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35:9-34, 너희를 위하여 도피성을 정하여,
19.5.29, 박홍섭 목사
민35장은 레위 인들에게 준 성읍과 그 성읍 중에 제정해주신 6개의 도피성에 관한 말씀입니다. 지난주에 보았던 첫째 단락인 1-8절까지는 례위 인들에게 48개의 성읍과 초장을 주셔서 그들의 거처를 보장해주신 내용이었죠. 둘째 단락인 9-34절은 그 48개의 성읍 중에 요단 동쪽에 3개, 요단 서쪽에 3개, 총 6개의 성읍을 도피성으로 정하고 그 도피성의 용도를 말씀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도피성을 정하라고 하십니까? 너희를 위해서입니다. 11-12절입니다. “너희를 위하여 성읍을 도피성으로 정하여 부지중에 살인한 자가 그리로 피하게 하라. 이는 너희가 복수할 자에게서 도피하는 성을 삼아 살인자가 회중 앞에 서서 판결을 받기까지 죽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도 실수로 사람을 죽일 때가 있음을 아시고 이 제도를 마련해주셨습니다. 당시 고대 근동에서는 살인이 일어났을 때 공식적인 법 집행 이전에 피해자의 가족들에게 복수할 수 있는 일차적 책임과 권리를 주었습니다. 그때는 지금처럼 경찰이 많이 있는 것도 아니고 검사나 변호사 같은 법 제도도 잘 갖추어진 때가 아니므로 살인이 일어나면 일차적으로 죽은 사람의 가족이나 친족이 살인자를 죽이도록 해서 살인이 쉽게 일어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살인자라 할지라도 반드시 정당한 재판을 통해서 그 살인이 고의적인 살인인지 아니면 부지중에 실수로 일어난 살인인지를 살펴서 부지중에 일어난 살인의 경우 도피성 제도를 통해 그 사람의 생명을 보호하고 처벌도 약하게 하는 규정을 주신 것입니다. 은혜의 제도입니다. 이스라엘 안에 있으면 이스라엘 사람들만 아니라 거기 거하는 거류민들도 이 제도의 혜택을 받게 하셨습니다. 15절이죠. “이 여섯 성읍은 이스라엘 자손과 타국인과 이스라엘 중에 거류하는 자의 도피성이 되리니 부지중에 살인한 모든 자가 그리로 도피할 수 있으리라.”
이어서 16-21절은 이 은혜의 제도가 남용되거나 악용되지 않도록 부지중 살인이 아닌 경우를 분명하게 규정해줍니다. 첫째 철 연장을 가지고 사람을 죽였을 때(16), 둘째 사람을 죽일만한 돌로 사람을 죽인 경우(17), 셋째 사람을 죽일 만한 나무 연장을 가지고 살인했을 때입니다(18). 그 다음 미워하는 감정이 있어서 밀쳐 죽였거나 기회를 엿보아 죽였거나 혹은 악의를 가지고 손으로 쳐 죽인 경우도 살인의 의도가 있었다고 판단해서 도피성에 피하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20-21). 이런 자들은 사람을 죽일 의도를 가지고 살인한 것으로 간주되어 도피성 제도의 혜택을 받지 못합니다. 반드시 죽이라고 하십니다.
도피성에 피할 수 있는 자는 오직 ‘부지중에 살인한 자’입니다. 그래서 22-23절은 부지중 살인한 경우를 조금 더 상세하게 설명합니다. 우선 악의나 해하려는 의도가 없어야 합니다. 우연히 사람을 밀치거나 기회를 엿봄이 없이 무엇을 던지거나 보지 못하고 죽일만한 돌을 던져서 죽인 경우가 이에 해당됩니다. 17절에도 죽일만한 돌을 던져서 사람을 죽인 경우가 나오지만 17절은 의도를 가진 살인이고 여기는 우연히 일어난 경우입니다. 재판을 통하여 그의 살인이 고의가 아니라 죽일 의도가 없었는데 실수로 일어난 살인이 밝혀지면 그는 도피성제도를 통하여 벌을 받되 피의 복수자로부터 보호를 받습니다.
어떻게 보호받고 어떻게 벌을 받습니까? 그는 자신이 도피성에 피하여 있던 당시의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도피성에 머물러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보호인 동시에 근신의 의미가 있습니다. 왜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도피성에 숨어 살도록 했습니까? 먼저 피해자의 가족들에게는 복수심과 분을 삭이고 하나님의 뜻을 살필 수 있는 시간이 됩니다. 그 다음 살인자와 그 가족들에게는 실수이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을 죽임으로써 한 가족에게 미친 고통을 느끼는 근신의 시간이 대제사장이 죽는 시간까지입니다. 만일 그 시간을 다 채우지 않고 가족이 보고 싶다든지 다른 이유로 도피성 밖으로 나왔다가 피해자의 가족에게 피의 보복을 당하여 죽는다 해도 이것은 정당한 복수로 간주되었습니다(25-27).
더 중요한 이유는 비록 부지중의 살인이라 할지라도 살인에 대한 죄책은 죽음입니다. 살인의 죄책이 대제사장에게 전가되어 그의 죽음으로 살인자의 죄가 대속된다는 의미가 여기에 들어 있습니다. 이점에서 도피성에 도망한 자가 자유하게 되는 대제사장의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의 예표입니다. 도피성 제도를 마련해주신 하나님의 의도가 여기에 있습니다. 31-32절에서 “속전”이라는 말이 두 번이나 나오고 33절에 피가 아니면 속할 수 없다는 말이 나오는 것도 그런 의도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도피성입니다. 주님의 죽음은 죽어 마땅한 죄인인 우리의 죄를 완전하게 속죄하는 대제사장의 대속의 죽음입니다.
