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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신령한 은혜를 맛보려면(2214.2023.10.22)
느11:1-2
할렐루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임재하셔서 우리 예배를 받으십니다. 오늘도 주의 전에 나오신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위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혹시라도 삶의 현장에서 상처와 상한 마음을 가지고 오셨으면 말씀 듣다가 위로와 치유함을 받으시고 질병과 싸우는 중이라면 여호와 라파 치료의 하나님을 만나서 치료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삶이 힘들고 지쳐서 오셨다면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은 새 힘을 얻으시기를 축복합니다. 무엇인가 계획하고 기도중에 있는 것이 있다면 응답받는 은혜가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삶이 해결되고 성령이 충만하여 기쁨과 감사와 웃음이 넘쳐나는 유쾌한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서 감화와 감동을 받고 여호와의 신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철철 넘치는 하나님의 영감으로 소스라쳐 깨어 일어나는 감격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상주감리교회에서 예배드리시는 여러분, 오늘 예배를 드리면서 무엇보다도 주 앞에서 갖는 우리의 믿음을 강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실개천 같은 믿음이라도 붙잡으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있습니다. 믿음이 있어야 자신의 삶에 대한 기대의 수준을 높일 수가 있습니다. ‘내 남은 인생을 이렇게 끝내지는 않으리라’ 믿음이 있어야 삶의 높은 수준에 끝없이 도전할 수가 있습니다. 믿음이 있어야 일마다 때마다 묘한 방법으로 우리 속에 개입하셔서 우리를 도와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가 있습니다.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있어야 응답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어떤 일 때문에 억울하고 분하고 참기도 힘들고 억눌리고, 마음에 상처받고, 영적이든 육적이든 병든 심령들을 향해 우리 주님께서는 한결같이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니라’,‘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도 이만한 믿음을 본 적이 없다’그러므로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들에게서 이런 믿음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네 믿음이 어디에 있느냐’ 이 시간 우리는 믿음 없음을 회개해야 합니다. 믿음 없음을 가슴 아파해야 합니다. 믿음 없는 이 세대를 향해 끊임없이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은 ‘네 믿음을 어디에 두었느냐’는 것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믿음의 힘은 칼의 힘보다는 강합니다. 믿음의 힘 어떤 절망의 힘보다도 훨씬 강합니다. 어떤 대항의 힘보다도 강합니다. 믿음을 붙든 사람들을 보면 대단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사람들이었고, 역사의 주인공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듣는 가운데서 이 믿음을 붙들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 인생 길에서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실패했다고 실패자가 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실패는 우리의 삶 가운데 한 사건일 뿐입니다. 지난 한 주간을 살아오면서 힘들었던 모든 것들을 이 시간 주 앞에 다 내려놓고 염려하지 마시고 다시 믿음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삶의 환경에 짓눌려서 흔들릴 수 있었던 우리의 믿음을 하나님을 의지하여 다시 확실하게 붙드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믿음은 금보다도 더 귀한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있으면 다시 시작하여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찬송 450장 4절--금보다 귀한 믿음은 참 보배 되도다 이 진리 믿는 사람들 다 복을 받겠네--아멘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어떤 세상적인 학문을 배우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도 어떤 학식을 배우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성경을 통해서 어떤 교리를 배우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읽는 가운데서 우리는 역사를 이루어갔던 믿음의 조상들의 그 믿음의 삶을 배우는 것입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듣는 가운데서 믿음의 삶을 배우시기를 축복합니다.
