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수원 시인의 시세계
현대인의 공간 인식과 시적 재현
세상을 살아가며 무언가를 동경하고 갈망하는 것은 자기 욕구이자 인간적인 본능에서 비롯된다. 그중 현실에서 전략적으로 감안해볼 때 자기만의 공간 실현은 구체적인 방편이 된다. 그런 곳은 물리적 공간일 수도 있고 정신적인 공간일 수도 있다. 어떤 형태이든 간에 쉽게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도시 생활에서 오는 권태로움에서 벗어나겠다는 단순한 것만은 아니기에 그렇다. 거대 자본주의 사회의 위기의식과 메커니즘에서 자기 방어의 가능성을 찾는 변화 욕구이고, 현실에서 다양하게 관성화된 문제를 극복하려는 정신적인 전위 행위라고 보면 타당하다. 특히 사회 초년생으로 편입될 때는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사람의 관계를 통해 자기 정체성을 복제해 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이 들어 지금껏 경험으로 축적해온 정체성을 회의하는 것은 오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자의식이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통찰과도 궤를 같이하며 지금껏 지켜온 사회 규범의 준거 의식으로부터 더 많이 자유로워지길 원한다. 다양한 방편에서 본다면 문학도 자기의 삶 속에서 중요한 사유 공간으로 자리매김될 수 있다. 그 또한 꽉 막힌 도시에서 정신적 피난처인 망명지로 규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박수원 시인의 문학적 성향에서 그런 기류를 감지할 수가 있다. 시인은 연이어 세 번째 시집 《가면놀이》(인간과문학사)를 펴냈다. 서두 시에 올린 <낙우송>에서 공간 인식을 통한 자의식의 통찰이 시적 형상화로 재현되었다고 본다.
세모를 참 많이도 그렸다
이름도 모를 세모꼴을 그리다가 지우다가
드디어 그대 만난 가을날
그 습지에서는
세로 껍질 비늘처럼 벗겨지는 붉은 피부가
그대 오래도록 연모하던 내 편린인 것을
뒤늦게야 아주 뒤늦게야
그대 세모꼴의 눈부심에 가슴 저렸다
제자리 노린 뿌리 곁의 호흡근도
무릎처럼 불쑥 터져 나온 그대 살기 위한 분노였음을
여기저기 수백 개의 분노가
습지 먼 곳에라도 몸을 틀면은
그 분노들 마다않고 제자리에 정좌해
산소도 훌훌 퍼마실
그대 또 이리 만났으니
이제 어쩌랴
그대와 마주 걷고 마주나기 잎을 따라 가다 가다가
그대 잎처럼 다시는 어긋나지를 말기
그대 암수 한 그루에 싹트는 꽃이 되고 열매되어
든든한 그늘 아래서 우리도 그늘로서 되살아나기
무지개처럼 점점이들
하늘을 날지는 못할지라도
그대 깃털로 가벼이 떨어져서
다시금 그리운 세모로 다시 서 보기
-<낙우송> 전문
“세모를 참 많이도 그렸다/이름도 모를 세모꼴을 그리다가 지우다가”를 반복하는 심리적 정서는 규범에 매우 충실한 삶을 살아왔음을 말한다. 그러나 무수히 그려왔던 세모꼴의 모형은 진정한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타자의 강요된 규범에 충실했던 것임을 문득 깨닫게 된다. 그런 시점은 시인의 연륜처럼 완만한 계절을 살아낸 가을이었고, 온통 붉어 더 아름다운 낙우송과 맞닥뜨리며 인식의 반전이 시작된다. 평소와 다른 자신의 모습처럼 흡사한 세모꼴의 낙우송에서 “드디어 그대 만난 가을날/그 습지에서는/세로 껍질 비늘처럼 벗겨지는 붉은 피부가/그대 오래도록 연모하던 내 편린인 것을/뒤늦게야 아주 뒤늦게야/그대 세모꼴의 눈부심에 가슴 저렸다”는 시인은 ‘낙우송’의 변화된 모습을 통해 자신의 내면 의식을 들여다보게 된다. 조만간 나목처럼 가벼워질 낙우송을 보면서 시인의 정체성을 다시 확인해가는 과정으로 귀결된다. 그렇다고 꼭 잘못된 과거에 대한 반항심으로 일탈을 통해 정체성을 찾아가려는 것은 아니다. “그대 깃털로 가벼이 떨어져서/다시금 그리운 세모로 다시 서 보기”라는 유연성을 통해 자의식을 통한 통찰을 이뤄간다.
