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난 사람은 확실히 다르다, 변화된 삶과 성품에서 아름다운 열매들이 나타난다 이 고전을 통해 자신이 거듭났는지, 아닌지 명확히 점검해보라!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새로워진 척 스스로 자신을 속이지 말라. 확인할 수 없는 거듭남은 가짜다. 당신에게 거듭남의 징표가 없다면 두려워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런 징표도 없는 상태에서 스스로 거듭났다고 여기며, 거듭나려는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은 채 현재 상태에 만족하는 것이야말로 아직 거듭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죄 사함과 거듭남의 은혜를 주시는 주 예수를 바라보라.
|프롤로그|
올바른 거듭남의 진리를 배워라
이 책의 주제는 ‘거듭남’(重生)이다. 거듭남은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교리 가운데 하나이다. 예수님은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라고 엄숙히 선언하셨다. 예수님의 선언이 있은 후로 세상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장구한 세월이 흘렀고, 많은 나라와 제국이 흥망성쇠를 거듭했고, 위인과 현자들이 나타나 말과 글을 전하다가 흙이 되어 사라졌다. 그러나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예나 지금은 물론, 천지가 없어질 때까지 변하지 않는다. 중생의 가르침은 오늘날 특히 더 중요하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올바른 중생의 가르침을 견지해야 할 책임이 있다. 두 가지 입장 사이에서 더 이상 우물쭈물해서는 곤란하다. 우리가 믿는 바를 분명히 알고, 우리 입장을 옹호할 준비를 해야 한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진리가 공격을 받을 때 더욱 힘써 진리를 지켜야 한다. 진리를 사수하려는 굳은 결심과 항상 하나님의 편에 서겠다는 충정(忠情)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제부터 설명하려고 하는 중생, 곧 거듭남의 교훈에 귀를 기울여라. 물론 나는 내가 어떤 새로운 거듭남의 교리를 제시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문제를 둘러싸고 논쟁이 일어났을 때는 올바른 주장을 펼 수 있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더 있으면 그만큼 도움이 된다. 내가 성경을 근거로 거듭남의 의미를 좀 더 설명할 수 있고, 그래서 성경을 사랑하는 선량한 독자들의 이해를 조금이나마 증진시킬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며 하나님께 감사하고 싶다. 사람들의 견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우리를 판단하실 분은 오직 주님이시다. 따라서 우리는 “진리의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는가?”라는 한 가지 문제만을 확실히 규명하면 된다. 나는 이 책에서 거듭남의 본질(의미), 거듭남의 필요성, 거듭남의 징표를 차례로 살펴보고, 가장 흔히 제기되는 몇 가지 반론에 대해 답변을 제시할 생각이다. 하나님께서 이 네 가지 일을 잘할 수 있도록 도우신다면 독자들의 영혼에도 큰 도움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에필로그|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다!
지금까지 거듭남의 본질과 필요성과 징표와 나의 견해를 반박하는 여러 반론에 대해서 다루었다. 이제는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을 위해 몇 마디 엄숙한 말로 모든 논의를 끝맺는 일만 남았다. 나는 일부러 ‘엄숙한 말’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내가 다루어온 논의의 주제를 성경에 입각하여 올바로 생각하는 일은 정말 중요하다. 사람들은 때로 세례 받은 사람이 모두 거듭났다고 말하든지 거듭나지 못했다고 말하든지 큰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 이렇게 말하나 저렇게 말하나 똑같지 않느냐는 논리이다.
