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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교리란 무엇인가
복잡한 세상, 그리스도인에게 나침반
평화신문은 예수 성탄을 기다리는 대림시기를 좀더 의미있게 보낼 수 있도록 서울대교구 명동주교좌성당에서 실시하는 대림특강을 연재한다. 올해 처음 제정된 사회교리주간을 맞아 '세상 속의 그리스도'를 주제로 마련된 특강 순서는 △ 5일 '사회교리란 무엇인가'(박정우 신부) △ 12일 '법으로 알아보는 사회교리'(임통일 프란치스코, 변호사) △ 19일 '이웃과 함께 하는 사회교리'(이동우 마르코, 방송인)다.
사회교리란 무엇인가 사회교리는 사회 문제와 관련해 신앙인으로서 알고 실천해야 할 교회의 가르침이다. 본격적 사회교리는 교황 레오 13세가 1891년 5월 15일에 반포한 회칙 「새로운 사태」에서 시작됐다. 이 회칙은 노동자들의 정당한 임금과 노동조합을 결성할 권리, 국가의 의무와 한계, 사유재산권을 부정하는 사회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하게 선언했다. '노동헌장'이라고 불리는 이 회칙은 세계 노동운동과 교회의 사회교리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사회교리는 가정ㆍ생명ㆍ정치ㆍ경제ㆍ사회ㆍ노동ㆍ인권ㆍ세계 평화 등 다양한 영역에서 신자들이 지켜야 할 신앙의 원리와 윤리 기준, 가치관을 제시하며, 특히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길을 다루고 있다. 산행을 하는데 나침반과 지도가 반드시 필요하듯 복잡한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합당하게 살아갈 지침을 제시해 준다.
교회는 정치공동체의 고유영역을 존중한다. 그러나 '인간의 기본권과 영혼들의 구원이 요구할 때는 정치 질서에 관한 윤리적 판단을 내리는 것은 정당하다'(사목헌장 76항, 간추린 사회교리 69항)고 선언한다. 교회는 인간을 돕는 것이 첫 번째 사명이기에 인간이 살아가는 현장인 사회를 복음화하고, 가난하고 약한 이들의 권리를 수호하기 위해 사회정의를 세울 사명이 있다.
1. 인간 존엄성의 원리 : 인간은 하느님 모습대로 창조됐기에 동등한 존엄성을 지닌다. 인간 존엄성을 침해하는 어떤 차별도 하느님 뜻을 거스르는 죄가 된다. 예를 들어 동남아에서 온 이주민을 열등하게 여겨 차별하고 신체적ㆍ정신적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그들이 지닌 인간 존엄성을 훼손하는 죄악이다.
2. 공동선의 원리 : 사회 구성원 모두 함께 행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동선을 이루려면 아무도 제외되지 않고 모두가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재화의 올바른 분배와 이웃 사랑이 필수적이다. 공동선이야말로 '사회 자체가 존재하는 참된 이유'다.(간추린 사회교리 164) 주택을 수백 채씩 소유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무허가 비닐하우스에서 불안한 삶을 사는 이들도 있다. 이런 불의한 현실을 개선하지 못하는 한 공동선의 실현은 요원하다.
3. 연대성의 원리 : 개인과 개인, 개인과 사회, 민족들 간에 상호 의존과 유대를 바탕으로 서로 책임지고 돌봐야 한다는 원리다. 연대성의 영적 힘은 이웃을 위해 아무 조건 없이 자신을 내어 놓은 그리스도를 닮고자 하는데서 나온다. 가난한 이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사회복지단체를 후원하고, 빈곤과 질병에 시달리는 개발도상국을 위한 나눔에 참여하는 것이 연대성의 원리를 실천하는 것이다.
4. 보조성의 원리 : 국가와 같은 상위 단체는 공동체 구성원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되 개인의 자율성과 주체성을 부당하게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원리다. 막대한 힘을 갖고 있는 국가는 '개인이나 가정을 장악'해서는 안 되며, 가능한 자유로이 활동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 또 국가는 공익을 목적으로 설립된 시민단체나 비정부기구 활동을 존중하고 지원하되, 공동선을 해치지 않는 한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
명동성당 대림특강 (2) 법으로 알아보는 사회교리 시대의 징표 읽고 공동선 증진에 힘써야
시대의 징표란 인권, 환경 문제처럼 우리 사회가 처한 법적 문제이자 사회정의 관점에서 다뤄질 문제로 바라봐야 한다. 극빈자, 다문화가족, 새터민, 어린이, 무의탁 노인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차별과 FTA와 같은 자유무역주의로 표현되는 세계화와 농어업 붕괴, 청년실업과 양극화, 금융경제 위기, 공권력 불신, 부와 권력 독점, 가정 붕괴와 육아위기, 과잉소비, 개발정책과 생태환경 파괴 등 사회 문제는 산적해 있다. 사회교리는 가톨릭 신앙 안에서 이런 사회문제를 복음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인식의 틀이자 가치판단 기준, 행동지침 같은 것이다.
