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 허락된 인연 -
大選무지개
서석조
별천지가 있을 테다, 저 강 건너 저 산 넘어
유리 벽에 부딪히는 까치의 낭패처럼
작심한 허튼소리여도 우르르 몰리는 귀
막무가내여야 하지 펴지 못하는 날개
허위단심 모여들어 환호하는 시장 바닥
여우비 반짝 내리고 무지개 섰다 진다.
*서석조 : 2004년 ‘시조 세계’로 등단, 작품집으로 ‘돈 받을 일 아닙니다’ 등 다수. 수상으론 「경남 시조 문학상」, 「서정주 문학상」 등
늦가을이었다. 빌딩 숲 사이로 간간이 몸을 떨며 바람을 맞는 가로수 잎들이 하나, 둘씩 떨어지는 날들이었다. 스치는 바람에 길 가던 연인들은 저마다 하늘을 보며 가슴을 저몄다. 계절이 바뀌는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님에도 사람들은 떨어지는 낙엽을 보고, 막바지까지 청명한 하늘을 보며 떠나가는 가을을 아쉬워하고 있었다.
무산 시 중앙동 한 빌딩 안 사무실이었다. 나는 그날따라 업무를 하다말고 마음이 심란하여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창밖은 바로 부두였다. 대한민국 수출입의 관문 중앙부두는 컨테이너와 정박 중인 배들 그리고 짐을 싣는 해상 크레인이 인부와 함께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먼바다에는 조업 중인 선박과 항구로 입항하는 상선들이 이따금 보였다.
오후 5시 30분. 조금만 견디면 퇴근할 시간이었다. 최근 들어 새벽기도는 물론 수요예배와 금요철야기도 그리고 주일예배까지 빠지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업무도 열심히 했건만, 이상하게 내 마음은 늘 공허하고 허전했다. 아내와 특별히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고 아이들도 그 정도면 잘 커고 있었다. 무엇보다 경제적으로 어렵지 않아 남들이 보기엔 윤택하다고 할 정도였다. 그런데도 나는 늘 가슴 한쪽에 무거운 돌을 넣고 다니는 사람처럼 힘이 없었고 쓸쓸했다. 이런 나의 사정을 어떻게 알았는지 오늘은 옆 관세사사무실의 친구 한수가 저녁 식사 겸 간단한 술자리를 갖자며 오후에 연락이 왔다.
그런 상념으로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을 때였다. 내 책상과 직원들 사이로 쳐 놓은 칸막이 끝에서 인기척이 나 나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얼마 전, 본사에서 이곳으로 발령 난 직장생활 삼 년 차, 연희였다.
“과장님.”
나는 행여 결재할 것이 있나 싶어, 우선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그녀 뒤에 낯선 여직원이 보였다.
“들어와요. 무슨?”
나는 미리 볼펜을 들고 그녀가 서류를 건네길 원했다. 보고서 내용이 시간이 오래 걸릴 수 있어 빨리 결재할 심산이었다.
“결재할 건 없어요. 옆 사무실에 새로 여직원이 들어와서 과장님께 인사드리려고 같이 왔습니다.”
“그래?”
그제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연희와 함께 온 여자를 자리에 앉으라고 권하고선 들 앞에 앉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정유희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어요.”
연희가 잠시 차를 준비하러 간 사이에 나는 그녀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짧은 커트 머리에 화장기 없는 하얀 얼굴, 새침한 표정에 깔끔한 투피스 차림의 그녀는 나와의 첫 대면임에도 이곳 무산 시의 여느 직장여성처럼 부끄러운 기색 없이 담담했다.
“옆 사무실이라면 K 관세사사무실이죠? 잘 되었네요. 실은 K는 나와 대학 동기입니다. 녀석이 가끔 실없지만 아주 유능하고 돈은 잘 버는 친구니, 배울 게 많을 겁니다. 그런데 어디서 오셨죠?”
“서울에서 왔답니다. 저랑 동갑이고 이름도 끝 자가 같아요.”
그때 커피를 타온 연희가 그녀대신 대답을 했다.
“그렇구나. 어느 부서에서 일하실 건지?”
“아마, 수출입 통관 담당으로 할 것 같아요.”
이번엔 그녀가 연희 대신 또박또박 이야기했다. 그녀의 표정이나 말투가 영락없는 서울 여자였다.
