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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셀도르프행 기차에 올랐다. 시집 『노래의 책』과 함께였다. 2006년 이맘때쯤이었나 보다. 서툴게 첫사랑을 했던 때가. 순전히 웃는 얼굴 덕분이었다. 꽤 오랜 기간을 두고 마음의 무게를 더했지만, 내처 그 무게를 스스로 덜어내야 했다. 고개를 숙여 하인리히 하이네의 시집을 펼쳤더니, 가슴께로 그때의 감정이 기어 나온 모양이다.
■ 뒤셀도르프 역, 수채화, 2015, 이진이 作
뒤셀도르프 중앙역에 닿았다. 뒤셀도르프는 인구 약 58만 3천 명에 달하는 도시로, 라인 강의 지류인 ‘뒤셀 강변마을(도르프)’의 뜻을 가지고 있다. 시의 역사는 12세기로 거슬러 오른다. 뒤셀도르프는 라인 강의 수운과 주변의 석탄∙철광석의 산지를 중심으로 하는 공업지대의 중심지였다. 독일의 중요한 산업도시라는 위치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 때 총 면적의 90%가 파괴되는 손해를 입었다. 현재는 독일의 경제∙산업의 중심지로 발전하여 해외 상사와 금융기관 지점이 모여 있으며, 각종 전시회나 박람회로 늘 북적이고 활기에 넘친다. 또한, 뒤셀도르프는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가 태어났고, 슈만과 멘델스존이 활약했던 문화 도시다.
■시청사와 마르크트 광장
유럽 여행을 하면서 생긴 습관은, 어느 도시에서든 시청사로 첫 발걸음을 떼는 것이었다. 아무리 여행을 해도 나아지지 않는 방향 감각 덕이다. ‘Rathaus(시청사)’를 가리키는 표지판은 곳곳에 있었고, 익숙한 단어를 쫓아 걷기만 하면 목적지를 찾을 수 있었다. 자신감마저 붙었다. 중앙역에서 도보로 20분 정도 떨어진 곳에 구시가지가 있고, 시가 중심부에 시청사가 있다. 뒤셀도르프 출신 대공, 요한 빌헬름의 기마 상이 마르크트 광장에서 위용을 떨친다. 광장에서부터 음식점∙술집이 모인 볼커 거리가 시작된다. 뒤셀도르프의 명물인 알트비어가 궁금했지만, 하인리히 하이네를 만나는 게 우선이었다.
길을 따라 십 분가량 걸었을까, 볼커 거리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온통 희멀건한 건물 사이, 역시나 하얀 건물의 하인리히 하이네 연구소가 있다. 1974년에 설립된 연구소는 박물관과 문서 보관실, 도서관 등으로 나누어져 있다. 2층은 하이네의 생애와 작업에 관한 상설 전시를 열고, 1층 작은 공간에서는 음악∙미술 등에 대한 특별 전시를 준비한다. 박물관 내부에는 하인리히 하이네뿐만 아니라, 동시대 예술인의 유물과 사진 등을 보유하고 있다.
■하인리히 하이네 연구소 정경_상설전은 여덟 개의 주제로 조성된다. 또한, 열람실과 음악감상실이 있어 저마다의 방법으로 하이네의 시를 감상할 수 있다.
