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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화가(3)_미켈란젤로(Michelangelo)의 골관절염
통풍 및 골관절염(gout or osteoarthritis)신체적 장애
세계 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미켈란젤로가 유명한 장애 예술가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나요?.
미켈란젤로는 그 멋지고 위대한 조형걸작품(입체상)을 만들고, 디자인하고, 그림을 그리는 동안 손과 발의 움직임이 제한되었다고 기록했다.
이 문제는 작가의 손 움직임을 어렵게 만들고 제한적으로 만들었다. 나중에 전문가들은 그것이 통풍이나 골관절염(gout or osteoarthritis)이었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의 움직임을 제한하는 이러한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미켈란젤로는 당대에 그의 예술을 포기하지 않았고 오늘날 우리 모두를 매료시키는 작품을 계속해서 창조했다.
유명한 예술가들은 예를 들어 베토벤이 귀를 사용할 수 없게 되는 등 가장 비극적이고 아이러니한 장애를 겪으며 서양고전음악을 대표하는 교향곡5번 운명 ’이라고 잘 알려진 이 교향곡을 비롯하여 모든 음악을 작곡하였듯 미켈란젤로도 다르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그가 활동시기 후반에 골다공증이나 통풍을 앓았는지에 대해 여전히 논쟁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한 가지 사실은 그 유명한 조각가이자 화가가 나이가 들수록 손을 사용하기 어렵게 만드는 장애를 앓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켈란젤로는 89세라는 나이까지 조각을 계속했다.
미켈란젤로의 관절염에 대한연구결과
하버드 의과대학의 의학부 교수 로버트 H. 슈머링, MD ( Robert H. Shmerling, MD,Harvard Medical Schoo) 주축이된 연구팀들이 세기의 유명한 화가이자 조작가인 미켈란젤로의 손이 관절염 장애를 갖고 있었다는 결과를 발표했다.
연구자들은 미켈란젤로가 이전에 생각했던 통풍이 아니라 골관절염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발견은 다른 예술가들이 렌더링한 화가이자 조각가의 손 묘사를 기반으로 하여 왕립의학학회지(Journal of the Royal Society of Medicine) 최근호에 발표되었다.
미켈란젤로는 손에 심각한 통증과 장애로 인해 창작활동의 기능이 제한되어 있다고 보고했지만 거의 89세가 될 때까지 그림과 조각을 계속했다. 연구팀은 미켈란젤로가 관절염에도 불구하고 바쁘고 활동적인 예술 활동을 통해 걸작을 제작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미켈란젤로가 작업을 진행하며 끌로 깎고, 망치질하는 등 모든 행위가 실제로 관절염을 유발시키는 원인으로 결론을 내렸다,
골관절염을 일으키는 원인은 상황에 따라 다르다. 관절 부상, 특히 관절을 감싸는 매끄러운 연골의 손상은 결국 골관절염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러나 일반인의 직업이나 취미에 따른 반복적인 사용이 실제로 골관절염을 유발할 만큼 관절을 손상시킬 수 있다는 생각은 잘 뒷받침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오랫동안 달리는 사람들의 데이터는 그들이 달리지 않는 사람들보다 무릎이나 고관절 골관절염의 발병률이 더 높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며,마찬가지로 주로 쓰는 손과 잘쓰지 않는 손에서 골관절염의 빈도나 심각도는 일반적으로 유사하다. 미켈란젤로가 정말로 골관절염을 앓았다면(통풍은 아님) 양손 모두 똑같이 심각한 관절염 변화를 보일 것으로 예상할 수 있으나 하지만 이 연구결과는 왼손 대상 결과이다.
명확하게 말하면, 이미 관절염이 있는 경우 관절이 계속 움직이는 것이 좋다는 이유는 이것이 바로 의사가 대부분의 관절염 유형에 대해 운동, 물리 치료 및 지속적인 치유활동을 정기적으로 권장하는 이유이다.
의학적 지식이 높은 연구원들은 눈으로만 보아도 관절염의 종류를 구별할 수 있다.
골관절염의 경우 일반적으로 염증이 제한되거나 전혀 없다(즉, 발적, 열감 또는 부기가 많지 않음). 이 보고서에 설명된 그림은 골관절염과 일치하는 관절 기형, 즉 염증 없이 뼈가 커지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판명하고 있다.
그러나 예술가가 쓴 편지에 따르면 미켈란젤로는 손과 발에 영향을 미치는 관절 질환을 포함하여 여러 가지 질병을 앓고 있었다는 분석 결론을 내렸다.
당시에는 통풍이라고 불렸지만 이 용어는 현재 우리가 여러 가지 유형의 관절염을 고려하는 것을 가리키는 데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그는 또한 통풍을 동반할 수 있는 질환인 신장 결석을 가지고 있었다.