아쉽게도 그런 의미에서 <우포늪에서 온 편지_서식지 1>는 좀 더 회의적인 인식과 삶에 대한 냉소주의를 엿보게 한다. 그것은 주어진 현실을 돌파해가는 소시민적인 삶의 자구 의식일 수 있다. 지금껏 잘 학습된 사회규범에서 단번에 벗어날 수 없음을 한편으로 방증한다. 두 번의 편지를 교환하는 형식을 통해 보여주는 시적 의도는 그래서 명확해진다. 내면에 존재하는 또 다른 내부자와 소통하는 방법도, 편지라는 매개체를 이용하는 것도, 현대 사회의 전형에서 이루어진다. 그 매개체 사이에 존재하는 우편배달부는 아예 배제되어 있지만, 엄연히 유기적인 관계에서 존재한다. 따라서 우편배달부는 이 사회를 은근하게 제도적으로 리드해가는 전지적인 힘으로 작용한다. “편지가 왔다/수신인은 창녕군 우포늪 왕 소금쟁이에게/발신인은 여기 50층 펜트하우스에 사는 내가”로 편지 내용마저 공개하는 형식을 취한다. 그것은 현실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회적인 갈등 곧 부조리를 설명하며 그것을 바라보는 또 다른 기득권층의 관성화된 이익을 지향하는 의식인 것이다. ‘소금쟁이’와 ‘50층 펜트하우스에 사는 나’즉 비둘기는 각기 다른 입장에서 이해 충돌을 겪게 되고 사회적인 입장을 대변한다. 그것은 본능적으로 서로를 이해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지만, 지적 소통에서는 한참을 벗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이해 충돌도 서로를 견제하고 극복하려는 전위적인 행동임을 알 수 있다. 서로의 환경에서 갖게 된 불만을 편지글을 통해 토로하고 해소해가는 방법은 대단한 비전이 개입된 성과는 아니다. 가장 소시민적인 삶의 경험에서 얻을 수 있는 현실에 대한 수용이어서 꼭 회의적이라고 매도할 수만은 없다. 우포늪에 사는 소금쟁이는 아무리 환경이 바뀐다 해도 본질적으로 그곳은 변하지 않는다. 또한 펜트하우스에 사는 사람도 결국은 땅으로 내려와야만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자연 생태적 서식지를 지향한다. ‘서식지’라는 부제의 시에서 시인은 자기만의 고립된 공간 인식을 갖고 있다.
그 공간은 <회색인>에서도 잘 표현되고 있다. 도시 현실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이 갖는 고립은 고독과 상통하는 내부자를 갖고 있다. 외부의 힘에 갇힌 고립과 심리적 상실을 초래하는 고독은 별개가 아니면서 현대인이라면 과소의 차이만 다를 뿐인 전체성으로 공유된다.