이것은 도피성이 피의 복수자로부터 도피하는 성인데 복수할 자라는 ‘고엘’이라는 단어에서 더 분명해집니다. 많이 들어본 말이죠? 룻기 할 때 ‘기업 무를 자’를 살폈죠. 어떤 사람이 기업을 잃었을 때 가장 가까운 친척이 잃어버린 기업을 찾아줄 책임을 감당하지 않았습니까? 그때 그 사람을 ‘기업 무를 자’라고 불렀는데 바로 ‘고엘’이라는 단어입니다. 또한 욥이 고통 속에서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 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욥 19:25)”라고 했을 때 대속 자도 ‘고엘’이라는 단어입니다. 똑같은 말이 친척의 죽음에 대해 복수할 책임을 가지는 자에게도 ‘고엘’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기업 무를 자도 되시고, 우리의 대속 자도 되시며 우리의 억울함을 보수해주시는 복수자도 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연약해서 실수로 죄를 지었을 때 사단의 참소와 복수로부터 피할 도피성도 되신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도피성제도를 주시면서 그의 백성을 배려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십시오. 신명기19:3,6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 전체를 세 구역으로 나누어 길을 닦고 모든 살인자를 그 성읍으로 도피하게 하라… 그 사람이 그에게 본래 원한이 없으니 죽이기에 합당하지 아니하나 두렵건대 그 피를 보복하는 자의 마음이 복수심에 불타서 살인자를 뒤쫓는데 그 가는 길이 멀면 그를 따라 잡아 죽일까 하노라.”
하나님께서 6개의 도피성을 지정해주실 때 모든 지역에서 빨리 도착할 수 있도록 가까운 성읍들을 정해주셨습니다. 심지어 그 도피성으로 가는 길을 닦아서 속히 피할 수 있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도피성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언제 어디서든 피하여 숨을 수 있는, 심지어 가는 길까지 닦여져 있는 은혜의 도성입니다. 이 문은 늘 열려있습니다. 닫혀있지 않습니다. 이방인이든 누구든 부지중 실수로 살인한 자가 이 약속을 믿고 도피성으로 피하면 피해자의 복수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받습니다. 그러나 이 은혜의 약속을 믿지 않고 도피성으로 피하지 않고 자기 방식으로 살려고 할 때 그는 복수자의 복수로부터 구제받을 길이 없습니다. 교회는 회개의 복음을 외쳐 그리스도께로 피하는 모든 죄인이 도피성 되신 예수님께 나오게 해야 합니다.
한 가지 유념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도피성 제도는 남용되거나 악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죄를 지어놓고 “아, 이건 실수였으니까 괜찮아”라고 쉽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비록 부지중에 살인한 경우도 살인은 살인입니다. 살인은 응분의 처벌을 받아야 함을 먼저 기억해야 합니다. 도피성 제도는 부지중에 사람을 죽인 사람은 당연히 구제 받아야 함을 가르치는 제도가 아닙니다. 부지중에 한 살인도 죽어 마땅한 죄에 해당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도망하여 피할 길을 마련해주신 제도가 도피성입니다. 마땅한 제도가 아니라 은혜의 제도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살인자가 이 제도를 악용해서 거짓말로 도피성에 머물러 있다면 어떻게 할까요? 반드시 본 성으로 돌려보내 보복자의 손에 넘겨 죽여야 합니다. 신19:11-13절입니다.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이 그의 이웃을 미워하여 엎드려 그를 기다리게 하다가 일어나 상처를 입혀 죽게 하고 이 한 성읍으로 도피하면 그 본 성읍 장로들이 사람을 보내어 그를 거기서 잡아다가 보복자의 손에 넘겨 죽이게 할 것이라. 네 분이 그를 긍휼히 여기지 말고 무죄한 피를 흘린 죄를 이스라엘에서 제하라. 그리하면 네게 복이 있으리라.”
결국 도피성 제도를 마련해주신 목적은 거룩한 땅이 피로 더럽혀지지 않기 위해서입니다(33-34절). 억울한 피가 땅을 더럽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가는 땅에서 억울한 피가 흘려져 땅이 더렵혀지지 않도록 고의로 살인한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실수로 살인한 자들이 또 다시 피를 흘리지 않도록 도피성 제도를 마련해주셨습니다. 고의로 사람을 죽인 사람은 반드시 죽여서 억울함을 면하도록 했고 부지중 살인한 자들은 보호해서 다른 억울함을 면하도록 했습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형제에게 노하는 자, 형제에게 욕하는 자가 살인하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칼과 돌로 사람을 죽인 살인을 행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말로 사람을 억울하게 하는 죄를 짓지 않았는지 늘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것도 습관적이고 고의로 그런 죄를 범하고 있지 않는지요? 습관적이거나 고의가 아니라도 나의 말로 상대방을 상하게 하고 교회를 어렵게 하고 힘들게 한 적이 있다면 도피성 되시는 예수님께 나아가 용서를 구하고 계속해서 그런 죄를 짓지 않도록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도피성 제도의 은혜를 안다면 그 은혜를 육체의 기회를 삼지 않고 오직 사랑으로 종노릇해야 할 것입니다(갈5:13). 이런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