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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駙馬, 황제·왕의 사위
엄밀하게는 천자의 딸과 결혼한 남자를 말한다. 즉, 공주/옹주의 남편이자 임금의 사위를 말한다.
1.2. 역할과 지위[편집]
풀네임인 '부마도위'(駙馬都尉)는 천자의 행차 때 갑작스런 암살의 위협을 막기 위해서 어느 마차에 천자가 탔는지 모르도록 동행하는 예비 마차인 '부거'(副車)를 끄는 말인 '부마'(駙馬)를 관리하던 직책이다. 현대 사회의 직책과 비교하자면, '대통령 경호실 2호차 관리 및 선탑자' 정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일이라곤 그냥 아랫사람 시켜서 왕이 타는 마차를 관리하다가 황제의 행차가 있으면 선탑하는게 주요 임무인, 놀고먹기 딱 좋은 고대의 땡보직 중의 땡보직이다. 하지만 매우 중요한 직책인 것이, "행차 때 황제가 몇번째 마차에 타고 있는가?" 라는 초특급 기밀을 관장했기 때문이다.
이런 초특급 기밀이 유출된다는 것은 황제의 목숨이 위험해진다는 뜻이다. 실제로 진나라 때 장자방과 창해 역사의 시황제 암살기도가 실패했던 것은 박랑사에서 부거를 잘못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하는 일도 별로 없으면서도 위세 하나는 정말 대단했다. 그런데 난세가 되면 황제의 측근이라고 매수되어 기밀을 발설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으니까, 서진의 무제 사마염이 이 직책에다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공주의 남편인 사위를 직접 임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천자의 사위만이 부마도위 직책을 하도록 굳어지면서 결국에는 '부마도위=천자의 사위'가 된 것이다. 그 뒤에는 그나마 맡던 역할도 희미해져서 사실상 명예직에 가깝도록 변하였다. 물론 위세는 어디 가지 않았다. 비슷한 것으로는 천자의 외숙에게 주어지던 '거기장군'(車騎將軍)이 있었다.
상위 버전으로 여왕의 남편인 '국서'가 있다. 다만 한국사의 경우 여왕이 신라시대에 세 명 있었을 뿐이고 그나마도 독신이거나 정식으로 혼인하지 않았거나 혼인 여부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한국사에 한해서는 의미없는 용어이다. 여왕이 종종 나왔던 서양사에 관련해서 주로 쓰이는데 그나마도 여왕의 남편을 무조건 국서라고 하지 않기 때문에 대개는 그냥 여왕의 남편이라는 식으로 풀어쓰는 편이다.[1]
한편 한 나라 안의 왕실과 일반 귀족 가문 사이나, 천자국의 왕가와 제후국의 왕가 사이처럼 명백하게 급간 차이가 나는 경우가 아니라 일반적인 국가 관계에서 타국의 공주와 결혼했을 때는 부마라고 하지 않는다. 사실 '부마'라는 용어 자체가 위에서 설명된 어원을 봐도 알 수 있듯이 국내에서 공주가 자신보다 신분이 낮은[2] 신하와 결혼한 경우에 사용되는 동아시아적인 용어이기 때문에, 비슷한 급의 왕족끼리 겹겹이 중첩된 혼인 관계를 맺는 것이 다반사인 서양 왕족의 결혼과 관련해서 쓰는 것은 부적절하다.
1.3. 한국사에서[편집]
신라에서는 적자가 없거나 순서를 양보하는 경우 부마가 왕위를 잇기도 했다. 신라 왕위를 성씨가 다른 박, 석, 김이 번갈아가며 한다고 알려져 있는데, 성이 바뀌는 부분은 대부분 전왕의 사위로서 왕위를 이은 형태이다.[3][4] 국성이 바뀐다는 개념이라 신라 이외 중세 이후의 흔한 동아시아 왕조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형태이기도 하다.
한편 나말 여초 후백제의 장수 박영규는 견훤의 사위이자 태조 왕건의 사돈, 제3대 정종의 장인이 되었다.
