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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형주
윤형주(尹亨柱, 본명 尹炯柱, 1947년 11월 19일 ~ )은 대한민국의 가수, 작사가, 작곡가, 편곡가, 방송인이다.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호(號)는 율성(栗成)이다.
서울에서 출생하여 서울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6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2년 후 1968년 경희대학교 의과대학으로 전학하였으나 1971년 중퇴하였다. 1968년 송창식과 함께 남성 듀엣 ‘트윈 폴리오’를 결성하여 가요계에 데뷔, 〈하얀 손수건〉, 〈축제의 노래〉, 〈웨딩 케익〉, 〈슬픈 운명〉등을 발표했다.
1970년부터는 솔로로 전향, "비와 나", "라라라(조개껍질 묶어)", "비의 나그네", "두개의 작은 별", "우리들의 이야기", "바보", "고백", "사랑스런 그대", "어제 내린 비" 등을 불렀으며 1971년에는 동아방송 심야프로인 '0시의 다이얼'과 '톱 툰 쇼'에서 MC를 맡기도 하였다. 다시 1973년엔 동아방송 '팝스 투나잇' MC를 맡았으며 1976년과 1978년엔 광고회사 '서울 오디오'와 '샘 기획'을 설립하여 운영하기도 했다.
1981년부터 그는 MBC-FM에서 '윤형주의 한밤의 데이트'의 MC를 맡았으며 기독교 방송의 환자와 장애자들을 대상으로 한 프로인 '찬양의 꽃다발'과 극동방송에서 '윤형주와 함께'의 MC를 지냈다. 그는 시인 윤동주와 시인 겸 건축학자 윤일주의 6촌 동생이기도 하다. CM송도 많이 만들었는데 롯데껌 CM, 새우깡 CM 그리고 롯데월드 테마송 역시 그가 만들었다. 2009년에는 부산 도시철도의 로고송을 작사 및 작곡하였으며, 직접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다.
포크 대중화의 기수, 뭇 소녀의 꿈에 들다
1970년대에 포크를 향유했던 중장년층은 윤형주를 비롯해 한대수, 송창식, 양희은, 김세환, 이장희, 김민기, 사월과 오월, 이연실, 서유석, 김정호 등 포크 뮤지션들이 일으킨 청바지, 통기타, 생맥주 문화에 대한 원초적인 향수를 지니고 있다. 윤형주는 그 중심에 있었던 주역이었다.
귀공자풍의 앳된 외모와 발랄한 노래로 큰 사랑을 받았던 그는 1967년 2월 송창식, 이익근 등과 세시봉 트리오를 결성해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68년 송창식과 함께 결성했던 듀오 트윈 폴리오는 포크의 대중화에 본격적인 시동을 걸었다. 대표 곡 ‘조개 껍질 묶어’, ‘두 개의 작은 별’,‘비의 나그네’,‘어제 내린 비’등은 지금도 애창되는 히트 넘버. 그의 음악은 시대와 대상을 초월해 언제나 부담없이 노래하고 들을 수 있는 편안함으로 긴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윤형주는 서울고 국어 교사와 경희대 산업대학장을 역임한 부친 윤영춘 씨와 원산의 신학교 시절 빼어난 소프라노이면서 피아노 반주자였던 모친 김귀순 씨의 장남으로 1947년 11월 19일 서울 신문로의 전 서울고 관사에서 태어났다. ‘별 헤는 밤’으로 유명한 고 윤동주 시인은 6촌 형제 간이다. 네 살때 한국 전쟁으로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성악을 했던 어머니의 영향은 컸다. 늘 집에서 음악을 들고 자란 그는 5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다. 어릴 적 별명은 앵무새. 전쟁이 끝난 54년 서울 덕수국민학교에 입학했다.
노래를 잘 했지만 내성적인 성격이었던 그는 라디오 음악 프로‘누가 누가 잘하나’에 참가했지만 많은 사람 앞에서 노래하는 것이 떨려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해 입상을 하지는 못 했다.
60년 대광중학에 입학하면서 AFKN을 통해 팝송을 처음 접했다. 그는 방과 후에는 아예 라디오를 끼고 다녔던 팝 송 마니아였다. 당시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가수는 지미 로저스와 마티 로빈스.
학업 성적이 출중했던 그는 63년 명문 경기고에 진학하면서 동대문 동신교회의 성가대원이 되었다. 당시 고 3이었던 성가대 선배 조영남과 이 때 두터운 음악 인연을 맺었다.
66년 연세대 의대에 합격하자 어머니가 기타를 선물로 건네주었다.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처럼 학업보다는 음악에 몰두했다.
“아버지가 전해 준 6촌형 시인 윤동주의 시에 감동 받아 시를 노래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어요. 그래서 연세대 최초의 록 그룹 ‘피닉스’를 결성해 TBC 대학생 재즈페스티벌에 나갔지요. 저는 베이스 기타를 맡았습니다.”
