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범스님 화엄법문]인생이여 화엄이여 2014.2.9
*인생
1. 죽음에 대한 불만족
2. 죽음에 대한 두려움 불안
어디나 인생이다. 화엄도 반야도 경제도 정치도, 사람이 하는 일엔 모두 인생이 들어있다.
인생이 참 문제다. 인생이란 게 돌아가는 건 한 곳(죽음)인데, 죽음에 만족하면 그만인데, 인생이 어디서부터 꼬이느냐, 죽음에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
그냥 죽으면 만족 못하면 좋은데, 또 미리 걱정을 한다. 이게 두 번째 재앙.
고양이 보면 추우면 당장 먹을 물도 없다. 그런데 잘 때 보면 늘어지게 자더라고.
죽음을 만족하지 못하고 죽음을 미리 걱정하고...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냐?
*해결책
1.향락주의-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인생, 그게 현실. 그건 감춰두고 잊어버려서...
인생은 무엇인가 청춘은 즐겁다, 그러니 이 밤이 새기 전에 밤새 춤을 추자... 이게 인생관.
얼마 못 사니 좋은 거 먹고 좋은 집 살고 좋은 옷 입고... 그게 향략 인생. 좋은 건 다 향락. 향락적인 걸 가지고 죽음에 대한 불안, 아쉬움을 달래려고 한 것.
그래서 돈 많다고 벼슬 높다고 아는 것 많다고 뽐냄. 이게 다 깨뻥.
그게 다 뻥인데,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인생이, 제 앞에 코가 석자는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것. 그걸 감춰 두고 재력 뽐내고 인물 뽐내고... 인물 그거 죽는 날엔 개뻥이여~ 죽는 사람 인물 누가 봐요?
인생에 대한 뿌리가 자랑하는 속에 그 밑에 있다. 뽐내는 속에 인생 뿌리가 있다.
향락적인 건 아주 심각한 문제가 있다. 거기엔 의미도 없고 책임도 없다.
인도에 그런 향락파가 있었다. 어떻게 사는게 잘사는 삶이냐? 노력은 하나도 안 하고 평생 동안 남의 돈만 빌려서 그 돈 갖고 살다가 그 돈 하나도 안 갚고 그냥 딸깍 죽는거다, 이게 향락주의.
2.고행주의 -내세 준비
인생의 향락은 잠깐이니 내세를 준비해야 한다는 것. 그래서 먹지도 쓰지도 않고 집이 있어도 집에서 안 자고... 이게 고행주의. 내세를 준비하는 현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 극단적이지 않나? 고행이 인도 사회에 굉장히 심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고행도 향략도 아니다.
모든 걸 소유하려고 하는 건 향락인생. 소유는 향락에 도움이 된다. 소유하지 않고 다 버려서 버리고 버려서 미래에 좋은 행복을 추구하는 건 고행. 고행은 뭐든지 다 버린다. 소유 않고 버리는데 포기하는데 그 이유가 내세의 행복. 그냥 내세가 짓눌려 있다. 내세에 어떠한 고통을 당할지 모른다. 이건 완전히 포기하는 인생. 소유는 향락, 포기는 고행.
석가모니는 이 둘에 다 만족 못함. 출가 전엔 향락적 분위기. 왕자에 궁전. 그런데 향락은 안된다 하고 출가하고는 고행. 그런데 내세에 태어나 그 복 다 없어지면 다음에 어쩔거냐?
석가가 문제 삼은 건 무상. 향락이든 고행이든 나오게 된 동기는 얼마 못산다는 것. 항상함이 없다. 무상처럼 그런데 좋은 게 없다. 잘난 놈도 잘 죽고 유명한 놈도 잘 죽고... 만약에 안 죽는다고 생각하면? 그거 세상이 벌써 뒤집어졌을 것. 그런데 가진 사람과 못 가진 사람의 마음에 불만은 있지만 다행스런 건 가진 사람도 잘난 사람도 금방금방 죽으니까 불만 말하다가 죽고 나면 별 말 안해요. 죽는 거 보니까 참을만 하더라...