“통관업무라면 우리와 밀접한 업무네요. 연희에게 들어 알겠지만 우리는 운송업체입니다. 그쪽에서 통관이 끝난 물품은 통상적으로 우리가 주로 운송을 하니 앞으로 연희 씨랑 업무 협조하면서 잘 지내기 바랍니다. 그럼, 반가웠어요.”
나는 습관적으로 그녀 앞으로 손을 내밀었는데, 그녀는 주저 없이 내 손을 잡으며 웃었다. 가까이서 보니 아주 예쁜 얼굴이었다.
“자! 들자고. 오늘은 특별히 형님인 내가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아우에게 한잔 사는 거니까, 마음껏 먹어.”
대학동기생 한수는 시골 출신이었다. 시커먼 피부에 땅딸막한 체구라 처음 보는 사람들은 그를 노동자로 오인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하지만 그의 성실하고 전투적인 생활방식은 내가 봐도 놀랄 만큼 경이로웠다. 이름도 없는 지방대학에서 관세사 자격시험을 통과하는 건 손꼽히는 정도였는데, 녀석은 대학 3학년 때 이미 시험을 통과하여 졸업 후 이름있는 관세사사무실에서 사무장을 하다 몇 년 전에 당당하게 이 빌딩에서 자신의 사무실을 냈다.
빌딩 근처 고급 초밥집이었다. 이곳은 무역 관련 사무실이 집중된 지역이었다. 관세사, 보세사, 대한항공, 통관업체 등 여러 사무실이 밀집되었기에 퇴근 시간이 조금 지나자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몰려와 시끄러웠지만, 둘이 조곤조곤 이야기하기에는 별 불편이 없었다.
“삶의 의미까지는 아니고, 그냥 사는 게 별 재미가 없어.”
나는 접시에 있는 광어 한점을 집어 먹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뭐야? 뭐야? 착한 아내와 토끼 같은 새끼들을 거느리고선 그게 무슨 말이냐? 나 같은 이혼남은 그럼, 죽으란 말이냐?”
그는 불행히도 아내와 이혼한 상태였다.
“아! 그리 생각했다면 미안해. 그런 말이 아니고, 이상하게 요즘 들어서 기분이 그냥 우울해. 열심히 산다고 살았으나, 그냥 가슴 한쪽이 뻥, 하고 뚫린 것 같아. 이상하지?”
그는 내 말에 다짜고짜 자신의 잔을 내게 내밀었다.
“오늘은 그냥, 한잔해. 그래, 이해한다. 우리 나이니까 그럴 수 있어. 학창시절엔 오로지 대학, 그놈의 대학에 가기 위해 죽도로 공부만 했고, 대학 졸업 후엔 정말 먹고살려고 앞만 보고 달렸지. 매일 월, 화, 수, 목, 금, 금, 금이었잖나. 집에 가면 마누라는 오직 돈, 돈만을 요구하고 새끼들은 내가 먹여 살리는지도 모르고 날 무시했어. 아마 너도 그런 것일 거야. 그저 시대를 잘못 타고난 탓이야. 별 건 없어. 이제 우리는 돈 많이 벌어서 먹고, 마시며 즐기면 돼. 인생 뭐 있냐?”
그의 말에 나는 작정을 하고 그가 준 술을 냉큼 마시곤, 내 잔을 따라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럴까? 너무 앞만 보고 달려와서 이제 내가 지친 것일까? 아직 할 일도 많은데 말이야. 부장 진급도 해야 하고, 우리 아이들 대학에도 보내야 하는데.”
그러자 그는 내게 핀잔을 주었다.
“야! 그런 것 아무 소용없다. 진급해서 뭐할 거며, 새끼들 걱정해서 뭐할 거냐? 그냥 네가 지금 하고 싶은 일은 다시 시작해. 너! 대학 다닐 때 우리 학교에서 이름난 시인이었잖아. 그때만 해도 여학생들이 줄줄 따라다녔지. 그런데 지금은 넌 네가 뭐라고 생각해? 월급쟁이야, 아니면 시인이야?”
그의 말에 나는 가슴이 찔렸다. 시(詩)? 그제야 나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나의 꿈이 생각이 났다. 대학 시절 시문학동아리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동인을 결성 하여 동인지를 만들고 한 달에 한 번 이상 시를 발표하던 나였다. 하지만 결혼 후, 나는 일체의 문학 활동을 그만둔 상태였다. 왜냐고? 아내와 두 아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와 마찬가지로 주말 없이 여태껏 직장생활을 했다. 주일일 경우 겨우 오전 예배만 보고 사무실로 온 적이 태반이었다. 나는 그야말로 돈벌이만 하는 슬픈 존재로 변한 것이다.
