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안동의 '예끼마을'
안동댐 건설로 수몰민 정착한 예끼마을
마을 곳곳, 벽과 조형물에서 예술과 끼 넘쳐
안동호 물 위 걷는 선성수상길
[안동(경북)=이데일리 강경록 기자] 안동호 호숫가에 자리한 경북 안동의 작은 시골마을. 이 마을의 이름은 ‘예끼’다. ‘예끼’는 누군가를 혼내거나, 혼이 날 경우에 듣는 말. 보통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쓰는 표현이다. 자연스레 ‘예끼’ 다음은 ‘이놈’이나 ‘고얀놈’이 입에 붙는 게 일반적이다. 왜 마을 이름을 ‘예끼’라고 지었을까. 예끼마을의 ‘예끼’는 ‘예술의 끼’의 줄임말이다. 예술의 끼가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 ‘예끼마을’이었던 것이다. 이름처럼 마을 곳곳에는 크고 작은 갤러리와 새련된 카페가 자리하고, 오래된 골목은 예스러움이 세련된 감각으로 더해져 동네를 밝히고 있다. 여기에 세월의 이끼가 뒤덮인 고택과 그보다 더 오래된 가치를 소중하게 품고 사는 사람들의 삶의 터가 바로 예끼마을이다.
선성현문화단지 옆 예끼마을 골목과 벽에 그려진 벽화. 예끼마을의 옛 모습과 선성수상길을 함께 그려놓았다. |
예안사람이 예끼마을에 정착한 이유
예끼마을을 찾아가는 길. 안동시청에서 도산서원 방향으로 길을 나선다. 그렇게 30여분을 달려 도착한 곳은 한국국학진흥원. 그 아래 산기슭에 산골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바로 예끼마을이다. 행정구역상 도산면 서부리다. 이 산골에 어떻게 마을이 생겨난 것일까. 사실 이 마을이 생겨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마을 사람 대부분도 예안이라는 곳에서 살던 사람들이다. 도대체 어떻게 된 사연일까. 45년 전인 1976년. 당시 낙동강 물길을 막아 안동댐을 건설하면서 여러 마을이 물속으로 사라졌다. 예안마을도 수몰 마을 중 하나였다. 대부분의 예안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지만, 차마 마을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은 산언덕으로 모여들었다. 발밑에서라도 고향을 두고 보려는 심산이었다.
마을 규모가 400여 가구에 달했다. 대구를 왕래하던 직행 시외버스도 운행했을 정도. 장날이면 배를 타고 정성껏 지은 농작물을 한가득 머리에 이고 팔러 나오는 아지메와 고등어 한 손 손에 들고 비틀거리는 할배들로 북적댔다.
옹기종기 모여살던 마을은 어느새 조용해졌다. 농사짓고 소 키우던 이웃은 새 돈벌이를 찾아 도시로 떠나고, 나이든 노인들은 세월이 가져다준 무게를 짊어지다 세상을 떠났다. 마을은 절반으로 줄었고, 그렇게 생긴 빈자리를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도 허전함으로 채워졌다.
시간이 흘러 마을에 다시 생기가 돌고 있다. 마을로 젊은 사람들이 찾아오면서다. 지난 2018년 마무리된 안동의 ‘이야기가 있는 마을 조성사업’이 계기가 됐다. 잊혀지던 옛이야기도 하나둘씩 들춰내기 시작했고, 까맣게 이끼 때가 낀 담벼락에는 벽화로 이야기를 그렸다. 그러는 사이, 빈집들은 새로운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했다.
호숫가 마을 속 예술과 끼가 있는 사람들
이제 예술의 끼가 흘러넘치는 이 마을을 둘러볼 차례. 마을입구부터 큰 조형물이 반갑게 인사한다. 조형물 아래 ‘예술과 끼가 있는 마을’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여기서부터 안동호까지는 내리막길이다.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송곡고택이 있다. 예안마을에 있었던 것을 1975년 이곳으로 이전해왔다. 송곡고택 맞은편에 근민당(近民堂)이라는 미술 갤러리가 있다. 선성현 옛 관아가 한옥 갤러리로 탈바꿈한 것으로, 예술 작품에 한옥 고유의 품격을 더했다. 갤러리 창을 통해 보이는 마을 풍경은 어떤 풍경화보다도 투명하고 서정적이다.