석가는 고행이든 향락이든 의미가 없다. 문제는 인생이 금방 죽는다는 것. 삶과 죽음이 그러면 뭐하는 거냐 이거거든. 그래서 석가가 절실하게 깨달은 건 인생무상. 인생 무상을 깨달으면 도를 딱 반 이룬거다. 인생 무상을 철저히 깨달으면 그 다음 더 깨달으려 하지 현세의 향락 내세의 욕구가 아무 의미가 없다. 욕구는 무상 앞에 딱 중지가 된다. 왜 나이 90이 되어도 고집을 부리나? 그거 무상을 못 느껴서 그렇습니다.
90 되어도 온갖 걱정 다하는 사람, 맨날 봅니다. 스님도 그러더라니까. 그래서 내가 말 다했다... 자기 갈 길이 바쁜데 뭐 어떻고 자기가 하지 못한 거 , 이루지 못한 걸 잡고 있다. 아직 無常道도 못 느낀 것. 석가는 이미 무상을 알고 도를 반을 이루고 들어간 것. 일체 세속적으로 또 내세적으로 구하는 게 없다.
내세에 태어나봐야 역시 무상. 한 생 연장하는 건데 그게 무슨 의미?
또 현세에 많이 소유해봤자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게 인생인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이렇게 무상에 대한 절실한 깨달음이 있으면 구하는 게 없다.
구하는 게 없으면 그 다음엔 인생이 왜 이렇게 부질없이 나왔다가 부질없이 가는가? 그거에 대한 열망이, 취미 삼아 여행 삼아 하는게 아니라 다른 거 다 중지하고 거기에 열중하게 됨. 그걸 쥐가 막다른 쥐구멍에 몰렸다고 함. 인생 무상을 알고 도를 닦는 거를 쥐가 막다른 구멍에 몰린거다. (15분까지 녹취 분)
신심청정 즉생실상
從法生智
*3가지 화엄
1.지엄 화엄-화엄경학 智學 의 두 가지가 지엄 화엄
2.의상, 법장의 화엄
법계도기총수록 -의상 제자들이 공부한 화엄 모아 놓은것
지엄을 부를 땐 엄師 혹은 지엄師라 부름
의상은 화상이라 부름
이를 보면 경학을 하지만 지혜로 바로 들어가는게 지엄 그래서 경학 지학을 겸함
그런데 의상은 지학 법장은 경학으로 감
의상은 저서가 얼마 없으나 제자들과 한 내용은 어마어마한 게 다 들어있음
화엄경 문답이 의상 거라고 김상현교수가 일본 학자들과 논의 끝 결론
의상은 이렇게 문답으로.
법장은 전부 저술 즉 저술 화엄
이게 두번째 화엄
3.통현 화엄
그리고 통현 화엄은 그냥 실천으로 들어감 통현은 지행 실천 화엄
*화엄의 핵심 3가지 - 정각 발심 보현행
무슨 화엄을 해도 세마디 밖에 없다
화엄경을 보면 맨 처음 놓은게 시성정각
맨 마지막에 보현행원
시성정각을 맨 처음 놓고 마지막에 보현행원 으로 끝남
보현행원이 해탈 중도의 삶 (33분)
그럼 보현행원은 어떻냐 공덕을 짓고 또 짓는데 내가 갖는건 아무것도 없다 지어서 모두 회향. 이게 불교의 삶이다. 계속 소유하고 소비하는게 아니라. 또 고행만 하는게 아니라. 고행도 향락도 아님
소유는 왜 하냐 소비하려고 하는것 .
어떤 사람은 앞으로 좋은일 하려고 돈 번다는데 그건 거짓말. 앞으로 좋은일 하려면 지금 좋은일 하지. 자식 주려고 하는데 자식이 나거든?