당시는 밥 딜런, 존 바에즈, 주디 콜린스 등 미국 포크 음악이 엘리트 음악으로 받아들여지던 시기. 그 해 가을 슈퍼 스타급 포크 트리오 킹스톤 트리오를 모델로 같은 연대생 이장희, 유종국과 함께 포크 트리오 라이너스를 결성했다.
대학가와 다운타운가에 노래꾼으로 알려지면서 2학년 때 젊은이의 전당이었던 세시봉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이 곳에서 서울예고 출신 송창식을 만났다.
송창식이 트리오 결성을 제안해 왔지만 오페라 ‘남몰래 흐르는 눈물’을 기타로 노래할 뿐 포크의 기본 곡도 모른 상태인지라 처음엔 거절했다.
하지만 그의 뛰어난 음악적 감성을 발견하곤 67년 11월 송창식과 연대 토목과 동급생 이익근과 함께 트리오를 결성했다.
이름은 업소의 이름을 빌여 ‘세시봉 트리오’로 정했다. 하지만 68년 2월, 이익근의 군입대로 포크 듀오 트윈폴리오로 개편되었다. 이후 몇몇 방송에서 통기타 반주로 정훈희의 ‘안개’등을 불렀다.
신선한 포크 스타일의 노래를 구사했던 이들은 ‘한국의 사이먼과 가펑클’로 불리며 단숨에 주목을 받았다. 데뷔 앨범은 펄시스터즈, 박연숙과 함께한 김인배 작편곡집으로 68년 발매. 상큼한 화음의 ‘하얀 손수건’ 등 6곡의 번안곡은 재판이 발매될 정도로 젊은 층에 큰 인기를 모았다.
또한 신중현이 음악 감독을 맡은 김응천감독의 하이틴영화 ‘푸른 교실’에 조영남, 최영희 등과 함께 출연했다. 그 해 12월 드라마센터에서 첫 리사이틀을 성공적으로 개최하며 대중속으로 파고들었다. 포크의 대중화가 시작된 셈이다.
이들은 경기여고 특활반의 초청을 받고 당시 여고 2학년이었던 양희은의 노래 반주를 해 주는 등 청소년들 속으로 파고 들었다. 69년 12월,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트윈폴리오는 느닷없이 해체를 발표했다.
완고한 교육자 집안의 반대 속에 어렵게 음악 활동을 했던 윤형주가 학업 때문에 경희대 의대 본과로 학교를 옮기는 사태가 발생되었기 때문. 이에 69년 12월21~22일 이틀 동안 드라마센터에서 공식 고별 공연을 개최했다.
공연은 찬조 출연 없이 둘 만이 노래하고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2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수 많은 10대 소녀 팬들에 의해 울음 바다가 되었던 이날 공연 이후 계속된 팬들의 요청으로 무려 6번씩이나 비공식 고별 공연을 열어야 했다. MBC, TBC 등 방송들도 이례적으로 5차례나 고별 공연을 재편집 방송하여 팬들의 아쉬움을 달래주었다.
고별 공연 직후 12곡이 수록된 독집 <튄폴리오 리사이틀-지구.70년1월>이 발표되었다. 이 음반 역시 76년과 80년 두 번에 걸쳐 재발매되었을 만큼 포크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해체 6개월후인 70년 6월 29일, 젊은이의 전당으로 탄생한 명동 YWCA 청개구리 개관 행사에 윤형주, 송창식은 김민기, 양희은 등과 나란히 참석했다. 주위의 요청에 못 이겨 1~2곡을 부르기로 하고 즉석에서 ‘하얀 손수건’ 등 히트곡을 불렀다.
그러나 거듭되는 앵콜 요청으로 동요메들리, 찬송가, 트로트 ‘눈물을 감추고’ 등 장르를 파괴하는 레퍼토리를 1시간도 넘게 불러야 했을 만큼 이들의 인기는 여전했다.
청진기 대신 통키다
영원히 기억될 '포크 빅3'
윤형주, 송창식은 조영남과 캐롤이나 리싸이틀 쇼 음반은 물론 공연도 함께 하는 등 최영희 등과 함께 어울리며 두터운 음악적 친분을 유지했다.
학업 때문에 경희대 의대로 옮긴 윤형주는 의대 공부보다는 신방과 후배 김세환과 함께 히트 곡 ‘‘라라라’가 수록된 스플릿 음반 ‘별밤 씨리즈 3집-71년’을 발표하고 DBS라디오의 팝송 프로 ‘0시의 다이얼’ DJ로도 변신하는 등 음악 활동을 계속했다.
수천명 씩 모이는 대학가의 행사나 MBC ‘‘ 별 밤 회원’ 야유회 등에 함께 참가한 윤형주, 김세환은 대단한 인기를 구가했다.
특히 그들이 명동의 DBS 팝 패밀리 사무실에 나타나는 날에는 1~2백명의 여고생들이 몰려들어 백화점 영업이 어려웠을 정도. 솔로 가수 윤형주는 71년부터 ‘랄랄라’, 72년 ‘두 개의 작은 별’ ‘우리들의 이야기’, 73년 ‘어제 내린비’, 74년 ‘미운 사람’ 등 히트 퍼레이드를 벌였다.