마을 곳곳에도 여러 갤러리가 있어 예술향이 가득하다. 조용했던 마을이 예술과 끼로 점점 채우고 있는 공간이다. 우체국은 유명작가의 전시공간과 교육공간으로, 마을회관은 작가 창작실로 탈바꿈했다. 안동선비순례길 종합안내소 앞의 ‘끼 갤러리’는 마을 아이들의 솜씨를 뽐내는 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마을 골목으로 발을 들인다. 골목에는 1970년대식 풍경을 남겨두기도 했고, 너무 과하지 않은 정도의 벽화를 그려 넣기도 했다. 선성수상길을 그려놓은 골목에서는 ‘인증샷’ 찍느라 분주했고, 글을 테마로 한 골목에서는 가슴 울리는 문구에 길을 멈췄다. 벽 속의 꽃들은 사시사철 언제나 만개해 반긴다. 때로는 아이들의 말뚝박기도 훔쳐보고, 오래된 이발소도 들여본다. 벽 위의 그림들은 그렇게 여유롭게 지나간다. 비록 화려함이나 세련됨과는 거리가 멀지만, 벽 속의 세상은 순수하고, 평온하다. 그렇게 골목들을 다니다 보면 한겨울 한파도 녹여버릴 따스함이 가득하다.
호수 위 아득하게 뻗은 수상 다리에 오르다
안동호 쪽으로 선성현문화단지가 깃들어 있다. 안동호가 훤히 내려보이는 자리에 객사, 동헌, 관창 등 옛 관아를 복원해 놓았다. 선성현문화단지 앞, 잔잔한 호수 위에 수상 데크(Deck)가 길게 펼쳐져 있다. 이 길은 지난 2017년 만들어진 ‘안동선비순례길’의 1코스인 ‘선성현길’. 오천리 군자마을에서 시작해 코스 이름이 된 선성현문화단지를 거쳐 월천서당에 이른다. 군자마을 뒷산을 넘어 안동호반을 따라가는 길로, 편안한 산길과 걷기 쉬운 데크로 이어져 있다.
선성현문화단지 아래 안동호 수면 위에 길이 1.2km, 폭 2.7m의 규모의 부교(浮橋)가 놓여 있다. 선성현길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길인 ‘선성수상길’이다. 이 부교 덕분에 편안하게 물 위를 걸으면서, 안동호의 아름다움에 빠져볼 수 있다. 선상수상길에서는 평지와 달리 호수의 잔잔한 물결이 부교를 타고 전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세상을 꽁꽁 얼어붙게 했던 한파도 안동호의 아름다운 풍광에 잠시 힘을 잃는다. 수상길 중간 지점에는 쉼터를 겸한 포토존이 있다. 모형 오르간과 책걸상, 간이 철판 등 추억의 조형물도 있다. 과거 안동댐 건설로 수몰된 옛 예안국민학교가 이 자리에 있었음을 기념하기 위함이다. 일부나마 학교의 옛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곳에서 잠시 코끝을 에는 시린 바람과 함께 따스한 추억에 젖어본다. 수몰로 인한 ‘실향민’들의 향수도 아련하게 전해져 오는 듯하다. 그렇게 한동안 신선처럼 호수 위를 거닐다 보니 현세의 번뇌가 마치 남 일 같이 느껴져 온다.
여행메모
△먹을곳= 예끼마을에는 식당이 제법 있다. 그중 마을 토박이가 추천한 식당은 민속식당은 안동찜닭이, 선비촌식당은 간고등어, 대풍식당은 오삼불고기, 나그네식당은 시골정식이, 미정식당은 육계장이다. 술을 좋아한다면 ‘맹개술도가’도 빼놓을 수 없다. 직접 빚은 세가지 도수의 안동소주를 잔에다 조금씩 시음해볼 수 있는 곳이다.
△잠잘곳= 선성현문화단지 앞 주차장 쪽으로 한옥체험관이 있다. 모두 6동(8인용 2실, 6인용 2실, 2인용 2실), 세미나실, 식당 등의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다. 외부는 한옥이지만, 내부는 현대식으로 만들어져 있어 한옥의 불편함을 최소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