보현행원은 뭐냐? 많이 모아서 그냥 회향하는것
그래서 성정각 & 보현행이 화엄인데 그 사이에 초발심이 있다.
그런데 성정각 하면 거기 초발심도 보현행도 있고 vice-versa. 하나 속에 다 돌아간다. 정각이 다른 데서 오는게 아니라 초발심에서 오고 보현행에서 오는것 또 초발심이 바로 보현행. 그래서 초발심공덕품에서 초발심의 말할수 없는 공덕을 얘기.
또 선재가 저는 발심 했습니다 하면 어떤 스승은 선재에게 발심처럼 위대한게 없다며 절을 함 (37분)
*발심은 무엇인가? 의상 제자들에 따르면...
그럼 발심이 뭐냐? 의상 제자들이 설명.
시방 미진은 미진에 자성이 없고 시방 허공으로 성품을 삼고, 시방 허공은 허공에 자성이 없고 시방 미진으로 성품을 삼는다.
찰나는 찰나에 자성이 없고 무량겁으로 자성을 삼고 vice-versa 이걸 진성이라 함
그런 가르침을 듣고 그런 마음을 내는걸 초발심이라 부른다
아 불교 좋으니까 한번 해보자 이러는것도 발심이라 하는데 그런것만이 아니라.
진성을 듣고 已知진성하고 법무자성 이타의성 으로 자성을 삼는다
색에 색이 없고 공에 공성이 없어서 색즉시공 공즉시색 이게 진성
이런 법문을 들으면 진성에 대해 안단 말이죠 그래서 이지진성 발진성심 진여실상에 대해 알았으면 진여실상의 마음을 낸다 이게 발심
진여실상의 마음을 내니 아상이 없어짐 왜냐 진여실상에 나라고 하는 탐진치 아상은 없다 그니까 진여실상을 알고 진여실상의 마음을 내니 아상이 없어짐 이게 발심
그렇게 발심하면 아상은 없어지고 뭐가 남느냐 진여실상에 대해 구체적으로 모르는 미지장 즉 작은 장애가 있다 그 미지장을 완전히 없애 나가는게 십지. 그래서 십지를 지나가면 불지가 되는데 불지에는 번뇌장도 없고 미지장도 없고 또 그동안의 허망하고 무상한 것을 대책없이 구했던 중생의 습기 즉 습기장도 전혀 없다.
그래서 번뇌장 미지장 습기장 (40분)
우리가 90 이 넘어도 돈 버는건 습기장 때문이다.
진성을 듣고 발심을 하면 밖으로 구하는 번뇌가 없어진다 그런데 미지장(소지장, 알것에 대한 장애. 이는 지혜가 작아서 모르는게 있다는 말)은 남아있다 . 미지장은 지혜가 작은 장애. 이를 닦아 나가면 십지 닦아 법운지가 되면 미지장이 자꾸 줄어들었을 것. 그래서 차별지까지 나온다. 그리고 불지에 올라가면 번뇌장 미지장 습기장이 없다
중생의 습기는 불지에 올라가야 없어진다 그래서 이걸 수행 3장이라 함 (번뇌장 미지장 습기장 )
발심 정각 행원이 하나도 다를 바 없다 이걸 화엄에서는 원융이라 함
그래서 화엄은 발심하는 순간이 정각이고 정각하는 순간이 행원이고 그래서 가봐도 법성 이더라
화엄에서 佛은 법성불이기에 옛부터 움직이지 않은걸 부처라 부른다 이걸 법성불이라 함
초기불교에서는 팔상성도를 불이라 하나 대승은 법성을 불이라 함
그래서 팔상불 법불 보불 응불 이렇게 삼불 얘기 하는데 화엄은 십불 이 나옴. 그런데 십불이 나타나면 보현이 됨 그래서 십불보현대인경 (50분)
나머지는 생략
https://www.youtube.com/watch?v=KA3uJSd_304&t=3744s
첫댓글 스님의 3가지 종류 화엄을 들어보면, 매우 현학적이지요?