검정도 아닌 하양도 아닌
그 중간에 서면
경계선은 늘 회색이었다
---중략---
너도 햇빛 하나 없는
콘크리트길을 달려 보아라
얼마나 그것이 막막한 언약이었는지를
허허벌판에서 섰을 때는
검정도 숨기고
하양도 숨기고
드러나지 않는 미소 지을 수밖에 없지
과연 회색을 좋아하는가에
대한 나의 고찰
회색을 나의 전체라고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나의 반문
-<회색인> 부분
회색인(灰色人)은 기회주의자를 상징하며 그 이미지는 모호성을 갖고 있다. 그런 상징으로 대변되는 최인훈의 장편소설 《회색인》을 비롯하여 조정래의 《태백산맥》에서 인텔리 범우의 인물상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시에서는 기회주의자적 표상이 아닌 도시를 구성하고 있는 거대한 콘크리트 문화 속에 사는 도시인을 상징하고 있다. 시인은 오래 동안 살아온 친숙한 도시에서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우선 그렇게 살아온 삶을 변명하는 너스레를 풀어놓지만, 그마저도 마땅찮다. 그렇다고 긴장할 만한 현실과 불화에 기인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현실 인식에 대한 긍정에서 비롯되었고 “콘크리트길을 돌이켜 난 돌아가야 한다”는 모천회귀적인 본능에서 발화한 공간 인식이다. 그렇지만, “자물쇠 굳게 닫힌 문을 열어야만 한다”는 갈망에서 좀 더 구체적인 전략과 전망은 아직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더 많은 고민과 후회의 시간이 필요한 것인지 모른다. <토닥토닥>에서 일상의 시간을 반추하며 자신을 되돌아본다. “기차는 떠났다/뒤도 안 돌아볼 것처럼 다시는 앞만 보고 달릴 것처럼//그러나 역 모퉁이 돌아/네가 다시 올 것을 또 믿으며/난 오래도록 입구에 서서/축 처진 네 어깨 쓰다듬어 주지 못했음을 후회했다”는 토로가 구체성을 담고 있다면, 반성을 담보하는 저항의지로 읽어내도 무방하다. 여성성이 갖는 모성으로의 귀환은 좀 더 실현 가능한 중심을 갖고 있다. 그러하기에 누군가를 가슴으로 다독여줄 수 있는 심리적 거리는 더 짧아질 수밖에 없다. ‘토닥토닥’은 가장 인간적인 더 많은 행동을 예고한다.
그동안 전통이나 규범에 얽매여 살아온 사회 유형인에서 자유로워지려는 의지만으로 쉽게 되는 것은 아니다. 매번 시도하는 호기심만큼 두려움은 자유라는 사유와 반비례하게 된다. 그래도 시인은 쉽게 현실과 타협하기를 거부한다. 스스로 경계 지어진 영역 바깥으로의 비행을 시도한다. 비행의 궤적을 따라 거침없이 들어오는 풍경의 경이로움은 그 상상을 충격하지만, 후유증까지도 고스란히 시인의 것이 된다. <적요>에서 그런 심리적인 상태를 볼 수 있다. 나이가 들어야 세상이 바로 보인다는 것처럼 이전에는 느낄 수 없던 변화를 감지한다. 그토록 갈망하던 공간은 생애라는 정신적 망망대해를 표류케 하더니 드디어‘사하라 그 사막의 섬’에 기착한다. 그곳도 인생의 궤적처럼 어디론가 찾아가야 할 노정에 불과했음을 알게 된다. 또다시 “도망치듯 또 떠나야 할 곳은/적요한 섬/그 너머의 섬”으로 여행을 멈추지 않는다. <날개를 달고>에서 “난 나에게도 내가 아니다/누구에게도 아니다”라는 자기 선언은 매우 과감하고 직유적이다. 어쩔 수 없이 현대인은 자본주의의 경제 구조 속에 포섭되어 살면서 매 일상을 부조리와 만나게 된다. 이방인에서 카뮈의 그 부조리는 실존에 대한 질문으로 귀결되면서 우리가 극복해야 할 실존의 조건임을 암시한다. 부조리한 현실 공간을 규정해버리지 않고 스스로 “성에꽃 퍼지듯 곰팡이 피어난 내 골방에서/그 벽지의 고통만큼 피부로 스멀스멀 스며들던 버짐은/네 고의가 아니라도 벗겨내야 나는 날 수가 있다”는 의식을 전제하고 있다. 자유를 갈망한 채 오랜 시간 속에서도 희망을 놓지 못한 사람(새)이 있었다. 페루의 나스카 평원에 그림처럼 내려앉아 날아오를 꿈을 포기하지 않는 “나스카인의 새에서 알을 까고 나온 새/나를 떠나고 너를 보내는 고통의 비상이다/지상을 우선 날 수가 있으면/나는 새가 된 나는 더는 하강할 이유가 없다/좌절을 벗겨낸 무한한 행복”을 추수하는 사유의 고통은 아름다운 것이다. 날기를 포기한 새가 아닌 나스카 평원에 막 안착한 새로 인식해내는 시적 환기는 놀랄 만하여서 남다른 것이다.