성경을 통해서 다른 것을 배우려고 하지 말고 믿음의 삶에 대해서 눈을 뜨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사는 거로구나! 이게 믿음이로구나! 이제 나도 이렇게 한 번 살아 보리라’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믿음만 붙들면 하나님이 살리는 길이 있습니다. 믿음만 붙들면 어느 날인가 어느 시간인가 하나님의 개입으로 사는 길이 있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에게 끝없이 요구되는 핵심 내용입니다. 우리 모두 겸허한 자세로 지금 나에게 선포되어지는 하나님 말씀 앞에 서 보십시오. 그 말씀 앞에 결단하는 귀한 시간을 가져보십시오. 내가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라고 해 보십시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이 내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시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 때 왕의 술을 맡은 아주 높은 관원장이었습니다. 그는 궁궐에서 예루살렘 성전이 훼파되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몹시 괴로워합니다. 결국 그는 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 귀한 기회와 자리를 버리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훼파된 성전을 다시 수축하게 됩니다.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에 굴하지 아니하고 그는 그 귀한 사명을 끝까지 잘 감당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성전을 다시 수축한 사람으로 성경에 기록되는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왕의 술을 맡은 관원장이라면 날아가는 새를 떨어트릴 수 있는 권세를 가진 자리이었지만 느헤미야가 그것에 연연하여 성전 수축의 일을 감당치 아니하고 자기 자리 만 지키고 있었다면 우리는 지금 그가 누구인지를 도무지 알지 못할 그러한 사람으로 인생을 끝마쳤을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이 보기에는 느헤미야가 어리석어 보였을는지 모릅니다. 느헤미야는 저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술맛은 관원장 느헤미야와 그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많은 어려움과 위험 속에서도 하나님의 성전을 다시 수축한 사람 느헤미야와는 하늘과 땅만큼 큰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만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술맡은 관원장 느헤미야로 인생을 마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귀한 기회들을 이용하여 얼마든지 하나님 의 성전을 잘 수축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뜻 그 일에 뛰어 들려고 하지 않습니다. 저는 우리들 중에 느헤미야와 같은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그와 같은 귀한 몫과 기회를 놓치지 아니하는 지혜롭고 용감한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교회에 술맡은 관원장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지위와 재산을 자랑하고 또 그것을 은근히 부러워도 하지만 하나님이 기대하시고 바라시는 삶은 그것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은 오늘 이 설교를 들으시면서 술맡은 관원장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인생을 건 느헤미야로 살 것인가를 결정하실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수축하였을 때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곳은 아직도 적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변방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서 살려고 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살지 않으면 성을 지키기가 어려웠으므로 누군가는 그 곳에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당시 세 종류의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첫째는 백성들의 두목이었고, 둘째는 자원하는 사람들이었고, 셋째는 백성들 중에서 제비 뽑힌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가려고 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백성들 중에 십분의 일을 제비 뽑아 예루살렘으로 강제 이주를 시켰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역사적인 사실 속에서 우리는 하늘의 신령한 은혜를 맛보고 살아야 합니다.
신앙을 회복한 백성들이 해야 할 일은 예배를 위하여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일이었습니다. 주민이 거하기에는 위험하고 가옥이 없었음으로 지도자들은 제비 뽑기에 뽑힌 자들과 자원한 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거주하게 되지요.(1-2) 억지로 주님의 십자가를 진 구레네 시몬의 가정이 복음으로 은혜가 임한 것을 보지요.(마27:32) 우리는 상황과 여건이 좋지 않아도 하나님의 일에 앞장 설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함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자리를 묵묵히 지켜내는 예배자가 되어 주님의 기쁨이 되는 여정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루살렘성은 참으로 화려했던 도시로 다윗을 거쳐 솔로몬에 이르러서는 세계 전무후무한 문화와 문명을 자랑했고 뛰어난 건축술과 예술성을 자랑했던 도시였습니다. 이 세상에 어떤 화려함도 솔로몬이 누렸던 영화와 비교할 수 없었다고 할 정도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거하기를 원했고 누리기를 원했고 흠모했던 성이 바로 예루살렘이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영광과 영화는 바벨론의 침략으로 무너졌습니다. 70년간의 포로생활부터 90년 후에 느헤미야가 와서 성을 건축할 때까지 160년간이나 폐허가 된 채로 버려져 있었습니다. 70년간의 포로기 이후에 성을 재건하겠다고 사람들이 돌아왔던 적이 있으나 또 적들이 쳐들어와 일부 회복해놓은 것마저 무너뜨렸습니다. 그래서 풀과 무너진 벽돌, 옛날 화려했던 잔해들만 나뒹구는 참혹한 곳이었습니다.
