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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시기에 축조되어 조선시대 수도 한양을 지키던 성곽. 산성.
국가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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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 및 수정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시기에 축조되어 조선시대 수도 한양을 지키던 성곽. 산성.
개설
흔히 북한산성(北漢山城)과 함께 조선의 도성인 한양의 방어를 위하여 쌓은 산성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최근의 발굴조사 결과, 8세기 중반에 조성된 성벽과 건물터 등이 확인되어, 신라 주장성(晝長城)의 옛터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조선시대 남한산성은 주봉인 해발 497.9m의 청량산을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연주봉(467.6m), 동쪽으로는 망월봉(502m)과 벌봉(515m), 남쪽으로도 여러 봉우리를 연결하여 성벽을 쌓았다. 성벽의 바깥쪽은 경사가 급한데 비해 안쪽은 경사가 완만하여, 방어에 유리하면서도 적의 접근은 어려운 편이다. 봉암성(蜂巖城), 한봉성(漢峰城), 신남성(新南城) 등 3개의 외성과 5개의 옹성도 함께 연결되어 견고한 방어망을 구축하였다. 성벽과 성 안에는 많은 시설물과 건물이 있었지만, 지금은 동·서·남문루와 장대(將臺)·돈대(墩臺)·보(堡)·누(壘)·암문·우물 등의 방어 시설과 관청, 군사훈련 시설 등이 남아 있다.
남한산성의 역사·문화적 가치가 높게 인정되어 2014년 6월 카타르 도하에서 개최된 유네스코 총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신규 등재되었다.
역사적 변천
1985년에 지표조사가 실시된 이래, 1998년부터 8차례에 걸쳐 행궁터, 인화관터, 일부 성벽에 대한 발굴 조사가 실시되었다. 그 결과 대략적인 축성 시기와 함께 변천 과정도 파악되었다.
남한산성이 백제 온조왕 때 도성이었다는 견해가 있다. 하지만 발굴조사 결과 백제 주거지 2곳과 저장 구덩이 8곳 등이 확인되었을 뿐 성곽의 흔적은 확인되지 않았다. 오히려『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673년(문무왕 13)에 한산주(漢山州)에 주장성(혹은 日長城)을 쌓았는데, 성의 둘레는 4,360보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장성은 곧 남한산성이고, 당시 돌로 쌓은 최대 규모의 산성이었다. 2005년에 북문과 동장대 사이의 제4암문과 수구(水口)터 주변 발굴 조사가 실시되었다. 그 결과 조선시대 성벽 안쪽에서 주장성 성벽으로 추정되는 성벽이 확인되어, 조선시대 남한산성이 신라 주장성의 옛터를 따라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또한 행궁터 발굴 조사에서는 대규모 건물터가 확인되어, 주장성 당시 성 안에 무기고(武器庫) 등 중요한 건물들이 자리하였음도 밝혀졌다.
남한산성에 대한 고려시대 기록은 광주부사를 지낸 이세화묘지명(李世華墓誌銘)이나『고려사(高麗史)』에 몽고군이 침입하였을 때 ‘광주성(廣州城)’으로 피하여 항전하였다는 것 등이 전한다. 산성 안에서 고려시대 건물터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광주성은 바로 남한산성으로 추정된다. 한편『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일장산성이라고 기록되었는데, 둘레가 3,993보이고 성 안에는 군자고(軍資庫)가 있으며 우물 7곳은 가뭄에도 마르지 않으며, 성 안의 논밭이 124결(結)이나 된다고 하였다. 이 기록 역시 신라 때 축성된 주장성, 일장성이 그대로 이어져 온 것으로 보인다.
그 뒤 조선시대에 들어서 후금(後金)의 위협을 받고 이괄(李适)의 난을 겪은 뒤 인조 2년(1624)에 지금처럼 다시 고쳐 쌓았다. 곧 인조는 총융사 이서(李曙, 1580∼1637)에게 산성의 축성을 명령하였고, 2년 뒤에 둘레 6,297보, 여장(女墻) 1,897개, 옹성(甕城) 3개, 성랑(城廊) 115개, 문 4곳, 암문(暗門) 16곳, 우물 80곳, 샘 45곳 등을 설치하고서 광주읍의 치소(治所)를 산성 안으로 옮겼다. 축성 공사에는 각성(覺性)을 도총섭(都摠攝)으로 삼아 전국 8도의 승군을 동원하였는데, 승군의 사역과 보호를 위하여 현재 남아 있는 장경사(長慶寺)를 비롯한 7곳의 사찰을 새로 건립하기도 하였다.『남한지(南漢志)』에는 원성 성벽의 안쪽 둘레는 6,290보로 17리 반이고, 바깥 둘레는 7,295보로 20리 95보이며, 성가퀴는 1940타, 5곳의 옹성과 16곳의 암문, 125곳의 군포, 4곳의 장대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뒤 순조 때까지 여러 시설이 정비되어, 우리나라 산성 가운데 가장 시설이 잘 완비된 산성으로 손꼽힌다.
내용
통일신라 때 석축산성은 그 규모나 축성 기법을 구체적으로 확인하기는 어렵다. 다만 성 안에서 여러 건물터가 확인되어 돌로 쌓은 성벽과 여러 시설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대형 건물터는 길이 53.5m, 너비 18m 규모로, 현재 알려진 통일신라시대 최대 규모의 건물로 추정된다. 건물은 사방으로 회랑칸을 둔 구조로, 벽체의 두께는 2m나 되며, 길이 50~64㎝, 무게 20㎏의 특대 기와를 올렸으므로, 군수 물자를 저장하였던 특수 창고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와 가운데는 ‘갑진성년말촌주정량(甲辰城年末村主政亮)’, ‘마산정자와초(麻山停子瓦草)’, ‘관초(官草)’, ‘천주(天主)’ 등의 글자가 새겨진 것도 다수 출토되어, 통일신라시대에 국가 기관과 밀접히 관련된 건물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시대에도 많은 시설물과 건물이 자리하였다. 원성에는 동·서·남·북 모두 4곳의 성문이 있었는데, 동문은 좌익문(左翼門), 북문은 전승문(全勝門), 서문은 우익문(右翼門), 남문은 지화문(至和門)이라고 불렸다. 암문도 원성 11곳, 봉암성 4곳, 한봉성 1곳 등 16곳이 설치되어, 우리나라 산성 중 가장 많은 편에 속한다. 암문 가운데 6곳은 평거식이고, 10곳은 홍예식이다. 여장은 처음에 벽돌로 쌓았으나 1744년(영조 20)에 벽돌을 제거하고서 기와로 덮었으며, 1779년(정조 3)에 다시 원성을 고쳐 쌓을 때 기와로 덮었던 것을 전돌로 바꾸었다. 현재 남아 있는 여장은 대부분 전돌로 쌓은 것이며, 활이나 총을 쏠 수 있게 갈라 놓은 타구(垛口)에는 수키와를 한 장씩 올려 놓았다. 성벽에는 원성 4곳, 봉암성과 한봉성 사이 1곳 등 5곳의 치(雉)도 설치되어 있다.
한편 7곳의 포루가 있는데, 제1남옹성 8곳, 제2남옹성 9곳, 제3남옹성 5곳, 장경사 부근 원성 2곳, 장경사 신지옹성 2곳, 연주봉 옹성과 봉암성 2곳 등이다. 장대는 원성 성벽의 동·서·남·북에 하나씩 설치되었고, 봉암성에도 외동장대가 있다.『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에는 남한산성 안에 125곳의 초소인 군포가 있었으며, 각 군포는 2∼3칸 정도의 규모였다고 하였는데, 실제 성 안에서 앞면 3칸, 옆면 1칸의 군포 건물터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그 밖에도 소금을 묻어두었던 매염처(埋鹽處), 숯을 묻어두었던 매탄처(埋炭處)도 있었다.
