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케직(keswick) 사경회 원문보기 글쓴이: 이여호수아 목사
사도들이 전했던 복음.변형되지 아니한 복음을 듣으라
현대 기독교 안에는 사도들이 전했던 복음을 왜곡되게 설명하는 설교자들이 많다.
"예수 천국.불신자 지옥"외치고 다니기도 하는데 사실 이런 간략 복음 외침은 많은 오해를 낳는다.
대다수의 기독도들은 "예수 믿으면 천국 갑니다." 라고 확신한다. 맞는 것 같지만는 너무도 단편적이고 편협한 믿음일 수가 있다.
교회 다녀도 멸망 당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이다.
예수 믿는 다고 하시만 천국에 못 갈수도 있다. 평생 교회에 다니고도 천국에 한 발자국도 들여 놓지 못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사도들이 전했던 복음의 진수가 아닌 왜곡되고 변형된 복음 설명을 듣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도베드로는 최초 주 예수님이 하시던 그 복음을 대행할 때 외치던 메시시는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이다. 멸망으로 치닫는 이 시대의 사고방식에 추종자들의 삶에서 구출받으라는 것이다. 이 세대의 이방 사람들이 사는 양식대로 살면 멸망을 받으니..구원함을 얻으라는 것이다.
천성가는 백성이란 전적으로 하늘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다. 예수께서 전한 복음도 마찬가지이다. "너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또는 좁은 문으로 들러가라 협착하여 찿는 이다 적음이니라..."
무엇을 시사하고 있는가? 인류의 세대에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걷는 삶에서 하늘을 향해 걷는 사람으로 턴 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교인들을 보라. 생을 멸망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처럼 ...땅을 위하여 살고 ..육체의 행복을 위해 살며. 혈육의 잘되기를 소망하며 신앙한다. 불신자도 땅에 삶이 잘되길 소원하며 종교를 가지며 신앙한다. 교인들도 마찬가지이다. 현세에 삶이 잘되길 염원하며 신앙에 열심을 낸다. 이런 타락한 인류의 죄성에서 기인된 축복관에 편승하여 설교자들은 땅에 속한 것을 더 얻는 것을 축복으로 설파하고 있다. 이런 축복론을 강변하는 설교자가 있는 교회엔 많은 무리들이 모여든다..
"네 영혼이 잘됨 같이 현세의 삶이 부유해 져라" 이런 복음을 사도들이 증거했는가? 신앙생활 잘하면 물질축복,자녀축복, 같은 것을 주시리라...이런 축복론을 전파한 사도가 있는가? 예수님이 그런 설교를 하신 적이 있는가? 한 마디도 그런 의미로 설교하신 적이 없다.
네 영혼이 잘 된 것이 아니고,,아직 영혼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으로 받으시지도 않았다.
신약에 사도들은 무엇이라고 증거하였는가?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거역하던 구약 백성들처럼 불순종하지 말라....내갸 노하여 맹세하며 선언한 것처럼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하였다."(히3:7-11)
구원받아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개념은 주님의 음성에 복종하는 삶을 매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주님과 함께 동거동락하는 사람들이다. 인류의 후손은 죄의 본질을 갖고 태어났기에 본능적으로 하나님의 예정하심, 뜻하심을 거스른다. 인간이 죄인이라고 하나님의 정의하시는 의미는 '죄의 본성에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본질상 되인이다. 성질상 죄성을 가졌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2:)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받았다는 실재를 어떻게 아는가?
전폭적으로 순종한다는 것이다. 전에는 주의 뜻하심과 하나님이 예정하신 모든 것들에 대해서 반발심이 앞서며 거부반응을 일으켰다. 그런데 이젠 즐겨 순종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뜻하신 것이라는 사실을 성경을 통해 발견될 때마다 즐겨 순종한다는 것이다.
'손은 자연스레 안으로 굽는다' 라는 격언이 있듯이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었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즐겨 순종한다, 거역하던 본성에 지배를 받던 나가 이제 하나님의 뜻이라면 즐겨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이것이 가장 확실한 구원받은 증거이다.
그러하기에 예수께서도 형제라 부르기에 부끄러워 아니하신다. 당신 자신께서 아버지의 기쁘심을 위해 즐겨 순종하며 사셨듯이 구원받은 이들도 본성적으로 본능적으로 같기 때문이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심"(히2:11)
만약 이 시대에 사도들이 나타나거나 예수께서 나타나신다면 기독교인들을 향해서 뭐라고 외치실 것인가?
그것은, "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행7:51) 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초대받은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뜻을 생에서 이루기 위해 질주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구원 안으로 초대된 사람들에게 뜻하심을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곧 너희의 거룩함이니라.. 곧 음란을 버리고...각각 거룩함으로..."(살전4:3-4) 나아가라 촉구한다.