사과나무에 매달린 한 알의 사과가 만유인력의 법칙에 의해 땅으로 떨어지듯, 사람에 대한 관심도 저항할 수 없는 인력引力에서 비롯됨을 알 수 있다. 박수원 시인을 알게 된 것은 《인간과문학》이란 문예지와의 인연을 통해서였다. 열정적인 시 쓰기를 멈추지 않는 모습을 보며 진공관을 통과해 전달되는 신비한 소리처럼 시적 비의가 호기심을 유발했다. 또한 고요 못지않게 시에서 감지할 수 있는 자유 의식은 분방함과 다른 시 미학적인 정서로 구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발화된 시의 근원이 과거라는 풍부한 체험에 있고, 문학적인 향수에서 진동한다. <첨예한 갈등>은 김유정 소설 ‘동백꽃’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해마다 봄이면 핀 노란 동백꽃은 생강나무 꽃을 가리킨다. 강원도에서는 생강나무를 동백이라 말한다. 소설 속에서 그 꽃을 매개체로 점순과 소년은 갈등이 완화될 기미를 만들어간다. 하지만, 그 사랑은 공감 지대를 형성할 수 없는 미완의 관계 설정으로 끝을 맺고 만다. 시인은 고등학교 교사로 평생을 복무해왔다. 그런 성장관계의 과정을 아이들에게서 발견하고 지켜봤을 것이다. 누구나 갖게 되는 성숙과 인성의 가치관까지 성장기를 통해 이루어간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김유정의 소설 ‘동백꽃’의 줄거리를 인용하며 김유정이 의도했던 소설과는 또 다른 패러디로 시적 의미를 형상화해 낸다. 여기에서 남과 여의 대립적인 관계와 경제적인 빈부의 차이를 표면으로 드러낸다. 그러나 가장 원초적 본능에 의한 수탉과 암탉과의 관계가 갖는 의미까지를 성장통으로 이해하는 데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 대립적인 관계에서 시인은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또 다른 타자와 갈등을 보여주고 있다. 그 화자는 사랑의 속도가 더디게 이행될 때마다 갈등의 대립각을 곧추 세우게 된다. 시적 화자도 그것을 당연하게 긍정한다. “나는 네 마음 빨리 몰라준 죄밖에 없다/그 동백꽃 숲속으로 떠밀렸을 때, 그때야 겨우 알아챘으니/네 갈등이 내 갈등을/닭싸움으로 시작해 닭싸움으로 끝을 냈다”며 결국 아무것도 서로에게 얻거나 양보하지 못한 채 끝을 맺고 말았다는 것이다. 상대방에게 생각을 전달하는 수단이 반항으로 돌출되더니 이내 잠복한 갈등으로 내재되어 있다가 상당한 폭력을 수반하게 된다는 것도 알려준다. 그 폭력의 뒤끝은 간혹 더 큰 대립과 외면으로 끝날 수 있지만, 사랑과 포옹으로 마무리가 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간과할 수 없는 이유로 “감자 몇 알의 거절”은 또 다른 의미의 수단인 것을 알아챈다. 맨날 점순이네 수탉에게 당하는 암탉의 아픔을 생강 꽃이 뭉개지며 내던 싸한 내음처럼 남녀 간의 이성을 조금씩 알아가는 시의 전말은 곧 시인의 가슴속에 묻어둔 소녀 시절의 성장통이기도 했다. 그 또한 점순이를 이유 없이 밀쳐버린 것처럼 그런 행위의 이면에 억압된 이성적인 본능이 개재되었음을 알려준다. 박수원 시인은 시속에서 은연 중 존재하는 사람들 간의 관계가 인간애에 근거하지 않고 힘의 논리로 쉽게 작동해버리는 안타까움을 내비친다. 그런 시적 내면의 탐문은 매우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시집 속 사유의 근간에 내비치는 근대문학적 사유를 매개로 발화한 시편을 들고 나왔기 때문이다. 사실 그런 발상은 복잡해서 쉽게 이해할 수 없는 현대 사회에 대한 회의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또 다른 면에서는 과거의 문제작을 통해 리메이크함으로써 기존의 독자까지도 공감케 하는 효과를 가상했을 것이다. 야콥슨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시는 언어적으로 독특한 표현의 유사성을 전제하는 은유라고 보았을 때 소설의 환유적인 한 부분을 해체하여 시로 치환해내는 발상을 보여 주고 있다. 의도하던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 시인의 시적 모험은 시인만의 상상력을 잘 형상화하고 있다.