성 안에는 광주부의 읍치를 산성 안으로 옮겼기에 행궁과 함께 많은 관아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유사시에 국왕이 거처할 행궁(行宮)이 73칸반의 규모이고, 하궐(下闕)은 154칸 정도이다. 궁실에 딸린 건물로는 1688년과 1711년에 건립한 좌덕당(左德堂)과 종묘 건물로 사용하기 위한 좌전(左殿)도 자리하였고, 남문 안에는 사직을 옮길 우실(右室)도 갖추었다. 1798년(정조 22)에는 한남루(漢南樓)가 건립되었고, 1624년에 세운 객관(客館)인 인화관(人和館)은 1829년(순조 29)에 수리되었다. 하궐 왼쪽에는 일장각과 군사를 조련하던 연무관이 있었다. 이밖에도 비장청과 교련관청, 기패관청, 군관청, 별군관청, 서리청 등 많은 관아 건물이 자리하였다. 또한 행궁 및 관아의 소요 물품과 여러 가지 관수 물자를 비축하고 군량을 보관하기 위한 영고, 수창, 신풍창, 별창, 동창, 군기도 등 많은 창고도 들어서 있었다.
한편 산성 안에는 장경사, 망월사, 개원사, 옥정사, 남단사, 한흥사, 천주사, 동림사 등 여러 사찰이 있었는데, 이곳은 산성 축성에 동원된 8도 승군의 주석처이자 승군이 군기와 화약을 비축하고서 산성을 수비하는 곳이었다.
1638년(인조 16)에는 온조왕묘를 건립하여 배향하였으며, 남단사 오른쪽에는 사직단, 북문 안의 동쪽 언덕에는 성황당, 서장대에는 기우제단을 두어 정기적으로 제의를 행하였다. 동문 안에는 1688년(숙종 14)에 유수 이세백이 병자호란 때 청의 침입에 끝까지 저항할 것을 주장한 척화파의 홍익한, 윤집, 오달제의 위패와 좌의정 김상헌, 이조참판 정온의 위패를 배향한 한절사라는 사당이 있다.
특징
통일신라시대 대형 건물터의 조성 연대는 절대 연대를 측정한 결과 대부분 600∼900년으로 확인되었다. 이러한 결과는 건물터에서 출토된 도장무늬[印花文] 토기 조각과 목 부분에 물결무늬가 있는 대형 항아리, 각병(角甁) 등이나 기와의 제작 및 사용 연대가 7세기 후반~10세기 전반이라는 점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 이 건물터는 성벽 발굴 조사에서 확인된 성벽과 함께 통일신라시대 주장성 관련 유구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남한산성은 원성의 여장 옥개 중심선을 중심으로 측량한 결과, 외성과 옹성을 제외한 원성의 규모가 둘레 7.545㎞이고 성 내부의 면적은 212만 6637㎡이며, 부속 시설을 포함한 성벽의 전체 규모는 12.356㎞에 달하였다. 원성에는 여러 차례 개·보수가 이루어진 흔적이 확인되는데, 특히 성벽의 윗부분, 여장 아래쪽 1m 안팎 부분은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이 부분은 여러 차례 개축되는 과정에서 인조 때 가지런히 정비되었던 성벽의 모습이 많이 바뀌었으며, 암문이나 성문 등 붕괴되기 쉬운 곳도 여러 번 개축이 이루어졌다.
인조 때 축성한 원성은 지반 위에 길게 잘 다듬은 장대석을 받침돌로 쌓고 성돌을 바른층쌓기로 올렸다. 곧 성돌의 받침돌은 길이 50cm, 두께 30㎝이고, 그 위로 너비 30㎝, 두께 20㎝ 크기의 성돌을 네 모서리를 잘 다듬어 면석으로 사용하였으며, 뒷채움은 잡석으로 깊게 하였다. 면석은 4각뿔 모습이지만, 성벽의 바깥쪽 면은 가운데가 약간 볼록한 부채꼴 모양이며, 모서리 부분은 매끈하게 다듬질되었다.
의의와 평가
남한산성은 통일신라시대에 축성된 주장성으로, 군수 물자를 저장하는 특수 창고를 설치한 중요한 거점성이었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외성과 옹성을 갖춘 전형적인 산성이면서, 산성의 변화 과정과 기능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참고문헌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벡과사전 남한산성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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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남한산성 세계유산센터"의 공식 기록
성곽의 길이 및 면적
| 구간 | 길이(m) | 면적(㎡) | |
| 본성 | 7,545 | 2,126,637 | |
| 옹성 | 제1남옹성 | 426 | 2,381 |
| 제2남옹성 | 318 | 3,583 | |
| 제3남옹성 | 125 | 839 | |
| 장경사신지옹성 | 159 | 1,447 | |
| 연주봉옹성 | 315 | 865 | |
| 소계 | 8,888 | 2,135,752 | |
| 봉암성 | 2,120 | 7,137 | |
| 한봉성 | 1,093 | – | |
| 소계 | 3,213 | 7,137 | |
| 신남성동돈대 | 134 | 1,381 | |
| 신남성서돈대 | 121 | 998 | |
| 소계 | 255 | 2,379 | |
| 합계 | 12,356 | 2,145,268 | |
※「남한산성 세계유산등재신청서」 기준(2013.02)
※측정에 따라 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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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경기도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남한산성 역사
남한산성 일반연혁
남한산성 일반연혁
남한산성 일반연혁의 표로써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등의 내용을 제공
| 삼국시대 | 온조왕 | 13년(기원전6) | 한산 아래 도읍, 하남위례성 축조 |
| 진흥왕 | 14년(553) | 백제 동북부에 신주 설치 | |
| 29년(568) | 신주 설치 | ||
| 진평왕 | 26년(604) | 남천주를 폐지하고 한산주 설치 | |
| 경덕왕 | 16년(757) | 한산주를 한주로 개칭 | |
| 고려시대 | 태 조 | 23년(940) | 한주를 광주로 개칭 |
| 성 종 | 2년(983) | 설치시 광주목 설치 | |
| 14년(995) | 절도사 설치 | ||
| 예 종 | 양광충청주도 아래 광주 예속 | ||
| 명 종 | 충청도, 양광도로 개편, 양광도에 광주 소속 | ||
| 공양왕 | 경기좌우도 설치 | ||
| 조선시대 | 태 조 | 4년(1395) | 경기좌도, 우도로 개편시 광주는 경기좌도에 속함 |
| 세조 | 1년(1455) | 광주 좌보제 시행 | |
| 연산군 | 11년(1505) | 난언을 한 자가 있다하여 광주를 혁파함 | |
| 중 종 | 6년(1511) | 구읍을 회복하고 목사 설치 | |
| 인 조 | 2년(1624) 1월 | 이괄의 난 발생 | |
| 4년(1626) | 광주목을 산성 안으로 이설 | ||
| 수어청(장관: 수어사) 설치 | |||
| 11년(1633) | 목사겸토포사 설치 | ||
| 14년(1636) | 병자호란 발발 | ||
| 15년(1637) | 목사를 부윤으로 승격 | ||
| 효 종 | 3년(1652) | 부윤겸수어부사 설치 | |
| 숙 종 | 6년(1680) | 부윤겸수어부사 복설 | |
| 9년(1683) | 유수겸수어사 설치 | ||
| 16년(1690) | 부윤겸방어사 설치 | ||
| 17년(1691) | 부윤겸수어부사 설치 | ||
| 26년(1700) | 수어부사 폐지 | ||
| 영 조 | 26년(1750) | 수어사 폐지, 유수겸수어사 설치 | |
| 정 조 | 19년(1795) | 경청(수어청)폐지, 유수겸수어사 설치 | |
| 고 종 | 32년(1895) | 한성부 광주군이 됨 | |
| 33년(1896) | 광주부가 됨 | ||
| 광 무 | 10년(1906) | 광주부를 광주군으로 개칭 |
남한산성 축조물 관련 연혁
남한산성 축조물 관련 연혁
남한산성 축조물 관련 연혁의 표로써 삼국시대, 조선시대 등의 내용을 제공
| 삼국시대 | 문무왕 | 왕12년(672) | 광주 동쪽에 주장성을 축조(4,360보) |
| 조선시대 | 선 조 | 26년(1593) | 유성룡 남한산성 수어책 주장 |
| 29년(1596) | 유정의 승군 60여명 남한산성 수비 | ||