성에 머물기를 원했던 사람들은 치워야 할 수많은 쓰레기와 잔혹한 잔해들 때문에 시 외곽에 삶의 터전을 잡고 살아가고 있었지만, 성을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성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기로 하셨고, 이스라엘 백성으로 제사장의 나라요 왕 같은 족속으로 삼겠다 하셨으며, 메시아를 보내어 전 세계를 통치하겠다고 약속하셨기에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문제는 성을 건축했어도 성에 거할 사람들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성에 거한다는 것은, 적들이 쳐들어올 때 제일 먼저 공격의 대상이 될 뿐 아니라 기본적인 생활을 포기하고 황무지를 개척하는 일에 헌신해야 함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그럼 새 예루살렘은 어디일까요? 새 예루살렘은 우리가 장차 갈 천국의 수도입니다.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수도이듯이 새 예루살렘은 천국의 수도입니다. 천국도 아름다운데 천국의 수도라면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얼마나 아름다운 성인지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하였습니다. 계21-22장에 나타난 천국은 거기 가면 눈물도 없고 사망도 없고 애통하는 것도 곡하는 것도 없고 아픈 것도 없는 곳도 없이 하나님의 사랑과 보좌와 생명나무와 생명강수와 황금길과 빛나는 보석으로 만든 집과 천사들과 성도들과 온갖 아름다운 것으로 충만한 곳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줄 믿습니다. 우리 성도들 세상 수고 끝내고 모두 새 예루살렘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 사람만 자랑스러운 것 아닙니다. 상주에 살면서 하늘의 신령한 은혜를 맛보고 살면서 새하늘 새 예루살렘 시민이 되면 그보다 자랑할 것은 없다고 봅니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은 누구나 들어갈 수 있지만 아무렇게나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계22:14절‘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 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준비된 자가 들어간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어 천국의 백성이지만 신앙에 따라 하나님의 영광을 누리는 수준은 다 다르다는 말입니다. 그럼 어떤 사람이 지상에 살면서도 새 예루살렘의 은혜를 누릴까요? 우리는 그것을 느헤미야서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본문은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벽을 쌓았는데 거기 거할 자가 문제였습니다.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거하지 않으려고 한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외세의 침략의 목표라서 주야로 성을 방비해야 하고 적군과 싸워야 합니다. 또 산지라 농사짓는데 힘이 듭니다. 그리고 종교의 중심지라 살아가는 삶 속에 제약이 많고 상업도시가 아니어서 돈벌이하기가 쉽지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거주자가 되었는데 그들은 곧 이스라엘의 두목들과, 다음에는 제비 뽑힌 자들, 그리고 자원해서 머물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너무도 사랑해서 온갖 불이익과 수고와 두려움을 감수하고 예루살렘에 거하겠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랬기에 백성들은 이들을 위해 복을 빌었습니다. 이처럼 새 예루살렘의 영광을 누릴 자의 자격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말씀하셨고,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하셨습니다. 히6:4-5절‘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지상에 살면서도 하늘의 새 예루살렘의 영광을 맛보며 살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상주감리교회 성도만이 갖는 특권 중의 특권입니다. 그럼 어떤 사람이 하늘의 신령한 은혜를 맛보며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1.하늘의 신령한 은혜를 맛보려면 세상 죄 내려놓고 회개하고 돌아와야 합니다.
예루살렘 거주자는 1-2절만 아닙니다. 느7장을 보면 바벨론에서 귀환해서 예루살렘에 거주했던 원거주자들이 나옵니다. 느7:66절‘온 회중의 합계는 사만 이천 삼백 육십 명이요 그 외에 노비가 칠천 삼백 삼십 칠명이요 그들에게 노래하는 남녀가 이백 사십 오 명이 있었고’그랬는데 이들은 에스라의 인도로 바벨론에서 돌아온 1차 귀환자였습니다. 그리고 느7:73을 보면 이들 모두는 이국땅에서 하나님을 사모한 나머지 돌아와 예루살렘 본성에 거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이방나라의 침입을 받아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고, 지방에서 살면서 생업을 가져 예루살렘은 텅텅 비게 되었습니다. 느헤미야 총독은 1차 귀환 명단을 언급하면서 그들이 옛날 그 마음을 회복하여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오기를 희망했습니다. 즉 바벨론에서 하나님의 도성을 그리워하며 모든 것 다 내려놓고 돌아왔던 것처럼 그 사랑의 마음을 품고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보여주는 교훈은 우리 믿는 자가 진실로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이키면 누구든지 새 예루살렘의 은혜를 누릴 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계22:14-15절‘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순간에도 회개하여 깨끗하게 씻으면 하늘의 영광이 우리에게 비쳐옵니다. 절망이 있습니까? 문제가 있습니까? 진실로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회개하면 하나님은 천상의 100명의 의로운 의인보다 죄악 된 세상에서 진실로 회개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한 명을 더 귀하게 보십니다.
