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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비추는 태양의 불법 - 제25회 인간혁명의 종교⑤
행복 – 한 사람도 빠짐없이 개가를 울리는 인생을
소중한 불자(佛者)를 한 사람도 빠짐없이 행복하게!
이것은 은사 도다 조세이(戶田聖城) 선생님이 제2대 회장에, 또 내가 제3대 회장에 취임한 ‘5월 3일’에 빛나는 ‘창가의 마음’입니다.
그것은 부처의 간절한 바람을 실현한 것 일뿐 아니라 여기에 창가학회가 존재하는 의의도 있습니다.
은사가 도호쿠의 라디오방송 인터뷰(1956년 4월)를 하실 때의 일입니다. 회원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곧바로 대답하셨습니다.
“특별히 없습니다. 다만 신심을 단단히 실천해서 하루라도 빨리 행복해지라고 주장하는 바입니다.”
‘종교를 위해 인간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행복해지려고 종교가 있다.’는 일대선언이기도 했습니다. 학회는 민중의 행복을 최우선으로 하여 이 세상에 출현했습니다.
‘창가학회불’이라는 무상(無上)의 긍지
도다 선생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창가학회불(創價學會佛)’―미래 경전에는 학회의 이름이 이렇게 기록되리라.”
내 가슴은 설레었습니다.
그것은 법화경 불경품에서 설한 위음왕불(威音王佛)에 의거하여 엄연한 대확신입니다.
‘최초의 위음왕불은 중생을 교화하고 입멸했다. 다음에 나타난 부처도 위음왕불이라 이름하고 민중을 구제했다. 일대(一代)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음 대, 또 다음 대에 나타났다. 그리고 이만억에 이르는 부처가 모두 똑같이 ‘위음왕불’이라는 이름으로 장원한 세월동안 민중을 구제했다.’
도다 선생님은 “차례차례로 이만억의 부처가 있었으니 모두 동일한 이름이니라.”(법화경 556쪽) 하고 묘사한 무수한 부처를 “영원히 민중을 구제하는 위음왕불의 이름을 딴 ‘화합승단’이고 ‘조직’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예리하게 통찰하셨습니다.
그야말로 ‘창가학회불’은 초대 회장 마키구치 쓰네사부로(牧口常三郞), 제2대 회장 도다 조세이 선생님이라는 사제에 어깨를 나란히 광선유포의 대서원에 꿋꿋이 살아가는 지용보살의 모임입니다.
지금 창가의 연대는 세계 192객국·지역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지구의 이곳저곳에서 동지가 탄생하고, 한 사람 한사람이 자타 함께 행복을 확대하고자 매진하고 있습니다.
은사가 그린 미래가 현실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존귀한 부처의 진열인 학회에서 평생 멀어지지 않고 사이좋은 이체동심의 단결로 끝까지 걸어가야 합니다. 거기에 바로 영원한 행복의 궤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
<어의구전> (어서 787쪽 6행~7행)
자신(自身)의 불승(佛乘)을 깨닫고 자신(自身)의 궁전(宮殿)에 들어감이라, 소위(所謂)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함은 자신(自身)의 궁전(宮殿)에 들어가는 것이니라.
<현대어역>
자기 내면의 묘법을 깨닫고 자신의 궁전에 들어간다.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는 행동이 자신의 궁전에 들어가는 행동이다.
자신의 생명에 금강불괴(金剛不壞)의 궁전이
이번에 배울 <어의구전>①의 구절은 마키구치 선생님이 소중히 배독하신 성훈입니다.
자신의 생명에 불성(佛性)②을 엄연히 갖추고 있어 묘법을 부르면 곧바로 불계(佛界)를 나타내 최고로 행복한 경애를 열 수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자신의 궁전’이란 한 사람 한사람의 생명에 빠짐없이 갖춰진 불성을 말합니다.
이 궁전은 부나 명성, 권력 등으로 치장한 궁전이 아닙니다. 전 우주의 재보를 모아도 미치지 못합니다.