그러니 '화엄학'은 되지만 화엄학을 가지고는 화엄이 전하고자 하는 이 세계를 알수가 없어요.
화엄경을 직접 봐야 합니다.
그리고 보현행을 직접 해봐야 해요.
화엄경을 보고 보현행을 동시에 실천해야 비로소 화엄이 전하고자 하는 세계가 눈앞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하나만 하면 안 됩니다.
의상스님도 제가 아쉬운 게 많아요.
의상의 화엄이 원효의 화엄을 못 따라간다... 는 게 제 개인 생각입니다.
발심에 대한 정의만 해도 그래요.
진여실상에 대한 마음을 낸다, 는 게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우리 마음, 우리 몸 그대로 구래로부터 움직이지 않는 구래불, 부동지불이라는데, 당장 답답하지 않으세요?
그 말이 다 맞겠지만, 그걸 우리 범부들은 어케 알수 있느냐, 말입니다.
알수 있느냐에 대한 의문이 우리 온몸을 휘감은데, 거기에 무슨 신심이 생깁니까?
이걸 의상 제자들도 똑같았는지, 종범스님 법문 뒷부분에 그런게 나와요.
제자들이 그걸 우리가 어케 알수있습니까, 하고 말이지요.
아마 그 대답이 믿음(信)일 겁니다.
네가 부처다! 네가 바로 구래부동의 그 부동지불이다!
그걸 믿으면 알게 된다! 이렇게 말입니다.
이건 보조스님도 예외가 아니라, 우리가 부동지불임을 알면 되는데 사람들이 안 믿는다! 하고 한탄하셨지요.
이게 말이 됩니까?
창조주를 무조건 믿어라 그러면 구원이 온다, 하는 기독교와 뭐가 다른가요
우리가 부동지불임은 어케 아느냐?
이에 대한 저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보현행을 해라! 그러면 알게 된다!
이 간단한 걸, 왜 의상도 보조 지눌도 몰랐을(?)까요?
*원효는 보현행인 걸 알았을 겁니다.
그 증거가 원효 말년 교판에서 화엄을 보법 원만으로 놓고 보현교를 가장 수승한 것으로 분류한 것에서도 볼수 있습니다.
또 십회향에서 해설서를 중단하고 중생 속으로 들어간 것도 그래요.
반면 의상은 중생 속으로 들어가지를 못하고 실체없는 관음신앙에서 구원을 구합니다.
그러다 동해 홍련암에서 관음을 보고 몸을 던졌다 하지요.
중생 속에 들어가서 중생과 살다가 생을 마감한 원효와,
오지 않는 구원을 찾아 기도하다 바다에 몸을 던진 의상.
누가 더 보현행을 알았을 것 같습니까?
그럼 보현행원은 어떻냐 공덕을 짓고 또 짓는데 내가 갖는건 아무것도 없다 지어서 모두 회향. 이게 불교의 삶이다. 계속 소유하고 소비하는게 아니라. 또 고행만 하는게 아니라. 고행도 향락도 아님
소유는 왜 하냐 소비하려고 하는것 .
어떤 사람은 앞으로 좋은일 하려고 돈 번다는데 그건 거짓말. 앞으로 좋은일 하려면 지금 좋은일 하지. 자식 주려고 하는데 자식이 나거든?
보현행원은 뭐냐? 많이 모아서 그냥 회향하는것
-종범스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니 보현행 하는 사람들은 불쌍해요!
다들 가지는데 보현행자들만 가지는 게 없어요!
또 그걸 다른 이들은 당연한 걸로 알아요!
우리 광자 덕자 큰스님만 해도 보세요!
다른 큰스님들은 산 속에서 온갖 수행 온갖 경계 다 이뤄 그 이름 깊어만 갔지만,
우리 큰스님은 뭘 이루셨나요?
다들 산 속에서 당신 하고픈 공부만 하고 있을 때,
큰스님은 시멘트 냄새 속에서 중생들과 함께 하다 가셨어요.