육체의 욕망에 지배를 당하는 사람은 아직 이방인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따르지 말라"(살전4:5)
"그러므로 (이 뜻하심을) 져버리는 자는 사람을 져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져버림이니라."(살전 4:8)
난 의도적으로 8절에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누락시켰다. 왜냐하면 본래 구원받은 것이 "그분께 성령을 받은 것"인데 오늘날 교인들이 구원에 확증에서 빗나간 고정관념이 있기 때문이다.
구원받았다는 의미는 , 예수께 보태어 졌다는 것이요. 속해졌다는 것이요. 연합되었고 결합되었다는 것이 사도들의 가르침이다. 함께..함께..이다. 죽음과 동일시되었고 부활과 동일시 된 사람이 구원받은 자이다. 그런데 오늘날 교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적도 없으면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걷는다고 말한다.
예수와 함께 죽은 자를 하나님이 함께 일으키신다. 그후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걷는다. 이것이 로마서6장에서 8장까지 증거한 바울의 메시지의 핵심이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음과 같은 양식으로 결합한 자가 되었으면....그의 부활과 같은 모습으로 결합한 자도 되리라..."(롬6:5)
바로 연이어서 구원받는 자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는가?"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못 박힌 것"(6:6)이라고 증명한다.
누가 자신이 구출된 그리스도인이라고 확신하는 사람이 있는가? 그렇다면 증명해 보이라. 예수와 함게 죽었던 적이 있다는 실재를 보이라..그렇지 못하다면 그 믿음은 증명 못하는 믿음이라서 하나님께 버리운 자요. 인정받지 못하는 가짜 믿음이다. "너희는 믿은 안에 있는가 스스로 테스트하고 너희 자신을 증험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것이 인지되지 않으면 하나님께 바림받은 자니라,."(고후13:5)
오늘날 기독교 안에는 변형되고 변질된 구원론에 의해서 자기들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인체 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사도들은 구원받은 증거를 성령의 인침이며...우리 안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라고 하였다. 로마서 8장에선 그 내주하는 성령의 지도하심을 받아 사는 사람이,,그 성령의 인도를 받아 사는 사람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따라 사는 그리리스도인들이라고 확증한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의 실제적 증명은 무엇인가?
성령의 요구는 육체의 요구가 대적하므로 서로 대적자 관계이다...라고 갈라디아서를 통해 증거한다. 구원받지 아니한 자연인은 육체의 육망에 지배를 받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 안으로 구워받은 사람은 바울사도가 증거한 것처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요즘 표현방식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이란.."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라고 한다.
아담의 후손은 누구나 자기 육체에 원함을 따라 산다. 그래서 자연인은 예수님에 의해서 구원을 받아야 한다고 성경을 증거한다. 그런데 교회에 다니지만 구원받지 못한 자연인처럼 사는 신도들은 천국에 갈 수가 없다. 그런데도 오늘날 설교자들은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들을 천국 간다고 확신을 시키려고 주력한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꼴이다. 후회는 내세에 입성할 그 때에 일어날 것이다.
육체의 욕망. 정욕에서 해방받는 길을 제시하는 못하는 기독교 설교는 성령의 음성을 대변하는 설교가 아니다. 세상사람처럼 살다가 공의로운 심판대에 나아가도록 내 팽겨친 설교가 어찌 복음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멸망받고 정죄받을 행실에서 건지지도 못하는 설교가 어찌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설교인가? 자기가 그런 처지에서 구원받는 길를 체득하지 못했기 때문에 구출하는 설교를 증거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도들이 전했던 복음설교는 옛사람의 행실에서 구원하여 새 사람으로 살게 한다."해방되고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롬6:22)
21세기 기독교는 성경에도 없는 괴상한 유행어를 만들어 놓았다. 그것은 “구원받았습니까?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이다.
신약성경에 기록된 사도들이 목회하던 교인들에게 이런 질문을 한번이라도 던진 적이 있는지 살펴보라., 없다. 이렇게 이렇게 살면, 구원을 얻으리라..주시리라...라는 말은 있지만 교회 안에 있는 신도들에게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 ”라고 물으며 구원의 확신을 심어주려고 노력한 흔적은 어느 곳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 교회 밖 사람들에게 구원을 받으라 외칠 뿐이다.
무엇에 대한 방증인가?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지지 못한 신자들이 거의 대다수이라는 사실이다. 내가 천국에 들어가리라는 확신은 믿는 자 속에 거주하시는 성령이 주신다. 그런데 인간들이 자기 나름대로 성경을 해석하여 구원의 확신을 주려고 주력하였다. 그러다보니 구원받은 자의 삶은 없으면서 머리로만 구원에 대해서 잘도 읊어 대는 것이다. 과연 그 구원의 확신을 주께서도 인정하실까? 자기가 확신하는 바대로 주께서 사후에 천국에로 데려가실까? 미지수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위하여 속죄를 준비하셨으며 예수 안에 들어온 자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피를 흘리셨다.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러 오신 예수”(마1:21)은 말하고 있지 않은가! 자기 백성이다. 이 시대에 기독교 신자들은 모두 자기가 아는 구원에 관한 지식을 재고해야 한다.