2.하늘의 신령한 은혜를 맛보려면 마음을 다해 하나님께 늘 예배하시기 바랍니다.
예루살렘 거주자가 나옵니다. 1절‘백성의 지도자들은 예루살렘에 거주하였고’ 3절에는 점 더 자세히 ‘이스라엘과 제사장들과 레위사람들과 느디님 사람들과 솔로몬의 신하들의 자손들’이라고 나옵니다. 즉 그들은 행정 및 종교의 의무를 담당하는 자로서 백성을 통치하며 제사하는 것이 그들의 주 임무였습니다. 이처럼 신령한 지도자와 제사장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나라요 제사장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행정과 종교의 중심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때 이들은 바로 우리 마음 중심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며 예배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1절‘백성의 두목들은 예루살렘에 머물렀고’11장 3-24절까지 보면 이들은 지도자들과(3-9절) 제사장들과(10-14절) 레위인들과(15-18절) 성전봉사자들(19-24절)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행정과 종교의 의무를 담당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예루살렘에 거주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천상에서는 물론 지상에서 내세의 은혜를 맛보며 살려면 우리가 다스리는 자가 되어야 하고 제사장이 되어야 합니다. 마음을 다스려 늘 겸손하고 순종하며, 또 제사장이 되어 날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경배함에 부족함이 없어야 합니다.
아무나 은혜 누리던가요? 겸손과 경배의 조건을 갖추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은혜를 주시되 큰 은혜를 주십니다. 겸손한 자에게 생명수의 강이 흐릅니다. 구약의 보이는 복은 신약의 신령한 복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잠22:4절‘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겸손한 자에게 한없는 은혜를 주십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늘 예배하고 경배해야 합니다. 예배하는 곳에 성령이 임하십니다. 정규예배 뿐 아니라 삶 속에서 늘 예배하면 성령이 임하시고 그곳이 하나님 나라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 자와 함께 하시며 예배 자에게 복을 주십니다. 예배하는 잘 하는 곳이 천국입니다. 성령이 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예배의 성공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예배하는 자에게 하늘의 영권을 주십니다. 늘 마음을 다스려 겸손과 늘 예배하여 제사장이 되셔서 새 예루살렘의 주인공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지상에서 내세의 은혜를 맛보며 살려면 우리가 신령한 통치자가 되어 마음을 다스려 늘 하나님의 말씀에 겸손하고 순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 안의 행정입니다. 그리고 신령한 제사장이 되어 날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경배함에 부족함이 없어야 합니다. 늘 기도하고 찬송하며 살자는 것입니다. 우리의 섬김의 분량이 구약의 제사장만큼 되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하루를 돌아볼 때 최소한 그들이 조석으로 번제하듯 시간을 정해놓고 하루 두 번은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일과 절기와 제사 등 하나님에 대한 종교적 의무만큼 지금은 형태와 모양은 다르지만 그 시간 그 정성 그 분량 정도는 헌신해야 정상적인 영적생활이 가능합니다. 자신과 세상일에 너무 바쁘면 안 됩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그랬던 것처럼, 목동 다윗이 그랬던 것처럼 날마다 하나님께 기도와 찬송으로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하늘의 은사를 입혀주실 것입니다.
예배는 진정 우리 삶을 바꿉니다. 말씀이 인생을 보는 관점을 바꾸고, 찬양이 지친 마음에 새 힘을 불어 넣고, 기도가 그 동안 보지 못했던 시야를 밝힙니다. 그리스도 안의 참된 교제는 세상에 찌들고 지쳐있던 몸과 영혼에 용기를 주고 격려해줍니다. 예배의 감격과 기쁨을 통해 이렇듯 새롭게 될 수 있다면, 예배는 계속되어야 합니다. 목적과 의미를 잃어버린 사람, 세파에 지친 사람은 누구나 예배에 참석해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진정한 자기 가치를 발견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하나님을 온전히 만나도록 돕고 섬기는 일이 얼마나 소중합니다. 예배위원으로, 찬양대로, 안내 위원으로 그리고 예배를 위한 중보기도 팀에 이르기까지 오늘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데 수많은 사람들의 섬김과 봉사가 있습니다.
3.하늘의 신령한 은혜를 맛보려면 의무적으로라도 믿음에 최선을 다해야합니다.
