 다음, 그들을 따라 생전 처음으로 지게를 지고 낫을 들고 산으로 따라 올라갔다. 절의 뒷산은 아주 가파르게 솟아있으며 자갈이 깔려있는 산길을 올라 중턱에 이르러서 소나무 밑가지를 낫으로 쳐서 마르도록 땅에다 깔아놓는 작업을 하였다. 점심때가 되자 절에 내려가면서, 먼저 쳐서 말라있는 나뭇가지를 한 짐씩 짊어지고 내려가면서 나에게는 그들의 삼분의 일 정도 되는 나뭇가지를 얹어주었다.
나는 그것도 겨우 짊어지고 내려가다가 가파른 길의 절반도 못가서 다리가 후들 후들 떨리기 시작하였다. 도저히 그대로 갈 수가 없어서 좀 쉬어갈려고 언덕길에 지게를 바치려 다리에 힘을 주다가 그만 쭉 미끄러지니, 지게를 등에 짊어진 채 곤두박질하여 머리는 땅에 박고 두 다리는 허공에서 버둥거리는 몰골이 되고 말았다. 같이 가던 부목들이 황급하게 달려와서 일으켜 세워준 덕에 살아났지, 혼자서는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일어나 약간 혼미해진 의식 속에서 손으로 목을 쓰다듬어 보았더니 다행히 목은 부러지지 않았고, 아무데도 특별히 다친 데도 없었다. 겨우 정신을 수습하여 간신히 절에 도착하여 점심도 제대로 못 먹고, 잠시 쉰 다음에 다시 산으로 올라갔다.
이렇게 매일 산에 다녔더니, 보름 만에 석암스님께서 부르시더니,
“이제 산에 가는 것은 그만하고, 내일부터 선원 후원의 부엌에 가서 일하도록 하여라.”
하는 지시가 있었다.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계셨던 것이다. 다음 날 아침에 부엌으로 갔더니 서까래가 그대로 들어나 있는 높은 천정은 오랫동안 연기에 찌들어 새까만 부엌에는 나보다 석 달 먼저 왔다는 키가 전봇대처럼 큰 행자가 꺼덕꺼덕하면서 왔다 갔다 하며 일하고 있었다. 내가 들어가는 것을 보자 슬쩍 웃음 지으며 드디어 왔구나하는 표정으로 반가이 맞아주었다.
우리의 8개월 행자 생활 가운데서 그는 밥하는 공양주이었고, 나는 국 끓이고 반찬 장만하는 갱두 채공으로 역할을 맡았다. 한솥밥 먹으며 후원의 좁은 방에서 무릎을 맞대고 지내면서 동고동락하다가 함께 사미계를 받은 그가 바로 후일 김지견 박사가 된다. 선원의 부엌에서 두 행자는, 마치 한산과 습득처럼 우정 넘치게 살던 인연은 이후 오래도록 이어져서, 평생 존중하는 선후배로, 불교학 연구 분야의 라이벌 도반으로, 서로 아끼면서 살아온 두 사람의 첫 인연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 후에 나는 선원에 남아서 정진하는 생활을 계속하였으나, 그 키다리 행자는 스님이 된 얼마 뒤에 선암사를 떠나서 범어사·진주·제주 등지에서 남달리 풍채 좋고 언변이 유창하여 불교신도들 포교에 활약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왔으나, 얼마 후 좋은 인연 만나 퇴속하고 결혼하였다. 그리고 동국대학교 불교학과와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치고 연구실 조교로 있다가, 일본에 유학하여 동경대학에서 화엄학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모교인 동국대 교수, 강원대 교수, 한국 정신문화연구원 교수를 역임하면서도 스스로 대한전통불교연구원을 설립하여 국제적 학술활동을 펼친 김지견박사는 우리 불교학계의 걸출한 화엄학 대가로 명성을 드날렸으나 애석하게도 70세에 먼저 타계하였다.
그 당시에는 사회적으로나 절집에서나 경제가 궁핍하였고, 따라서 갓 들어온 행자에게 상당 기간 먹물옷을 지급해 주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절에 들어갈 때의 양복차림 그대로 땀 흘리며 종일 부엌에서 일을 하다가, 밤 9시에 취침하기 전에 속옷 겉옷을 모두 물에 담가 땟국을 대충 빤 다음 대강 짜서 널어놓고, 새벽 3시에 일어나면 아직 덜 말라서 꿉꿉한 옷을 그야말로 단벌 신사 신세라 그대로 다시 입고 몸으로 말리면서, 아침 예불에 참석하는 일이 매일같이 반복되었다.