| 30년(1597) | 정유재란으로 남한산성 수축론의 대두 | ||
| 36년(1603) | 2월 남한산성 수축론의 재론 | ||
| 광해군 | 13년(1621) | 남한산성을 보장지지로 선정, 남한산성 축조 | |
| 인 조 | 원년(1623)10월 | 이귀 남한산성 수축주장 | |
| 2년(1624)3월 | 영의정 이원익 남한산성 수축 적극주장 | ||
| 2년(1624) | 목사 유림 인화관 건립 | ||
| 2년(1624)4월 | 심기원 남한도원수로 임명, 산성보수 명령 | ||
| 2년(1624)6월 | 남양부사 유림 광주목사로 차출, 담당 | ||
| 2년(1624)7월 | 총융사 이서, 옛터에 남한산성 개축 | ||
| 2년(1624)9월 | 총융사 이서, 목사 유림 행궁 상궐, 하궐 착공 | ||
| 3년(1625)4월 | 행궁 상궐, 하궐 준공 | ||
| 4년(1626)11월 | 남한산성 개축 완료 | ||
| 14년(1636) | 병자호란 발발 | ||
| 구송정 건립 | |||
| 16년(1638)1월 | 남한산성 원성 증, 개축 | ||
| 16년(1638) | 온조왕묘 건립 | ||
| 현 종 | 9년(1668) | 수어사 김좌명 연무당을 연무관으로 개칭 | |
| 13년(1672) | 부윤 이세화 지수당 건립 | ||
| 숙 종 | 12년(1686)윤4월 | 윤지선 감독아래 한봉성(한봉외성) 신축시작 | |
| 12년(1686)5월 | 수어청 군병 동원 한봉외성 신축완료 | ||
| 14년(1688) | 유수 이세백 재덕당 건립, 현절사 건립 | ||
| 19년(1693) | 수어사 오시복 한봉외성 신축, 현절사에 사액 내림 | ||
| 우의정 민암 남한산성 봉암과 한봉에 돈대 축조 주장 | |||
| 31년(1705) | 한봉성에 포루 두 개 증축, 청인이 한봉성을 헐어버림 | ||
| 37년(1711) | 좌전(26칸), 우실(4칸) 증설 | ||
| 45년(1719) | 수어사 민진후 신남성(남격대) 신축 |
남한산성 축조물 관련 연혁
남한산성 축조물 관련 연혁
남한산성 축조물 관련 연혁의 표로써 삼국시대, 조선시대 등의 내용을 제공
| 삼국시대 | 문무왕 | 왕12년(672) | 광주 동쪽에 주장성을 축조(4,360보) |
| 조선시대 | 선 조 | 26년(1593) | 유성룡 남한산성 수어책 주장 |
| 29년(1596) | 유정의 승군 60여명 남한산성 수비 | ||
| 30년(1597) | 정유재란으로 남한산성 수축론의 대두 | ||
| 36년(1603) | 2월 남한산성 수축론의 재론 | ||
| 광해군 | 13년(1621) | 남한산성을 보장지지로 선정, 남한산성 축조 | |
| 인 조 | 원년(1623)10월 | 이귀 남한산성 수축주장 | |
| 2년(1624)3월 | 영의정 이원익 남한산성 수축 적극주장 | ||
| 2년(1624) | 목사 유림 인화관 건립 | ||
| 2년(1624)4월 | 심기원 남한도원수로 임명, 산성보수 명령 | ||
| 2년(1624)6월 | 남양부사 유림 광주목사로 차출, 담당 | ||
| 2년(1624)7월 | 총융사 이서, 옛터에 남한산성 개축 | ||
| 2년(1624)9월 | 총융사 이서, 목사 유림 행궁 상궐, 하궐 착공 | ||
| 3년(1625)4월 | 행궁 상궐, 하궐 준공 | ||
| 4년(1626)11월 | 남한산성 개축 완료 | ||
| 14년(1636) | 병자호란 발발 | ||
| 구송정 건립 | |||
| 16년(1638)1월 | 남한산성 원성 증, 개축 | ||
| 16년(1638) | 온조왕묘 건립 | ||
| 현 종 | 9년(1668) | 수어사 김좌명 연무당을 연무관으로 개칭 | |
| 13년(1672) | 부윤 이세화 지수당 건립 | ||
| 숙 종 | 12년(1686)윤4월 | 윤지선 감독아래 한봉성(한봉외성) 신축시작 | |
| 12년(1686)5월 | 수어청 군병 동원 한봉외성 신축완료 | ||
| 14년(1688) | 유수 이세백 재덕당 건립, 현절사 건립 | ||
| 19년(1693) | 수어사 오시복 한봉외성 신축, 현절사에 사액 내림 | ||
| 우의정 민암 남한산성 봉암과 한봉에 돈대 축조 주장 | |||
| 31년(1705) | 한봉성에 포루 두 개 증축, 청인이 한봉성을 헐어버림 | ||
| 37년(1711) | 좌전(26칸), 우실(4칸) 증설 | ||
| 45년(1719) | 수어사 민진후 신남성(남격대) 신축 |
성곽의 길이
성곽의 길이
성곽의 길이의 표로써 구간, 길이(m), 면적(㎡) 등의 내용을 제공
| 구간 | 길이(m) | 면적(㎡) | |
| 본성 | 7,545 | 2,126,637 | |
| 옹성 | 제1남옹성 | 426 | 2,381 |
| 제2남옹성 | 318 | 3,583 | |
| 제3남옹성 | 125 | 839 | |
| 장경사신지옹성 | 159 | 1,447 | |
| 연주봉옹성 | 315 | 865 | |
| 소계 | 8,888 | 2,135,752 | |
| 봉암성 | 2,120 | 7,137 | |
| 한봉성 | 1,093 | – | |
| 소계 | 3,213 | 7,137 | |
| 신남성동돈대 | 134 | 1,381 | |
| 신남성서돈대 | 121 | 998 | |
| 소계 | 255 | 2,379 | |
| 합계 | 12,356 | 2,145,268 | |
※「남한산성 세계유산등재신청서」 기준(2013.02)
※측정에 따라 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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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교통
지하철 노선도
시내버스 노선도
대중교통이용안내 (성남, 광주방면)
대중교통이용안내 (성남, 광주방면) 안내 표
대중교통이용안내 (성남, 광주방면) 안내 표로써 출발지, 유형, 노선, 소요시간, 안내 등의 정보를 제공합니다.
| 출발지 | 유형 | 노선 | 소요시간 | 안내 |
| 모란역 | 버스 | 52 | 39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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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란역 | 버스 | 9 | 64분 |
|
| 을지대학교 | 버스 | 9 | 30분 |
|
| 광주시청 | 버스 | 15-1 | 53분 |
|
| 경기광주역 | 버스 | 15-1 | 58분 |
|
| 산성역 | 버스 | 52, 9 9-1(휴일) | 26-43분 |
|
| 남한산성역 | 버스 | 9 | 30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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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교통이용안내 (서울방면)
대중교통이용안내 (서울방면) 안내 표
대중교통이용안내 (서울방면) 안내 표로써 출발지, 유형, 노선, 소요시간, 안내 등의 정보를 제공합니다.
| 출발지 | 유형 | 노선 | 소요시간 | 안내 |
| 잠실역 | 지하철 + 버스 | 8호선 | 19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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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2, 9, 9-1(휴일) | 25분 |
| ||
| 서울시청 | 지하철 + 버스 | 2호선, 8호선 | 61분 |
|
| 52, 9 9-1(휴일) | 26-43분 |
| ||
| 사당역 | 지하철 + 버스 | 2호선, 8호선 | 61분 |
|
| 52, 9 9-1(휴일) | 26-43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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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교통이용안내 (경기남부방면)
대중교통이용안내 (경기남부방면) 안내 표
대중교통이용안내 (경기남부방면) 안내 표로써 출발지, 유형, 노선, 소요시간, 안내 등의 정보를 제공합니다.