자신의 맡은 의무를 잘 감당해야 합니다. 1절‘그 남은 백성은 제비를 뽑아 십분의 일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거하게 하였고’그랬습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비뽑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추구했습니다. 그럼 제비뽑기가 보여주는 오늘날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비뽑아 10분지 1일 뽑혔는데 그 의미는 무엇일까요? 십일조의 개념처럼 하나님의 것으로 선택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원하든 원치 않든 예루살렘 성민이어야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들에게 주어진 하나님 뜻의 의무가 있습니다.
이 사명은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잘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소홀히 하면서 지상에서 새 예루살렘의 영광을 누릴 수는 없습니다. 자신의 직분과 주어진 은사와 책임에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자기 직분에 충성하다가 받는 은혜도 크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요나와 같이 사명을 회피하다가는 주님이 함께 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의무를 다한 사람에게 천성의 그 영광을 지상에서도 나타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갈망하는 사람입니다. 잠16:33절‘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제비를 뽑고 그 결과대로 하기를 원했습니다. 그 결과 십분의 일이 뽑혔습니다. 십분의 일을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뽑힌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것으로 뽑힌 것에 대해서 아무런 불평이 없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갈망해야 합니다. 죄의 사람이 되면 안 됩니다.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을 가까이하시기 바랍니다.
1절에서 왜 제비를 뽑았을까요? 예루살렘에 거주할 지원자가 적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는 대부분 생업의 터전이 외부에 있었기에 예루살렘에 돌아오기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비를 뽑았습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을 의무적으로라도 충실히 하라는 교훈입니다. 우리에게 주일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복된 일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들은 일주일이 빨리 돌아옵니까? 한 주일 돌아오는 것은 정말 빠릅니다. 여러분보다 목회자는 그걸 더 실감합니다. 한 주간이 왜 그렇게 빨리 돌아오는지 매일 매일 준비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입니다.
위대한 신앙인들은 모두가 그 생활이 어느 모로나 규모가 있고 규칙이 있었습니다. 다니엘 선지자 얼마나 규칙적이고 규모 있는 신앙생활이었습니까?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이스라엘의 청년 다니엘이 규칙을 정해 신앙생활을 하다가 하나님께서 은사 주셔서 바벨론의 총리가 나라가 바뀌고 정권이 바뀌어도 계속하여 왕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규칙을 정해 의무적으로라도 열심히 하면 은혜를 받는다는 말입니다. 다니엘은 날마다 하루에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한 창문을 열어 놓고 기도했는데 다른 신에게 절하거나 기도하면 사자밥이 된다는 법 앞에서도 기도를 계속했습니다. 지독한 규칙쟁이였습니다.
감리교 창시자 요한 웨슬레도 메도디스트(mathodist) 즉 규칙쟁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그 시간에는 어떤 일에도 양보하지 않고 힘슨 결과 성령에 사로잡혀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의 사자가 되었습니다. 종교 개혁자 마틴·루터도 매일 새벽마다 2시간씩 기도를 하곤 했는데 하루의 일과가 바쁜 날일 것 같으면 3시간씩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그래야 마귀한테 지지 않고 승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4.하늘의 신령한 은혜를 맛보려면 성령의 감동을 거절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령 감동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2절‘무릇 예루살렘에 거하기를 자원하는 자는 백성들이 위하여 복을 빌었느니라’ 느혜미야는 왕도 지도자도 제사장도 아니고 제비에 뽑히지 않았어도 자원하는 자에게는 예루살렘 성민이 되는 자격을 열어놓았습니다. 목회자도 그렇습니다. 목회자란 꼭 소명 받아야만 하는 건 아닙니다. 나도 나의 사생활을 포기하고 십자가 지고 주님의 뒤를 따라야겠다고 자원하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십니다. 이 세 번째 자격자는 규율도 엄하고 돈벌이도 되지 않고 적군의 침입도 잦고 여러 가지 제약이 많아 사람들이 기피하는 곳을 모든 희생을 각오하고 목숨을 걸고 자원했습니다. 이들이야 말로 주님을 위하고 백성들을 위한 희생적인 사람들입니다. 성령이 감동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도 행20:24절‘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말했습니다. 이런 일은 성령 따라 살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고백입니다. 바울이 위대한 것 아닙니다. 성령님이 위대하십니다. 성령 따라 사시기 바랍니다. 천성의 영광이 임합니다. 좋은 일이 생깁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은 많았지만 수도 시민이 되는 자는 많지 않았습니다. 