거듭남은 멸망과 영생의 갈림길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기에 둘 사이에는 매우 중대한 차이가 있다. 어떤 사람에게 “당신은 이제 내적 은혜를 받았으니 이미 마음에 존재하는 은혜의 씨앗을 틔우기만 하면 된다”라고 말하는 것과 “당신은 죄로 인해 죽은 상태이니 반드시 거듭나야만 살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언뜻 생각해도 이 두 가지 말이 일으키는 효과는 서로 큰 차이가 있다. 전자는 죄인에게 자장가를 불러주어 잠들게 하는 효과를, 후자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죄인을 일깨우는 효과를 각각 만들어낸다. 전자는 자신의 상태를 온전히 깨닫지 못하게 하고 영혼의 안일함과 나태함을 부추긴다. 다시 말해 마음에 은혜가 있기 때문에 언제라도 원하면 얼마든지 은혜를 활용할 수 있는데 굳이 서두를 필요가 없고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는 생각을 심어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후자는 양심의 가책을 자극하고, 자신의 상태를 깨달아 위험한 안전의식에서 놀라 깨어나게 만든다. 다시 말해 자기 속에 의지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피난처와 구원책을 찾는 가운데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게 만든다. 이렇듯 전자는 사람을 자연인의 상태에 머물게 만들지만 후자는 사람을 영적인 존재로 만든다. 또한 전자는 양심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지만 후자는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한다. 따라서 이렇게 말하나 저렇게 말하나 똑같다는 주장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그릇된 중생 교리를 경계하라 세례 받은 사람이 모두 거듭났다는 주장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를 새롭게 발견하게 될 때가 많다. 신앙생활을 잘 하다가 첫 사랑을 잃고 불신자와 다름없이 변해버린 평신도들도 있고, 한때 교회의 기둥이 될 것이라고 촉망받다가 그만 실족하여 무익한 존재로 전락한 목회자도 있다. 그릇된 중생 교리를 신봉한 탓에 신앙생활에 돌이킬 수 없는 해(害)를 입고 방황하는 신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릇된 중생 교리는 성경이 지지하지 않는 생각을 부추기며,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들에 심각한 영향을 끼친다. 그릇된 중생 교리는 선택, 양자(養子), 칭의(稱義), 성령의 내주하심이 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에게 저절로 부어진다고 믿게 만든다. 그릇된 중생 교리를 억지로 옹호하려다보니 그 밖의 중요한 교리들을 아전인수(我田引水) 격으로 이리저리 뜯어고치는 사태가 벌어진다. 또한 신자들은 일관성을 잃은 모순된 설명에 당황하며 혼란스러워 한다. 그런 주장은 기독교를 성례(聖禮)에 의존하는 종교로 만든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가르치는 기독교가 세례에서 시작하여 성만찬으로 유지되는 의식 종교로 변질되고, 사도 바울이 그의 서신에서 공들여 전했던 중요한 교리들이 한갓 종교 의식의 들러리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직임과 사역이 훼손되고, 믿음의 역할 또한 심각하게 왜곡된다. 나는 이런 현상을 지켜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따라서 결코 그릇된 중생 교리를 대수롭지 않은 문제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성경이 확증하는 거듭남의 표징을 확인하라 나는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의 양심에 이 문제를 진지하게 호소하고 싶다. 성경을 신앙의 유일한 규범으로 믿고 사랑하는 이들에게 호소한다. 모든 신자에게 간절히 호소한다. 주위에서 세례 받은 사람들의 삶을 유심히 관찰해보라. 그들이 세상과 세상 일들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지 살펴보라. 그런 다음 “그들은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들일까?”라는 묻고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요일 2:29; 3:9),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요일 3:10),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4)와 같은 성경 말씀으로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라. 예수님은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눅 6:44)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인을 자처하는 많은 사람들이 과연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지 살펴보라. 안타깝게도 세례 받은 사람들 가운데 성령의 열매는 거의 없고 육신의 열매만 주렁주렁 매달고 살아가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들에게는 성경이 말하는 중생(重生)의 표징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런데도 세례 받은 사람이 모두 거듭난다는 주장을 옳다고 인정할 수 있겠는가? 교회의 요리문답과 성례에 관한 조항을 살펴보아도 결과는 마찬가지이다. 세례를 통해 영적 은혜를 받으려면 “죄(罪)에 대해 죽고 의(義)에 대해 다시 사는 경험”이 필요하다. 세례를 받은 많은 사람들의 삶 속에서 과연 그런 은혜의 증거를 발견할 수 있는가? 그들은 과연 죄에 대해 죽었는가? 아니다. 그들은 죄 가운데 살고 있다. 그것이 그들의 본성이다. 그들은 “의에 대해 자유로운 죄의 종”(롬 6:20)일 뿐이다. 그들은 죄의 지배를 받으며 의에 대적하는 원수들이다. 결국 외적 상징 행위에 반드시 영적 은혜가 뒤따른다는 것이 그릇된 주장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만일 그런 일이 가능하다면 은혜가 있는 것과 은혜가 없는 것이 똑같다는 논리밖에 되지 않는다. 이번에는 반율법주의자들과 도덕폐기론자들을 생각해보자. 그들은 그리스도와 값없이 주어지는 은혜 안에서 구원을 얻었다고 고백하면서도 고의로 죄를 지으며 부끄러움을 모른 채 부도덕한 삶을 살아간다. 그들의 삶은 혐오스럽기 짝이 없고, 그리스도를 모욕하고 기독교를 불명예스럽게 한다. 우리 가운데 이 점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성령의 열매가 없고, 마음에 은혜도 없고, 중생의 징표가 없는 경우는 과연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삼위일체 하나님 가운데 삼위 되시는 성령을 모욕하는 것도 주님을 모욕하는 것만큼이나 심각한 범죄가 아니겠는가? 결국 세례 받은 사람이 모두 성령을 받는다는 주장은 도무지 성립될 수 없다.