| 출발지 | 유형 | 노선 | 소요시간 | 안내 |
| 안양역 | 버스 | 333 | 63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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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2, 9 | 39분-64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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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역 | 버스 | 2007 | 75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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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2, 9 | 39분-64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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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역 | 지하철 + 버스 | 분당선 | 61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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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2, 9 | 39분-64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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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인시청 | 지하철 + 버스 | 에버라인, 분당선 | 64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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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2, 9 | 39분-64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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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교통 | 대중교통 | 오시는길 | 경기도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자가용
| * 공휴일은 남한산성내 도로가 매우 혼잡하고, 주차공간이 부족하므로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지하철 8호선 산성역에서 남한산성 등산로 입구까지 도보로 10분가량 소요 > |
자가용 노선도
자가용 방문안내
자가용 방문안내 안내 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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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발지 | 노선 | 소요시간 | 안내 |
| 경기광주 IC | 18분 | 10.41 km | 중부고속도로(13.3km) → 희안대로(2.6km) → 남한산성로(7.2km) |
| 신갈 IC | 41분 | 31.01 km | 경부고속도로(12.8km) →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10.3km) → 남한산성로(4.5km) |
| 양재IC | 37분 | 17.43 km | 헌릉로(8.1km) → 수정로(0.9km) → 남한산성로(4.5km) |
| 모란역 | 26분 | 9.7 km | 산성대로(2.2km) → 수정로(2.1km) → 남한산성로(4.5km) |
| 평촌 IC | 37분 | 28.45 km | 서울외곽순환도로(20.6km) → 헌릉로(2.5km) → 남한산성로(4.5km) |
| 북수원 IC | 51분 | 31.80 km | 과천봉담도시고속화도로(4.9km) →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14.1km) → 수정로(3.8km) → 남한산성로(4.5km) |
네비게이션 입력 주소
네비게이션 입력 주소 안내 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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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분 | 장소 | 입력 주소 |
| 기관 및 사찰 | 경기도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남한산성로 731 경기도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지번]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158-1 |
| 망월사 |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남한산성로 680 [지번]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15 | |
| 국청사 |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남한산성로780번길 105 [지번]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803 | |
| 장경사 |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남한산성로 676 [지번]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22-1 | |
| 유료 주차장 (성내) | 남문 주차장 |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1041-1 일원 |
| 로타리 주차장 |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527 일원 | |
| 중앙 주차장 |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230-1 일원 | |
| 센터 주차장 |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156 일원 | |
| 무료 주차장 (광주방면) | 동문 주차장 |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44-5 일원 |
| 하행선 주차장 |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검복리 25-1 일원 | |
| 검복리1 주차장 |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검복리 41-1 일원 | |
| 검복리2 주차장 |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검복리 118-3 일원 | |
| 불당리 주차장 |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불당리 26-7 일원 | |
| 농산물 주차장 |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오전리 336-1 일원 | |
| 오전리 주차장 |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오전리 308-11 일원 | |
| 광지원 주차장 |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광지원리 8 일원 |
자가용 | 자가용 | 오시는길 | 경기도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무료셔틀버스운행안내
무료셔틀버스 운행 안내
무료셔틀버스 승강장 위치도
무료셔틀버스 승강장 위치도 안내 표
무료셔틀버스 승강장 위치도 안내 표로써 연번, 정류장 이름, 위치, 비고(노선도, 운행방향) 등의 정보를 제공합니다.
| 연번 | 정류장 이름 | 위 치 | 비 고(노선도, 운행방향) | |
| 1 | 행정복지센터 주차장 | 광지원리 112 일원 | 중앙 주차장 방향 | (기·종점) |
| 2 | 오전리(농산물) 주차장 | 오전리 336-1 일원 | 양방향 | |
| 3 | 불당리 주차장 | 불당리 26-7 일원 | 양방향 | |
| 4 | 검복리 제2주차장 | 검복리 118-3 일원 | 양방향 | |
| 5 | 검복리 제1주차장 | 검복리 41-1 일원 | 양방향 | |
| 6 | 하행선 주차장 | 검복리 25-1 일원 | 양방향 | |
| 7 | 중앙 주자창 | 산성리 406 일원 | 행정복지센터 주차장 방향 | (회차점) |
무료셔틀버스운행안내 | 무료셔틀버스운행안내 | 오시는길 | 경기도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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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1636년(인조 14) 12월부터 이듬해 1월에 청나라가 조선에 대한 제2차 침입으로 일어난 전쟁.
이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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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 및 수정
미디어 정보
서울 삼전도비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1636년(인조 14) 12월부터 이듬해 1월에 청나라가 조선에 대한 제2차 침입으로 일어난 전쟁.
배경
병자년에 일어나 정축년에 끝났기 때문에 병정노란(丙丁虜亂)이라 부르기도 한다. 1627년 후금(後金: 뒤의 淸)의 조선에 대한 1차 침입 때 조선은 무방비 상태로 후금에 당함으로써 후금에 대해 형제의 맹약을 하고 두 나라 관계는 일단락되었다.
한편, 조선은 정묘호란 이후 후금의 요구를 들어 1628년(인조 6) 이후 중강(中江)과 회령(會寧)에서의 무역을 통해 조선의 예폐(禮幣: 외교관계에서 교환하는 예물) 외에도 약간의 필수품을 공급해 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당초의 맹약을 위반하고 식량을 강청하고 병선(兵船)을 요구하는 등 온갖 압박을 가해왔다. 그뿐 아니라 후금군이 압록강을 건너 변경 민가에 침입해 약탈을 자행하므로 변방의 백성과 변방 수장(守將)들의 괴로움은 말로 형언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후금의 파약(破約) 행위로 조선의 여론은 군사를 일으켜 후금을 치자는 척화배금(斥和排金: 후금에 대하여 화의를 반대함)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격증하게 되었다.
당시 후금은 만주의 대부분을 석권하고 만리장성을 넘어 북경 부근까지 공격하면서 정묘호란 때 맺은 ‘형제의 맹약’을 ‘군신(君臣)의 의(義)’로 개약(改約)하자고 요청을 해올 뿐 아니라, 황금 · 백금 1만냥, 전마(戰馬) 3,000필 등 종전보다 무리한 세폐(歲幣)와 정병(精兵) 3만까지 요구해왔다.
조선에서는 이러한 그들의 요구에 응하려 하지 않고 화의 조약을 무시하고 후금에 대해 선전 포고를 하려는 움직임까지 일어나기 시작했다.
또한, 1636년 2월에는 용골대(龍骨大) · 마부태(馬夫太) 등이 후금 태종(太宗)의 존호(尊號)를 조선에 알림과 동시에 인조비 한씨(韓氏)의 문상(問喪)차 조선에 사신으로 왔는데, 그들이 군신의 의를 강요해 조선의 분노는 폭발하게 되었다.
조정 신하들 가운데 척화(斥和)를 극간(極諫)하는 이가 많아 인조도 이에 동조해 사신의 접견을 거절하고 국서(國書)를 받지 않았으며 후금 사신을 감시하게 했다.
조선의 동정이 심상하지 않음을 알아차린 그들은 일이 낭패했음을 간파하고 민가의 마필을 빼앗아 도주했는데, 공교롭게도 도망치던 도중에 조선 조정에서 평안도관찰사에 내린 유문(諭文)을 빼앗아 본국으로 가져가게 되었다.
이로 인해 후금에 대한 조선의 태도가 무엇인지를 그들도 비로소 명확하게 알 수 있게 되었고 재차 침입을 결심하게 된 것이다. 같은 해 4월 후금은 나라 이름을 ‘청’으로 고치고 연호를 숭덕(崇德)이라 했으며, 태종은 관온인성황제(貫溫仁聖皇帝)의 칭호를 받았다.