한국사에서 부마가 가장 자주 언급되는 시대는 고려시대이다. 원 간섭기 동안 고려의 왕들은 원나라의 부마(몽골어: 쿠르겐, 페르시아어: 귀르겐)였다. 충렬왕이 제국대장공주[5]와 결혼한 것을 시작으로, 고려 제1왕비는 원나라 공주가 차지했다. 왕위도 원나라 공주가 낳은 아들이 물려받았고, 그 아들 또한 원나라 공주와 결혼했다. 원나라의 입김이 강하다보니 원나라 출신인 왕비와 그 수족들의 힘도 강해서 고려인들은 한 수 접고 들어가야 했다. 원나라 출신인 왕비들은 막강한 친정을 등에 업고 횡포를 부렸으며, 노국대장공주[6]를 제외한 대부분이 남편인 고려 국왕까지 업신여겼다.[7]
상위 버전으로 여왕의 남편인 '국서'가 있다. 다만 한국사의 경우 여왕이 신라시대에 세 명 있었을 뿐이고 그나마도 독신이거나 정식으로 혼인하지 않았거나 혼인 여부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한국사에 한해서는 의미없는 용어이다. 여왕이 종종 나왔던 서양사에 관련해서 주로 쓰이는데 그나마도 여왕의 남편을 무조건 국서라고 하지 않기 때문에 대개는 그냥 여왕의 남편이라는 식으로 풀어쓰는 편이다.[1]
한편 한 나라 안의 왕실과 일반
조선의 경우에는 세조 때부터 '의빈'(儀賓)이라고 하고, 의빈부(儀賓府)에서 관장했는데, [8] '예의를 갖춘 손님'이란 뜻으로 사위를 흔히 '(백년)손님'이라 부르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공주의 남편은 종1품 ○○위(尉), 옹주의 남편은 종2품 ○○위(尉), 군주의 남편은 정3품 ○○부위, 현주의 남편은 종3품의 ○○첨위로 봉했다. ○○에는 부마의 본관 내지 그곳에서 따온 칭호가 들어간다.[9]
참고로 공주는 왕의 적녀(嫡女)로 무품, 옹주는 왕의 서녀(庶女)로 무품, 군주는 세자의 적녀로 정2품, 현주는 세자의 서녀로 정3품 작위다. 옹주의 남편인 도위나 부위, 첨위도 업적에 따라서 의빈부 최고 품계인 유록대부(정1품)에 오를 수 있었다. 고종 6년에 공주와 옹주의 남편인 위는 정1품으로, 세자의 적녀인 군주의 남편인 부위는 종1품으로, 역시 세자의 서녀인 현주의 남편인 첨위도 종1품으로 승격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왕의 사위인 만큼 그 대우가 각별하고 왕실에서 넉넉하게 지원을 해주기 때문에 편하게 살 수는 있다. 그러나 처신을 잘못해서 정쟁에 휘말리거나 배짱이 두둑해져 바람을 피다가 장인에게 걸려 혼쭐나는 경우도 있었다. 게다가 조선 왕조의 경우 부마는 정책적으로 명예직 외엔 벼슬을 받을 수 없었다. 그래서 가끔 왕명을 받아 공문서를 작성하고 의전을 맡거나, 중국에 사신으로 파견[10][11] 되는 등 실권 없는 얼굴마담 역할만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내가 왕녀이다 보니 아내가 살아있을 때는 첩을 둘 수 없었고 아내가 죽었다고 해도 후처를 맞이하지 못하고 그대로 홀아비로 살아야 했다.[12] 간혹 왕의 허락을 받아 재혼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숙종 때 효종의 4녀 숙정공주가 요절한 후 숙정공주의 남편 정재륜[13]이 재혼할 것을 청한 것을 물리치면서 이를 계기로 부마의 재혼 금지가 법제화되었다. 만약 공주가 일찍 죽었는데 후사가 없으면 무조건 양자를 들여야 했다.[14]
조선 후기에 왕녀들이 단명하면서 어린 나이부터 수절하는 부마가 늘어났다. 혼인하고 3개월만에 아내 영혜옹주가 죽어 홀아비가 된 박영효가 대표적인 케이스다. 부마는 재혼을 못한다는 관념이 얼마나 강력했는지, 심지어 조선이 멸망한 뒤로도 후처를 들이지 못했고, 죽어서도 정실부인 영혜옹주의 곁에 묻혔다. 그나마 고종이 그를 배려하여 영혜옹주가 하가할 당시 몸종으로 데려갔던 궁녀들을 첩으로 삼을 수 있게 해주어 일제가 내린 후작 작위를 계승할 자손은 남길 수 있었다. 그 후손들 중 한 명이 흥영군 이우 공의 부인인 박찬주 여사이다.
