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40. 탁실라 달마라지카·쿠나라 대탑
왕자의 슬픈 전설 깃든 쿠나라 대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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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라 스투파> |
사진설명: <대당서역기>에 의하면 부처님이 보살일 당시 깨달음을 구하고자 머리를 잘라 남에게 베풀었던 곳에 아쇼카왕이 세운 탑이 바로 이 탑이다. 탁실라란 지명도 여기서 비롯됐다고 한다. |
실크로드 길목에 위치한 간다라는 “동서 문화의 교차점이자, 중앙아시아 여러 민족들이 그들의 힘을 과시했던 격전장”이었다. 만년설로 뒤덮인 카라코람 연봉(連峰)을 저 멀리 두고, 가깝게는 폐샤와르에서 스와트로 넘어가는 맬라칸트 고개를 병풍삼아 펼쳐진 간다라 유적지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곳이 바로 탁실라 지역. 2002년 4월20일 ‘한국불교 원류를 찾아’ 취재팀은 ‘그 유명한’ 탁실라에 도착했다.
탁실라의 산스크리트어는 ‘Taksasila’(탁샤실라), 축찰시라(불국기)·달차시라(대당서역기)·득차시라(아육왕전) 등으로 한역(漢譯)된다. ‘Taksa’(탁샤)는 ‘절(截. 자르다)’이고 ‘Sila’(실라)는 ‘두(頭. 머리)’, 즉 ‘머리를 자른 곳’이란 의미다. 당나라 현장스님(?~664)은〈대당서역기〉에서 “달차시라국의 둘레는 2천여 리이며, 나라의 큰 도성 둘레는 10여리다. 토지는 비옥하며 농사의 수확물도 매우 많다. 삼보를 받들고 있으며 가람의 수는 많지 않지만, 아주 많이 황폐해졌고 무너졌다. 승도는 아주 적은데 모두 대승을 공부하고 있다”고 적었다. 법현스님(317~419)은〈불국기〉에서 “축찰시라란 중국어로 ‘머리를 자른다’는 뜻이다. 부처님이 보살로 계실 때 여기서 머리를 남에게 베푸셨다. 그래서 이런 이름을 갖게 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쇼카왕이 세운 사리탑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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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아쇼카왕이 건립한 84,000기의 사리탑 중 하나로 여겨지는 달마라지카 대탑. |
수십만 평이나 되는 탁실라 지역 곳곳에 수많은 유적들이 흩어져 있는데, ‘도시 유적’과 ‘사원 유적’이 대부분이다. 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 침입 때부터 조성되기 시작한 탁실라 도시 유적들은, 1913년부터 거의 10년 가까이 조사되는 도중 많은 새로운 사실들을 토해냈다. 탁실라에서 중요한 도시 유적은 비르마운드와 시르캅, 그리고 시르숙. 비르마운드 유적은 알렉산더 침입 때부터(기원전 327년) 박트리아 말기까지의 도시 유적이고, 시르캅은 사카족과 파르티아가 세운 도성유적. 반면 쿠샨왕조 당시의 도시 유적이 시르숙이다. 불교 유적으로는 쿠나라 대탑, 모란모라두 사원지, 죠우리안 사원지, 달마라지카 대탑, 카라완 유적 등이 손꼽힌다.
탁실라 곳곳에 흩어진 수많은 유적 가운데 비교적 창건 연대를 정확하게 밝힐 수 있는 가람 유물이 있다면, 아쇼카왕이 세운 84,000기 사리탑 중 하나로 추정되는 ‘달마라지카 대탑과 주변지역’이다. 탁실라에 도착했다는 기쁨을 잠시 진정하고 달마라지카 대탑으로 이동했다. 날씨는 뜨거웠고, 도로는 한산했다. 포장도로로 한참 달리자 비포장도로가 나왔다. 달마라지카 대탑으로 들어가는 입구 도로는 포장공사 중이었다. 먼지를 마시며 걷는데 대탑 유적이 저 멀리 보였다. 차에서 내려, 흐르는 냇물을 건너 언덕을 올라갔다. ‘그렇게 참배하고 싶었던’ 대탑이 거기 있었다.