거듭남의 증거가 있는가? “하나님, 성령을 보내주셔서 이 문제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라고 진심으로 기도하면서 이 문제를 스스로 깊이 생각해보기 바란다. 각자 내가 한 말과 성경의 증언을 비교해보고 진지하게 기도하면서 심사숙고하는 노력을 기울여주면 좋겠다. 이 책에서 내가 만일 예수님이 가르치신 진리에 어긋나는 말을 했다면 주님이 잘못을 깨닫게 해주시기를 기도한다. 하지만 성경의 교훈에 어긋나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양심을 걸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세례 받은 사람이 모두 저절로 거듭난다는 주장을 단호히 거부한다. 삶이 아니라 교인 등록이나 세례자 명부를 중생의 징표로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마음에 은혜가 임했는데도 삶의 변화가 뒤따르지 않고, 새 마음을 가졌는데 행위를 통해 그 증거를 확인할 수 없으며, 성령을 받았는데 삶 속에서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런 일은 성령과 참 신앙을 모욕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혼란스럽게 하며 신앙생활에 관한 모든 진실을 뒤집는다. 나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정당한 절차를 거친 세례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의가 없다. 교회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큰 특권이다. 하지만 나는 중생이 그보다 훨씬 더 큰 특권이라고 생각한다. 불행히도 우리 가운데는 세례를 받았으면서도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에 모두를 부탁한다. 우리는 모든 논쟁이 사라지고 영원한 삶만이 존재하는 곳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 날을 진정으로 소망하는가? 그렇다면 거듭나야 한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라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영원한 삶을 보장하는 것은 오직 중생뿐이다.
|편집자의 글|
당신은 교회 다니는 사람인가? 거듭난 사람인가?
제과학원에서는 과자나 빵 만드는 기술을 배워야 한다. 토익학원에서는 영어를 배워야 한다. 컴퓨터학원에서는 오피스 프로그램이나 프로그래밍 등 구체적인 컴퓨터 활용법을 배운다. 그럼 우리는 교회에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그간 당신은 교회에서 무엇을 구하고 얻었는가? 당신의 신앙생활을 돌아보라. 예수를 10년 믿고, 20년 믿고, 평생을 믿었는데도 자신이 거듭났는지 아닌지 명확한 인식이 없고, 자신의 인격과 생활이 변화되지 않았으면서 “나는 거듭난 사람이야”라고 굳게 믿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자신의 죄의 본성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지금 그 신앙 행태를 심각히 고민해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거듭나지 못한 상태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 5:22,23) 거듭났다고 확신하는 당신은 사랑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동료를 지금 사랑하는가? 당신은 말할 수 없는 기쁨 가운데 거하는가? 당신은 주위에 화평을 심는 사람인가? 당신은 억울하고 고통스러운 일을 당해도 그리스도처럼 참고 견디는가? 당신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대로 자비의 열매를 맺는가? 당신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만큼 이웃을 복되게 하는 선행에 힘쓰는가? 당신은 게으르지 않고 열심히 주님의 일에 충성하는가? 당신은 자기 뜻을 앞세우지 않고 언제나 온유한가? 당신은 주님을 위하여 육체의 소욕을 거절하고 절제하는가? 예전에 자신이 아니라 성령의 기쁨으로 오직 마음이 새롭게 되어 그리하고 있는가? 믿기 전이나 믿은 다음에도 부리던 성질 그대로 부리고, 고질적인 습관 하나 바꾸지 못하고, 기도를 해도 마지못해 하고, 봉사를 해도 의무감으로 하고,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는데 기쁨이 없고, 예수님을 생각해도 전혀 행복하지 않다면 그 사람이 예수를 믿고 변화된 것을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자신의 삶과 인격에 변화가 없는데 무엇 때문에 그 신앙 행태를 계속 유지하고 있는가? 혹시 인격과 삶의 변화 대신 다른 대체물에서 위로를 받으며 자족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교회 안에서 인간관계를 통해 누리는 혜택 때문인가? 향우회, 동창회, 인터넷 카페 동호회처럼 교회도 그 차원에서 다니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가 세상에서, 직장에서는 인정받지 못하고 있지만 교회에서만큼은 인정받을 수 있어서 자기자아를 실현하기 위해 교회 다니는 것은 아닌가? 세상에서는 말단인데 교회에서는 선생님, 집사님, 권사님, 장로님이라고 불러주는 것이 좋아서인가?
