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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전쟁 당시에 미군이 운용했지만 한국인으로 구성되어 북한 지역에서 첩보 수집과 게릴라전을 벌였던 첩보/유격부대이다.
미군이 북한 지역의 지리와 언어에 익숙한 이북 출신 한국 청년들을 활용하여 비공식적이고 변칙적으로 운용하던 특수부대였기 때문에, 미군 정규군 소속도 아니고 한국군 소속도 아니라서 군번도 없이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용사들이다.
2. 시초
광복 이후 남한에 주둔한 미 육군 제24군단은 예하에 크게 두 그룹의 정보기관을 거느렸다. 하나는 4개의 일반참모부(G-1, G-2, G-3, G-4) 중 정보 참모부로 알려진 G-2였고, 다른 하나는 CIC(Counter Intelligence Corps)로 일컫는 방첩대였다.
1945년 9월 9일에 제224 CIC파견대(the 224th CIC Detachment)가 최초로 남한에 들어왔으며, 소속 요원 대부분은 태평양전쟁 당시 레이테와 오키나와 전투에서 활약했던 인물들이었다.
224 CIC파견대는 다양한 CIC 전투부대분견대(combat unit detachment), 수도부대(metropolitanunit), 지역부대(area unit)들과 함께 활동했다.
이들
각 파견대는 도쿄의 제441 CIC 파견대 통제를 받다가, 1946년 2월 13일 서울의 제224 CIC파견대가 남한주둔 모든
CIC파견대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장악한 뒤, 4월 1일
모든 CIC파견대가 971CIC파견대로 교체되고 나서야 본격
활동에 돌입한다.
1946년 美 제 육군 제24군단 정보처 산하에 대북공작을 담당했던 첩보부대인 442CIC를 창설하고, 이후 1948년 8월 美 극동군사령부(GHQ) 정보처에서 442CIC를 기반으로 당시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던 백의사, 정의사 등 여러 반공단체를 망라하여 켈로(KLO)부대를 만드는데, 대북첩보를 위해 주로 서북청년단에서 활동하고 있던 이북출신이 중심이었다.
KLO는 주한 첩보연락처(Korean Liaison Office)의 약자로 케이엘오를 줄여서 흔히 켈로부대라 불린다.
1948년 12월 CIC는 공식 철수했으나 그 요원 상당수는 그대로 남아 켈로부대로 알려진 KLO와 미극동공군의 대북 첩보기관인 美공군 인간첩보부대(USAF HUMINT)로 역할이 옮겨진 것이다.
3. 활약상
초창기의 켈로부대는 고트(Goat: 대장 최규봉), 선(Sun: 대장 전훈), 위스키(Whiskey: 대장 박태현) 등 3개의 지대로 나뉘어 활동했는데, 각 대별로 통상 2-3백명으로 구성되었으며 도서지역(초도·영종도·백령도·주문진 등)에는 파견대를 설치 운영하였다.
구성원들은
각 지대대장이 직접 모집하였고 첩보원들은 민간인 신분이었다.
1951년 7월 26일 미 극동군사령부 예하에
제8240부대를 창설하여 첩보부대 및 유격부대를 통합 운영하게 되는데,
베이스캠프는 용산 선린상고에, 본부는 종로 태화관에 설치했다.
부대명을 특수공작대로 바꾸고 육군대령 계인주가 지휘를 맡고, 공작과장은 최규봉씨가, 군수 및 보급과장은 전훈씨가, 총무 및 인사과장은 박태현씨가 맡았다.
그러나 1952년 6월에 발생한 미군 정보장교단 39명 몰살사건을 계기로 몇몇 파견대는 8240부대의 지휘계통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휴전협정이 체결된 후 1953년 9월 전격 해체되었다.
그 후 이들 중 군에 계속 남기를 원한 인원들은 휴전 후 한국군 소속으로 변경된 8240부대 산하로 있다가 1954년에 8240부대가 해체되자 일부는 육군 부대들로 갔고, 또 다른 일부는 HID에 배속되기도 했다.
그리고 육군 부대들로 간 켈로부대원들 중 일부가 1957년에 육군본부 특전감실이 주도한
육군 특수부대 창설준비 요원이 되었고 이듬해 일본 오키나와의 미 육군 특전부대 제1특전단에서 교육받고 온 뒤에 이들을 창설요원으로
하여 제1공수특전단을 창설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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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 이후 남측 지역으로 복귀하지
않고 북한 지역에 남아서 활동하던 KLO부대원들은 대부분 담당부대에서 통신망을 끊어버려 휴전협정과 동시에
한국과 미국 정부 양국에서 버림받았다.