예수께서..그리고 그 분에게 그 복음전파를 위임받은 사도들이 증거 하지도 않은 구원이론을 요즘 설교자들을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들의 시대엔 교회에 첫 발을 들여 놓는 순간 이미 자기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음을 안다. 그렇지만 현대기독교는 교회에 나온지 몇 년,몇십년 지나서 설교자가 자기가 아는 성경지식으로 구원의 확신을 고취시켰기에 구원의 확신을 가진다.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지식이 아니고 인간에게서 배운 구원에 관한 지식이다. 그들 속에 임하신 성령께서 주신 확신이 아니라 인간 설교자가 자기 의지로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한 것이다.
성경은 경고한다. 참 영원한 생명을 얻은 사실은 “사람의 의지로서도 아니고...오직 하나님의 의지로 말미암은 것”(요1:11)이라고 한다. 예수께서도 하나님이 낳으셨기 때문에 형제들로 받으신다고 히2:11은 기록한다. 설교자가 만든 교인은 모두 예복을 입지 아니하고 혼인잔치에 들어온 자와 같아서 그날에 쫓겨 날 것이다.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느니라.”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은 자는 다 내게로 오느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뜻(의지. WILL)을 따라 낳으셨느니라.”(약1:18)
사람에게서 배워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육체를 좇아 난 신자들이다., 다 그 나라에서 내어 쫓김을 당할 것이다. “육체(인간의 지성에서 생겨난 신자)를 따라 났고....(갈4:23) 종에게서 난 자들을 내어 쫓으라.유업을 얻지 못하리라.”(갈
4:30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길 권한다.
신약에 구원이 어디로부터 기인한 것이며 영원하신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 안에 예정하신 구원의 복은 무엇인가? 왜 그리스도 안(IN CHRIST) 인가?
성경은 증거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주시되....내게 오는 자는 쉼을 얻으리라...
하나님이 예정하신 복은 그리스도에게 유업으로 주셨다., 복수가 아니라 단수이다. 우리가 개별적으로 속죄함을 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께서 하나님께 옳다함(의롭다하심)을 받으셨기 때문에 그가 받은 복이 그에게 속한 사람들이 함께 받는 것이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여럿을 가르켜 그 자손들(복수)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르켜 네 자손(단수)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갈3:16)
오늘날 교인들의 고백과 확신처럼 “주여, 저를 천국백성이 된 줄로 믿습니다. 아멘”이러한 방식은 틀린 것이다., 비성경적이고 하나님이 예정하신 구원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기에 내가 구원받을 줄 믿습니다,. 고백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품에 안겨 있으니 난 그분이 대표로 받은 복에 참예하는 것이다., 신약성경은 반복하여 “함께..함께...”라는 말을 강조한다.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물이 되셨다.
대표성을 가지는 것이다. 자기에게 속한 백성을 대표로 하늘 아버지께 영원히 거한 왕국을 수여받으셨다.
히브리서에 나타난 각도로 상상해 보라.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옛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 피로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일회성)으로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염소와 황소의 피와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첫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시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하심이라.“(히9:11-15)
이 성경이 우리에게 알려 주는 바가 무엇인가?
그리스도가
1)대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셨다는 것과
2)완벽한 영구성을 가진 속죄제물이 되셨다는 것과
3)중보자의 권한을 획득하셨다는 것과
4)자기에게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아브라함으로부터 대대로 예비하신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를 상속받게 하는 권리를 가지셨다는 것이다.
메시야(헬라어=그리스도)로 오신 예수께서 죄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 알게 하려 함이라...라고 주께서는 강조하시었다. 오늘날 빛이 임하지 아니한 옛 본성으로 아는 기독교인들은 죄를 누가 사해주는 지를 모른다. “하나님 제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아무리 기도해봐야 소용이 없다. 사죄의 확신이 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권한을 대제사장이시며 완전한 속죄제물을 드리신 그리스도 예수께 아버지께서 줘 버렸기 때문이다.
사도들이 전한 복음은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행20:21)을 증언하였다.
당신이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라면 왜 하나님께 대한 회개이며..그리스도에 대하여는 믿음인가를 인지하지 못할 것이다.
생각해 보라. 유대인은 하나님을 섬긴다. 그들은 유신론자이다. 그런데도 구원을 얻지 못한다. 천주교 신자를 비롯하여 개신교의 신자들도 유대인처럼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 그런 부류들에게 사도들을 회개하라...외친 것이다. 이 차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당신이라면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냥 유신론자일 뿐이다. 사도들의 입장에선 구원받아야할 대상이다. 모쪼록 진리를 깨우쳐 구원에 이르길 소망한다.
