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코스를 가기 위해서 아침 일찍 출발해 상봉역에서 9시 10분발 지평행을 타고,
10시 40분이 되어서야 지평역에서 걷기 시작했다.
지평역에서 나와 곧장 앞의 작은 길로 들어간다.
이내 대로로 나오지만 얼마가지않아 오른쪽의 작은 길로 들어가야 한다.
여기서 "지평 양조장"과 "참전비"(參戰碑)를 봐야 한다.
지평 양조장.
이곳에서는 이미 막걸리를 만들지 않는다.
지평 막걸리 병을 보면 제조공장이 다른 곳(춘천)으로 표기되어 있다.
- 자유를 위하여 -
1951년 2월 한국전 참전 유엔군
프랑스 육군의 전설적인 사령관, 몽클라르 장군께서
지평리 전투를 지휘하시는 동안
이곳을 사령부로 삼다.
이제 "참전비"(參戰碑)를 보기 위해서 "지평 고등학교"로 간다.
그런데 교문앞에 "참전비"(參戰碑)가 보이지 않는다.
마침 학생들을 데리고 나오는 선생님이 있어 물어보니 교문 안쪽에 있다고 알려준다.
참전비(參戰碑)는 교문 옆 주차장에 있는데 차를 주차하지 못하도록 표시를 해 놓았다.
"참전비"로서는 너무 조촐하고 간단하지만 오래전 부터 보고 싶었던 것이다.
이제 8코스를 걸어 "지평초등학교"쪽으로 간다.
길에서도 볼 수는 있지만 마침 문이 열려 있어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옥개석"(屋蓋石)만 원래의 것이고 "탑신석"(塔身石)은 없어져 새로 만들었다.
이제 지평초등학교 담장을 끼고 돌아서 석불역을 향하여 간다.
지평천(砥平川)을 따라 한참을 올라간다.
무슨 연유인지 인도를 여기 만 만들어 놓았다.
잠깐이지만 데크길을 지난다.
데크길을 지나 조금 더가면 길을 건너 오른쪽 길로 간다.
"햇골새마을교"라는 다리를 건넌다.
옛날 기찻길의 철교의 흔적인데 다리는 없어지고 교각(橋脚)만 남았다.
지금 이곳을 걸어서 지나는 다리가 "월산교"란다.
큰길로 올라서면 길을 건너 뚝방의 계단으로 올라간다.
"월산 저수지"(月山 貯水池)
이곳의 경치를 감상하며 잠시 쉬어 간다.
이곳은 낚시터로도 유명한 곳이지만 이곳에 들어가 본 적은 없다.
저수지를 지나면 길을 건너 계단으로 올라가야 한다.
이곳은 옛날 철로가 있던 길이다.
돌을 깔아 놓았는데 걷기가 불편하다.
옛 철길은 한참을 걸어가야 한다.
물소리길 8코스는 새로 만들어서인지 7월에 걸은 사람들이 간 길과 조금 다르다.
앞에 고가도로가 보이는데 "석불과선교"(石佛跨線橋)라는 다리이다.
"과선교"(跨線橋)는 "철로 위를 건너는 다리"를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다리를 지나면 조그만 체육시설이 나오는데 "베드민턴"이나 "족구"를 하는 자리인듯하다.
이곳을 오니 화물열차가 많이 지나간다.
상봉역에서 지평역까지 올 때는 잘 보이지 않던 화물열차가 이곳에서는 많이 지나간다.
"석불역"앞에 오니 8-1인증대가 있다.
장난감 집같은 예쁜 "석불역"
이곳에서도 기차가 선다.
지도를 잘 살펴보고 왔어야 하는데 잘못 보고 온 것이다.
이곳은 "폐역"이 아니다.
역무원인듯한 아주머니가 나와서 선로로 향하는 문을 연다.
이곳이 고향인 아주머니는 정식 직원이 아니고
두 사람이 교대로 열차가 올 때만 근무를 하는 모양이다.
이곳에 대해 여러가지 이야기를 해 주신다.
조금 더 가면 폐역이 된 "석불역"이 있는데 몰라서 못보고 말았다.
<자료사진>
<자료사진>
이것은 지방 신문에 게재된 글이다.
경기도 양평군 지평면 망미리 야산 화강암에 음각과 양각으로 새겨진 미륵불 2기가 발견됐다.
많이 마모되어 희미하지만, 소박하고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수작(秀作)이다.
양평군 지평면 망미리에는 중앙선 "석불역"(石佛驛)이 있다.
간이역으로 1960년대 말에 설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새로 전철이 들어서면서 2011년 10월 5일부터 하루 4번씩 정차하던 여객열차도 서지 않는다.
하지만 주민들의 요구로 용문~원주 복선전철 개통에 맞춰 인근에 새 역사가 들어섰다.