그는 이 자리에 참석한 조선 사신에게 왕자를 볼모로 보내서 사죄하지 않으면 대군을 일으켜 조선을 공략하겠다고 협박했다. 이와 같은 청나라의 무리한 요구는 척화의지가 고조되고 있는 조선 조정에 받아들여질 리 없었다.
그 해 11월 심양(瀋陽)에 간 조선 사신에게 그들은 왕자와 대신 및 척화론을 주창하는 자를 압송하라는 최후 통첩을 보내왔으나 조선에서는 그들의 요구를 묵살했다. 이에 청나라는 조선에 재차 침입해왔는데 이것이 병자호란이다.
경과
청태종은 몸소 전쟁에 나설 것을 결심하고 1636년 12월 1일에 청군 7만, 몽골군 3만, 한군(漢軍) 2만 등 도합 12만의 대군을 심양에 모아 예친왕(禮親王) 대선(代善), 예친왕(睿親王) 다이곤(多爾袞), 예친왕(豫親王) 다탁(多鐸)과 패륵(貝勒) 악탁(岳託) · 호격(豪格) · 두도(杜度) 등을 이끌고 다음 날 몸소 조선 침입에 나섰다.
9일에 압록강을 건너 다탁은 전봉장(前鋒將) 마부태에 명해 바로 서울로 진격하도록 했다. 마부태는 의주부윤 임경업(林慶業)이 백마산성(白馬山城)을 굳게 수비하고 있음을 알고, 이를 피해 밤낮을 달려 심양을 떠난 지 10여일 만에 서울에 육박했다.
청군이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침입했다는 급보가 중앙에 전달된 것은 12일로서 의주부윤 임경업과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의 장계(狀啓)가 도착한 뒤였다. 보고에 접한 조정에서는 비로소 적의 형세가 급박한 것을 알고는 있었으나, 이렇게 빨리 진격해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13일 오후 늦게 재차 장계가 이르러 청군이 이미 평양에 도착했다고 하자 조정은 갑작스런 변란에 황망해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도성 안은 흉흉해 성을 빠져나가는 자들로 줄을 이었다.
다음 14일 개성유수의 치계(馳啓)로 청군이 이미 개성을 지나갔다는 것을 알게 되자 급히 판윤 김경징(金慶徵)을 검찰사(檢察使)로, 부제학 이민구(李敏求)를 부사(副使)로 명하고 강화유수 장신(張紳)으로 주사대장(舟師大將)을 겸직시켜 강화를 수비하도록 했다.
한편, 원임대신(原任大臣) 윤방(尹昉)과 김상용(金尙容)에게 명해 종묘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세자빈 강씨(姜氏), 원손(元孫), 둘째아들 봉림대군(鳳林大君), 셋째아들 인평대군(麟坪大君)을 인도해 강화도로 피하도록 했다. 심기원(沈器遠)을 상중에서 불러내어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삼고 호조참의 남선(南銑)을 찬획사(贊劃使)로 삼았다.
인조도 그날 밤 숭례문으로 서울을 빠져 나와 강화도로 향했으나, 적정을 탐색하던 군졸이 달려와서 청국군이 벌써 영서역(迎曙驛: 지금의 서울 은평구 대조동과 불광동 사이)을 통과했으며, 마부태가 기병 수백을 거느리고 홍제원(弘濟院)에 도착해, 한 부대를 보내 양천강(陽川江)을 차단해 강화도로 가는 길이 끊겼다고 보고했다.
인조는 다시 성안으로 들어와 숭례문 누각에 앉아 사후 대책을 물으니, 전 철산부사 지여해(池如海)가 정병(精兵) 500을 주면 사현(沙峴)에 나가 청군의 선봉 부대를 무찌르겠다고 했다.
그 말에 여러 신하들은 500의 군사로 적을 시험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반대 의사를 개진했다. 결국, 이조판서 최명길(崔鳴吉)이 홍제원 청군 진영에 나가 술과 고기를 먹이며 출병의 이유를 물으면서 시간을 지연시키는 사이에 인조는 세자와 백관을 대동하고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갔다.
인조 일행이 남한산성으로 들어간 뒤 영의정 김류(金瑬) 등은 본 산성이 지리적으로 불리함을 들어 야음을 타서 강화도로 옮겨갈 것을 역설하므로 다음 15일 새벽에 인조는 산성을 떠나 강화도로 떠나려 했다.
그러나 마침 눈이 내린 뒤라 산 언덕에 얼음이 얼어서 왕이 탄 말이 미끄러져 왕은 말에서 내려 걸어서 갔는데, 여러 번 미끄러져 몸이 편안하지 못해 강화도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다시 산성으로 돌아왔다.
훈련대장 신경진(申景禛)이 서울로부터 뒤따라오니 그에게 동성(東城) 망월대(望月臺)를 지키게 하고, 이영달(李穎達)을 중군(中軍)으로 삼고 총융사 구굉(具宏)에게 남성(南城)을 지키게 했다.
또, 수원부사 구인후(具仁垕)를 부장(副將)으로 삼고 상중에 있던 이확(李廓)을 불러 중군을 삼았으며, 어영대장 이서(李曙)는 북성(北城)을, 수어사 이시백(李時白)은 서성(西城)을 지키고 이직(李稷)을 중군으로 삼았다.
이때 영남의 분방병(分防兵)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채 여주목사 이필원(李必遠), 이천부사 조명욱(曺明勗), 양근군수 한회일(韓會一), 지평현감 박환(朴煥) 등이 약간의 군사를 이끌고 입성했고, 파주목사 기종헌(奇宗獻)이 수백의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와 구원했다.
이때 성안에 있는 군사는 1만 3000명으로 성첩(城堞)을 지키도록 하고, 도원수 · 부원수와 각 도의 관찰사와 병사에게는 근왕병(勤王兵)을 모으도록 하는 한편, 명나라에 위급함을 알려 원병을 청했다.
이 때 성안에는 양곡 1만 4300석(石), 장(醬) 220 항아리가 있어 겨우 50여 일을 견딜 수 있는 식량에 불과했다. 청군의 선봉 부대는 12월 16일에 이미 남한산성에 이르고 대신 담태(潭泰)의 군사도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서울에 입성해 그 길로 한강을 건너 남한산성을 포위했다.
청태종은 다음해 1월 1일에 남한산성 밑 탄천(炭川)에서 20만의 군사를 포진하고 성 동쪽의 망월봉(望月峰)에 올라 성안을 굽어보며 조선군의 동태를 살폈다. 포위를 당한 성안의 조선군은 12월 18일 어영부사(御營副使) 원두표(元斗杓)가 성안의 장사를 모집, 성을 빠져나가 순찰중인 적군 6명을 죽이고, 동월 20일 훈련대장 신경진의 군이 출전해 또 적군 30명을 죽였으며, 다음날 어영대장 이기축(李起築)이 군사를 이끌고 서성을 나가 적군 10명을 또 죽여 성안에 사기를 올렸다.
그러나 이렇다할 큰싸움 없이 40여일이 지나자 성안의 참상은 말이 아니었다. 이러할 즈음 각 도의 관찰사와 병사가 거느리고 올라왔던 관군들은 목적지에 이르기도 전에 무너졌다.
충청도관찰사 정세규(鄭世䂓)의 군사는 험천(險川)에서 패해 이성현감(尼城縣監) 김홍익(金弘翼), 남포현감(藍浦縣監) 이경(李慶) 등이 전사했고, 경상좌병사 허완(許完)과 경상우병사 민영(閔泳)의 군사도 광주(廣州) 쌍령(雙領)에서 괴멸해 두 병사도 전사했다.
전라병사 김준룡(金俊龍)은 경기 용인 광교산(光敎山)에 이르러 적장 액부양고리(額駙揚古利)를 죽이고 승첩을 거두었으나 뒤에 역습을 당해 수원으로 퇴각한 뒤 전군이 무너졌다.