하인리히 하이네는 「로렐라이」, 「노래의 날개 위에」, 그리고 「그대 한 송이 꽃과도 같이」 등의 친숙한 서정시로 대중에게 알려졌다. 나치가 하이네의 「로렐라이」를 작자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금지하려 하였으나, 노래가 원체 독일 국민에게 사랑받았기에 ‘작자 미상 민요’라는 딱지를 붙여 부르도록 허용했다는 일화는 널리 밝혀진 사실이다.(로렐라이 가곡 https://youtu.be/Ees8BcTeM_I)
■하인리히 하이네 친필
나 왜 이리 슬픈지 / 정말 알 수 없구나. / 옛날의 전설 하나가 / 마음속을 떠나지 않는다. // 바람은 차고 날은 저무는데 / 라인 강은 고요히 흐르고, / 산마루에는 저녁 햇살이 // 눈부시게 반짝인다. / 그 위엔 눈부시게 아름다운 / 처녀 하나 놀라운 자태로 앉아 / 황금빛 장신구를 반짝이며, / 황금빛 머리카락을 빗어내린다. // 황금 빗으로 머리를 빗으며 / 노래를 한 곡 부른다. / 듣는 이의 가슴을 뒤흔드는 / 놀라운 가락의 노래를. // 그 소리에 나룻배를 탄 사공은 / 걷잡을 수 없는 슬픔에 휩싸여, / 암초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 바위 언덕만을 올려다본다. // 마침내 파도는 뱃사공과 / 조각배를 삼켜버렸으리라. / 로렐라이의 노래 때문에 / 생긴 일이다. – 시 「로렐라이」 전문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 1797-1856) 초상과 흉상_본명은 하리 하이네(Harry Heine)다. 계단을 오르며 하이네의 삶을 파악할 수 있다.
하인리히 하이네는 1797년 12월 13일, 뒤셀도르프에서 가난한 유대 상인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모는 그가 함부르크 은행가인 숙부처럼 대상인이 되기를 바랐기에, 17세 때부터 상인이 되기 위한 수업을 받게 하였다. 반면에 하이네는 장사보다 문학에 관심이 있었다. 1817년, 숙부의 은행에서 일함과 동시에 ‘프로이트홀트 리젠하르프’란 가명으로 함부르크의 《파수꾼》지에 첫 시작품을 선보였다. 당시 하이네는 숙부의 딸인 아말리에 하이네와 열렬히 사랑했다. 하지만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했고, 그는 실연의 고통을 아름다운 시로 승화시켰다. 뒤셀도르프로 돌아온 하이네는 22세에 본 대학에 입학하였다. 이후 괴팅겐대학∙베를린대학에 다니며 슐레겔, 호프만, 푸케 등의 문인과 교류했다. 1822년, 그의 첫 책 『시집 Gedichte』이 출간되었다.
■『노래의 책 Buch der Lieder』 (1827)
하이네는 1827년 시집 『노래의 책』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작가의 길에 들어섰다. 이 시집은 시인으로서의 하이네 명성을 확고히 해주었다. 『노래의 책』에 수록된 시는 대부분 직∙간접적으로 ‘불행한 사랑’을 노래한다. 이처럼 사랑의 고통을 주제로 선정한 배경에는 사촌 여동생과의 사랑이 있었다. 아말리에에 대한 사랑과 실연은 하이네의 순수한 사랑이 현실적인 환멸로 바뀌는 계기가 되었고, 나아가 시를 통해 사랑의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동기가 되었다. 더불어 전통적인 서정시 틀에서 벗어나 민요풍의 형식을 도입하여, 당대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노래의 책』은 시인 생존 당시 독일에서만 13판을 거듭하는 등 큰 성공을 거두었다. 후일 슈베르트와 슈만 등에 의해 음악으로 다시 탄생하여, 지금까지 널리 애송되고 있다.
■슈만(Robert Alexander Schumann, 1810-1856) / 슈만의 악보
(예술가곡; 18세기에서 20세기에 걸쳐 만들어진 성악곡들로서 질 높은 문학적인 시에 음악이 결합한 독특한 형태의 성악곡)
슈만은 유독 하이네의 시를 선호하였다. 그는 ‘시는 모든 예술의 근본이며, 음악은 시적인 높은 능력’이고 ‘작곡가는 시인이어야 하고 시적인 자각을 향하여 끊임없이 노력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슈만은 하이네의 시에 음악의 날개를 달아 피아노곡에서 가곡 작품으로 전환한 최초의 연가곡 작품, 「리더크라이스 Liederkreis, op.24」를 작곡했다. 「리더크라이스 op.24」는 『노래의 책』 1부 「젊은 날의 아픔 Junge Leiden」 중 「노래들 Lieder」 연시 9편에 곡을 붙인 것이다. 그는 장조로 곡의 처음과 마무리를 꾸몄다. 사랑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희망과 기대감을 조성 변화를 통해 아름답게 승화시킨 것이리라. 하이네 시에 의한 슈만 가곡은 「시인의 사랑 op.48」, 「리더크라이스 op.24」, 「미르테의 꽃 op.25」, 「로망스와 발라드 제1, 2, 3집 op.45, 49, 53」 등 많은 곡이 있다.
