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을 몰락시키다
비트겐슈타인 1889-1951(61세)
<생애와 저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시절의 비엔나에서 철강재벌의 여덟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비트겐슈타인의 이름은 루트비히 요제프 요한 비트겐슈타인이다. 유대인 출신인 아버지 카를은 ‘오스트리아의 카네기’로 불린만큼 엄청난 부를 축적하였고, 나중에 미국의 채권에 투자해서 오스트리아 최고 부자가 된다. 비트겐슈타인 궁이라고 불리는 최고의 저택에서 당대 최고의 음악가들의 음악연주를 들으면서 성장한 비트겐슈타인은 가정교사에게 교육을 받다가 14세에 레알슐레라는 공업학교에 들어가 3년 동안 공부한다. 이곳에서 동갑내기 히틀러를 만나는데, 13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가난하게 살았던 히틀러는 헤르만 괴링 제철소를 세워 비트겐슈타인 가문이 소유했던 제철소를 흡수해 버린다. 후일 사람들은 이 일을 두고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복수라고도 말한다.
그 후 베를린에서 2년 동안 기계 공학을 공부하고 1908년(18세)에 영국 맨체스터 공과대학 항공학연구소에서 3년동안 머물며 대기권 상층부에서 연의 비행을 실험하고 비행기 엔진 개발을 연구한다. 실험용 엔진을 고안하던 그는 프로펠러의 고안과 관련된 문제들 때문에 수학에 관심을 갖게 되고, 곧이어 수학의 기초를 이해하려는 욕구에 사로잡힌다. 버트란드 러셀의 저서 <수학의 원리>에 영향을 받은 그는 1911년에 공학 연구를 포기하고 영국 케임브리지로 가서 러셀을 만나 수학과 논리학을 공부한다.
그는 수학논리학 분야의 지식을 매우 빨리 습득해 나간다. 러셀에 따르면 “비트겐슈타인은 내가 가르쳐야 할 모든 것을 금방 알아버렸다”고 했으며 비트겐슈타인을 알게 된 것이 자신의 삶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적 모험 가운데 하나”였을 뿐 아니라 “그는 아주 비상한 정열과 통찰력과 지적 순수성을 지닌 인물”이라고 술회했다.
그 뒤 홀로 노르웨이에 가서 논리학 연구에 전념한 채 은거행활을 하던 그는 1차 세계대전(1914-1918)이 터지자 오스트리아 군대에 자원해 전쟁내내 전선에서 근무한다. 용맹스럽게 전쟁에 임한 그는 장교가 되었지만 전쟁이 끝날무렵 이탈리아 전선에서 포로가 된다.
하지만 전쟁 동안에도 논리학과 철학의 문제들을 계속 연구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공책에 적어 군장 속에 넣고 다녔다. 그가 전쟁 포로가 되었을 때는 그의 유일 무이한 저서 <논리철학 논고>가 완성되어 있었다. 그의 철학을 대표하는 또 다른 저서 <철학적 탐구>가 있지만 이 책은 그의 사후에 출판되었다.
<논리철학 논고>가 자신이 철학에 기여할 수 있는 전부라고 생각한 비트겐슈타인은 다른 직업을 구했다. 그의 가정은 오스트리안 최고의 부자였지만 비트겐슈타인은 유산상속을 거절하고 “자신이 직접 벌어서 먹고 살겠다”면서 집에서 나와 1920년부터 초등학교 교사가 된다. 하지만 다른 교사들이나 마을 사람들과의 사이에 심각한 알력이 생겨서 1925년 교사생활을 그만둔다. 그는 아이들에게 증기기관을 직접 만들어 보도록 했고, 직접 고양이 뼈를 조립하면서 해부학을 가르쳤으며, 밤하늘을 직접 관찰함으로써 천문학을 이해하도록 했다. 또 수학을 중요하게 다뤘는데 그는 대수학의 기초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여자아이의 머리채를 잡아당기기 일쑤였다. 이러한 그의 교사 생활은 가는 곳 마다 문제가 되곤 했다.
1929년 케임브리지로 돌아온 그는 23년 동안 죽을 때까지 강의와 방대한 저술 활동을 한다. 하지만 출판은 하지 않았고 수많은 노트, 논고, 타이프 친 원고 등이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 평생 결혼을 못했는데 여성 몇 명을 만났던 것으로 알려진다. 마거리트라는 여성을 몇 년 동안 만나고 있었던 1931년에 그는 노르웨이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그녀를 데려갔다. 그런데 옆에 있는 애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기도와 명상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결국, 2주 뒤에 그녀는 결혼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판단해 그의 곁을 떠나고 가까운 친구 사이로 남았다. 또 1946년에 40여살 가까이 차이가 나는 의대생 벤 리처드와 사랑에 빠져 생애 마지막까지 연인관계를 지속했다.
첫댓글 '철학을 몰락시키다'는 그가 쓴 책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