우선 시제로 선택한 ‘가면놀이’는 부제 형태로 6편을 선보이고 있다. 하지만, 시인의 시적 상상력은 사실을 근거한다 해도 사회적 부조리를 강조하는 의도로‘가면놀이’라는 익명성을 전제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모든 말뚝이에게_가면놀이 1>도 그중 하나로 보아도 무방하다. 우선 ‘말뚝이’는 가면극 즉 탈춤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중요 인물 중 하나다. 가면극에서 말뚝이는 양반을 섬기는 하인으로 등장하여 양반의 무능력과 부패를 고발하는 역할을 맡는다. 시인은 그런 통상적인 이미지를 차용한 듯하다. 탈춤으로 대변되는 가면극 자체가 사회 문제를 이슈로 갖고 있음은 예나 지금이나 동일하다. 그 좋은 예로 “마당 한가운데 멍석 두어 판 깔아 보라/아니 광화문 한복판,/여의도 나루터라도 좋으리니”라는 공공성을 띤 상징적인 장소성을 들 수 있다. 이후 시적 전개는 기존의‘말뚝이’가 갖는 정서와는 다름을 알 수 있다. 전통 탈춤에서 ‘말뚝이’는 양반을 신랄하게 풍자하여 굿판을 찾아온 청자에게 카타르시스적인 동일성을 선사한다. 하지만 말뚝이는 수동적인 입장에서 조곤조곤 시인의 말을 귀담아듣고 있다. 그러고도 모자라 “부디 침묵하라, 온몸으로 도리어”라며 당부를 묵묵히 받아들인다. 여기에 등장하는 말뚝이는 다름 아닌 현대인의 타자화된 모습일 것이다.
<미얄의 빈말들_가면놀이 4>에서 미얄도 마찬가지로 탈춤에서만 볼 수 있는 해학미 중 으뜸으로 치는 역할이다. 미얄 과장은 양반의 처로 등장하는 본처를 칭하고 대체로 첩이 등장하는 삼각관계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특히 미얄이 빠른 템포에 맞춰 실룩이는 엉덩이춤은 보는 사람들의 웃음을 참을 수 없게 한다. 이 시에서도 탈춤 속 미얄 과장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집 나간 영감을 은근하게 비꼬는 대사도 유사하다. 하지만, 미얄도 집 나간 영감이 자신을 외면한 채 첩과 살림을 차린 것이 가슴에 사무치도록 밉지만, “빈말로는 가뭇가뭇한 데 눈에는 오롯한가”라며 되묻는다. 사람 속은 알 수 없듯 애틋한 정 앞에서는 가장 인간적인 나약한 모습을 보이고 만다. 가면놀이를 통해 시인은 현대인의 이면을 각색하여 보여준다. 탈춤에서 중요한 도구는 다양한 인간 군상을 상징하는 탈 곧 가면이다. 그 가면을 통해 이뤄지고 있는 서사는 과거의 전통과 단절이 아닌 현대인의 고달픈 삶의 정서와 교감하는데 부족함이 없다. 탈춤에서 대다수 청자로 등장하는 관객 그 자체는 민중의 모습과 의식을 대변한다고 본다. 그런 놀이를 통해 소시민적 무력감을 완전하게 극복하는 데까지 다다르지 못한 아쉬움은 있다. 다만 문학이 삶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면 그만한 성공도 가치가 있는 것이다. 만약에 가면놀이 연작시에서 당면한 사회문제에 대한 개입이 좀 더 구체적이었다면 그 문학적인 의지는 훨씬 확장 포용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아직은 그 기대를 접어서는 안 된다. 적어도 나름의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제천과 주천은 1>은 현대인의 망각된 또는 소멸되어버린 고향의 정서를 상상하게 하는 색다른 체험을 공감하도록 해준다.