■『노래의 책』, 슈만 소유
나는 왠지 모르게 이리저리 헤맨다! / 몇 시간만 있으면, 난 그녀를 만날 수 있으리라, / 바로 그녀를, 아름다운 여자들 중 가장 아름다운 그녀를; --- / 너 소중한 심장이여, 어찌 그리 힘들게 뛰고 있는가! // 하지만 시간은 느림보 종족! / 천하태평으로 게으르게 발을 질질 끌며 간다, / 늘어지게 하품하며 제 길을 기어간다; --- / 서둘러라, 이 느림보 종족아! // 걷잡을 수 없는 조급함이 나를 사로잡는구나! / 계절의 여신들은 한 번도 사랑을 해보지 않았나 봐; --- / 그들은 저희들끼리 은밀히 결탁하여, / 사랑하는 사람들의 조급한 마음을 음험하게 비웃는다. - 『노래의 책』, 「노래들」 중 2번째 시
잃어버린 사랑과 절망에 빠진 사랑, 그리고 불행한 사랑을 노래했던 젊은 하이네의 시에 음악이 어우러지면 아름다움이 한층 더한다. 억양이 다소 강한 독일어도 하이네의 시에서는 아무 힘도 들이지 않은 듯 편안하며 진귀한 울림을 보인다. 달콤하면서도 단순하고, 가슴이 아린 민요조의 시가 작곡에 적합한 음악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니체의 말마따나 하이네는 ‘19세기 가장 위대한 시인이자 독일어를 사용하는 가장 탁월한 작가 중 한 사람’이었다.
■하인리히 하이네의 유품.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 오페라 안경 / 시계 / 불로뉴에서 파리로 가는 좌석표 / 머리카락
내 사랑아, 네 조그만 두 손을 내 가슴에 얹으렴; --- / 조그만 방에 갇혀 심장 고동치는 소리가 들리지? / 거기 목수 하나가 제멋대로 집을 짓고 들어가 / 나를 위해 관을 짜고 있단다. // 밤낮으로 망치질 소리 두드리는 소리 끊임이 없다; / 이미 오래 전에 그 소리가 잠을 앗아가버렸단다. / 아! 서둘러다오, 목수여, / 내가 어서 잠들 수 있도록. - 『노래의 책』, 「노래들」 중 4번째 시
■『여행 화첩 Reisebilder』(1826-1831)
아름다운 서정시가 하이네 문학의 모든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기행문과 비평문 등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내용을 담은 글들이 그가 남긴 작품 가운에 3분의 2 이상을 차지한다. 하인리히 하이네는 프랑스 7월 혁명(1830)에 크게 감화되었고, 이어 독일 내에서 자신을 포함한 진보적인 지식인들에 대한 탄압이 거세지자 1831년 파리로 망명을 감행하였다. 그는 프랑스에서 독일신문과 잡지의 통신원으로 일하며 양국 간 문화 교류를 위해 힘썼다. 이처럼 사상과 글쓰기의 자유를 찾아 파리로 망명한 그를 미적 세계만을 추구한 서정 작가로만 간주할 수는 없다.
■하인리히 하이네를 비롯한 청년독일파 작가들의 저술은 1835년 독일 연방 회의로부터 금서 조치를 받기도 했다.