통풍은 관절에 요산(배뇨를 통해 신체에서 제거되는 정상적인 노폐물)이 축적되어 발생한다. 신장 질환, 유전적 경향, 알코올 사용 또는 기타 원인으로 인해 수치가 너무 높으면 관절통 및 신장 결석이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연구팀은 결절(피부 아래 요산 결정 덩어리로 구성된 덩어리)이 부족하고 그림에 표시된 염증 징후가 없기 때문에 통풍 진단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통풍이 항상 통풍을 유발하는 것만은 아니다. 또는 결절은 팔꿈치 뒤나 아킬레스건을 따라 등 명확하지 않은 위치에 발생할 수 있으며, 통풍의 관절염 발병 사이에는 일반적으로 관절에 염증이 없다.
또한, 그림이든 사진이든 이미지만으로는 염증을 확인하기 어려울 수 있다. 많은 경우 신체 검사를 통해서만 염증이 있는 관절의 따뜻하고 "해면질" 또는 "액체 같은" 부기를 발견할 수 있다.
천 마디 말보다 한 장의 사진이 더 가치가 있다면. . .사실, 그림만으로는 통풍, 골관절염 등 다양한 유형의 관절염을 구별하기가 어려울 수 있다. 물론 미켈란젤로는 두 가지 조건을 모두 가질 수도 있었다는 연구들이 결과를 내놔 미술계는 물론 많은 사람들로부터 관심을 받았다.
미켈란젤로 (1475-1564)
화가로서 미켈란젤로의 위업은 오늘날까지도 존경받고 있다. 어떤 사람을 미셸 안젤로라고 표현하는 것은 그 사람을 특정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라고 표현하는 것과 같다. 놀라운 기량을 보여준 이탈리아의 조각가, 화가, 건축가, 시인으로 유명한 르네상스 예술가.
그의 가장 흥미로운 조각 걸작품으로는 브뤼헤의 마돈나, 피에타, 다비드 등이 있다. 미켈란젤로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으며 영향력이 크고 부유함에도 불구하고 매우 절제된 생활 방식을 유지했다. 미켈란젤로에 대한 다양한 기록은 그가 우울한 성격을 갖고 있었고 다소 고독한 생활 방식을 원했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켈란젤로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예술 작품을 통해 당대 가장 뛰어난 예술가 중 한 명으로 평가된다!
그는 Doni Tondo, 브뤼헤의 마돈나, 모세, 아담의 창조, 최후의 심판 등을 창조걸작들이 즐비하다. 많은 예술가들이 미켈란젤로의 작품에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예술가 중에는 Lorenzo de' Medici, Domenico Ghirlandaio, Girolamo Savonarola, Giovanni Pico Della Mirandola 및 Melozzo da Forlì가 있다.
미켈란젤로의 탄생과 활동
미켈란젤로 디 로도비코 부오나로티 시모니(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는 1475년 3월 6일 이탈리아 피렌체 카프레제 공화국에서 다섯 아들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는 1564년 2월 18일 로마 주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조각가, 인쇄업자, 건축가, 시인으로 서양 미술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영향력 있는 발전을 가져왔습니다. 이 이탈리아 예술가는 당대의 가장 위대한 표현주의자 중 한 명으로 여겨졌으며, 그 이후로 예술 창작에 있어서는 높은 평가를 받아왔다.
그의 그림, 조각품, 건축물 중 다수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에 있는 프레스코화는 아마도 오늘날 알려진 그의 작품 중 최고일 뽑을 수 있다. 미켈란젤로는 자신을 근본적으로 조각가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시대에는 디자인과 드로잉의 시대였기 때문에 그가 여러 예술 분야에 참여하고 실천하는 것은 다소 이례적이었다. 그는 거의 평생 동안 대리석 조각 작업을 했고, 다른 시기에는 다른 예술을 부전공했다.
시스티나에 대한 높은 존경심은 부분적으로 그가 20세기 후반에 그림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음을 반영하며, 부분적으로는 다른 매체에 실린 그의 작품 중 상당수가 불완전한 상태로 남아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미켈란젤로의 평생 명성이 훼손된 많은 부분 중 하나는 그의 경력이 그의 시대와 그 이전의 다른 어떤 예술가보다 더 완벽하게 문서화 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는 그가 아직 살아있을 때 전기가 출판된 최초의 서양 예술가였다.
사실, 두 가지 경쟁 생활 기록이 기록되어 있다. 첫 번째는 화가이자 건축가인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가 쓴 예술가들의 삶 시리즈(1550)의 마지막 장이다. 이것은 이전 사람들의 노력을 훨씬 상쇄하는 예술의 걸작을 낳은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명시적으로 선보이는 살아있는 예술가에 관한 유일한 장이었다.