열반도 멋지게 열반종 울리며 산사에서 하시지 못하고,
시멘트 속에서 초라하게 열반.
당신의 공부도, 도를 이루고 싶은 출가의 발심도 모두 큰스님의 보현원 앞에는 조금도 의미를 갖지 못했습니다.
오직 중생들의 행복만이 큰스님 비원
보현행 하는 건 무척 외롭습니다.
다른 이들이 보현의 경계를 알지를 못해요.
자기들 하고 똑같은 줄 압니다.
거기 더해, 보현행을 가식적으로 하는 걸로 봐요.
왜냐? 자기들이 진실로 하지를 못하거든요?
보현행, 사실 일반인들은 잘 못합니다.
남 보고 보현행이 제일이야, 부처행이야, 하고 떠들고 멋내기는 좋아도,
실지 일상에서 막상 해보려면 대부분 못합니다.
이 사바세계가 보현행을 할수있게 내버려두지를 않아요.
공경 못할 사람, 찬탄 못할 때가 얼마나 많은데요?
거기에 미안하다 하고 한 마디 할 것 같으면 그때부터 자기 잘못은 모르고 그냥 사과했다고 잡아 먹으려 듭니다.
그런데 보현행을 어케 합니까?
바보들이나 하지요.
그렇지만 그럼에도 내가 보현행을 하면, 이 세상이 아름다와집니다.
내가 공경하고 내가 찬탄하고 내가 섬기면 세상도 점점 공경 찬탄 섬기게 돼요.
공경을 모르던 이가 공경을 알게 되고 찬탄 못하던 이가 찬탄을 하며 섬기지 못하던 이가 섬기는 일들이 기적처럼 일어납니다.
무엇을 통해? 울며 인내하며 보현행을 하는 나!를 통해서!
나를 통해서 보현을 보게 되고 나를 통해 부처를 보게 되고 나를 통해 부처님 모습 부처님 행을 보게 되어 나도 모르게 중생들이 거친 말과 마음을 접고 점점 부처로 변해 갑니다.
나만 부처되는 게 아니라 나를 보는 이웃도 부처가 되어가는 거에요!
그러니 보현행을 안할 수 없습니다.
내가 보현행을 몰랐으면 모르되 알고나면 아니 할수가 없어요.
내가 부서지고 온갖 오해 속에서 지쳐 쓰러져간다해도 안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이 뛰어난 가르침을 전해주신 부처님 은혜가 사무쳐서, 이 뛰어난 가르침을 모르고 서로 대립하고 원수가 되어 살아가는 이웃이 안타깝고 가여워서 내가 힘들다고 보현행을 그만 둘 수가 없어요.
그래서 보현은 다시 보현을 부릅니다!
내생명 부처님 무량공덕생명!
허공계가 다하고 중생계가 다해도 나는 보현행을 끝까지 하겠다!
경전에 장엄이란 말씀이 많이 나오지요.
오늘 법문은 장엄이란 표현이 딱 그대로인듯 합니다.
음성으로, 글로, 지식으로 보현을 법계에 장엄하시네요!!
번뇌도, 교만도, 아상도, 깨달음도, 선정도, 삼매도 보현 앞에 아무 의미 없을 듯 합니다. 말 그대로 이 모든 것이 찰나에 공으로 돌아가는 듯 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법계는 보현으로 충만하겠지요? 우리가 알든 모르든.
감사합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_()()()_
행을 통해 드러납니다.
경찰이 경찰이고 검사 판사가 검사 판사인 건, 그들이 경찰행 검사행 판사행을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모든 게 그렇습니다.
의사가 의사인 것도 의사행을 하기 때문이고, 상인이 상인인 것도 물건을 파는 상행위를 하기 때문입니다.
행을 통해 그 정체가 드러나요.
부처가 부처인 건 부처행을 하기 때문입니다.