첩보부대에선 이런 일들을 용도폐기 되었다고 표현한다.
육군 첩보부대에 흡수된 상당수는 북에 남겨진 동료들을 구해오려는 비공식 활동을 휴전 이후에도 수년간 계속했다.
휴전협정
체결 전 북한 해안가의 대부분의 섬을 차지하고 있었던 그들은 휴전과 더불어 고스란히 넘겨주게 되었다며 한탄했다.
부대원 중 여성첩보원도 있었는데, 남녀 대원의 성비가 약
8대2 정도였다고 한다.
여성들은 주로 북한군에 의해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으며 적지에서 의심을 덜 받기 때문에 생존율도 남성대원들보다 높았다.
여성첩보원들은 남성대원과 함께 부부로 가장해 침투하기도 하였다.
켈로부대는 한국군과의 교류는 거의 없었고 비밀로 붙여졌는데, 공산주의자나 북한군측 첩자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독자적으로 재판, 처형하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전쟁 발발 전까지는 소규모로 비밀리에 활동하다가 한국전쟁 발발 후 해산때까진 보다 많은 인원이 첩보/게릴라 대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6.25 전쟁 중에 활발한 활동으로 여러 전과를 올리게 되는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전과가 인천상륙작전 때 팔미도
등대 점령작전이었다.
KLO요원인 최규봉, 그리고 한국 육군 및 해군 장교, 미 해군과 육군 장교들로 이루어진
연합 작전팀이 1950년 9월 14일 밤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인천 앞 바다 팔미도등대를 점령함으로써 인천상륙작전 성공에 결정적으로
기여하게 된다.
그 동안 이 켈로부대 출신들은 국가의 배려를 받지 못하다가 『참전군인등 지원에 관한법률』에 의해 지난 1996년에 들어서야 2,410명의 켈로출신 전사자들이 대전 국립묘지에
봉안되었고 위령비가 세워졌다.
이에 따라 생존자 230여명의 군번없는 전사들이 군번과 참전용사증을 받게 되었다.
명단이 확인된 대원 중 전사· 실종자 총수가 3,415명이고 생존대원 총 수는 350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현재 이 켈로출신 생존자들이 KLO·8240전우총연합회(대표 최규봉)라는 모임을 구성하고 있는데, 그 동안 총연합회는 회원들이 조금씩 돈을 모아 장학금지원, 팔미도 등대에 기념비 건립, 팔미도 점령기념행사 등의 활동을 해왔다.
4. 8240부대에 대한 보충 설명
한국전쟁 당시에 북파되어 활동하던 특수부대로는, KLO 직할 부대인 특수공작대, 선린상고의 공작대, 서울여상의 공작대가 있었고, 이 외에도 KLO 직할 부대는 아니었지만 귀순자로 구성된 공작팀이 따로 있었는데, 소위 동키 부대로 불리는 유격부대들이다.
동키뿐만
아니라 북한 지역에서 1.4후퇴 당시 서해상의 각 섬으로 피난 온 반공 무장대원들을 조직해서 편성한
유격부대인 레오파드,
울프팩, 커크랜드 부대도 있었다.
이 부대들은 KLO 직할 부대들과 함께 1951년 7월부터 미 극동군사령부 산하의 제8240유격첩보부대로 통합되어 운용되었고
이때부터 이들 부대들도 모두 KLO부대라고 불리게 되었다.
즉 1951년 6월까지는 미군의 주한 첩보연락처에서 운용하던 몇 개의 지대들을 켈로부대라고 일컬었으나, 1951년 7월에 KLO 직할 부대들과 동키 등 유격부대들을 통합 지휘 운용하는 8240부대가 창설되자 이 부대들이 모두 8240부대 소속이 되었고 이 8240 소속 부대들이 모두 켈로부대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켈로(KLO)부대라는 명칭이 원래는 주한 첩보연락처 소속 부대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이 좁은 의미의 기존 켈로부대와 유격부대들이 1951년에 8240부대로 통합된 후로는 8240 예하 부대들(기존 KLO + 미국이 운용하던 한국인 유격부대들)을 모두 켈로부대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부대원들이 대부분 38선 이북 출신들이었다.
보급은 미군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각 섬에 파견된 미군 작전 고문관의 통제를 받았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이후 이 8240부대를 한국군으로 이관했는데, 1953년 8월 12일 국방부 일반명령 제219호로 창설된 국방부 8250부대사령부가 8240부대의 지휘, 인사, 행정, 포상 및 징계권을 이양받았다.
즉 이때부터는 한국군 국방부 직할 8250사령부 소속의 8240부대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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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휴전협정 체결로 이런 특수부대가 사실상 필요 없어 졌다고 판단한 군 수뇌부는, 1954년 2월 8240부대를 공식 해체하고 소속 대원들을 육군으로 일괄 편입시켰다.