그러한 추도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의 조수인 Acanio Condivi가 1553년에 더 짧은 다른 책을 쓰는 것을 완전히 기뻐하지 않았고 준비도 되지 않았다. 아마도 예술가 자신의 발언으로 인해 그가 원하는 방식을 보여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사 후, 바사리는 1568년에 두 번째 판에서 반박하는 글을 썼다. 학자들은 대부분 Condivi의 권위를 선택했지만, Vasari의 생생한 저술은 그의 책 전체의 중요성과 빈번한 재판 언어와 결합되어 Condivi가 미켈란젤로와 함께 다른 르네상스 예술가에 대한 광범위한 아이디어의 가장 일반적인 기반이 되는 데 기여했다.
미켈란젤로의 명성은 또한 수백 통의 편지, 스케치, 시를 포함하여 수많은 순간을 보존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동시대의 다른 어떤 작품보다 더 많은 것이며, 그러나 이 모든 것에서 얻은 엄청난 이익에도 불구하고 논쟁의 여지가 있는 주제에서는 미켈란젤로의 주장만 알려진 경우가 많다.
미켈란젤로가 태어날 당시 그의 아버지 레오나르도 시모니(Leonardo Simoni)는 잠시 카프레세의 치안판사로 봉사하고 있었다. 가족은 미켈란젤로의 유아기 때 피렌체로 돌아왔다. 그의 어머니 프란체스카 네리가 병들었기 때문에 아기는 석공 가족의 보살핌에 맡겨졌고, 미켈란젤로는 나중에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농담을 했다.
생애 동안 전기를 출판한 최초의 서양 예술가 미켈란젤로
미켈란젤로는 실제로 학교 교육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의 초기 전기 작가 Vasari, Condivi 및 Varchi에 따르면 그는 인근 교회에서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보는 것을 선호했다. 그에게 도메니코 기를란다요(Domenico Ghirlandaio)라는 화가를 소개한 사람은 6살 연상의 문법학교 친구 프란체스코 그라나치(Francesco Granacci)였을 수도 있다.
미켈란젤로의 아버지는 아들이 가족의 금융 사업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일찍부터 깨닫게 되었다. 이것이 그를 13세의 나이에 유행하는 피렌체 화가의 작업실에서 견습생으로 삼기로 결정하게 된 이유이다. 미켈란젤로가 프레스코 기법을 접하게 된 곳이 바로 그 곳이었다.
회화, 조각, 건축의 대가인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가장 모범적인 인물 중 한 명이다. 그의 별명 Il Divino('신성한 자')는 그가 얼마나 사랑받았는지 보여주는 증거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살아있는 동안 부와 명성을 누리지 못했던 시대에 그의 놀라운 성공은 의미가 크다. 사실, 미켈란젤로는 생애 동안 전기를 출판한 최초의 서양 예술가이다.
프로이트(Freud wrote)는 1914년에 익명으로 "미켈란젤로의 모세"라는 제목의 유명한 에세이를 썼는데, 여기서 그는 현재 로마의 산 피에트로 교회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조각품이 유대인 입법자가 수행하는 모습을 묘사한 정확한 동작을 재구성하려고 시도했다.
이 에세이는 프로이트의 관찰과 분석 능력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보여준다. 또한, 프로이트는 모세와 깊은 동질감을 느꼈고, 미켈란젤로의 동상에 대한 그의 해석, 즉 모세가 금송아지를 숭배하는 유대인들의 불순종을 발견하고 자신의 분노를 참는 모습으로 묘사된 것도 프로이트 자신의 해석을 반영했을 수도 있다.
프로이트는 자신이 정신분석학의 미래와 불멸성을 맡겼다고 믿었던 많은 학생들을 만났다. 그러나 그들 중 다수는 비록 프로이트의 사상에 의존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상에서 벗어났다. 프로이트의 마지막 작품 중 하나는 모세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는 십자가에 처형된 후 그리스도의 몸을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를 묘사한 대리석 조각품이다.
성 베드로 대성당이 소장하고 있는 미켈란젤로의 인상적인 조각품인 피에타 작품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주요 작품 중 하나로 간주되며 불과 21세의 젊은 조각가가 로마에 도착하여 대부분의 시간을 보편적 차원의 대가로서 헌신하고 그가 제작한 예술 경력을 시작할 수 있게 해주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예술의 가장 큰 보석으로 여겨지는 여러 작품이 남아있다.