공주건 옹주건 품계를 초월한 자가(自家)들이라 남편과 시부모조차 며느리를 받들어 모셔야 한다.[15][16] 실직을 맡을 수 없으니 출셋길도 막히고, 재수 옴 붙으면 정종처럼 정치적 문제에 휘말려 끔살당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부마가 되는 것을 반기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의 부마(몽골어: 쿠르겐, 페르시아어: 귀르겐)였다. 충렬왕이 제국대장공주[5]와 결혼한 것을 시작으로, 고려 제1왕비는 원나라 공주가 차지했다. 왕위도 원나라 공주가 낳은 아들이 물려받았고, 그 아들 또한 원나라 공주와 결혼했다. 원나라의 입김이 강하다보니 원나라 출신인 왕비와 그 수족들의 힘도 강해서 고려인들은 한 수 접고 들어가야 했다. 원나라 출신인 왕비들은 막강한 친정을 등에 업고 횡포를 부렸으며, 노국대장공주[6]를 제외한 대부분이 남편인 고려 국왕까지 업신여겼다.[7]
명된 어원을 봐도 알 수 있듯이 국내에서 공주가 자신보다 신분이 낮은[2] 신하와 결혼한 경우에 사용되는 동아시아적인 용어이기 때문에, 비슷한 급의 왕족끼리 겹겹이 중첩된 혼인 관계를 맺는 것이 다반사인 서양 왕족의 결혼과 관련해서 쓰는 것은 부적절하다.
1.3. 한국사에서[편집]
신라에서는 적자가 없거나 순서를 양보하는 경우 부마가 왕위를 잇기도 했다. 신라 왕위를 성씨가 다른 박, 석, 김이 번갈아가며 한다고 알려져 있는데, 성이 바뀌는 부분은 대부분 전왕의 사위로서 왕위를 이은 형태이다.[3][4] 국성이 바뀐다는 개념이라 신라 이외 중세 이후의 흔한 동아시아 왕조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형태이기도 하다.
한편 나말 여초 후백제의 장수 박영규는 견훤의 사위이자 태조 왕건의 사돈, 제3대 정종의 장인이 되었다.
를 이은 형태이다.[3][4] 국성이 바뀐다는 개념이라 신라 이외 중세 이후의 흔한 동아시아 왕조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형태이기도 하다.
한편 나말 여초 후백제의 장수 박영규는 견훤의 사위이자 태조 왕건의 사돈, 제3대 정종의 장인이 되었다.