여기는 경계선이다
한 발짝 내디디면 강원도 그 언저리 주천면
한 발짝 내디디면 충청도 그 언저리 제천시
그랬어유우우우,
했지유우유우
끝소리 줄줄 끄는 그 소리들에
주천의 감자 삶는 내음새 슬며시 제천까지 건너간다
참으로 구수하고 비슷도 한 제천과 주천은 영영
이웃사촌이다
-<제천과 주천은 1> 부분
라며 풍부한 소녀 시절의 감성으로 바라본 아름다운 풍경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그런 추억은 박수원의 시를 은근하게 감돌고 있어 따뜻한 순수성을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그런 정서 속 풍경은 농촌이 붕괴되기 전의 살가운 시절임을 상상할 수 있다. “그래서 내 외갓집/문턱 넘는 것처럼 반가움이 울컥울컥 서려오던 곳”을 잊지 못한다. 박수원 시인은 나이 들어서도 소녀 시절의 아름다운 풍경으로 채색된 고향의 정서를 온전하게 간직하고 있다. 행운처럼 건강한 정서에 결속된 시인은 도시에서의 사회분열적인 감정에 침몰되지 않고 시적 서정성을 담보받고 있다. 특히 소녀 시절 서울을 오가며 “오십 리 길 겨우 넘는 이웃사촌의/그 한밤 중/그 요요했던, 주천 망산 덩그러니 뜬 보름달보다도/그믐밤을 수놓던 다래산 애틋한 별빛보다도/제천역을 떠돌던 가로등 그 불빛이/아직도/내 눈에서 아롱아롱 울고도 웃는다”는 고향에 대한 공감과 연대의 감정은 여전히 시적 서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시적 대상으로 존재한다. 문학적인 생동성은 성장기 사물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되었고 나이 들어서도 사회적 변화에 크게 침식 마모되지 않았다. 시적 자의식의 온전한 보전을 가능케 한 순수한 마음은 과거에 대한 시선과 단절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시적 공간은 정서적으로 실재한 공간이었음을 알려준다. 시인이 체험한 눈眼을 따라가면 더 선명한 “막내고모 잔칫날 큰 장 보러 갈 때에나/서울에 갈 때에나/또 귀향을 할 때에나/꼭 지나쳐야 하는 내 청춘의 길목쯤인 이 고갯마루는/그래서 내 외갓집/문턱 넘는 것처럼 반가움이 울컥울컥 서려 오던 곳/학창 시절 그 청량리역,/맘모스 빵집 힐끗 지나/중앙선 철로에 몸을 실으면/만종을 지나 원주를 지났는데 벌써 엄마가 그립다/치악역 똬리굴에서 가쁜 숨 한번 훅 들이켠 뒤/참 고맙게도 참 고스란히도/나를 잘도 데려다 주던 그 기차와 제천역에서//앞으로 살아갈 날들, 불빛처럼 휘황하나 쓸쓸하다는 것도/그 역 가로등 아래에서 나는 배웠다”는 시인이 중앙선 기차에서 바라본 풍경은 오래 동안 여운을 짙게 하고도 남았다. <콘서트 7080> 세대가 즐겨 부르는 노래를 따라 부르며 사람들은 편해서 좋다 한다. 가사도 쉽게 공감할 수 있어 다시 듣게 된다는 7080 세대들이 즐겨 부르던 노래도 지금은 특별한 곳이 아니면 듣기가 어렵다. 그 특별하지 않는 노래를 따라 부르면서 “그 노래가 좋다/세울 묻은 그 노래가 좋다/흥얼흥얼, 따라 부를 수 있는/기억나는 그 노래가 좋다/그 노래 따라 잠자던 추억들이 튕겨 나온다/나이를 먹었나 보다”며 오래간만에 시인의 마음이 가벼워졌을 것이다. 