피에타는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의 시신을 무덤에 안치하기 전에 무릎을 꿇고 있는 “슬픈 동정녀”의 성서적 주제를 담았다. 이 드라마틱한 강렬함은 이 표현의 부드러움, 평온함, 인간성 앞에서 사라져 버린다. 이 작품은 위대한 기교와 이교적 아름다움과 종교적 아름다움이 혼합된 작품으로 평가된다.
성모 마리아는 특별히 젊은 이미지를 대표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33세의 예수가 그의 어머니보다 거의 훨씬 나이가 많다는 사실이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해 왔다. 그러므로 저자는 동정녀가 자신의 섬세한 순결을 오랫동안 유지한 결과로 마리아에 대한 이러한 환상을 옹호했다. “영원한 동정녀로 보이려면 어머니가 아들보다 젊고 젊어야 했다.
게다가 그녀는 아들보다 비율이 더 크기 때문에 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으면 처녀 자리가 훨씬 더 크다. 전체는 골고다 산의 돌 위에 놓인 피라미드 구조 아래에 윤곽이 그려져 있으며, 꼭대기에는 마리아의 얼굴이 강조되어 있고 비스듬한 S를 형성하는 예수의 몸이 조각의 나머지 부분과 균형을 이루고 있다.
이 조각품은 제작 이후 그 아름다움과 해부학적 완벽함으로 인해 찬사를 받아왔다. 미켈란젤로는 성모 마리아의 고통과 슬픔, 그리고 움직이지 않는 그리스도의 몸을 훌륭하게 표현했다.
장엄하고 상징적인 피에타 작품 상세묘사
– 그리스도의 형상은 고통의 흔적을 나타내지 않으며 동정녀의 형상은 슬픔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죽음이 아닌 고인의 평온함과 버림을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 이 작품은 고 샤를 8세 국왕을 추모하는 장례식 기념물을 장식하기 위해 프랑스 추기경 장 빌헤르 드 라그라울라스(Jean Bilhères de Lagraulas)가 피렌체의 젊은 조각가에게 주문한 결과이다.
– 조각품의 가장 주목할만한 요소 중 하나는 성모를 덮고 있는 맨틀과 습관을 표현하기 위해 돌로 만든 작품. 대리석 조각의 장엄한 솜씨는 천연 실크와 같은 느낌을 주는 돌질의 재료를 꼼꼼하게 지워준다.
– 미켈란젤로가 직접 새긴 시그니처가 발견된 유일한 조각품이다.
어느 날 예술가는 자신의 작품을 존경하면서도 다른 예술가의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특정 방문객의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된다.
그런 다음 젊고 자랑스러운 미켈란젤로는 이러한 인식 부족으로 인해 깊은 상처를 받았으며 동정녀의 가슴에 라틴어로 그녀의 이름인 MICHAL ANGELUS BONAROTUS FLORENT FACIEBAT가 새겨진 리본을 조각했다. 작가는 이 행동을 회개하고 다시는 자신의 조각품에 서명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 이미지는 이상화되고 완벽하며 거의 신성하여 장면의 극적인 효과와 엄청난 대비를 제공한다. 저자는 플라톤의 신성 이상을 강조하고 그리스도의 형상에서 이 특성을 강조하고 싶었다. 그분의 몸은 동정녀와 직접 접촉하지 않고 조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 미켈란젤로는 이 작품에 사용된 카라라 대리석 블록이 그의 예술 경력 동안 작업한 것 중 최고라고 말했다. 이것이 바로 “라 피에타”가 완벽하게 마감 처리된 최고의 광택 조각품인 이유이다.
피렌체에서 그의 가장 유명한 걸작은 단연 다비드(David)작품으로 꼽고 있다. 성서 이야기에서 어린 다윗은 단 한 번의 전투에서 블레셋의 거인 골리앗을 물리친다. 피렌체에서 다비드는 깊고 강한 의미를 갖고 있다.
그는 큰 적을 죽일 수 있는 약한 방어자이며, 이는 그를 모든 폭군에 맞서 피렌체 공화국의 수호자로 만들었다.
이 조각상은 그의 무덤을 장식한 것으로 추정된다. 덕분에 당신은 고통받는 마지막 생애 동안 미켈란젤로의 생각과 마음 상태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될 것다. 미켈란젤로의 남다른 개성을 알기 위해서는 아카데미 갤러리와 두오모 미술관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지만, 피렌체에서 더 많은 미켈란젤로의 조각품을 만날 수 있다.
산토 스피리토 교회에 있는 특별한 십자가상은 그가 인체 해부학을 연구하기 위해 시체를 해부했던 곳이다. 그의 유명하고 많은 논의가 이루어진 바커스(Bacchus); 메디치 예배당(Medici Chapels)에 있는 화려한 로렌조 데 메디치(Lorenzo de' Medici)의 무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