변호사는 단순한 법 기술자가 아니라 법을 통해 우리 사회 약자들을 보호해야 한다. 저는 1996년부터 14년 동안 대한변호사협회 인권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인권보고서 발간, 새터민을 위한 북한이탈주민 법률지원, 고령화 사회를 대비한 노인법률지원 등 공익활동을 벌여왔다. 또 남대천 환경보호를 위한 양양 양수발전소 저지 소송, 4대강 사업 저지 국민소송단 공동집행위원장 및 변호사단 단장으로 공익활동에 관여해 왔다. 이를 통해 우리 사회에 인간 존엄성을 회복하고, 공동선을 실현하며, 법률문화와 인권을 개선하는 데 일조하고자 노력했다. 이 과정에서 집권자들의 독선과 권력으로 밀어붙이는 비민주적, 반법치적 행정관행이 성행하고 있으며, 이를 저지할 양심있는 시민 참여가 부족하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그러나 한편으로 평신도 법조인으로서, 교황 레오 13세가 회칙에서 정의한 교회 밖의 '선의의 한 사람'으로서 우리 사회 인간 존엄성을 회복하고 소외된 이를 위한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데 한 몫을 했다는 점에서 위로를 받는다.
무한경쟁의 세계화 시대에 사회는 희망을 잃어가고 있다. 먹을 것이 없어 슈퍼마켓에서 절도를 하다 붙잡히는 생계형 범죄가 늘고 있다. 경제양극화로 비정규직 노동자가 증가해 아무리 일을 해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근로빈곤층이 늘어나는 반면 금융부자 속도는 아시아 최고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다. 양극화 문제는 경제문제에 그치지 않고 사회 연대성 붕괴로 이어져 사회 각 부문의 위기로 다가온다. 교회는 각계각층 국민들이 공평한 혜택을 받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국민의 경제적 번영은 소유자산의 총액으로 평가하기보다는 오히려 정의 규범에 따라 이뤄지는 재화의 분배로 평가해야 한다.(교황 요한 23세 회칙 「어머니요 스승」 73~74항) 부유층 재산과 권력을 증대시키는 반면 빈민층 빈곤을 고정화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교황 바오로 6세 회칙 「민족들의 발전」 9항)
또 턱없이 부족한 최저임금과 치솟는 대학 등록금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청년실업이 미래 희망을 옥죄고 있다. 더불어 비정규직 노동자와 실업 문제는 노동자의 인간 존엄성과 직결된다.
대기업과 정치인들은 이제 결단을 내려야 한다. 기업을 위해 비정규직을 양산할 것인지, 노동자를 위해 비정규직을 줄이고 정규직화를 추진할 것인지 말이다. 사회는 시민들이 충분한 노동의 기회를 찾도록 도와야 한다. 또 노동에 대한 보수는 노동조건과 공동선을 고려해 본인과 그 가족의 물질적, 문화적, 정신적 생활을 품위 있게 영위할 수 있게 제공돼야 한다.
금융경제가 부를 독점하는 문제도 살펴봐야 한다. 세계적으로 금융경제는 실물경제를 키우는 본연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제 살만 찌우고 있다. 이로 인해 경제성장의 열매가 사회 각층에 골고루 배분되지 못하고 일부 자본가에게 편중되는 것이다. 사회적 약자와 연대성 차원에서 볼 때 이주민 등 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차별도 심각하다.