새 예루살렘의 시민으로 부족함이 없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날마다 예배하며 회개하여 새 사람 되고 성령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사람으로 충성하므로 더욱더 풍성한 은혜를 누리는 새 예루살렘의 주인공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2절‘예루살렘에 거주하기를 자원하는 모든 자’이 사람들이야 말로 참으로 귀한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자기들의 기업을 포기하지 못하고 망설일 때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사람들이 대적들의 훼방과 공격의 목표가 되는 예루살렘에 거주하려는 것을 꺼릴 때 그들은 대적들에게서 예루살렘을 파수하며 하나님의 성전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도 내어 놓았습니다. 이 얼마나 귀한 사람들입니까? 이걸 다른 말로 표현하면 성령의 감동입니다. 늘 성령의 감동 받아 살면 하늘의 은사를 맛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가 상주에서 중심이 되는 교회로 성장하기 위하여 저와 여러분들을 이곳 상주감리교회로 부르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스스로가 이 일을 다 이루시는 것을 좋아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누군가가 이 짐을 져 주시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무거운 일입니다.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선뜻 나서서 개척교회의 사명을 감당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교인이 100명을 넘어서기까지 우리 상주감리교회는 이제 커가는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머지않아 우리 교회는 그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하고 이 상주지역과 경북북지방과 삼남연회의 중심에 서게 될날이 올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을 위하여 느헤미야와 같이 그리고 백성들의 두목들과 같이, 그리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그 어렵고 위험한 짐을 감당하였던 백성들과 같이 우리 상주감리교회를 위하여 헌신한 사람들은 교회와 함께 중심에 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뿐만 아니라 우리도 그때 교회가 힘들고 어려울 때 스스로 작은교회 사람들이 중심에 서서 일을 할 수 있도록 서로를 도와주고 밀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저들은 그 때에도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마음으로 신앙으로 또 작은 교회에 서려고 할 것이지만 그와 같은 사람들이 교회의 중심에 서도록 하나님은 밀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가 힘들고 어려울때는 모른 척 외면하다가 교회가 중심에 설 때에 염치없이 중심에 서려고 하는 사람들을 경계하여야만 합니다.
교회의 힘든 일에는 외면하고 쉽고 대접받는 일에만 얼굴을 내미는 이기주의적인 교인을 경계해야만 합니다. 틀림없이 그와 같은 사람들이 생겨날 터인데 우리는 그것을 철저히 막아내야만 할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사람들이 교회의 중심에 서게 되면 교회는 정말 무기력하고 힘없는 교회로 전락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 교회는 절대로 중심에 서는 교회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영원히 작은교회로 서 있을 것입니다.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기를 힘써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우리 개인 스스로가 열심히 충성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솔직히 저도 설교는 이렇게 하지만 커가는 교회로 생활을 한다는 것은 그렇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으로 그와 같은 삶을 살아내야만 합니다. 그와 같은 삶을 살아내려고 하는 사람들이 우리 상주감리교회에도 있어야 합니다.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나 스스로가 먼저 앞장을 서서 그와 같은 역할을 감당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교인들이 앞 다투어 책임을 외면하는 일은 교회를 놓고 볼 때 매우 슬픈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교회 일에 있어서, 교회의 부흥을 위하여 우리 모두 자원하는 마음으로 나서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고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이 살아가는 삶 속에서 이렇게 살든 저렇게 살든 어느 땐가는 평가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때 평가를 받을 때 다른 사람들이 혀를 끌끌 차는 평가를 받으면 절대 안 됩니다. 죽고 나서 다른 사람이 우리를 생각할 때 감동스러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는 나로 하거나 내 혈기로 하거나 내 생각으로 하거나 나를 위해서 하면 절대로 그렇게 되지 못합니다. 주님을 위해서 주님과 함께 주님에 의해서 주님으로 해야 됩니다.
우리도 어떤데서 주님으로 하는 사람이 될 것인가 첫 번째는 힘들어도 원하는 곳에 머무는데 주님으로 하고, 두 번째는 원하지 않는데 뽑혀서 일하는데 주님으로 하고, 세 번째는 어려워도 자원해서 희생하는데 주님으로 하여 주님께서 우리를 정말로 감동스럽게 쳐다보고 인정하셔서 주님의 가슴에 기억된 바가 되시고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여 아름다운 상주감리교회를 이루어 나갈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