당시의 선암사 소림선원에서는 아침 예불 끝에 전대중이 앉아서 「신묘장구대라니」 보다 약 3배나 되는 분량의 「능엄주」를 독송하였다. 원주스님에게 그 연유를 물어 보았더니, 「능엄주」는 선정을 수행하는데 장애가 되는 마장을 물리쳐 주는 거룩한 주문이라는 것이였다.
행자로 후원의 부엌에 들어간 지 보름 만에 사중의 일제 삭발이 시작되었다. 나는 그동안 머리를 기른 채 양복차림으로 일을 해오면서, 절에서 이처럼 어울리지 않은 모양도 없다고 생각하여 보름마다 있는 삭발일에는 나도 머리를 깎을 수 있으려니 은근히 기대하였다.
그날 큰 솥에 더운물을 가득 마련하니 선방 앞마당에 대중들이 모두 나와서 노스님들은 상좌들이나 젊은스님들이 삭발해 드리고, 다른 스님들은 둘씩 짝을 지어 서로 품앗이 하는 형태로 약 40여 명의 대중들 삭발이 잠깐 사이에 끝났다.
그런데 나한테는 아무런 소식이 없기에 부엌에서 내다보니 사람들이 없고, 단 한사람 범어사에서 다니러 온 객스님 한분이 남아있어서 넓적한 삭두에 기와가루를 묻혀서 손질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띠었다. 얼른 대야에 더운물을 담아 머리카락을 축이고 대야를 들고 객스님 앞에 가서 머리를 불쑥 내밀면서,
“스님 부탁드립니다.”
하고 머리를 숙였다. 만일 그가 선암사 선원의 스님이었다면 사정을 아는 터에 삭발하라는 허락을 받았느냐 물었겠으나, 객스님이라 그런 말 물을 것도 없이
“음, 그래.”
하고는 즉시에 머리카락을 쑤욱쑤욱 대번에 시원스럽게 밀어주었다. 불가에서 머리털을 무명초라 한다던가? 햇빛 받은 일 없던 머리에 머리카락이 없어지니 그처럼 상쾌하고 시원스러울 수가 없었고, 흔히 있을 수 있는 미련이나 서운함 따위는 전혀 없었고, 날아갈 듯 기분이 좋아, 연신 손바닥으로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엌에 들어가 일을 보았다.
얼마 뒤에 석암스님이 지나가시다가 보시고는,
“이 사람이 허락도 없이 삭발했어.”
하시며 지나가셨으나, 꾸지람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이렇게 벼락치기로 삭발한 날, 오후 선원의 정진시간이 끝나는 죽비가 울리자, 선원에서 오대산 도인이라는 존칭을 받는 선원의 입승스님이신 지월스님께서 당신이 입으시던 먹물들인 T샤쓰와 홑바지 한 벌을 들고 부엌에 오셔서,
“행자님 이것 입으시게.”
하시며 주고 가셨다. 얼마나 고마운지 즉시 갈아입었으니, 그제야 선원 후원의 부엌에서 일하며 대중을 시봉하는 데 조금은 어울리는 모양새가 겨우 갖추어졌던 것이다.
선암사 소림선원의 후원 행자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후원의 살림을 감독하는 원주스님이 절 생활을 하려면 최소 필요한 일용의 의례를 외어야 한다고 하면서 「조석예불문」·「천수경」·「반야심경」 그리고 「능엄주」 의식집 책을 주셨다. 나는 그것을 매일 외울만한 분량만큼 손바닥만한 종이에 깨알같이 적어서 부엌에서 불을 때면서, 또 채마밭에서 채소를 가꾸면서도, 짬짬이 외우기에 열중하였다. 더욱이 「능엄주」는 우리말이 아니어서 혓바닥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을 그대로 통째로 외워서 약 2주일 만에 완벽하게 원주스님 앞에서 줄줄이 외웠더니, 아주 빨리 외웠다고 칭찬을 받았다.
행자시절의 초기에 가장 강력하게 기억에 남아있는 일이 있었다. 어느 날 저녁예불 마치고 7시경에 사무실에서 석암스님께서 부른다는 전갈이 왔다. 급히 두루마기를 챙겨 입고 사무실에 갔더니, 아랫목에 석암스님께서 앉아 게시기에 멀리 거리를 두고 절을 올리고 꿇어앉았다. 그랬도니 스님께서 대뜸 물으시기를
“너 왜 스님이 되려고 하는지 그 이유를 말해보라.”
고 하셨다. 그래서 몇 마디 말씀을 드렸더니,
“그런 어름한 소리!”