영원하신 아버지께선 이제 자신의 실존을 수긍하는 사람들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추종자들을 얻고자 예정하시고 뜻하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의미는 전폭적으로 그분께 복종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 손복하지 아니하는 영혼은 하나님의 진노가 그 머리 위에 머물러 있다.
정하셨기 때문이다. 그 권한을 부여받으셨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죄 사하는 권세가 있으며 모든 인간으로 그분 앞에 주로 고백하며 무릎을 꿇어야 한다.
“아들에게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러 있느니라.”(요3:36)
다시 환원하여,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에 대하여 상상해 보자
하나님를 섬기려 하는 사람이라면 죄가 제거되어야 한다. 죄인은 하나님의 면전에 설 수 없으며 근접하지도 못하고 섬길 기회도 박탈되었다. (이 때문에 오늘날 기독도들이 많이 기도할지라도 응답이 없는 것이다.하나님과 화목된 후 교통하는 사람이 된다면 죠지뮬러처럼 그렇게 기도응답이 될 것이며 항상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요셉처럼 사는 삶을 만끽할 것이다.)
백성이 죄인의 신분으로 있을 때 대제사장은 백성을 대표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죄를 씻는 작업을 한다,,이것이 속죄제사와 화목제사이다. 이렇게 완벽하게 죄를 제거한 후 지성소라는 하나님의 임재 장소에 들어간다...그후 그 안에서 주지받은 사항을 백성에게 알린다. 또한 성소 문 앞에 모여있는 일반백성을 이끌어 하나님과 교제토록 속죄제와 화목제를 드린다. 이 일반백성들의 죄를 제거하는 권리를 대제사장이 쥐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가 대제사장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백성을 대표하여 그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 그의 품 속에 숨은 사람들을 하나님과의 교제 안으로 이끌어 가시는 것이다.
앞서 갈라디아서에서 단수이신 그리스도...약속을 대표로 받은 그리스도 그분이 영원 하나님의 대제사장이요...흠없는 영원한 제물을 몸소 드리셨다. 친히 제물이 되셨고 그 제물을 열납하시고 메시야 예수를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위임하셨다.
우린 이 부분에서 하나님께 회개할 제목을 발견한다. 내 대신 죄값을 치르신 그리스도이다. 값을 치르고 사셨기에 자기 물건이다. 자기 마음대로할 권리를 가지셨다. 어떡해야 하겠는가? 어떤 사람을 자기 사람으로 여기시는가? 나의 권리를 포기하고 전권 이양하는 사람이다. 나의 모든 생의 권리를 예수께 드리는 것이다. 그분의 노예가 되길 자청하는 것이다.
우리가 “주여 저를 받으소서...당신이 저를 받아 마음대로 사용하시옵소서.” 진심으로 나의 왕, 나의 주인, 지배자로 영접할 때....주께서는 이미 그 고백하는 사람의 죄를 처리할 방편을 갖고 계신다.
오늘날 그릇된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들과 내용이 무엇이 다른가?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예수 피로 죄사함 받는 줄 믿사옵나이다...”이런 고백을 이끌어 내는 것이 사도들의 전한 복음이 아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것을 거부한 나의 마음을 회개하는 것이요...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믿는 것이다. 대제사장으로 오신 분으로 믿는 것이다. 이것이 사도들이 증거했던 복음이다. 이 증거하던 복음을 기록한 것이 신약성경이다.
비틀어지고 변형된 복음설명을 듣고, 예수 믿는 것이 이방인이라면 누구나 가진 종교를 자기도 하나쯤 가진 것처럼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은 아직 하나님께 회개한 적도 없으며..예수 그리스도가 그 영혼의 지도자도 아니다..이런 변형된 복음을 인지하고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 때문에 세상에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 이상한 형태의 타락한 교회가 편만한 것이다.
요한 웨슬레가 거듭난 시점을 눈여겨보라. 그가 변화되기 전에....성스러운 성직자다운 삶을 살 때에....그때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안 믿었겠는가? 체험이 없겠는가? 그렇지 않았다면 하나님을 섬겨야할 당위성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때 그 시절,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니었고, 사도들이 받았던 그 성령도 받은 적이 없었다고 고백한다. 정말 내 곁에..내 안에 계셔서 날마다 지도하시는 주님을 모시려면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깊이 깨닫게 해 주시길 간구하길 바란다.
이런 진리를 바로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을 섬긴다면. 당신은 유대인처럼 종교인일 뿐이다.
다음 카페. 케직 사경회에서 이 여호수아 목사 http://cafe.daum.net/testimony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