한국사에서 부마가 가장 자주 언급되는 시대는 고려시대이다. 원 간섭기 동안 고려의 왕들은 원나라의 부마(몽골어: 쿠르겐, 페르시아어: 귀르겐)였다. 충렬왕이 제국대장공주[5]와 결혼한 것을 시작으로, 고려 제1왕비는 원나라 공주가 차지했다. 왕위도 원나라 공주가 낳은 아들이 물려받았고, 그 아들 또한 원나라 공주와 결혼했다. 원나라의 입김이 강하다보니 원나라 출신인 왕비와 그 수족들의 힘도 강해서 고려인들은 한 수 접고 들어가야 했다. 원나라 출신인 왕비들은 막강한 친정을 등에 업고 횡포를 부렸으며, 노국대장공주[6]를 제외한 대부분이 남편인 고려 국왕까지 업신여겼다.[7]
조선의 경우에는 세조 때부터 '의빈'(儀賓)이라고 하고, 의빈부(儀賓府)에서 관장했는데, [8] '예의를 갖춘 손님'이란 뜻으로 사위를 흔히 '(백년)손님'이라 부르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공주의 남편은 종1품 ○○위(尉), 옹주의 남편은 종2품 ○○위(尉), 군주의 남편은 정3품 ○○부위, 현주의 남편은 종3품의 ○○첨위로 봉했다. ○○에는 부마의 본관 내지 그곳에서 따온 칭호가 들어간다.[9]
참고로 공주는 왕의 적녀(嫡女)로 무품, 옹주는 왕의 서녀(庶女)로 무품, 군주는 세자의 적녀로 정2품, 현주는 세자의 서녀로 정3품 작위다. 옹주의 남편인 도위나 부위, 첨위도 업적에 따라서 의빈부 최고 품계인 유록대부(정1품)에 오를 수 있었다. 고종 6년에 공주와 옹주의 남편인 위는 정1품으로, 세자의 적녀인 군주의 남편인 부위는 종1품으로, 역시 세자의 서녀인 현주의 남편인 첨위도 종1품으로 승격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왕의 사위인 만큼 그 대우가 각별하고 왕실에서 넉넉하게 지원을 해주기 때문에 편하게 살 수는 있다. 그러나 처신을 잘못해서 정쟁에 휘말리거나 배짱이 두둑해져 바람을 피다가 장인에게 걸려 혼쭐나는 경우도 있었다. 게다가 조선 왕조의 경우 부마는 정책적으로 명예직 외엔 벼슬을 받을 수 없었다. 그래서 가끔 왕명을 받아 공문서를 작성하고 의전을 맡거나, 중국에 사신으로 파견[10][11] 되는 등 실권 없는 얼굴마담 역할만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내가 왕녀이다 보니 아내가 살아있을 때는 첩을 둘 수 없었고 아내가 죽었다고 해도 후처를 맞이하지 못하고 그대로 홀아비로 살아야 했다.[12] 간혹 왕의 허락을 받아 재혼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숙종 때 효종의 4녀 숙정공주가 요절한 후 숙정공주의 남편 정재륜[13]이 재혼할 것을 청한 것을 물리치면서 이를 계기로 부마의 재혼 금지가 법제화되었다. 만약 공주가 일찍 죽었는데 후사가 없으면 무조건 양자를 들여야 했다.[14]
조선 후기에 왕녀들이 단명하면서 어린 나이부터 수절하는 부마가 늘어났다. 혼인하고 3개월만에 아내 영혜옹주가 죽어 홀아비가 된 박영효가 대표적인 케이스다. 부마는 재혼을 못한다는 관념이 얼마나 강력했는지, 심지어 조선이 멸망한 뒤로도 후처를 들이지 못했고, 죽어서도 정실부인 영혜옹주의 곁에 묻혔다. 그나마 고종이 그를 배려하여 영혜옹주가 하가할 당시 몸종으로 데려갔던 궁녀들을 첩으로 삼을 수 있게 해주어 일제가 내린 후작 작위를 계승할 자손은 남길 수 있었다. 그 후손들 중 한 명이 흥영군 이우 공의 부인인 박찬주 여사이다
1.5. 항목이 작성된 부마 목록[편집]
1.5.1. 실존인물[편집]
공민왕: 원나라 노국대장공주의 남편.
김용수[29]: 신라 천명공주의 남편. 진평왕의 부마.
김품석: 신라 고타소공주의 남편. 태종 무열왕의 사위이지만 김춘추가 무열왕으로 즉위하기 전 죽어서 부마는 아님.
김흠운: 신라 요석공주의 남편. 태종 무열왕의 부마.
김유신: 신라 지소공주의 남편. 태종 무열왕의 부마.
도쿠가와 이에모치: 닌코 덴노의 부마. 가즈노미야 지카코 내친왕의 남편.
금릉위 박영효: 조선 철종의 부마. 영혜옹주의 부군. 경술국치 후 조선귀족이 되어 후작이 된다.
석탈해: 남해 차차웅의 부마. 아효부인의 남편.
소배압: 요나라 경종의 차녀인 위국공주(魏國公主)[30] 야율장수녀(耶律長壽女)의 남편
소손녕: 요나라 경종의 3녀인 조국공주(趙國公主)[31] 야율연수녀(耶律延壽女)의 남편
시소: 당나라 평양공주의 남편.