8240부대원들은 육군 편입 이전보다 한계급 아래 계급[으로 육군에 편입되었고, 18세 미만 30세 이상의 대원들은 제대할 수 있었다.
8240부대 지휘관 가운데 753명이 장교로 현지임관하고, 대원 약 12,000명이 하사관이나 병으로 신분 전환됐다고 한다.
당시 부대원들 중 일부는 미군에서 지원해준 독일군복, 특히 슈츠슈타펠의 얼룩무늬 위장복을 입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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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육군에선 정식 특수부대를
창설하기로 하고 육군본부 특전감실에서 그때까지 육군에 남아 있던 8240부대 출신 장교 20여명과 8240부대 출신 하사관들을 창설요원으로 차출하여 제1전투단을 창설한다.
초대 지휘관 백문오 대령이었다.
제1전투단 창설요원들은 오키나와에 주둔하는 미육군 제1특전단(그린베레) 교육대에서 공수교육과 특수전교육을 받고 돌아왔다.
1959년 10월 1일 부대명을 제1공수특전단으로 개칭한다.
이 부대가 이후 특전사 제1공수특전여단이 된다.
결국 켈로부대원 중 일부가 남아 특전사의 핵심 창설요원이된 것이다.
5. 기타
이 외에도 美국무성 산하의 SOU(Special Operation Unit)라는 첩보부대가 있었는데, SOU도 켈로와 유사한 임무를 띤 부대였지만 창설시기가 1952년 4월로 비교적 늦은 편이다. SOU는 대원들을 뽑아 사이판 미군기지에서 훈련을 시켰다고 한다.
북파공작원들의
증언속에서도 미군이 지휘한 첩보부대로 잭, 닉, 월백, 동키부대, 위스키부대, 고트부대
등이 언급된다.
1966년에는 액션영화로도 각색되었다.
군번없는 용사들로 기록조차 제대로 남지 않는 경우가 허다해서, 연구가 어렵다고 한다. 그야말로 베일에 싸여 있는 부대.
당시 KLO부대의 간부급인 기획참모로 활동했던 이창건씨가 KLO의 한국전 비사 라는 책을 출간했으니 관심있는 위키러들은 참고.
이창건씨의 KLO부대에 대한 자세한 증언 인터뷰를 여기서 볼 수 있다.
그 외에도 개인 블로그에 전설의 켈로부대 실록이라고 작성 된 글과 김광인氏의 블로그에도 상당한 자료가 있다.
극동사령부에 관한 문서로 극동사령부 한국관련 연구문서에 켈로부대가 작성한 대북 비밀첩보 보고서들의 내용이
들어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서 발간한 한국 전쟁의 유격전사. 여기에서는 6.25당시
유격부대와 첩보부대에 관한 내용을 상세히 다루고 있다. 총 693페이지.
물론 휴전 후에 KLO부대(8240부대)가 국군으로 이관된 후엔 그때까지 부대에 남아있던 KLO 대원들은 한국 육군(일부는 HID) 소속이 됐지만, 그 이관 전에 전사, 부상, 행방불명 기타 사유 등으로 켈로를 떠나게 된 인원들은 결국 어느 군 소속도 아니게 된 것이다.
그래서 90년대 후반경 이후로 그 분들을 위해 부대원 명단 복원 및 신원 확인 작업 등이 이루어졌지만 여전히 완전히 다 복원된 건 아니다.
백의사와 KLO의 활동을 통해서 본 남한 대북정보활동의 원류(1945-1953),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완범 한국군으로 소속체계가 변경된 후로는 이들을 관리하는 상위부대인 국방부 직할 8250부대가 만들어져서 공식적으론 8250부대가 공식명칭이 됐으나, 이전 습관대로 8240부대라고도 계속 불리었다.
마치 HID에서 AIU로 공식명칭이 바뀐 뒤로도 여전히 HID라는 원래 이름을 더 많이 쓰는 것처럼.
관련 자료 - 해군지 2012년 09월호 12페이지. 정확히 말하면 이때부터 공식적으론 8240부대라는 명칭은 없어졌고 8250사령부 예하의 8250부대가 정식 부대명칭이었으나, 실제론 그 후로도 8240부대라는 익숙한 명칭을 더 많이 사용했다고 한다..
대대장은 대위, 중대장은 소위로 계급을 부여받는 식.
평안북도에 태어났고 서울대 공대 출신의 엘리트였음.
켈로부대를 떠난 후엔 핵공학 분야에서 활동했다.
2002. 11. 15 성신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조교수 김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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