무엇을 구할 것인가? 이렇게 지금 우리는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다른 데 만족하며 지내고 있다. 제과학원에 등록한 사람이라면 마땅히 제과 제빵 기술을 배워야 하는 것처럼 범죄한 인간이 기독교에서 깨닫고 구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라. 거듭남(중생, 重生)이요 영생(永生)이 아닌가?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 3:36) 그런데 오늘 우리가 교회생활에서 성령으로 거듭나는 일에 주력하고 있는가? 오늘 이 시대의 기독교가 거듭남 대신에 자기계발, 처세술, 부자 되는 법, 세상의 방식으로 성공하는 법을 가르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교회는 천국의 보화(거듭남, 영생)를 소개하고 전하는 곳이지 세상의 가치관이나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곳이 아니다.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자들과 돈 바꾸는 자들을 내쫓으신 예수님이 지금 한국 교계(敎界)에 오신다면, 오늘 우리의 제단 위에 놓인 세상적인 온갖 잡것들을 일소(一掃)하실 것이다.
우리의 생사를 좌우하는 거듭남 교회는 거듭나지 못한 자들을 거듭나게 해서 천국 백성으로 만드는 곳이다. 교회가 이 우선적 사명을 등한히 하는 것은 영적 외도(外道)이다. 교회는 이 사명을 위해 이 땅에 존재한다. 어머니 뱃속에 있다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인간의 가장 중요한 과제 또한 한 번 더 태어나는 것, 곧 거듭나는 것이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요 3:6) 이렇게 거듭남은 우리의 생사(生死)를 가름하는 중대한 주제이다. 교회를 평생 다녀도 거듭나지 못하면 멸망할 것이요, 오늘 교회에 처음 출석했더라도 성령으로 거듭난 자라면 영생을 얻을 것이다. 이 책은 우리의 운명을 좌우하는 이 중차대한 중생(重生)에 대해 단순 명쾌하게 가르쳐준다. 또한 그 가르침이 매우 성경적이다. 이 책의 저자인 J. C. 라일(1816~1900)은 종교개혁의 영성을 소유한 지성적 목회자였다. 영국 교회 내의 교리적 혼탁함을 ‘오직 성경으로’라는 종교개혁 정신으로 개혁하는 일에 힘썼다. 그는 세례와 교인 등록이 거듭남을 자동으로 보장한다는 영국 교회 내 의식주의자(儀式主義者)들의 견해에 맞서, 거듭남은 교회 의식이나 성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되는 것임을 역설했다. 이 책은 교회가 거듭남에 대해 침묵하고, 교회의 의식과 제도에 충성하면 자동으로 천국 백성이 된다고 여겼던 시대에 하늘에서 떨어진 거룩한 폭탄이었다. “유아세례 받았어도, 세례 받았어도, 교회 수십 년 다녔더라도, 교회 직분자라도 거듭나지 않으면 지옥 간다!” 이 메시지가 오늘 타성에 젖은 신앙생활에 빠진, 거듭남 없이 열심히 봉사만 하는, 인격과 삶의 변화가 없어도 그간다져온 유대관계나 교회생활이 아까워 여가선용 차원에서 교회에 나가주는 모든 명목상의 크리스천들에게 선지자의 사자후(獅子吼)가 될 것이다.