최고로 존귀하고 무너지지 않는 금강불괴의 행복이 있는 대궁전입니다. 게다가 아무런 차별 없이 모든 중생이 생명에 갖추고 있습니다. 여기에 불법이 설하는 생명존엄의 기반이 있습니다.
우리가 목표로 삼아야 하는 행복은 무엇에도 파괴되지 않는 ‘절대적 행복’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궁전에 들어간다.’는 말이고 자신의 불계를 여는 행동입니다.
고난을 극복하기 위한 묘법(妙法)
그러면 자기 궁전의 문을 여는 열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신의 불성을 깨닫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자신이 묘법의 당체(當體)라고 확신해야 합니다. 도다 선생님은 자주 “자신이 남묘호렌게쿄라고 정해야 한다!” 하고 외쳤습니다.
‘나 같은 게 행복해질 리가 없다’고 비하하면 그것은 묘법을 불신해 성불의 열쇠를 스스로 버리고 마는 것과 같습니다. 절대로 자신을 업신여기면 안 됩니다.
대성인은 “무일불성불(無一不成佛)이라고 하며 남묘호렌게쿄를 단지 한번 부른 사람은, 한 사람이라도 부처가 되지 않음은 없다고 설하시었소.”(어서 1573쪽)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일단 묘법을 수지한 사람은 어떤 고난도 극복하지 못할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틀림없이 행복해지고, 주위 사람들은 반드시 행복하게 만들 사명이 있습니다.
◇
① <어의구전> - 니치렌 대성인 미노부에서 강의하신 법화경의 요문을 닛코상인이 기록했다고 전한다. 상하 2권으로 되어 있다.
② 불성(佛性) - 불과를 얻기 위한 인으로서 일체중생이 갖춘 부처의 성분. 본성.
◆
<법화초심성불초> (어서 557쪽 6행~10행)
나의 기심(己心)의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를 본존(本尊)으로 숭앙(崇仰)하고, 나의 기심(己心) 중(中)의 불성(佛性)·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르고 불리어서 나타나심을 부처라고 하느니라.
비유컨대 새장 속의 새가 울면 하늘을 나는 새가 불리어서 모이는 것과 같고, 하늘을 나는 새가 모이면 새장 속의 새도 나가려고 함과 같으니라.
입으로 묘법(妙法)을 봉창하면 나의 몸의 불성(佛性)도 불리어서 반드시 나타나시고, 범왕(梵王)·제석(帝釋)의 불성(佛性)은 불리어서 우리들을 지키시고, 불보살(佛菩薩)의 불성(佛性)은 불리어서 기뻐하심이라.
그러므로「만약 잠시라도 가지는 자(者)는 내가 즉 환희(歡喜)하며 제불(諸佛)도 또한 그러하니라」고 설(說)하심은 이 심(心)이니라.
<현대어역>
우리 마음에 갖춘 묘호렌게쿄를 본존으로 존숭하여 우리 마음속 불성을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면 그 소리를 듣고 나타난 것을 부처라고 한다.
비유하자면 새장 속의 새가 울면 하늘을 나는 새가 그 울음소리를 듣고 모이는 것과 같다. 또 하늘을 나는 새가 모이면 새장속의 새가 나가려고 함과 같다.
입으로 묘법을 부를수록 우리 자신도 그 소리를 듣는 고로 불성이 반드시 나타난다. 범왕과 제석의 불성을 부르기에 우리를 수호하신다. 부처와 보살의 불성을 부르기에 기뻐하신다.
그러므로 ‘만약 잠시라도 (법화경을) 수지한 자가 있으면 나(석존)는 그 자리에서 환희한다. 부처들도 또한 마찬가지다.“(법화경 견보탑품 제11) 하고 설한 것은 이 마음이다.
창제가 바로 행복으로 가는 가장 올바른 길
절대적인 행복경애를 확립하는 일은 전부 창제에서 시작한다고 가르치신 구절입니다.
이번에 배독하는 <법화초심성불초>③의 성훈 앞부분에서 “한번 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하면 … 일체중생의 심중(心中)에 불성을 오직 한마디로 불러 나타내시는 공덕은 무량무변하니라.”(어서 557쪽)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제목을 철저히 부르면 무량한 공덕에 감싸입니다.