그렇지만, 현실에서 자신의 세대를 깨닫게 된다. 나이는 잊을 수 없는 것이라 흘러가버린 세월을 그 안에 고스란히 축적하고 말았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시인만의 유년을 많은 추억으로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시집 속 《그림자의 말》(인간과문학사)의 <주천강 1>에서 “내 유년의 길목,/아련한 그곳에 주천강이 있다.”며 추억의 강줄기를 따라 펼쳐낸다. “안흥을 흐르던 물이/수려한 계곡을 휘몰아치다/숨가삐/무릉의 요선정 반석을 밟고,/수주의 한 허리를 감고 돌아서 나오면” 주천강 그 언저리 어딘가에 소꿉놀이하던 시절의 추억이 강변에 널린 조약돌처럼 반짝인다. 그 돌을 쌓듯 <주천강 2>에서는 “노을빛에 떠밀려,/엄마 생각에 떠밀려/나막신 타박타박 딸랑거리며/두 손 가득 쥐고 온 주천강 돌멩이들”은 아직도 모천회귀母川回歸를 감행할 수 있는 본능 속으로 ‘주천강’이 흘러들고 있다. 시인은 스스로 자기 발견을 통해 시적 에너지를 충전해가는 건강성을 바탕으로 사물에 다가간다. 사물이 갖는 이물감의 물성은 시인의 감성 속에서 동화되어 이내 발효된다. 통상적으로 시에서 인용되는 대상에서 오는 자조와 체념이 정서적 바탕을 대다수 이루는데 반해 박수원 시인은 그런 것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 그런 것마저 의도적이지 않아 시 미학적 서정의 구조를 탄탄히 견지해주는 것이 매우 자연스럽다. 앞에서 말한 시인만의 사유 공간에서 더 많은 시적 위의에 다가가려는 자기 분열적인 고뇌의 몸부림은 시적 울림의 크기와 비례할 것이다. 그런 기미는 곳곳에서 이미 발견되고 있다. <끔찍하도록 사랑한 것들>에서 시인은 시적 전망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시인이 그토록 “끔찍하도록 사랑하는 것은/끔찍하도록 미운 것이 될 수 있다”로 단정하면서도 “결국은 끔찍하도록 미운 것은/끔찍하도록 사랑하는 것이다”라며 진전된 전망을 획득한다. 여기서도 사랑에 대한 자조와 원망은 자연 질서에 편입되는 안타까움을 적절하게 시적 객관화로 치환해낸다.
끝으로 박수원 시에서 보여주는 현실 인식은 매우 긍정적이면서 가능성마저 부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시의 본연에 충실한 시라고 말할 수 있다. 시집 해설에서 유한근(문학평론가)은 “박수원은 창작 열정으로 무한 공간의 지평을 여는 시인이다. 첫 시집 《그림자의 말》과 두 번째 시집 《너무나 인간적인》에서 보여준 ‘신서정과 느림의 미학’ 그리고 원체험 공간을 통한 자연친화 상상력으로 상생의 미학의 표상적 이미지를 이용하여 정체성을 사물의 자기화 또는 자기의 사물화 과정을 뛰어 넘어 그 가능성이 시간과 공간의 벽을 초월하고 있다”라고 한 말과 상통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시인만의 공간 인식에서 추수해낸 시적 견고함은 현대인의 망각하기 쉬운 전통적인 서정의식을 회복하는 데서 문학적 의의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