자신의 거듭남을 확인하라 이 책은 먼저 거듭남이 무엇인지를 명쾌하게 보여주고, 왜 거듭나야 하는지와 거듭남의 표시가 무엇인지를 밝히 증거한다. 이 책을 통해 자신이 거듭났는지, 거듭나지 않았는지를 명확히 진단해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거듭나려면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도 분명히 터득하게 될 것이다. 이 책 3장에 제시된 거듭남의 표시 6가지는 더 도망할 수 없는 명확한 증거이다. 수십 년간 기독교 책들을 편집한 편집자로서 중생에 대해 이렇게 짧고 명쾌하게 제시한 책이 없었다는 것을 감히 말할 수 있다. (이 책 4장은 거듭남에 관한 교회 의식주의자들의 반론에 대한 저자의 성경적 반박으로 이루어졌지만, 오늘 한국 크리스천들에게 주는 유익도 크다. 유아세례나 세례가 중생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잘 설명되어 있다) 이 책은 ‘규장 컨버전 북스’로 편성되었다. 이 시리즈의 1권과 2권인 리처드 백스터의 《회개했는가》와 조셉 얼라인의 《돌이켜 회개하라》에 이어 세 번째 책이 된다. 앞서 두 권의 책이 하나님께로 돌이켜 회개하기를 촉구한 책이라면, 라일의 《거듭났는가》는 그 회개가 거듭남의 열매로 맺어져야 함을 보여주는 책이다. 그리하여 회개가 우리를 반드시 거듭남의 길로 인도하는 것을 증거한다. 두 권의 책으로 큰 은혜를 받았다면 이 책을 통해 자신의 거듭남을 확인하는 자리에 이르기를 바란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마 4:17).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 3:3). 오늘 이 책이 거듭남의 체험 없이 습관을 좇아 교회생활 하는 모든 자,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계 3:1)의 코에 생기(生氣)로 들어가기를 바란다. - 규장 편집국장 김응국 목사
J. C. 라일
1816년 5월 10일_ 영국 매클스필드에서, 은행가이던 아버지 존 라일과 어머니 수잔나 라일의 장남으로 태어나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다. 1834년_ 사립 명문 이튼 칼리지를 졸업하고 옥스퍼드의 크라이스트 처치 대학에 입학하다. (그리스어와 라틴어에서 두각을 나타낸 그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장학금을 받고 공부할 만큼 학문적으로 뛰어났다. 경조와 풋볼, 크리켓도 수준급인데다 남자답고 호방한 성격으로 급우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 1838년_ 폐질환으로 오랫동안 누워 지내면서 성경을 읽기 시작하다. 어느 주일, 우연히 교회에서 에베소서 2:8 말씀을 듣고 회심하다.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구원을 얻었나니……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그는 이때를 회상하며, “이날처럼 나의 죄와 그리스도의 고귀함, 성경의 가치를 깨닫고, 세상에서 나와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깨달은 적이 없다”고 고백했다. 1841년 6월_ 아버지의 은행이 파산하여 막대한 재산을 잃고 하루아침에 집안이 몰락하다. (그는 이때를 “인생의 암흑기”라고 묘사한다.) 그해 가을,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한 것과 회심의 체험을 기억하며 성공회 사제직을 지원하다. 1842년_ 성직 서임을 받아 윈체스터에 있는 성 토마스 교회 교구 사제가 되다. 1843년_ 헴프셔 주 헤밍엄으로 옮겨 3년간 사역하다. (이때 18세기 위대한 청교도 인물들의 저작을 섭렵한다.) 1844년_ 마틸다 플럼프터와 결혼하다. 몇 년 후, 어린 딸을 남기고 아내가 죽다. 뒤이어 어머니와 남동생과 여동생이 세상을 떠나다. 1847년_ 서퍽 주로 옮겨 그곳에서 36년 동안 신실하게 섬기다. (신학과 신앙에서 그는 절대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늘 “고귀한 것은 비싼 값을 치러 얻은 만큼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그 같은 그의 태도는 비단 신앙적인 문제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작가로서 받은 인세로 아버지의 빚을 갚아 나간 그는, 삶에서도 신실하려고 한 성실한 인격의 소유자였다.) 