예를 들어 지금 어려움에 처해 있어도 아무 것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창제가 바로 행복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입니다.
대성인은 새장 속의 새와 하늘을 나는 새가 서로 불러 감응하는 비유를 들어 어본존을 믿고 묘법을 부를 때, 그 몸에 그대로 불계의 생명이 나타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창제는 부처의 생명을 자기 몸에 열어 빛내고 십계(十界)의 일체중생 마음속에 있는 불성을 부르는 장엄한 의식입니다.
“부르고 불리어서”의 부른다는 말은 본디 어본존에게 하는 창제입니다. 남묘호렌게쿄는 자기가 갖고 있는 불성의 이름입니다. 따라서 불리는 대상은 기심의 불성입니다.
다시 말해 제목을 함으로써 자기 마음속 불성을 불러 나타냅니다. 게다가 모든 사람의 불성도 불러 나타낼 수 있습니다.
자신의 행복을 남이 해주지 않습니다. 행복은 스스로 쌓아야 합니다.
불행을 남의 탓으로 돌려도 아무것도 생기지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자신의 인생은 스스로 개척해야 합니다. 그런 자신을 최대로 빛나게 하는 음률이 제목입니다.
부처란 ‘계속 투쟁하는 사람’의 이명(異名)
불교학자인 나카무라 하지메 박사④는 석존의 성불을 고찰해 이렇게 논했습니다.
“붓다(깨달은 사람)가 된 뒤에도 그(석존)는 여전히 인간이었다.”
“깨달음을 열어 ‘부처’라는 다른 존재가 된 것이 아니다.”
성불이라 해도 다른 무언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석존도 결코 인간이 아닌 무언가 특별한 존재가 되지 않았습니다.
부처가 되어도 인생의 고뇌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고뇌가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살아 있는 한 고뇌나 고난의 싸움은 계속됩니다.
오히려 묘법을 부르고 사람들을 구제하고자 고(苦)의 근원인 무명⑤이나 마⑥와 벌이는 끊임없는 투쟁이 불도수행입니다.
그 순간마다 불성이 용현합니다. 거기에 범부의 모습 그대로 불계를 여는 범부즉극(凡夫卽極)의 진수가 있습니다.
생로병사라는 근원적인 고(苦)를 초극하는 불법의 빛나는 길이 열립니다.
이것이 ‘인간종교’의 진면목입니다.
성훈에 “불보살의 불성은 불리어서 기뻐하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광포를 위해 투쟁하는 서원의 기원으로, 말하자면 전 우주의 불성을 일깨워서 내편으로 만들어 최고로 행복한 경애를 얻는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부르는 창제행은 불보살의 불성을 부를 뿐 아니라, 기쁘게 만듭니다.
제목의 사자후로 투쟁하여 약동하는 생명은 대환희의 불천(佛天)이 가호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진실한 행복을 확대할 수 있습니다.
경애를 바꾸는 여실지견(如實知見)의 지혜
불법의 지혜는 ‘행복으로 가는 직도’입니다.
대성인은 “아귀(餓鬼)는 항하를 불이라 보고, 사람은 물이라 보며, 천인(天人)은 감로라고 보니 물은 하나이지만 과보(果報)에 따라서 보는 바가 각각 다름이라.”(어서 1050쪽)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같은 세계에 살아도 부처와 중생은 달리 보고 느낍니다. 그것은 보는 사람의 경애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고뇌가 많은 범부의 모습이지만 부처의 지혜를 발휘하면 고뇌의 세계가 확 바뀝니다. ‘여실지견(如實知見)’⑦입니다.
지혜의 안목을 넓히면 모든 중생이 불성을 갖추었다고 실제로 지견(知見)할 수 있습니다. 삼라만상의 진실한 모습도 있는 그대로 지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묘법을 부르면 어떠한 고뇌도 반드시 변독위약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전부 의미가 있고 불법에는 헛됨이 없다고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병에 걸렸기에 진지하게 기원할 수 있었다!