하시더니 그 뒤에 아무 말씀 없이 참선하는 모습이었다. 나도 말없이 꿇어앉아 있으려니, 차츰 다리가 아파오면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리가 저려오더니 나중에는 허리 밑으로는 마비되어 감각이 전혀 없어진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스님 앞에서 허락 없이 일어날 수는 없었다.
그야말로 지옥 고통이 이보다 심하랴는 생각까지 들었으나, 이를 악물고 견디어 냈다. 9시 취침시간을 알리는 삼경의 종소리가 들려오니, 그제서야 입을 여시었다.
“앞으로 행자 시절을 끝내고 사미계를 받고 스님이 되어 수행생활을 하려면 그동안 세속에서 익혀온 모든 것을 다 없애야만 하는 것이니, 마치 독한 것을 담았던 항아리에 새것을 담으려면, 먼저 들어있던 독한 것을 다 퍼내 비우고 깨끗이 씻어서 독한 기운을 싹 없앤 뒤에 새것을 담아야 온전한 것처럼, 내일부터 새벽예불을 마치고는 법당에 남아서 백팔번의 참회 절을 하고 난 뒤에 부엌일을 하도록 매일같이 계속 하여라.”
라고 말씀하시고 당신은 밖으로 나가셨다. 나는 그 후에 겨우 일어나려고 하다가 방바닥에 옆으로 넘어져 약 30분 정도 그대로 있다가 차츰 감각이 돌아온 다음에 후원으로 갔다. 이튿날부터 나는 백팔배 참회절을 시작한 것이, 그 후에 75세에 허리를 다쳐 절을 할 수가 없게 될 때까지 일생 동안 계속 이어져 나의 수행 생활의 중요한 축이 되었다.
3.
나는 1964년도에 동국대 불교학과를 졸업하였다. 그때의 총장님은 정두석 스님이었다. 동기생으로는 무진장스님, 도선사 혜성스님 그리고 태고종 총무원장을 지낸 운산스님이 있었고, 웅변으로 이름난 고순호법사, 미국에 있는 최장수·최옥희 부부 등도 그러하였다.
나의 지도교수는 우정상교수님이시고, 화엄학은 김잉석교수님, 법화경은 홍정식교수님의 강의를 들었다. 그리고 수강 신청 없이 다른 학과 강의를 듣는 이른바 도강을 하였으니, 국문과 양주동교수님의 강의를 빠지지 않고 두 학기를 들었다. 양교수님의 강의는 해학에 넘치는 흥미진진한 것이었다. 마치 시골 노인신사 같은 허술한 옷차림으로 나오셔서 걸걸한 목소리로 익살스럽게 거침없이 강의를 이끌어 나갔고, 언제나 취중건곤의 거나한 상태였다. 가끔 강의하다가도 에너지가 떨어지는 것을 느끼시면, 교단에 선 채 학생들을 바라보면서 슬며시 양복 안주머니서 납작한 양주병 같은 것을 꺼내서 병마개를 틀고 입에 대고는 몇 모금 마셔서 목을 축인 다음에는 훨씬 더 매끄럽게 강의를 하시곤 하던 것이 인상적으로 남아있다.
이어서 대학원 석사과정을 1966년도에 마치고 김법린총장님 명의로 석사학위증서를 받았다. 당시의 대학원 불교분야에는 기라성 같은 근대 불교의 대석학들이 계시어 충실한 명강의를 들을 수가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었다.
우선 권상노교수님에게 「한국불교사」를 들었는데 선생님은 연로하시어 학교에 나오시지 못하였고, 그래서 대학원 수강생 7명이 매주 강의시간에 흥릉의 자택 서재에 가서 방에 둘러앉아 이불로 무릎을 덮으신 선생님에게 강의를 들었다. 그런데 소문으로 걸어 다니는 도서관이란 말을 들었던 대로 불교의 다방면에 걸치는 박학다식함에는 언제나 들을 때마다 감명을 새롭게 하는 강의였다고 추억이 된다.
김동화교수님에게는 「중국선종사상사」를 배웠는데, 지금 출판되어 나와 있는 중국선종사상사를 집필하고 계셨던 시기였기에 매주 강의시간마다 강단에 서시면 처음부터 끝까지 흑판에 가득 판서를 하면서 강의하는 것을 학생들은 필사적으로 노트에 빠짐없이 베끼면서 듣노라 진땀을 흘렸다. 그래서 요새도 출판된 중국선종사상사와 나의 옛 필사본을 대조해보면서 흥미를 새롭게 하고 있다.