13년간 프랑스에 머물던 하이네는 1843년 비로소 조국 독일 여행을 시작했다. 그는 브뤼셀, 암스테르담 그리고 브레멘을 지나 함부르크에 도착하였고, 다시 하노버, 뷔케브르그, 미나엔, 우나, 하겐, 쾰른 그리고 아헨을 거쳐 파리로 돌아갔다. 여행을 마친 하이네는 혁명적 장편 운문 서사시 『독일, 어느 겨울동화 Deutschland, ein Wintermärchen』(1844)와 풍자 서사시 『아타 트롤. 한여름 밤의 꿈 Atta Troll』(1847) 등을 간행하였다. 하이네는 두 책을 통해 한편으로 봉건체제에 대항하는 투쟁을, 다른 한편으로는 왜곡된 혁명 운동의 편협함에 대한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하이네는 시대정신에 투철했지만, 직접 나서지는 않았다. 변화는 시인을 통해 촉진되고, 미래의 세대를 거쳐야 마침내 역사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살아 있는 시인들을 모욕하지 마십시오, / 그들은 제우스의 번개보다도 더 무서운 / 화염과 무기를 가지고 있답니다. / 제우스의 번개야 시인이 만들어놓은 것이지요. // (중략) // 단테의 지옥을 아십니까, / 그 끔찍한 삼중창의 지옥을? / 그 시인이 거기에다 감금해놓은 자, / 어떤 신도 그자를 구원해낼 수 없습니다. - 『독일, 어느 겨울동화』 마지막 장, 부분
■하이네의 데드 마스크(dead mask)
하이네의 건강은 1835년 이래로 조금씩 나빠지고 있었다. 결국, 1848년 척수 결핵으로 인해 쓰러져 고통스러운 병상 생활에 들어갔다. 절망적인 시절에도 그는 『로만체로 Romanzero』(1851)를 출판하는 등 집필을 멈추지 않았다. 하인리히 하이네는 1856년 2월 17일, 59세의 나이로 파리 마티뇽가 자택에서 사망하였고, 그의 유언에 따라 몽마르트르 공동묘지에 안치되었다.
그의 연보를 거꾸로 살피며 계단을 내려가다, 창살 너머로 얼핏 하이네가 보였다. 다시 보니 2층 창문턱에 그가 걸쳐 앉아 있다. 여유로운 모습에 비죽이 입술 사이 웃음이 흐른다. 그는 왼손에 종이를 구겨 잡고, 오른손으로 깃 펜을 든 채 시작에 몰두하고 있다. 날씨가 좋아서 다행이었다. 비가 왔다면 종이가 축축해 허탕만 치고 들어갈 것이었다. 하이네는 자신을 일컬어 ‘18세기의 스러져가는 달빛과 19세기의 아침 햇빛 사이에서 태어난 어제와 내일의 아들’이라고 했다. 서정시인이자 반 정통적∙혁명적 저널리스트였던 하이네는 정치적, 종교적으로 자유롭지 못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독일의 현실을 한탄하며 부르짖었다. 그는 조국으로부터 편견과 오해를 받기도 하였지만, 오늘날 그가 그토록 그리던 고국에서 누구보다 칭송받는 시인이 되었다.
특별전이 열리는 1층의 전시실에 들어섰다. 글을 쓸 때 사용했던 재료가 시대별로 나열되어 있고, 한쪽에서는 실제로 써볼 수 있는 체험장이 마련되어 있다. 창문턱에서 하이네가 들고 있던 깃 펜과 같은 모양을 집어 들었다. 잉크에 찍어 사용하는 것이었다. 서걱서걱, 제법 크게 속삭이는 소리가 귀에 흘렀다. 소리가 또렷해질 때까지 잔뜩 낙서했다. 커다란 종이 한 장을 채울 때쯤 오른손에 잉크가 한가득 묻어 있었다. 무안한 마음에 새카매진 채로 밖으로 나왔다. 하이네 연구소에서 약 500m 떨어진 곳에 하이네 생가가 있다.