고난과 투쟁했기에 경애를 열 수 있었다!
숙명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시련과 맞닥뜨려도 부처의 눈으로 보면 모두 한층 더 높은 경애로 열립니다.
관점이 바뀐다, 즉 일념이 바뀌면 모든 고난이 자신을 인간혁명으로 이끄는 양식이 됩니다.
자신이 반전 드라마의 명배우가 되어 행복승리로 장식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기쁠 때도 슬플 때도 어본존을 떠나지 말고 제목을 계속 불러야 합니다.
끝까지 기원하고 또 기원하면 부처의 지혜를 발휘해 고뇌에 찬 세계가 민중을 구제하는 사명의 무대로, 환희의 보트로 만들 수 있습니다.
도다 선생님은 이 어서를 인용해 “어본존에게 제목을 부르는 사람이 바로 본존의 실체라는 점은 명백하다. 그러므로 이 모습을 진실한 수지(受持)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떠한 역경에도 꺾이지 않고 투쟁하는 자체가 승리고,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 부처의 모습입니다.
◇
③ <법화초심성불초> - 이 어서의 상세한 배경 등은 나와 있지 않지만 내용을 보아 예전에 염불을 믿던 여성문하에게 법화경 신앙의 기본을 가르치신 어서라고 배견된다.
④ 나카무라 하지메(中村元) 박사 - 1912년~1999년. 인도철학자이자 불교학자. 고대 인도철학부터 현대 인도사상과비교사상학까지 폭넓은 연구영역으로 유명하다. 대표작에 《동양인의 사유방법》 등이 있다.
⑤ 무명(無明) - 생명의 근본적인 무지. 궁극적인 진실을 밝힌 묘법을 믿지 않고 이해하지 못하는 어리석음, 또 그 무지에서 일어나는 어두운 충동.
⑥ 마(魔) - 신심을 수행하는 사람의 생명에서 묘법의 당체가 내포된 생명의 광채를 빼앗는 작용.
⑦ 여실지견(如實知見) - 현실의 상(상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 법화경 여래수량품 제16에는 “여래(如來)는 여실히 삼계(三界)의 상(相)을 지견(知見)하건데”(법화경 481쪽)라고 있다. 여래 삼계(중생이 사는 현실세계)를 여실히 지견하고 삼라만상의 십계(제법)의 진실한 모습(상)을 파악하여 일체중생을 구제할 지혜를 설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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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묘법화문답초> (어서 467쪽 16행~468쪽 1행)
적광(寂光)의 도읍(都邑)이 아니고서는 어느 곳이나 모두 고(苦)이니라, 본각(本覺)의 거처(居處)를 떠나서 무슨 일인들 즐거움이 되리요.
원(願)컨대 「현세안온(現世安穩)·후생선처(後生善處)」의 묘법(妙法)을 수지(受持)하는 것만이 오로지 금생(今生)의 명문(名聞)·후세(後世)의 농인(弄引)이 되리라.
모름지기 마음을 하나로 하여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나도 부르고 타인(他人)에게도 권(勸)하는 일만이 금생(今生) 인계(人界)의 추억이 된다.
<현대어역>
‘적광의 도읍’ 이외는 어느 곳도 모두 고뇌의 세계다. 진실한 깨달음이 있는 곳을 떠나서 무엇이 즐겁다 할 수 있겠는가.
바라건대 ‘현세의 삶은 안온하고 후세는 좋은 곳에 태어난다’는 묘법을 수지하는 일만이 금생에는 진실한 명예가 되고, 후생에는 성불로 이끌어주리라.
어디까지나 한마음으로 남묘호렌게쿄라고 나도 부르고 남에게도 권하시라. 실로 그것만이 금생에 인간으로 태어난 추억이 된다.
‘현세안온 후생선처’를 실현
묘호렌게쿄를 수지함으로써 부처의 경애를 열 수 있다고 가르치신 <지묘법화문답초>⑧의 한구절입니다.