의기투합이란 게 아마 이런 것일까, 그와 나는 그 자리에서 소주 4병을 마셨는데, 그래도 겨우 한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다.
“참! 오늘 우리 사무실에 새로 온 직원이 왔는데, 아까 너에게 인사하러 왔지?”
그는 매운탕을 시키면서 내게 물었다. 소주 2병을 마셨다지만 그는 전혀 취하지 않았다.
“그래, 왔더군. 인사했어.”
“그 여자, 좀 어때?”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나 싶었다.
“뭐가?”
그러자 그는 잠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여자는 서울이 고향이야. 그쪽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다니고 있었단 말이야. 이력서를 보니 이전 직장이 꽤 괜찮은 직장이었어.”
“그런데?”
“그런 여자가 왜 집과 뚝 떨어진 이곳 무산 시의 이름도 없는 개인 관세사사무실로 왔을까? 그전 직장보다 월급도 형편없을 건데.”
“그 여자가 어떻게 네 사무실로 오게 되었는데?”
그는 가슴이 답답한지 소주를 한 병 더 시켰다.
“전에 일하던 통관 담당하던 여자애가 시집갔잖아. 그래서 내가 관세사 협회에 구인신청을 해 두었지. 그런 후에 관세사 협회장이 직접 전화가 왔어. 그 여자가 갈 터이니 꼭 채용시키라고 말이야.”
“하하, 아주 배경 있는 여자구먼. 잘되었네. 너도 앞으로 그 여자애를 잘 보살펴주고 관세사 협회장에게 충성하면 되겠네. 됐다, 됐어.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지. 요즘 젊은 사람들의 사연은 우리가 잘 모르는 부분이 많아. 그냥 술이나 더 먹자고.”
나는 모처럼 우리만의 술자리 대화에 그 여자애가 더는 끼어드는 게 솔직히 싫어 그의 말을 뭉개버렸다. 하지만 그는 한술 더 떠, 내게 그 여자의 합석을 요청했다.
“뭐?”
“별 건 없어. 오늘 첫날인데, 지금 그 여자애는 밥도 못 먹고 업무 인수인계를 받고 있을 거야. 여기 와서 밥이나 먹이려고. 마침 매운탕도 나오니 말이야.”
그의 말에 난 이건 아니다, 싶었지만 돈 내는 사람이 그였으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대번에 사무실로 전화를 걸었다.
초밥집 출입구는 우리가 앉아있는 스탠드 맞은 편, 일반 좌석 너머에 있었다. 그는 출입구를 등지고 앉아있었고 나는 상대적으로 출입구를 바라보는 쪽이었다. 잠시 후, 일반 좌석에 앉아 술을 마시던 손님들의 시선이 일제히 출입구 쪽으로 향했다. 짙은 화장을 한 채 회색 바바리 코트를 입은 미모의 여자가 등장했다. 어떤 남자 손님은 와, 하는 감탄을 하는 이도 있었다. 나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는데 난 설마, 이 여자가 오늘 사무실에서 만났던 그녀인 줄 꿈에도 몰랐다. 여자는 출입문 입구에서 한참을 둘러보다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나는 내 앞에 있는 그에게 뒤를 돌아보라는 눈짓을 했다.
“어! 왔어?”
그녀, 정유희는 낮에 본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눈에 스모키 화장을 했고, 얼굴은 분홍빛으로 단장했으며, 몸에는 십대인 내 딸이 쓰던 은은한 모멘토 향수 냄새가 풍겼다.
“안녕하세요?”
그녀는 낮과는 달리 이번에는 아주 정숙하고 세련된 표정으로 우리에게 단정히 인사했다.
“우리 자리 옮기지. 어이! 주인장. 우리 테이블로 안내 좀 해줘요. 바로 매운탕과 밥 주시고요.”
그는 내가 그녀에게 인사할 기회도 주지 않고 아래쪽 넓은 테이블로 자신의 소주잔만 들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친구분과 오랜만에 술자리 가지시는데 제가 끼여서 정말 죄송해요.”
그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살짝 웃었다. 나는 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향수와 웃음으로 잠시 머리가 어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