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 목사님과의 대화]보수와 봉건
2000년(?) 어느날 <다음칼럼>에서 나눈 대화.
박 상익 교수님, 보수적일까요? 봉건적일까요? (김건 목사님의 글)
박상익 교수님. 따뜻한 봄 날입니다. 잘 지내고 계신지요? 요즘 강의하느라 바쁘신 텐데요.
저는 한국 기독교의 보수주의 내지 봉건적 태도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한번 전통으로 굳어진 제도들을 고칠 생각을 하지 않더군요.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질문을 던져야할 것들이 많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한국인의 심성 자체가 보수적이 아닌가? 라는 생각도 더불어 하게 되지요. 주어진 권위에 대해서 다시 뒤집어 생각해 볼 용기조차 없는 것은 아닌지.... 비록 느리지만 깊게 땅을 갈아엎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글 올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늘 건강하시길... 김 건 드림.
봉건도 보수도 못되는... (박 상익의 답글)
김건 목사님. 제가 보기에 우리나라는 역사가 너무 긴 것 같습니다. 전통의 무게가 현실을 짓누르고 있는 형국이라고나 할까요? 제가 쓴 독서노트(일본근대화론)에서도 언급했지만, 봉건제란 것도 어떤 의미에서 대단히 자율적이고 신축적인 것이어서 근대지향적인 면을 다량 함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럽에서도 봉건제를 경험한 영국과 프랑스가 근대적 발달에 앞장을 섰죠. 유럽과 일본이 이렇듯 “완전한 봉건제”를 경험했지만, 우리는 언제나 중앙집권적인 역사만을 경험했습니다.
그렇다고 보수성을 말하기에도 우리 역사는 문제가 있습니다. 에드먼드 버크는 이른바 철학적 보수주의의 원조로 불리지만 그가 보수(conserve)하고자 한 것은 명예혁명(1688) 이후의 휘그 체제였거든요. 버크가 지키려 했던 것과 우리네 소위 보수파들이 지키려 하는 것(친일, 독재, 반민주, 정경유착 등)은 엄청난 차이가 있는 거겠죠. 잘 아시는 바와 같이 그래서 ‘보수’와 ‘수구’는 전혀 다르거든요. 이렇게 볼 때 우리의 현 상황은 봉건도 보수도 못된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문득 안익태의 ‘코리안 환타지’가 생각납니다. 감당하기 힘든 무거운 짐을 지고 힘겹게 끌려가는 듯한 선율... 전통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짓눌려서 떨쳐 일어서지 못하는 늙은 노예의 여윈 허벅지... 새로운 세대에게는 그런 무거운 짐을 조금이나마 가볍게 해주어야 할 의무가, 기성세대에게 있다고 봅니다. 저는 그래서 아무런 조직도 필요치 않고 한 개인으로서도 기여할 수 있는 길을 찾게 됩니다. 죽는 날까지 몇 권의 책을 쓰고 번역할는지 알 수 없지만, 이 작업이 조금이나마 젊은 세대의 정신을 해방시키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제각기 자기가 서있는 자리에서 하나님이 주신 이성과 양심에 비추어 마땅히 해야 할 도리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인구가 점점 많아진다면 우리 사회도 조금은 미래를 낙관할 수 있지 않을는지요? 요즘은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미미한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짧은 인생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쓸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