■ 하이네 생가, 수채화, 2015, 이진이 作
도시 뒤셀도르프는 매우 아름답다. (중략) 나는 그곳에서 태어났고, 마치 곧장 집으로 가야 할 것만 같다. 내가 집이라고 말할 때 나는 볼커 거리의 내가 태어난 집을 의미했다. – 하인리히 하이네
하이네의 생가는 볼커 거리 한가운데 있다. 건물은 제2차 세계대전 때 파괴되었던 것을 1959년에 재건축한 것이다. 한동안은 거리에 있는 여느 가게처럼 맥주와 음식을 팔았다. 그러나 하이네 서거 150주년을 기념하여 문학 서적을 취급하는 전문 서점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안쪽으로 편안히 책을 읽을 수 있는 카페와 문학 강의실도 마련되어 있다.
서점 안으로 들어섰다. 좁은 공간에 빼곡히 책이 꽂혀 있다. 세 사람만 있어도 북적대는 느낌이다. 깔끔하게 정리된 서가와 빈 벽 공간마다 책을 홍보하는 삽화가 이목을 끈다. 서점의 주인인 양 커다란 개는 한쪽 바닥을 차지했다. 조용한 책방이 지루한 듯 영 기운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계산일을 하는 점원 할머니도 당신이 읽고 있는 책에 푹 빠져 있다. 공기 흐르는 소리마저 아니꼬울 만큼 고요한 공간이다.
자발적인 적요에서 그만 벗어나기로 했다. 라인 강 가녘을 따라 거닐었다. 가는 비가 내렸지만, 이미 날씨의 변덕은 익숙했다. 이 정도 비에는 시인 역시 문턱에 앉아 있을 것 같다. 다리 위에 올랐다. 그림자가 푸르게 짙어지는 산책길이 낭만적이다. 길어지는 그림자를 쫓다 보니 어느새 다리 끝, 강 건너에 와 있다. 물가 옆 공터에서 연인이 그들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산과 성들은 거울처럼 해맑은 / 라인 강물 속을 들여다보고, / 내 조각배는 유유히 떠가는데 / 사방에는 햇살과 가득하구나. // 몸을 비비 꼬면서 얽혀 들어가는 / 황금빛 물결들의 유희를 바라보자니, / 내 가슴속 깊이 묻어두었던 / 감정들이 조용히 눈을 뜨는구나. // 다정한 눈짓으로 내게 약속하며 / 화려한 강물은 나를 물속으로 유혹하지만, / 겉으로는 더없이 반짝이는 강물 속에 / 죽음과 밤이 숨어 있음을 나는 안다. // 즐거운 표정 뒤에는 흉계가 숨어 있으니, / 강물아, 너는 내 애인의 모습을 닮았다! / 그녀도 너처럼 상냥하게 고개 끄덕이고 / 천진난만하게 부드러운 미소를 짓거든. - 『노래의 책』, 「노래들」 중 7번째 시
하인리히 하이네의 시를 곱씹으니 잉크 묻은 세 손가락이 간지러웠다. 문득 떠오른 건 2006년의 그때가 아니었다. 상냥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천진난만하게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 사람에게는 눈길이 가기 마련이다. 눈길의 막다른 골목에 자리한 그를 알고 있다. 빗방울이 조금씩 두꺼워졌지만, 연인은 그들의 세계에서 벗어날 생각이 없었다. 자리를 피했다. 서둘러 귀국 준비를 할 때였다.
첫댓글 이진이 라는 젊은 여성이 하이네를 깊숙히 들여다보고 이런 멋진 소개글을 남겼습니다. 저는 이렇게 내공이 깊은 하이네에 관한 글을 읽지 못했습니다. 동문들과 같이 나누고 싶어 여기 옮겨보았습니다.
삼성그룹 대학생 열정 기자단은 매기 10여명을 선발하여 6개월 동안 해외취재때 취재비와 그밖의 활동에 필요한 일체의 비용을 지원받는 특전을 받습니다. 활동에 큰 제한없이 개성을 마음껏 발휘하고 젊은이들과 삼성간의 소통을 원활하게 하도록 하는 쌍방이 윈윈하는 제도입니다.
이진이 젊은이가 그중에서도 운영진으로 뽑혔다는건 엘리트중의 엘리트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