대성인 불법은 어디까지나 현실세계에서 악전고투하는 민중을 구제하는 불법입니다.
‘적광의 도읍’ ‘본각의 거처’란 불법에서 설하는 행복한 경애를 말합니다.
진실한 행복으로 가는 길은 자신의 흉중에 불계의 생명을 나타내는 것뿐입니다. 그러기 위해 ‘현세안온 후생선처(현세의 삶은 안온하고 후세는 좋은 곳에 태어난다)’의 묘법을 수지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불교 중에는 현세를 기피하고 후생에서만 행복을 찾으려고 생각하는 종파도 있습니다. 법화경은 ‘현세안온의 행복’과 ‘후생선처의 행복’ 양쪽을 진실로 실현하는 유일한 경전입니다.
현당이세(現當二世)에 걸쳐 민중을 구제하는 가르침입니다.
어디까지나 ‘지금’이 중요합니다.
진정한 ‘현세안온’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나에게는 어본존이 있다’고 확신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나에게는 스승이 있다’ ‘동지가 있다’며 무슨 일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고 서로 격려하고 광선유포를 위해 꿋꿋이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학회라는 안전지대가 있습니다.
금생의 명문 후세의 농인
“묘법을 수지하는 것만이 오로지 금생 명문 후세의 농인”이라는 말씀대로 어본존에게서 절대로 멀어지지 않는 사람이 바로 부처에게 칭찬받는 영원한 ‘명문’의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현세에서 끝나버리는 명문, 즉 지위와 명예와 재산만 추구한다면 더욱 큰 욕망과 허영에 빠지기 십상이고, 거기에 영속적인 충실과 만족은 없습니다.
금세에 태어난 깊은 의미도, ‘무엇을 위해 사느냐’는 목적을 탐구하는 일도 없습니다.
현실의 깊은 파도에 휩쓸리거나 겉모습에 농락당하는 인생만큼 공허하고 초라한 것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어서는 묘법을 믿고 따라 소중한 일생을 영원한 행복경애로 장식하라고 가르칩니다.
이 신심을 만나 어본존을 수지하는 이외에 진정한 ‘명문’, ‘진실한 ’명예‘는 없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영원히 퇴색하지 않는 생명의 훈장입니다.
나만의 행복도 없고 타인만의 행복도 없습니다. 이것이 불법의 행복관입니다. 자타 함께 행복해지려고 용감하게 지용의 사명에 살아가는 인생이 더할 나위 없는 기쁨입니다.
‘마음의 재보’를 쌓는 ‘금생의 추억’
“나도 부르고 타인에게도 권하는 일만이 금생 인계의 추억”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현세에 불연(佛緣)을 확대하고자 끝까지 도전한 사람은 최고로 값진 ‘마음의 재보’를 쌓을 수 있습니다. 현세 최고의 추억이자 가장 충실하고 행복한 인생을 걸을 수 있습니다.
설령 ‘곳간의 재보’ ‘몸의 재보’는 있어도 ‘마음의 재보’를 쌓지 못한 인생은 진실로 행복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고령화시대를 맞아 나이가 들수록 마음먹은 대로 활동할 수 없는 분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쌓은 ‘마음의 재보’는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한 걸음이라도, 두 걸음이라도 전진
‘수력홍통(隨力弘通)⑨이라 말씀하셨듯이 지금의 자신, 오늘의 내가 할 수 있는 힘을 다해서 하면 됩니다.
가족과 친구, 후배를 위해 기원하고 현명하고 창의적인 발상과 아울러 또 서로 돕고 서로 격려하며 한 걸음이라도 두 걸음이라도 계속 전진해야 합니다. 그래야 ‘마음의 재보’가 더한층 쌓입니다.
우리에게는 광선유포라는 서원이 있습니다. 이 서원에 꿋꿋이 살아가는 인생만큼 숭고한 인생은 없습니다. 광선유포를 위해 자기답게 용감하게 행동하는 사람이 바로 진정 행복한 사람입니다.