그런데 "돌부처"를 뜻하는 명칭이 어떻게 붙었는지 의문이 많았다.
주변에 석불이라는 지명이나 유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석불역(石佛驛) 이름의 수수께끼가 풀렸다.
역사에서 직선거리로 약 1.3㎞ 떨어진 곳에서 돌부처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미륵불이 발견된 곳은 양평군 지평면 면사무소에서 341번 지방도를 타고
원주 방향으로 가다가 월산 저수지를 지나 오른쪽 중앙선 복선전철 터널이 있는 야산이다.
산을 오르다보면 높이가 3m 남짓한 화강암 양 켠에
음각과 양각으로 조각된 미륵불 2기를 만날 수 있다.
석불은 망미산 줄기의 능선에 있는 높이 3m 정도 크기의 바위에 숨어 있었다.
한쪽에는 양각(陽刻)으로 약 90㎝ 크기, 다른쪽에는 음각(陰刻)으로 30㎝ 정도로 새겼다.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미륵불은 앳된 소년의 얼굴로 소박하고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미륵불로 추정되며, 아래쪽의 마을인 망미리와 월산리도 내려다보인다.
양평군 이강웅 박물관팀장은 "오랫동안 발길이 닿지 않아 이끼가 끼었지만
석불 앞에는 치성을 드린 것으로 보이는 제단도 남아있었다"고 전했다.
특히 두 돌부처는 소박하고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데다
오랜 세월에 풍화돼 더욱 정감을 주고 있다.
주민들도 잊혀졌던 보물을 발견한 듯 석불을 반기고 있다 .
주민 최 아무개 씨(63)는 “마을 사람들 사이에 오래전부터 산 어디엔가
미륵불 형상을 한 바위가 있다는 얘기가 돌았다”며
“그동안 석불리니까 석불이 있겠지 하고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이제와 보니 보존가치가 있는 문화재 수준의 작품인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 미륵불 바로 아래 마을의 옛 지명도 석불리에서 비롯된 ‘안 섬부리(석불리)’와 ‘바깥 섬부리’였다.
특히 인근에 위치한 미륵불을 바라보는 산이란 의미의 이름인 망미산(望彌山)에서도
이 미륵불을 관찰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지명 유래와도 깊이 연관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덩달아 과거에 발굴된 다른 불교 유물도 주목받고 있다.
한편 지난 1967년에는 길 건너 월산리의 고려시대 절터에서
지름 51.2㎝, 너비 11㎝ 크기의 청동종이 발견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학계에서는 이 일대에 여주 고달사에 버금가는 대형 사찰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정과 함께 석불에 대한 보전 대책이 마련돼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이광웅 양평군 박물관팀장은 “뒤늦게 발견되기는 했지만, 인근 월산리 취암사지에서 청동종이 발견되고
망미산이라는 이름의 산도 있는 만큼 문화재로의 가치가 충분하다고 판단된다”고 밝혔다.
물소리길은 석불역 지하도로 내려가 철로를 건너서 올라가야 한다.
즉 이곳은 상행선 전철을 이용하는 곳이다.
조금 전 아주머니가 문을 열어 놓더니 열차가 정지를 한다.
이 길도 옛 철로였던 것 같다.
길 양쪽으로 특이한 꽃이 피는 나무가 줄지어 심겨져 있는데 "칠자화"(七字花)다.
지금 있는 것은 꽃이 아니고 꽃이 지고 난 다음의 "꽃받침"인데 마치 꽃처럼 보인다.
이 길은 농로(農路)같은데 가로등도 있다.
곳곳에 바람개비가 있는데 이것은 공장에서 만든 것이지만 대부분 패트병을 잘라서 만든것들이다.
지평천을 따라 올라가는 길은 끝이 안보일 정도로 멀기만하다.
동네마다 하수처리시설이 들어서 있다.
하천을 위해서 무척 다행한 일이다.
옛 철교가 있던 흔적.
이제 "망미1리"(望美一里)로 곧장 가는 길이다.
이곳의 논들은 대부분 살충,살균제와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는 곳이라고 한다.
큰 길로 나오면 이곳이 "망미1리"(望美一里)마을이다.
물소리길은 횡단보도를 건너 첫번째 골목으로 들어간다.
지금이 마늘이나 양파를 심는 시기인지 밭마다 구멍이 뚫린 비닐을 덮고 작업을 한다.
그 옆에는 추수를 끝낸 들깨줄기가 가득하다.
마을을 벗어나면서부터 오름길이 시작이다.
전주에 여러 안내판이 붙어 있다.
"경기 옛길"안내판도 같이 있다.
"엉겅퀴"인데 꽃이 아래를 향하여 핀다. "도깨비엉겅퀴"인가보다.
올라 온 길을 잠시 뒤돌아 본다.
"백운정사"입구에 만들어진 조형물.