흔히 예전 도인 이야기들처럼 일반인들 속에 숨어서 일반인 행을 하면 아무도 부처임을 모릅니다.
부처행을 하기에 부처를 사람들이 알아보는 겁니다.
또한 행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도 드러납니다.
대통령이 대통령인 걸 알수있는 건, 자기 말 한디에 온 나라가 들썩하기 때문입니다.
검찰총장 오라 하면 오고, 합창의장 오라고 하면 다 옵니다.
내가 검찰총장 불렀는데 안 오면, 검찰총장이 이유가 있거나 내가 대통령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이면 당연히 옵니다.
부처가 본래 부처인 건 부처행을 통했을 때만 알수있어요.
중생들도 알고 본인도 부처님을 압니다.
왜냐? 부처행은 부처만 할수있거든요?
그런데 보현행이 부처행입니다.
따라서 보현행을 하면 자신이 본래 부처임을 너무다 처절하게 알게 됩니다.
또한 이웃들도 저 분이 부처임도!
그렇게 부처행은 안하고 머리로 믿음만 갖고 본래불 부동지불임을 안다...
이러니까 불교가 행동 불교가 되지 못하고 말은 자비의 종교임에도 현실은 행이 없게 됩니다.
기독교는 행이 있어요.
가르침은 불교보다 깊지 못할지 몰라도 그 분들은 행이 있습니다.
주님의 명령이 있고 그 명령을 몸으로 행합니다.
그러니 힘이 있지요.
행은 생명의 본질입니다.
행이 있어야 생명이 생명력을 갖게 돼요.
행은 없고 가만히 앉아 좌선만 하고 삼매만 해서 부처님을 알려고 하는 불교 그리고 그렇게 했던 불교.
우리 광자 덕자 큰스님은 이런 엉터리 불교의 문제점을 반야안으로 바로 보시고 이 시대에 새로운 불교, 행동 불교를 가지고 오셨지요.
추가:묘한 것은, 부처만이 할수있는 게 佛行인데 보현행을 보니 불행이라 하면서도 바로 우리도 할수있는, 중생들의 본래 모습입니다. 그렇게 다시 보니, 부처는 저 높이 있고 중생은 바짝 땅에 엎드린 줄 알았는데, 부처와 중생이 조금도 다른게 없어요! 적어도 보현행으로 볼때는 부처도 중생이고 중생도 부처입니다. 똑같아요 공경 찬탄 섬김을 모두 할수있다는 점에서! 그래서 화엄은 心佛及중생, 시삼무차별! 마음과 부처와 중생이 하나도 차이가 없다!
부처행은 저 먼 어느 높은 곳에 중생은 할수없는 특별한 행인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알고보니 공경 찬탄 섬김, 가장 중생다운 이들 행이 바로 부처행이라! 그래서 보편의 普, 보현.인 겁니다.
가장 중생다운 행이 바로 가장 부처다운 행. 여기서 우리는 비로소 중생이 부처와 하나도 다를게 없구나 하는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됩니다. 마음도 보현의 원이 있고 부처도 보현의 마음 중생도 보현의 마음이 있으니 어찌 마음과 부처 중생이 다르겠습니까
빅뱅 이전부터 빅뱅 이후까지 온 우주를 보현의 마음이 꽉 차 있고 부처도 중생도 그 마음 속에서 탄생한것. 내 생명이 진리실상 그 자체구나 부처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생명이구나 나는 그걸 모르고 살았구나!
여기서 광덕스님의 유명한 반야 활구, 내생명부처님 무량공덕 생명 보현행원으로 보리 이루리 가 나오게 됩니다 그것도 그냥 나오는게 아니라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오지요 내생명 부동지불 대 사자후의 선언 인겁니다
긴 댓글로 한글자 한글자 마다 보현행원이 나옵니다.
보현행원으로 보리 이룸을 몸으로 묻어나는 보현행자~~~
정말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 _()()()_
이 글도 조만간 정리해서 올려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