승리의 비결은 바로 ‘상쾌한 신심’
5월은 위대한 역사학자 아널드 토인비 박사⑩와 대담을 시작한 달이기도 합니다. 처음 뵈었을 때부터 올해로 45주년이 됩니다.
투철한 영지로 인류사를 내려다본 박사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진실한 행복은 물질적인 부를 추구하는 데서 정신적인 목표를 추구하는 쪽으로 인간의 에너지를 전환해야 찾을 수 있습니다.
정신적인 목표를 추구하는 일이야말로 인간의 활동 중에서 무한히 확대할 가능성을 내포한 유일한 영역입니다.”
‘정신적인 목표 추구’란 자기 내면의 탐구와 변혁이고 우리로 말하면 ‘인간혁명’이겠지요.
도다 선생님은 ‘절대적 행복을 얻는 것이 인생의 낙이고 인간혁명이다. 반드시 행복해지는 비결은 바로 상쾌한 신심에 있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는 신앙은 ‘인간혁명의 종교’입니다.
그것은 내가 더 현명하게, 더 강해지고, 더 잘살기 위한 투쟁입니다.
이 불도수행에 힘쓰며 상쾌하게 신심하는 사람은 불계가 힘차게 용현하고 확실한 행복을 쌓을 수 있습니다.
민중을 구제할 혼의 바통
석존과 니치렌(日蓮) 대성인은 ‘만인성불(萬人成佛)’이라는 일체중생이 행복을 실현하는 길을 열고 밝히셨습니다.
지금 우리는 이 불법의 정통을 계승해 평화와 행복운동을 세계로 넓혀 영원히 이어지게 만드는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경전에서 위음왕불이 일대로 끝나지 않고 민중구제의 바통을 대를 이어 영속적으로 계승한 것처럼 우리는 ‘학회의 영원성’을 확립해야 합니다.
창가 삼대(三代)의 사제가 내걸고 꿋꿋이 달린 광포의 혼의 바통을 지금 전 세계 지용의 청년들이 이어받았습니다.
앞으로 속속 이어질 새로운 세대로 SGI가 더한층 발전하는 동시에 더 깊으면서도 더 넓게 엄연히 계승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지금이야말로 ‘학회의 영원성’을 확립하자
광선유포를 위해 투쟁하는 생명은 ‘창가학회불’로서 영원히 빛납니다.
사제불이(師弟不二)의 정신에 따라 계승된 아름다운 이체동심(異體同心)으로 화합하는 불칙(佛則)의 전진에 비로소 부처의 생명이 맥동합니다.
여기에 ‘학회의 영원성’이 확립됩니다. 그때는 바로 ‘지금’입니다. 지금 일체를 승리함으로써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창가성을 구축해야 합니다.
자, 다 함께 용약환희하며 인류사에 찬연히 빛날 행복 개가의 서사시를 남기지 않겠습니다!
이 투쟁 속에 우리의 진정한 행복이 있다고 확신하고, 역사를 창조하기 바랍니다. 무한히 이어질 청년이 있기에 창가의 삼대는 영원히 행복합니다.
◇
⑧ <지묘법화문답초> - 이 어서는 성립 연대를 비롯해 여러 설이 있으나 자세한 것은 불분명. 제목에 ‘지묘법화’라고 있듯이 ‘묘법화’ 즉 ‘묘호렌게쿄’를 ‘수지하는’ 의의를 문답형식으로 가르치셨다.
⑨ 수력홍통(隨力弘通) - 각각의 힘에 따라 중생을 화도하기 위해 법을 설하는 것.
⑩ 아널드 토인비 박사 - 1889년~1975년. 영국의 역사학자, 문명사가, 런던대학교 왕립국제문제연구소의 요직을 역임. 대표작 《역사의 연구》는 각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케다 선생님과 대담집 《21세기를 여는 대화》는 인류에 귀중한 전망을 제시한 책으로 지금도 큰 반향을 넓히고 있다. 인용한 말은 다카자와 쇼이치가 번역한 《물질의 풍요, 마음의 중요성》와 《일본의 활로》에 수록, 국제PHP연구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