"관운장"과 "포대화상"(布袋和尙)이 있는데 앞의 "공양물"(供養物)이 참이슬이 웬말인가?
백운정사.
백운정사 바로 앞에도 "포대화상"이 있는데 여기는 술병이 더 많다.
포대화상이 술 좋아 한다는 이야기는 못들었는데,,,,,
포장도로는 여기서 끝나고 지금부터는 흙길이다.
아직 제대로 된 집이 아니고 임시로 된 작은 집에 앞에는 망을 친 밭이 있다.
여기에서는 오늘 걸어 온 길이 아주 잘 보인다.
밭에 마네킹 머리부분이 걸려있다.
이유를 물으니 산짐승때문에 세워놨단다.
밤에는 저기에 불을 비추면 고라니나 산돼지가 안 온단다.
여기가 물소리길로는 정상(頂上)이다.
이곳을 지나면 임도(林道)가 나온다.
이제부터는 내려가는 길이다.
물소리길은 이 임도(林道)의 중간지점부터 가는 것이라 그리 멀지는 않다.
초입은 세멘 포장을 한 도로다.
임도(林道)를 다 내려오면 8-2 인증대가 있다.
"무왕3리"(茂旺三里)마을회관 앞 은행나무와 쉼터.
이곳에서 큰 길로 나가는 마을 입구에도 하수처리장이 있다.
다리를 건너면 곧바로 차량의 왕래가 빈번한 큰 길로 나온다.
이길로 한참을 가야 하는데 많은 차들이 빠른 속도로 지나가서 위험하다.
저 멀리 좌측으로 빠지는 길이 보인다.
이제 물소리길 8코스도 막바지다.
구둔역과 일신역으로 가는 길 입구의 안내판이 화려하다.
이길로 들어서면 차량의 왕래가 거의 없어 편하게 걷는다.
왼쪽 바위산 꼭대기에 있는 토종 벌통.
일신역은 다리를 건너기 전에 가는데 물소리길 표지는 다리를 건너서 가라고 한다.
저기서 곧장가면 "구둔역"인데 9코스때 어차피 지나갈 거니까 그냥 패스.
좌측으로 잘 정비된 "일신천"(日新川)을 끼고 올라간다.
중간에 아주머니 한 분이 무릎까지 잠기는 일신천에 들어가 무엇을 잡으신다.
무엇을 잡느냐고 물으니 잘 들리지는 않는데 "게"(蟹)를 잡는단다.
"게"가 있다면 볼 것도 없이 무척 깨끗한 하천이다.
볏단을 옛날처럼 묶어 논 곳이 있다.
여지껏 물소리길을 오면서 처음 본다.
조금 더가니 "곤포(梱包)사일리지"(Silage)를 만들고 있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여지껏 만들어 진 것만 보았지 직접 만드는 과정은 처음 본다.
저 기계의 앞의 집개는 사일리지를 들어서 차에 올리는 도구고,
뒷부분에는 자동으로 짚뭉치를 비닐로 감는 장비가 있다.
농약,제초제를 사용하지 않는 논의 짚만 사일리지를 만든다고 한다.
멀리서 일을 하시다가 내가 열심히 사진을 찍으니 가까이로 와서 보여주신다.
차에서 내려 가까이 오시며 "재미있지요?" 하며 웃으신다.
아마도 이런 작업광경을 보신 분이 많지 않을듯하다.
멀리 뚝방넘어 "일신역"(日新驛)이 보인다.
뚝방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가파르다.
올라가 보니 이곳도 옛날 철길이였던 곳이다
"일신역"으로 가니 열차를 타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상행 열차시간은 두 시간이나 남았다.
앞에 버스정거장이 있는데 버스는 시간표는 있지만 언제올지는 모른다.
"일신역"근처에는 먹을 곳이 하나도 없다.
정말 상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데 여기에 왜 역이 생겼나 모르겠다.
그런데 나이가 조금 드신 역무원이 오시면서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다.
그러더니 여기는 식사할 곳이 없다며 고맙게도 "지평"까지 데려다 주겠단다.
지평역에서 30여년을 근무하셨단다.
양쪽에 음식점이 있는 지평역 맞은쪽에 내려 주신다.
짜장면이 먹고 싶기도 하고 이곳이 유명하다고 들어서 그곳으로 갔다.
두시부터 네시까지가 "브레이크타임"(Breaktime)이라는데 우리가 간 시간이 세시 58분.
쟁반짜장을 시키니 냄새부터 그럴듯하다.
여유있게 맛있게 먹고 나왔다.
지평역에서는 표를 팔지 않는다.
지평역뿐만 이니라 일부 작은 역은 모두 그런가보다.
지평역에 들어가 기다리니 금방 새마을호가 왔다.
차에 타니 여승무원이 온다. 덕소까지 표를 구매했다.
9코스도 시간을 잘 맞춰서 진행해야 할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