우리 평신도들은 정의로운 사회질서를 위해 일할 직접적 의무가 있다. 평신도들은 국민 개인자격으로 공익에 참여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평신도들은 경제, 사회, 입법, 행정,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조직적, 제도적으로 공동선을 증진시켜야 할 의무가 있다. [평화신문, 2011년 12월 18일]
명동성당 대림특강 (3) 이웃과 함께하는 사회교리 사랑은 상처받는 것을 허락하는 것
저는 망막색소변성증이라는 병을 앓고 있다. 이 병을 앓는 사람들은 하루하루가 절망의 늪이다. 언제일지 모르나 결국 실명하게 될 것을 알기 때문이다. 마치 사형선고를 받은 느낌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중도장애인이 되면 '공황-거부-분노 폭발'의 심리적 변화를 겪게 된다. 제가 강력히 분노하고 절망하던 때 아내가 뇌종양에 걸려 수술을 받았다. 당시는 제 시력이 조금 남아있을 때였는데 아내는 자신의 병석만 지키지 말고 머지않아 완전히 실명하기 전에 여행이라도 다니면서 아름다운 것, 좋은 추억을 많이 담아두라고 권했다.
그때 우연히 공지영 작가의 수필집에서 '사랑은 상처받는 것을 허락하는 것'이라는 사랑에 관한 아주 멋진 정의를 발견했다. 그렇다. 나는 내 병, 내가 상처받는 것을 허락하지 못해서 무려 5년을 절망 속에 살았는데, 뇌종양에 걸린 아내는 오히려 제 상처를 다 끌어안아 받아들이고, 자신의 아픔보다 제 고통을 먼저 염려했다.
지난해에 아주 감동적 사랑을 받았다. 천안에 사는 40대 근육병 환자가 제게 안구를 기증하겠다고 했다. 그분은 사지가 마비돼 움직일 수조차 없는 분이었다. 그분 말씀을 듣고 하염없이 울었다. 하지만 안구를 받을 수 없었다. 의학적으로 가능하지 않고, 이미 이식받은 것이나 다름없는 큰 사랑을 받았다고 말씀드렸다.
요즘은 아홉을 가진 사람이 열을 채우려고, 하나밖에 갖지 못한 사람의 것을 욕심내는 시대라고 한다. 그런데 하나밖에 갖지 못한 그분은 저를 위해 남은 하나를 내어주겠다고 했다. 이미 아홉을 잃은 자신에게 하나는 있으나마나 하기에 이 하나만 있으면 완벽해지는 다른 사람에게 주고 싶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제가 아홉이나 갖고 있다는 것을 미처 몰랐다.
우리는 이기심과 갖은 욕망으로 이 세상을 매우 추악하고 위험한 곳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토록 많은 예술인, 현자들이 사랑을 외치는 이유는 그만큼 세상에 사랑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사회는 곧 모순'이라고 생각한다. 부모들 역시 사랑이란 이름으로 자녀들에게 이기심과 부조리한 모순을 강요하고 있다. 정말 모순이다. 이런 모순된 사회에서 '우리가 어떻게 사랑을 실천하고 표현할 것인가'하는 문제의 해답을 얻으려면 끊임없이 주님을 생각하면서 묵상해야 한다. 그리고 기도해야 한다. 그것만이 해답이다. '사랑은 상처받는 것을 허락하는 것'이라고 했다. 주님께서 바로 우리에게 그렇게 오시지 않았나.
사랑하는 그분이 오시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기에 대림시기는 가장 감미롭고 희망에 찬 시기다. 그렇다면 우리는 마음속에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맞을 채비를 어떻게 해야 할까. 마음속에 늘 쌓여있는 욕심과 욕망 같은 먼지들을 청소해야 할 것이다. 누군가로부터 상처받는 것이 두려워 그 사람을 멀리하는 이기적 마음을 정리해야 할 것이다.
나는 지금 몇 개나 갖고 있을까. 갖고 있는 것에 감사함보다는 어제 잃어버린 것에 대한 안타까움, 억울함을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가진 것보다 남이 가진 것이 더 커 보여서 배 아파한 적은 없는가. 상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억울해 하지는 않나. 이런 것들에 대해 좀 더 깊이 묵상하면서 그분을 맞이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교리의 핵심인 사랑을 실천할 때 정말 소중한 것은 내가 상처받는 것을 허락하는 것이라고 했다. 누군가 나를 음해하고 매도하고 이유 없이 손가락질하더라도 결국 '내 탓이오'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 신앙인들이 가져야 할 사랑이라고 거듭 강조하고 싶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늘 그 상처를 받아들이지 못해 고통 속에서만 살게 된다.
주님 사랑 안에서 사는 우리가 남을 배려하지 못해, 상처받는 것을 허락하지 못해 고통스러워한다면 참으로 슬픈 일이다. 문제는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고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저 주님이 가르쳐주신 대로 사랑을 실천하며 살고 싶다. 그것이 잘 안 되는 것은 제 욕심 때문이다.
[평화신문, 2011년 12월 25일, 정리=서영호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