1848년_ 제시 워커와 재혼을 하다. 결혼한 지 6개월 만에 아내가 앓기 시작해, 십 년 이상을 병상에 누워 지내다. 아내와 네 명의 자녀를 혼자 돌보다. 강연을 다니면서도 추운 겨울 마차로 30마일의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달려 올 정도로 제시를 극진히 간호했으나 끝내 숨을 거두다. (이러한 가정의 어려움에도 교구를 돌보는 일에 소홀히 하지 않았다.) 1861년_ 스트래드브로크 교구로 옮겨 가다. 그곳에서 헨리에타 클라우스를 만나 세 번째 결혼을 하다. 건강하고 신앙이 깊은 헨리에타와 행복한 결혼생활을 이어 가다. 1872년_ 노퍽 주 노리치의 명예 사제가 되다. 1879년_ 「거룩」이 출간되다. (당시 종교개혁을 무력화하고 세례와 의식을 통해 거듭날 수 있다는 그릇된 교리가 편만한 영국 교회에 이 책은, 오직 복음만이 인간을 거듭나게 한다는 진리를 설파해서 큰 경종을 울렸다. 그는 19세기 영국의 위대한 복음주의자로 인정받는다.) 1880년_ 전 영국 수상 벤자민 디즈레일리의 천거를 받아 리버풀 주의 첫 주교가 되다. (이 결정은 놀라운 것이었는데, 그가 이미 정년을 넘긴데다가, 내각에서는 전통적으로 복음주의자를 주교로 임명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20년간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이니이다”(요 17:17)를 사역의 지표 삼아 섬기다. 1900년 6월 10일_ 세상을 떠나다. (그의 후임자는 그를 “대단히 완고하면서도 어린아이 같은 마음을 지닌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이 말은 그의 성품과 사역을 잘 대변해 준다. 그의 묘비에는 「거룩」의 마지막 장 제목인 “모든 것 되시는 그리스도”가 새겨졌다.) 1900년 12월_ 제시와 결혼해서 낳은 둘째 아들 허버트 에드워드 라일이 엑서터 주교로 임명되다.
J. C. 라일(John Charles Ryle, 1816~1900)은 청교도의 영성을 소유한 지성적 목회자이다. 일찍이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한 수재로 신학을 전공하여 목회자가 되었다. 영국 교회 내의 교리적 혼탁함을 ‘오직 성경으로’라는 정신으로 개혁하는 일에 힘썼다. 그는 세례와 교인등록이 거듭남을 자동으로 보장한다는 영국 교회 내의 의식주의자儀式主義者들의 견해에 맞서, 거듭남은 교회 의식이나 성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되는 것임을 역설하였다. 그의 이 책은 교회가 거듭남에 대해 침묵하고, 교회의 의식과 제도에 충성하면 자동으로 천국 백성이 된다고 여겼던 시대에 하늘에서 떨어진 거룩한 폭탄이었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J. C. 라일에 대해 “그는 스펄전과 더불어 쌍두마차를 이끌며 영국과 세계에 복음을 전파한 청교도 목사로서 존경과 찬사를 받아야 한다”고 극찬했다. 라일은 철저한 청교도적 개혁주의자로서 복음적 교리를 신봉하며 원칙과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신앙에 관한 실제적인 책들을 많이 펴낸 저술가이자 열정적인 설교자요 충실한 목회자였다. 그가 저술한 책들은 100년이 넘은 지금까지 끊임없이 출판되고 있으며, 영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그 영적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그는 오직 복음으로 사람들을 거듭나게 하는 일이 설교자로서, 기독교 저술가로서 해야 할 본분임을 깊이 자각하였다. 그래서 그의 설교와 책의 중심 주제는 항상 복음, 곧 사람을 회개시켜 구원 얻게 하는 일이었다. 그는 성령의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개인의 심령부흥, 교회의 부흥이 성령으로만 가능함을 믿어 늘 성령의 불을 구하였다. 그는 성령의 사람들에 대한 연구도 치열하게 하여 조지 휫필드, 다니엘 롤랜드, 하웰 해리스에 대해 정통하였다.
Contents
한국어판 편집자의 글
프롤로그
chapter 1 거듭남이란 무엇인가? chapter 2 왜 거듭나야 하는가? chapter 3 거듭남의 표시는 무엇인가? chapter 4 거듭남에 대한 거짓 교리에 속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