대학원 석사과정에 스님은 나 하나뿐이었는데, 김동화교수님의 강의를 듣고 하교하는 길에 제일병원 앞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다가 역시 자택으로 돌아가시는 선생님을 자주 만나게 되었다. 그럴 때 버스가 오면 으레이 선생님께서 앞장서 먼저 버스에 오르시면서 주머니에서 버스표 두 장을 꺼내어서 뒤따르는 나의 표를 대신 내시곤 하셨다. 참으로 송구스럽고 고마운 일이였으니 선생님은 그런 일면이 있으셨고, 그렇게 가난한 비구승 학생을 배려해 주시곤 하셨다. 더러 돈암동에서 버스를 함께 내려서 아리랑고개 가는 네거리에 있는 선생님 댁에 들려서는 약간 어두컴컴하던 서재에서 토론하며 음식을 대접받기도 하였다. 그런 인연으로 퇴직하신 뒤 동소문에 있는 정각사에서 선생님이 주재하시는 법회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선생님께서 타계하신 뒤 내가 동국대 교수로 있으면서 선생님을 기념하는 제8회 「뇌허학술상」 수상자로 선정되었고, 4월 달 한식날 정각사 법당에서 선생님의 기제사에서는 내가 법주가 되어 요령을 흔들며 정성을 다하여 지낸 다음, 그 자리에서 학술상을 받은 것은 선생님에게서 직접 칭찬받은 것 같은 영광이었다.
금강경 강의는 성북동의 청룡암으로 매주 가서 금강경의 대가로 알려져있는 임석진교수님에게서 「오가해」를 교본으로 강의를 들었는데, 청룡암은 그 후에 없어져서 추억을 더듬을 길이 없게 되었다.
조명기교수님에게서는 처음으로 「불교서지학」을 배웠으니 희귀한 강의였다. 강단에서의 선생님 강의자세는 자못 특이하였다. 왜냐하면, 흑판에 쓰거니 강의하거나 간에 한결같이 학생들을 마주보시는 일 없이 시종일관 흑판을 보고 우리에게는 등을 보이시고 언제나 그렇게 강의하셨으니 참 기이한 모습이셨다.
포광 김영수교수님에게서는 「불교문화사」를 들었다. 수강생이 하나이면 폐강이 되는데 수강신청 학생이 나하고 또 한명의 학생이 있어서 겨우 성립이 되었는데, 개강되고 보니 그 학생이 강의에 나오지 않아서 항상 나 혼자 교실의 맨 앞자리에 앉아있으면 선생님은 들어오셔서 교단에 서지 않으시고 내가 앉은 책상에 와서 마주 앉으시고 둘이 대면하여 강의를 하시게 되었고 한 학기동안 그렇게 계속되었다.
포광선생님은 마른 작은 체구이면서 마치 영국 젠틀맨을 방불케 하는 센스 있는 말쑥한 옷맵시에 항상 중절모를 단정하게 쓰시고 부드러운 웃는 모습으로 교실에 들어오시기를 한 학기 동안 한결 같으셨다. 기억에 남는 일은 책상에 마주 앉아서 강의하시다가도 연로하시어 입안이 마르면 양복 안주머니에서 담배 케이스 같은 것을 꺼내시기에, 처음에는 흡연하시려나 여겼는데 그것이 담배 케이스가 아니라 뚜껑을 열면 사각형으로 남작하게 가위로 썰어 넣은 마른 오징어였다. 그것을 하나 입에 넣으시고 한참 오물오물하시어 입안에 침이 돈 다음에 강의를 계속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내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그리운 모습이다.
대학원의 지도교수는 김동화박사님이시고 그분의 지도로 대승불교 불설 비불설의 연구로 논문을 제출하여 석사학위를 받았고 다음 해 1967년에 기회가 있어 일본으로 유학의 길을 떠나게 되었다. 그 뒤에 노교수님들이 곧 이어서 타계하신 소식을 듣게 되었으니 삼가 학은을 입은 먼저 가신 교수님들의 명복을 충심으로 빌어 마지않습니다.
채인환(蔡印幻)
1964년 졸업. 1967년 이후 숭산스님과 함께 재일홍법원을 창립하면서 시야를 해외로 넓혔다. 1975년에는 ‘신라의 계율사상 연구’ 논문으로 스님으로는 최초의 ‘도쿄(東京)대 박사’가 됐다. 1977년에는 조계종 국제포교사로서 캐나다 근무를 시작으로 토론토 대각사를 비롯, 온타리오(Ontario) 센터, 미국 시카고 불타사 등에서 활발한 포교활동 펼쳤다. 1982년 동국대 불교학과 교수로 부임한 이후 1996년 정년퇴임 때까지 불교대학장, 불교문화연구원장, 정각원장 등의 소임을 수행하였다. 2018년 10월 26일 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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