심문화(沈文和, ? ~ 478년) : 남조 제나라의 초대 황제 소도성(蕭道成, 427년 ~ 482년)의 부마(駙馬)로 소도성의 장녀 의흥헌공주(義興憲公主)의 남편이다. 남조 송나라 때 중서시랑(中書侍郎)에 이르렀다. 남조 송나라의 형주자사 심유지(송나라 태위 심경지의 사촌)의 아들이다.
심군리(沈君理, 525년 ~ 573년) : 남조 진나라 초대 황제 무제 진패선(武帝 陳霸先)의 부마(駙馬)이자 진나라 마지막 황제 후주 진숙보(後主 陳叔寶)의 국구(國舅)이다. 후주황후 심무화(後主皇后 沈婺華)의 아버지이며, 폐태자 오흥왕 진윤(廢太子 吳興王 陳胤)의 외조부이다. 망채정헌후(望蔡貞憲侯)에 봉작되었으며 진패선의 딸 회계목공주의 남편이다. 남조 진나라 때 시중(侍中)과 의동삼사에 이르렀다. 불교 천태종의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
심명(沈明) : 당나라 제8대 황제 대종 이예(唐 代宗 李豫)의 부마(駙馬)로 대종의 8녀 장림공주(長林公主)의 남편이다.
심휘(沈翬) : 당나라 제10대 황제 순종 이송(唐 順宗 李誦)의 부마(駙馬)로 순종의 4녀 서하공주(西河公主)의 남편이다. 대종의 황후 예진황후 심씨(睿眞皇后 沈氏)의 5촌 당질(堂姪)이다.
심의(沈礒) : 당나라 제11대 황제 헌종 이순(唐 憲宗 李純)의 부마(駙馬)로 헌종의 6녀 선성공주(宣城公主)의 남편이다.
심분(沈汾) : 당나라 제11대 황제 헌종 이순(唐 憲宗 李純)의 부마(駙馬)로 헌종의 8녀 남강공주(南康公主)의 남편이다.
심익현 : 효종의 2녀인 숙명공주의 남편. 청평도위에 봉해졌다. 영의정 심지원의 아들
심종 : 태조 이성계의 2녀인 경선공주의 남편. 청원군에 봉해졌다. 좌정승 청성백 심덕부의 아들. 세종의 장인 영의정 청천부원군 심온의 동생
심안의 : 세종의 서4녀인 정안옹주의 남편. 청성위 광덕의빈부의빈에 봉해졌다. 세종의 장인 영의정 심온의 형 경창부윤 심징의 증손자
심능건 : 영조의 서11녀인 화령옹주의 남편. 청성위에 봉해지고 종척집사를 지냈다. 이조판서 심택현의 증손자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 메이지 덴노와 측실 소노 사치코의 8녀 후미노미야 노부코(富美宮允子) 공주의 남편. 난징대학살의 총지휘관.
온달: 평원왕의 부마이자 평강공주의 부군. 부마 중에서 유명한 부마.
이브라힘 파샤: 쉴레이만 1세의 여동생 하티제 술탄의 남편으로, 오스만 제국에서 황녀와 결혼한 사람에게 붙이는 별명인 다마트를 앞에 붙여 다마트 이브라힘 파샤로도 불렸다. 다만 취소선이 쳐진 건 최근의 연구 결과 때문인데, 하티제가 아니라 고관인 이스켄데르 파샤의 손녀 무시네 하툰이 아내였다는 학설이 점점 힘을 얻고 있는 추세다.
이제 - 태조 이성계와 신덕왕후 강씨의 딸인 경순공주의 남편. 제1차 왕자의 난에 연루되어 비명에 간다.
장성택: 북한 김일성 수령의 부마.
영양위 정종: 문종의 부마. 경혜공주의 부군. 훗날 단종복위운동에 연루되어 처형.
전종: 오나라의 초대 황제 손권의 부마이자 손노반의 남편.
조대림: 태종의 부마이자 조준의 아들. 조대림 사건의 주인공.