또, 평안도관찰사 홍명구(洪命耉)는 금화(金化)에서 전사하고 부원수 신경원(申景瑗)이 맹산(孟山) 철옹(鐵甕)에서 사로잡혔으며, 도원수 김자점의 군사가 토산(兎山)에서 패주하고 강원도관찰사 조정호(趙廷虎), 함경남도관찰사 민성휘(閔聖徽)의 군사도 패배해 중도에서 좌절되니, 남한산성은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절망적인 상태가 되었다.
앞서 명나라에 구원을 청한 것도 국내 유적(流賊)으로 인해 원병을 보낼만한 처지가 못되었고, 겨우 등주총병(登州總兵) 진홍범(陳弘範)에 명해 수군을 동원하려 했으나 그것도 바람과 파도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 때 경기 · 호남 · 경상도 등지에서 의병이 일어나서, 경기도에서는 적병이 강화성을 공략할 때 다소의 전과를 거두었고, 호남에서는 전 참의 정홍명(鄭弘溟)이 많은 의병을 이끌고 공주에까지 이르렀으나 이미 화의가 이루어진 뒤라 군사를 파했다.
경상도에서는 김식회(金湜會)의 의병이 여주에서 퇴주하는 경상도관찰사 심연(沈演)의 군사와 함께 조령(鳥嶺) · 죽령(竹嶺) 사이를 잠행하다가 청군의 기습이 있다는 와전(訛傳)을 듣고 도산해 실전에 임해보지도 못했다. 또한, 의승군(義僧軍)도 봉기했으나 큰 전공을 세우지는 못했던 것 같다.
이상에서 보는 것과 같이 남한산성으로 구원오는 군사가 모두 붕괴되고 성중은 안과 밖이 끊어져서 의지할 곳이 없게 되자 차차 강화론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주화파(主和派)는 주전파(主戰派)와의 여러 차례 논쟁을 거듭했으나, 주전파 역시 난국을 타개할 방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예조판서 김상헌(金尙憲), 이조참판 정온(鄭蘊)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세는 강화를 지지하는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1637년 1월 3일 최명길 · 이식(李植) · 장유(張維)로 하여금 회답하는 국서를 초(草)하도록 했는데, 최명길의 글이 공손하다 하여 그것을 채택하고 좌의정 홍서봉(洪瑞鳳), 호조판서 김신국(金藎國) 등을 청군 진영에 보내 화호(和好)를 청했다.
그러나 청태종의 답서는 조선 국왕이 친히 성안에서 나와 자기 군문(軍門)에 항복하고 척화주모자 2, 3인을 결박지어보내라는 내용이어서, 조선은 이에 응하지 않고 정론(政論)이 구구해 주저하고 있었다. 이 때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보고가 성안에 이르렀다.
강화도 수비를 맡은 검찰사 김경징은 대신이나 대군의 말도 믿지 않고 마음대로 일을 처리해 성안에 있는 피난민이나 섬 사람들의 신임을 얻지 못했으며, 청군이 강화도만은 침입하지 못할 것이라 호언장담을 했다.
강화유수 겸 주사대장 장신은 ‘검찰사의 지휘 명령을 받들 사람이 아니라’고 서로 배척하는 등 알력이 심해 강화 수비에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1월 21일 밤 초경(初更)에 청군이 강화도를 침입하자 김경징은 그제야 놀라서 파수계책을 일르면서 화약과 총탄을 나누어주었다.
부마(駙馬) 윤신지(尹新之)로 대청포(大靑浦)를 지키게 하고, 유정량(柳廷亮)은 불원(佛院)을, 유성증(兪省曾)은 장령(長零)을, 이경(李坰)은 가리산(加里山)을 각각 지키게 하는 한편, 김경징 자신은 진해루(鎭海樓) 아래로 나가서 갑곶(甲串)을 지키려 했다. 그러나 군사가 적은데다 새로 모집하는 군사들도 흩어져서 결국 강화도성을 지키기로 했다.
한흥일(韓興一)과 정백형(鄭百亨)을 시켜 성안에 피난온 사람을 이끌고 성첩을 나누어 지키게 하고, 연미(燕尾) 서쪽을 풍덕군수 이성연(李聖淵)이, 연미 북쪽은 개성유수 한인(韓仁)이, 갑곶 아래는 첨지(僉知) 유성증이, 선원(仙源) 이하는 유정량이, 광성 이하는 윤신지가 각각 지켰다.
청군이 나루터에 주둔해 홍이대포(紅夷大砲)를 쏘니 포탄이 물을 넘어 육지 몇 리밖에 떨어졌다. 이를 본 김경징과 이민구는 놀라 부성(府城)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주위의 반대로 들어가지 못했다.
주사대장 장신은 해전을 벌리려다 도중에 퇴각해 싸움을 회피하니 강화도의 위급은 촌각에 달려 있었다. 청군은 복병을 의심해 배를 출발시키지 않고 1척을 먼저 보내 7명을 상륙시켰다. 이것을 본 관군이 조총(鳥銃)을 쏘았으나 화약에 습기가 차서 불발되었다.
적병 7명은 해안을 둘러봐도 사방에 복병이 없자 흰 깃발을 흔들어 부르니 일시에 적의 대군이 밀어닥쳤다. 성의 수비를 맡은 김경징과 이민구는 말을 버리고 나룻배를 타고 장신의 전선에 올라타고 함께 도망하니, 남은 것은 부성 안에 있는 빈궁(嬪宮)과 왕자 및 대신들로 싸움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들뿐이었다.
대신들이 명해 부성을 사수할 것을 결의했다. 빈궁이 일의 급박함을 듣고 통곡하며 성을 나가 바다를 건너가려 했으나 비국(備局)이 문을 굳게 지키고 열지 않았다.
이에 내관 김인(金仁) 등을 불러 원손을 보호하고 피신할 것을 부탁해 그들은 원손을 모시고 교동(喬桐)에 이르렀다가 주문도(注文島)로 옮겨 그대로 당진(唐津)으로 향했다.
부성이 함락되자 청군은 성안에 들어와 숙의(淑儀)와 빈궁과 봉림 · 인평 두 대군 및 대군의 부인을 협박해 나오게 하고, 드디어 군사를 풀어 크게 약탈을 자행하고 관가(官家)와 사가(私家)를 막론하고 모조리 불사르며 살육과 약탈을 자행한 뒤 다시 물을 건너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강화도에서 순절한 사람으로는 원임대신 김상용 등의 관원과 어린이, 부녀자들도 많았다.
한편, 남한산성에서는 적의 포위 속에 있으면서 화(和) · 전(戰) 양론이 팽팽이 맞서다가 주화론이 우세해 인조의 출성이 목전에 다가오자 예조판서 김상헌과 이조참판 정온이 화의를 반대 자결을 꾀하려다 실패했다.
이 때 청군은 강화도에서 포로가 된 대군의 수서(手書)와 재신(宰臣) 윤방과 한흥일 등의 장계를 보이면서 독촉했다. 강화도의 함락 사실을 확인한 인조는 드디어 출성을 결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홍서봉 · 최명길 · 김신국 등이 적진을 왕복하며 항복의 조건을 제시하고, 또 청군 진영에서도 용골대 · 마부태 등의 사신이 우리 성안에 들어와서 조건을 제시한 끝에 다음과 같은 조약에 합의했다.
첫째, 조선은 청에 대해 신의 예를 행할 것. 둘째, 명에서 받은 고명책인(誥命冊印)을 바치고 명과의 교호(交好)를 끊으며 조선이 사용하는 명의 연호를 버릴 것. 셋째, 조선왕의 장자와 차자 그리고 대신의 아들을 볼모로 청에 보낼 것.
넷째, 청이 명을 정벌할 때 조선은 기일을 어기지 말고 원군을 파견할 것. 다섯째, 가도(椵島, 椴島라는 설도 있음.)를 공취할 때 조선은 배 50척을 보낼 것. 여섯째, 성절(聖節) · 상삭(上朔) · 동지(冬至) · 중궁천추(中宮千秋) · 태자천추 · 경(慶) · 조(弔) 사신의 파견은 명의 구례(舊例)를 따를 것.