직경 33m, 높이 13.7m인 달마라지카 대탑의 동서남북에는 계단이 마련돼 있었다. 대탑 주변엔 팔각평면의 봉헌탑(奉獻塔)과 사당 혹은 승방으로 추정되는 시설물들이 배치돼 있고, 그 사이로 통로가 보였다. 발굴 자료에 의하면 대탑은 당초 소규모였으나, 기원후 1세기경 이뤄진 보수공사 후 확대·보강돼 지금과 같은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게 됐다. 수많은 불상과 파편들이 여기서 발견됐고, 지금도 무수한 불상이 대탑 주변에 봉안돼 참배객들을 기다리고 있다. 유적지를 천천히 돌며 그 옛날 수행자들이 수행하던 모습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지금은 ‘이슬람의 땅’. ‘과거는 과거일 뿐이지만, 무엇 때문에 이슬람 땅으로 변하고 말았을까.’ 또 다시 쓸데없는 상념이 전신을 휘감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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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아쇼카왕의 아들이자 계모 때문에 눈을 잃은 쿠나라 왕자의 슬픈 전설이 깃든 쿠나라 대탑. |
슬픔만 가득 안은 채 ‘쿠나라 대탑’으로 갔다. 시르캅 도시 유적을 가로질러, 밀이 심어진 논둑을 지나 탑에 올랐다. 저 멀리 탁실라 시내가 한 눈에 들어왔다. 참으로 멋진 풍광을 가진, 대단히 웅장한 규모를 가진 탑이었다. 탁실라 지역을 대대적으로 발굴한 영국 고고학자 마샬(Marshall)이 지은〈탁실라 안내〉에 의하면 이 탑은 쿠나라 왕자의 슬픈 전설이 깃든 곳.〈아육왕전〉제4 ‘쿠나라 본연’과〈아육왕경〉제4 ‘쿠나라 인연품’ 등에 따르면 쿠나라의 계모 제실라차(帝失羅叉. 아쇼카왕이 왕비)는 눈이 아름다운 쿠나라 왕자를 유혹했지만, 왕자는 넘어가지 않았다. 앙심을 품은 왕비는 아쇼카왕에게 무고(誣告)해 왕자를 탁실라 지역으로 보냈고, 그것도 모자라 왕자의 두 눈마저 뽑히도록 음해했다. 후일 아쇼카왕이 사실을 알고 왕비를 징벌했지만 그 때는 이미 왕자의 눈(眼)이 사라진 뒤였다.
계모 왕비가 쿠나라 왕자 음해
쿠나라 왕자의 슬픈 운명을 생각하며 ‘발라(Bhallar) 스투파’로 향했다. 당나라 현장스님이 남긴〈대당서역기〉엔 이 탑에 관한 기록이 있다. “성 북쪽 12~13리 떨어진 곳에 스투파가 있는데, 무우왕(아쇼카왕)이 지은 것이다. 어떤 때는 재일에 간혹 빛을 발하거나 신기한 꽃과 하늘의 음악이 있어 이것을 보거나 듣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중략)…이곳은 옛날 여래께서 머리를 잘라 베푸는 등 보살행을 닦으셨던 곳이다.” 한 때는 수많은 기도객들이 참배한 탑이었는데, 지금은 바로 옆에 철로가 뚫린, 그런 모습을 하고 있었다. 참배하러 가는 우리를, 탑 아래서 양봉(養蜂)하는 한 파키스탄 가족이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들에게 불교는 이미 의미 없는 종교. 그런 종교 유적에 올라가는 사람들이 이상하게도 보였으리라. 폐허로 변한 탑을 보고 ‘무상(無常)의 진리’만 절감한 채 내려와 다음 길을 재촉했다.
■ 탁실라박물관장 아쉬랍 칸 박사
“불상은 그리스 영향 아닌
간다라의 독자적 예술”
“인도문명권에 속하면서도 북쪽에 위치한 지리적 관계로 간다라는 일찍부터 그리스·로마와 교류가 있었고, 쿠샨족·훈족 등도 이 지역에 들어왔다. 그리스·로마의 영향을 받아 불상이 탄생됐다고 영국 프랑스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불상은 간다라 지역 자체의 아이디어에 의해 탄생됐다.”
지난 4월20일 탁실라박물관에서 만난 아쉬랍 칸 박물관장은 “불상은 간다라 지역의 독자적인 아이디어에 의해 조성됐다”고 강조했다. 칸 박사의 주장은 이렇다. 간다라 불교미술을 낳은 것은 인도 파르티아의 영향을 받은 쿠샨족. 역사적으로 봐도 알렉산더의 침입(기원전 326~325) 후 인도계 마우리아 왕조(기원전 321~297)가 이 지역을 지배했고, 마우리아 왕조가 멸망하자 그리스계 박트리아가 다스렸고, 이어 인도 파르티아가 간다라를 차지했다. 그리스계가 머물렀던 것은 2백년 정도. 때문에 전적으로 그리스 영향으로 불상이 탄생됐다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 “그리스·로마의 영향을 받았다면, 알렉산더가 간다라 지역에 들어왔을 때 이미 불상이 만들어졌어야 옳다”는 것이다.
칸 박사는 또 간다라와 인도 마투라 중 “간다라에서 불상이 먼저 탄생됐다”고 주장했다. 간다라 지역에서 대승불교가 흥기했고, 대승불교는 처음으로 부처님을 인간의 형태로 만들기 시작했다. 특히 당시 인도 교단은 불상 만드는 것을 금하고 있었기에 마투라에서 불상이 탄생될 이유가 희박하다는 설명. ‘간다라 탄생설’과 ‘마투라 탄생설’ 중 어느 지방에서 먼저 불상에 태어났는지에 대해서는 현재 이론이 분분한 상태다.
탁실라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는 칸 박사는 프랑스에서 간다라 미술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간다라 전문가. ‘한국불교 원류를 찾아’ 취재팀은 칸 박사의 도움으로 탁실라박물관에 전시중인 모든 유물들을 촬영할 수 있었고, 탁실라 지역 답사를 보다 편안하고 쉽게 마칠 수 있었다.
파키스탄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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