찰스 브랜던: 잉글랜드 공주 메리 튜더의 남편.
충렬왕: 원나라 제국대장공주의 남편. 비록 후궁 소생이지만 자그마치 황제(대칸)의 딸을 부인으로 둔다.
충선왕: 원나라 계국대장공주의 남편.
충숙왕: 원나라 복국장공주, 조국장공주, 경화공주의 남편.
충혜왕: 원나라 덕녕공주의 남편.
토머스 하워드: 잉글랜드 요크의 앤의 남편
하후무: 위왕 조조의 딸 청하공주의 남편.
영안위 홍주원: 조선 정명공주의 남편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 메이지 덴노와 측실 소노 사치코의 9녀 야스노미야 도시코(泰宮聰子) 공주의 남편. 나루히코의 장남 모리히로(盛厚)도 쇼와 덴노의 장녀 데루노미야 시게코 공주와 결혼하여 부마가 되었다.
부찰 경수: 청나라 도광제의 6녀이자 공친왕 혁흔의 누나인 수은고륜공주의 남편. 그는 도광제의 아들 함풍제가 죽었을 때 고명대신 8명 중 1명이 되었다가, 신유정변 때 관직에서 쫓겨났다. 후에 아들인 부찰 지단도 서태후의 양녀 영수고륜공주의 남편이 되어 부마가 되었다.
***
시게코 공주와 결혼하여 부마가 되었다.
부찰 경수: 청나라 도광제의 6녀이자 공친왕 혁흔의 누나인 수은고륜공주의 남편. 그는 도광제의 아들 함풍제가 죽었을 때 고명대신 8명 중 1명이 되었다가, 신유정변 때 관직에서 쫓겨났다. 후에 아들인 부찰 지단도 서태후의 양녀 영수고륜공주의 남편이 되어 부마가 되었다.
1.5.2. 가상인물[편집]
곤돌랜드의 마지 - 밥: 실비아 공주의 남편.
대항해시대 시리즈 - 레온 페레로
라이온 킹 2 - 코부: 결말에 프라이드 랜드의 공주 키아라와 짝으로 맺어진다.
라푼젤 - 플린 라이더: 코로나 왕국의 공주 라푼젤과 결혼한다.
레드슈즈 - 멀린: 화이트 왕국의 공주 스노우와 결혼한다.
뮬란 2 - 링, 야오, 치엔포: 셋 다 후속편에서 공주들인 팅팅, 메이, 수와 이어진다.
슈렉 시리즈 - 슈렉: 겁나먼 왕국의 공주 피오나의 남편.
알라딘 - 알라딘: 아그라바 왕국의 공주 자스민과 결혼한다.[32]
원피스
퀴로스: 드레스로자의 공주 스칼렛의 남편.
스테리: 고아 왕국의 공주 셀리와 결혼해 고아 왕국의 왕이 되었다.
인어공주 - 에릭: 아틀란티카의 공주 에리얼의 남편.
전하와 나 - 김처선: 선혜공주와 미국으로 도피한 뒤 결혼식을 올렸다.
조선공주실록- 신홍연: 진성공주의 남편이다.
크로노 트리거 - 크로노: 가르디아의 공주 마를의 남편.
파이널 판타지 XII - 라스라 헤이오스 나브라디아: 달마스카의 공주 아셰의 남편.
프린세스
스카데이 토르: 스가르드의 공주 요피나를 왕비로 맞이했다.
야파 아르고: 아나토리아의 공주 테오도라를 왕비로 맞이했다.
표르도바 2세: 코르시카의 공주 파라를 왕비로 맞이했다.
해를 품은 달 - 허염: 성조대왕의 부마로 민화공주의 부군.
황제의 딸 - 복이강: 건륭제의 부마로 자미의 부군.
히어로메이커 - 윌리엄 아셀: 세날 왕국의 살라나 공주의 남편
킹스맨 시리즈 - 게리 에그시 언윈: 스웨덴 왕실의 틸다 공주의 부군이 된다.
왕자(페르시아의 왕자) - 클래식 시리즈 한정. 이후에는 진짜 왕자로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