일곱째, 압록강을 건너간 뒤 피로인 중에서 도망자는 전송할 것. 여덟째, 내외제신과 혼인을 맺어 화호(和好)를 굳게 할 것. 아홉째, 조선은 신구(新舊) 성원(城垣)을 보수하거나 쌓지 말 것. 열번째, 올량합인(兀良合人)은 마땅히 쇄환할 것. 열한번째, 조선은 기묘년(1639)부터 세폐를 보낼 것 등이었다.
이상 11조문은 조선으로서는 힘겨운 부담이며 고통이었다. 드디어 1월 30일 인조는 세자와 함께 호곡(號哭) 소리가 산성 안을 가득히 채운 채 서문으로 출성해 한강 동편 삼전도(三田渡)에서 성하(城下)의 맹(盟)의 예를 행한 뒤 한강을 건너 서울로 돌아왔다.
청은 왕자를 비롯한 강화의 부로(浮虜)를 일부 송환한 다음 군중에 유치하였던 조선의 세자 · 빈궁 · 봉림대군(뒤의 효종)을 볼모로 삼고 미리 유치했던 척화론의 주모자 오달제(吳達濟) · 윤집(尹集) · 홍익한(洪翼漢)을 잡아 제도의 군사를 거두어 심양으로 돌아갔다.
비록, 한달 남짓한 짧은 전쟁 기간이었으나 그 피해는 임진왜란에 버금가는 것이요 조선으로서는 일찍이 당해보지 못한 일대 굴욕이었다. 이로써 조선은 명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고 청나라에 복속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관계는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 패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청군은 철수하는 도중 4월에 가도의 동강진(東江鎭)을 공격했는데 이때 청태종은 패륵 악탁과 명나라의 항장(降將) 공유덕(孔有德) 등에 명해 용산(龍山)에서 병선을 만들게 했다.
조선에서도 황해도의 병선을 얻어 그 준비를 갖추었는데, 항복 조건에 따라 조선은 평안병사 유림(柳琳)을 수장(首將), 의주부윤 임경업을 부장(副將)으로 삼아 청군을 도와 싸우게 하였다.
임경업은 척후장 김여기(金礪器)를 몰래 보내 명 제독 심세괴(沈世魁)에게 피하도록 알렸으나, 그는 굴하지 않고 1만의 군사와 함께 역전하던 끝에 전사해 동강진은 17년 만에 완전히 붕괴되었다.
결과
일단 전쟁이 끝을 맺자 전후 처리 문제가 거론되지 않을 수 없었다. 강화도의 실함이 인조의 남한산성 출성(出城)을 재촉케 했으니 우선 강화도 방수에 직임을 맡았던 장수들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먼저 강화유수 겸 주사대장(舟司大將)으로 해상의 방어를 맡았던 장신은 바다를 지키지 않고 도주한 죄로 왕명에 의해 스스로 자살하도록 했다.
검찰사로서 강화 수비의 총책을 맡았던 김경징이 사사되었으며, 강화 수비의 부책임자였던 이민구는 영변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충청수사 강진흔(姜晉昕)은 사력을 다해 바다를 지켰으나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한편, 강화부성이 함락될 때 전현직 관료나 아직 벼슬에 나가지 않은 많은 선비들이 순절했고, 부녀자들이 바다에 뛰어들거나 목을 메어 절개를 지켰는데 난이 끝나자 이들의 충절과 절개를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벼슬을 추증하거나 정문(旌門)을 내렸으며, 단(壇)을 설치해 죽은 자들의 영혼을 위로했다. 또 전장에서 싸우다 전사한 자에게까지 휼전(恤典)을 베풀고 시상했다.
난이 끝난 뒤 조선과 청 두나라는 종번관계(宗藩關係)로 굳어져 가면서 청의 위협이 거세지고 조선의 복종이 강요되었다. 조선은 병자호란 이후 청과의 화의 교섭을 통해 명과의 국교를 단절하였고, 청조로부터 ‘조선국왕’으로 책봉되면서 군신 관계가 재확인되었다.
청은 또 인조가 항복의 예를 행한 삼전도에 청태종의 공덕을 칭송하고 청군의 승전을 기념하기 위한 비의 건립을 조선에 강요해 어쩔 수 없이 응하게 되었다.
인조가 남한 출성에 앞서 합의한 강화 조약의 기본 원칙에는 연호 문제가 주요 사안으로 채택되었다. 그것은 조선이 지금까지 사용해오던 명의 ‘숭정(崇禎)’이란 연호를 버리고 청의 ‘숭덕(崇德)’이라는 연호를 사용한다는 약속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에도 수개월 동안은 제대로 약속이 이행되지 않았다. 이에 청은 청나라의 연호만 쓸 것을 강력히 촉구했다. 이에 결국 인조는 청과의 불필요한 분쟁을 사전에 막기 위해 공사 문서에 청나라 연호인 숭덕을 사용할 것을 내외에 명했다. 그러나 개인 문서나 제향(祭享)의 축사(祝詞)에는 의례히 명의 연호가 사용되고 있다.
청에 대한 배척 의식이 고조되어가는 과정에서 청은 여러 차례에 걸쳐 조선군의 출병을 요구해왔다. 그것은 청태종이 명의 금주(錦州)를 공격하기 위함이었다. 파병 반대 여론이 강했으나 군대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청군과 함께 참전한 조선군의 상장 임경업은 청군들이 모르게 40여척의 병선을 중도에서 빼돌리고 남은 80여 척의 배만 이끌고 대릉하(大凌河) · 소릉하(小凌河) 하구를 거쳐 개주(蓋州)에 도착한 다음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명 · 청 양군의 대결을 관망하고 있었다.
이를 알아챈 청태종은 임경업에게 조선 전함 3척을 명과의 경계선인 등주(登州) 앞바다에 척후로 보내어 명군의 움직임을 살피게 하고 임경업의 조선 수군을 철저히 감시했다.
그러나 임경업은 척후선으로 명군과 은밀히 내통해 청군의 동태를 명의 진영에 보고하고 조선의 파병이 불가피한 것이었음을 알리게 하였다.
임경업의 반청 행위가 탄로되자 청태종은 임경업의 군대를 조선에 돌려보내 강화 조약의 불이행을 엄중히 항의했다. 1641년 청태종은 또 조선에 대해 원군의 파견을 요청해 조선은 2,000명에 달화는 포수 · 기병 · 마부 등을 동원하여 유림(柳琳)을 주장으로 삼아 출동하게 했다.
조선군은 심양에 도착해 청태종의 열병을 받고 5월에 청군과 함께 금주 싸움에 참가했다. 그러나 명 · 청 양군이 치열하게 전투를 전개하는데도 조선군의 주장 유림은 병을 이유로 싸움에 나가지 않고 은밀히 군중에 명해 공포를 쏘아 명군에 피해를 입히지 않도록 했다.
조선군이 대명전에서 싸움을 기피하는 것을 알아차린 청은 조선군의 주장을 교체시킬 것과 포수 500명을 증원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이에 조선 정부는 통제사 유정익(柳廷益)을 유림의 후임으로 삼아 포수 500명을 이끌고 금주로 향하도록 했다.
여러 차례에 걸친 조선 원군의 파병은 청의 일방적인 강압에서 이루어진 것이어서 조선군이 전투에 임하는 자세는 지극히 소극적이었다. 따라서 조선군의 협력을 얻어 명을 치자는 청의 의도는 실효를 거둘 수 없었고 조선의 반감만 증폭시켜 청에 대한 적개심만 조장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전후에 처리해야 될 심각한 문제는 청군에게 강제 납치된 수만(다른 기록에는 50만)인의 속환 문제였다. 특히, 청군도 납치한 남녀노소의 양민을 전리품으로 보고 속가(贖價: 포로를 풀어주는 대가로 내는 돈)를 많이 받을 수 있는 종실과 양반의 부녀를 되도록 많이 잡아가려 했다.
그러나 대부분 잡혀간 사람들은 속가도 마련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속가는 싼 경우 1인당 25 내지 30냥이나, 대개의 경우 150 내지 250냥이었고, 신분에 따라 비싼 것은 1,500냥에 이르렀다.
여기에 순절하지 못하고 살아서 돌아온 것은 조상에게 죄를 짓게 된다고 해 속환 사녀(士女)의 이혼 문제가 정치 · 사회 문제로 대두되기도 했다. 10년의 볼모 생활을 하다가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은 1645년(인조 23)에 환국했으나 세자는 2개월 만에 죽었다.
그리고 인조의 뒤를 이은 봉림대군은 왕위에 오른 뒤 볼모 생활의 굴욕을 되새기며 재야의 인사를 발탁하고 군비를 확장하는 등 북벌의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그 역시 재위 10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
참고문헌
출처 : 병자호란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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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삼전도비 (서울 三田渡碑) Samjeondobi Monument, Seoul |
삼전도비 전경
분류
유적건조물 / 인물사건 / 역사사건
수량/면적
200㎡
지정(등록)일
1963.01.21
소재지
서울특별시 송파구 잠실동 47
시대
조선 인조 17년(1639)
소유자 (소유단체)
서울시 등
관리자 (관리단체)
서울 송파구
위치 정보 바로보기
국가유산 담당부서
역사유적정책과 - 상세문의
상세정보
설명
병자호란 때 청에 패배해 굴욕적인 강화협정을 맺고, 청태종의 요구에 따라 그의 공덕을 적은 비석이다. 조선 인조 17년(1639)에 세워진 비석으로 높이 3.95m, 폭 1.4m이고, 제목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로 되어있다.
조선 전기까지 조선에 조공을 바쳐오던 여진족은 명나라가 어지러운 틈을 타 급속히 성장하여 후금을 건국하고, 더욱더 세력을 확장하여 조선을 침략하는 등 압력을 행사하면서 조선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였다. 나라의 이름을 청으로 바꾼 여진족이 조선에게 신하로서의 예를 갖출 것을 요구하자 두 나라의 관계가 단절되었다.
결국 인조 14년(1636) 청나라 태종은 10만의 군사를 이끌고 직접 조선에 쳐들어와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남한산성에 머물며 항전하던 인조가 결국 청나라의 군대가 머물고 있는 한강가의 삼전도 나루터에서 항복을 하면서 부끄러운 강화협정을 맺게 되었다.
병자호란이 끝난 뒤 청태종은 자신의 공덕을 새긴 기념비를 세우도록 조선에 강요했고 그 결과 삼전도비가 세워졌다. 비문은 이경석이 짓고 글씨는 오준이 썼으며, ‘대청황제공덕비’라는 제목은 여이징이 썼다. 비석 앞면의 왼쪽에는 만주글자, 오른쪽에는 몽골글자, 뒷면에는 한자로 쓰여져 있어 만주어 및 몽골어를 연구하는데도 중요한 자료이다.
2010년 3월에 송파구 석촌동 289-3번지에 위치하던 비석을 고증을 통해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
설명
삼전도비 서울 三田渡碑 사적 인조 14년(1636) 봄, 조선은 형제 관계를 군신 관계로 바꾸자는 후금의 요구를 물리쳤다. 국호를 대청(大淸)으로 바꾼 청 태종은 이윽고 병자호란을 일으켰고,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해 항거하다가 당시 한강나루터였던 삼전도로 나와 청 태종의 신하가 되는 의례를 거행했다. 인조 17년(1639)에 세운 삼전도비의 원래 이름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이며 이러한 치욕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거북 모양의 받침돌 위로 몸돌을 세우고 그 위에 머릿돌을 용 모양으로 장식했다. 몸돌 앞면에 청에 항복했던 상황과 청 태종 공덕을 칭송하는 내용을 만주문자(왼쪽)와 몽골문자(오른쪽)로 새겼고, 뒷면에는 한자로 새겨 놓았다. 비석 옆에는 작은 크기의 받침돌이 하나 남아있는데 이는 더 큰 비석을 세우라는 청의 요구 때문에 버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삼전도비는 고종 32년(1895)에 청일전쟁이 끝난 뒤 땅속에 묻혔으나 1917년에 일제의 조선총독부가 다시 세웠고 1956년에 문교부 주도로 또다시 땅속에 묻히는 등 수난을 겪었다. 이후 홍수로 비석의 모습이 드러나면서 자리를 옮겨 다시 세웠고 1963년에 사적으로 지정되면서 문화재의 위상을 갖추게 되었다. 원래 위치(현재 석촌호수 서호 내부)에 가장 가까운 곳에 세워야 한다는 의견이 많아 2010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기고 보호각을 설치했다.
※(삼전도비 → 서울 삼전도비)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 (2011.07.28 고시)
출처 : 사적 서울 삼전도비 (서울 三田渡碑) | 국가유산포털 | 국가유산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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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떼) 종주 산행 길라잡이
-탐방 종주 산행일 : 2025.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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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주 산행과 일주 산행의 다른 점
---작성 : 들뫼날뫼---2023.10.20
###종주 산행(縱走 山行) : 산의 맥과 산의 능선으로 이어진 곳을 따라 걷는 장거리 산행을 말한다.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자연관중의 하나인-산자분수령(산은 물을 넘지 못하고, 물은 산을 건너지 않는다.)-에 의하여 산행길이 강이나 하천 등의 흐르는 물에 의하여 끊기지 않고 연속으로 이어진 산의 능선길을 달리거나 걷는 산행을 말한다.
예). 1대간 9정맥 162지맥 종주, 화대종주, 설악대종주, 육구종주...
### 일주 산행(一周 山行) : 산의 맥이 중간에 끊기어 이어지지 않는 장거리 산행(달리거나 걷는)을 말한다.
예). 불수사도북 일주(중랑천), 삼관우청광 일주(양재천), 동두천6산 일주(신천)...
***이와 같으므로, 불수사도북 산행을 종주 산행이라 이름하는 것은 맞지 않다.
불수사도북 산행은 수락산과 사패산 사이를 중랑천이라는 하천이 흘러 산의 맥이 이어지지 못하고 끊기므로, "종주 산행(縱走 山行)"이 아니라, "일주 산행(一周 山行)"이나 "연주 산행(連走 山行)" 또는 "연계 산행(連繫 ( 聯繫 ) 山行)"이라 이름해야 할 것이다.
***"종주 산행(縱走 山行)"을 "마루금 이어 걷기" 또는 "마루금 이어 달리기" 라 하고,
"일주 산행(一周 山行, "연주 산행(連走 山行)" 또는 "연계 산행(連繫 ( 聯繫 ) 山行)")을 "뫼이어 걷기" 또는 "뫼이어 달리기" 라고
순우리말로 불러야 한다 생각하지만, 이는 너무 과한~~~ 바람이려나?
### 사전에서의 정의
1). 종주
종주1 [縱走]단어장 저장
형태분석 [縱走]
명사
(1)
(기본의미) 능선(稜線)을 따라 산을 걸어, 많은 산봉우리를 넘어가는 일.
(2)
산맥 따위가 지형이 긴 쪽으로 또는 남북으로 길게 이어짐.
*출처-다음 국어사전
2). 일주
일주1 [一周]단어장 저장
발음 [-쭈] 듣기반복듣기
형태분석 [一周]
명사
넓은 일정한 지역을 한 바퀴 돎.
*출처-다음 국어사전
3).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 : “산은 스스로 물을 가른다”는 말로써 산은 물을 넘지 못하고, 물은 산을 건너지 않으니 물줄기를 보고 산줄기를 파악할 수 있으며 또한 산줄기를 보아 물줄기도 가늠할 수 있다는 말이다.
산자분수령은 우리 선조들의 전통의 자연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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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로 또 같이 : (메가람새, 다물, 들메날메, 스스로 그러하다, 뫼가람새, 더불어 걷는 길, 더불어 함께, 들뫼날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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