또한 오란C, 롯데껌, 새우깡 등 전체 광고 음악의 30%에 달하는 1,400곡을 도맡으며 더욱 대중적으로 파고 들었다.
그처럼 은퇴 선언을 반복한 가수도 없을 것이다. 의대를 9년이나 다녔지만 본과 3학년을 끝으로 중퇴를 했다.
“의사는 환자를 기다리는 수동적 입장이라는 엉뚱한 비관론을 가졌던 것이 음악 활동을 다시 시작한 계기가 되었죠.” 성공적인 가수 활동에도 불구하고 72년 12월 또 다시 은퇴 선언과 고별 공연을 했다.
TV에도 방영된 이 공연의 사회자 최희준은 “법대를 졸업한 나는 이 나이가 되도록 한 번도 은퇴를 생각 못했는데, 윤형주는 젊은 나이에 2번씩이나 은퇴를 선언하는 용기가 부럽다”고 농담을 건냈고 군복무중인 조영남은 휴가를 얻어 군복 차림으로 게스트가 되어 끈끈한 정을 과시했다.
은퇴 공연의 레퍼토리는 73년 ‘윤형주 리사이틀’ 음반으로 발표되었고 대도레코드는 69년부터 73년까지의 히트 곡 모음집까지 발매했다.
하지만 73년 영화OST인 ‘어제 내린 비’를 발표해 5만장의 판매되는 빅 히트를 터트리자 “은퇴 선언을 수 없이 번복한 가수”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74년 YMCA에서 개최한 구두닦이 소년들을 위한 자선 공연에 무료 출연한 그는 3월엔 4살 아래의 홍대 미대 출신 김보경 씨와 가정을 꾸렸다. 그러나 습관성 약물 중독설과 대마초 사건에 연루되면서 76년 2월, 징역1월 6개월에 집행 유해 3년을 선고 받으며 잊혀졌다.
활동 금지중이던 79년 1월 일간스포츠에 ‘속죄의 봄을…’, 11월 경향신문에 ‘어둠 속 우리의 모습 – 회한의 4년’이란 대마초 가수의 고백 수기를 발표했다. 이 후 80년 해금이 되자 5년 만에 ‘바보’‘고백’등이 수록된 독집 음반을 발표했다. 1백 여 곡의 노래를 작곡한 그는 창작 곡 ‘바보’를 자신의 특성에 잘 맞는 노래로 꼽는다.
특히‘사랑스런 그대’는 KBS 인기가요TOP 10과 MBC 인기가요 퍼레이드에 5위에 랭크되며 재기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이에 81년엔 MBC FM의‘한밤의 데이트’의 진행을 맡게 되었다. 또 송창식과 10년 전에 발표한 트윈폴리오 음반과 같은 레퍼토리에다 송창식이 작곡한 ‘우리’를 추가시킨 프로젝트성 음반을 발표했다.
82년 송창식과 ‘긴 머리 소녀’‘편지’‘축제의 노래’ 등을 수록한 금성사 판촉 카세트 테이프까지 발매하자 트윈폴리오의 재결합설이 모락모락 피어났다.
83년 12월 쌍룡 김석원 회장의 도움으로 김세환은 송창식과 함께 도너츠판, 책자가 들어 있는 ‘하나의 결이 되어’라는 박스 음반을 발표했다.
이 음반은 84년 KBS 가요대상에서 트리오 음반 기획상과 가톨릭 매스컴 위원회 공로상을 안겨 주었다. 재기에 성공한 그는 85년 광고 기획사 한빛기획’을 창립해 용평 팝 페스티벌, 태교음악회등 각종 콘서트를 기획하는 사업가로 거듭났다.
86년 미국 LA 슈라린 오디토리엄의 포크 페스티벌. 송창식 양희은 이장희 김세환 이종용등 70년대 포크 가수들이 모처럼 한자리에 모였다.
6,800여명의 교포들에게 고국에 대한 향수를 듬뿍 안겨 주었던 이 공연에 대한 그의 애정은 각별하다. 88년 창작 곡 10곡을 모아 6년 만에 신보‘사랑하는 사람이라면’을 발표하고 KBS 2FM에서 ‘윤형주의 음악앨범’의 DJ로‘뮤직 엉클’이란 애칭을 얻었다.
이후 자유방송인협회 공동 부의장을 맡고 93년 교통방송의 ‘밤과 음악 사이’, 10월에는 SBS TV의 심야프로 ‘SBS 콘서트’를 진행한 데 이어 94년 2월 MBC TV ‘음악이 있는 곳에’윤형주 스페셜 프로에 서울음대 작곡과에 입학한 딸 선명과 함께 출연해 건재를 과시했다.
12월에는 KBS 빅 쇼 크리스마스 특집에 송창식과 함께 모처럼 트윈폴리오시萱?히트 곡들을 불렀다. 이 때부터 지금까지 윤형주는 송창식, 김세환과 함께 ‘포크 빅3’로 명명해 전국을 순회하며 올드 팬들을 위한 공연을 지속적으로 열고 있다.
2000년 벤처 기업인 이트보의 부사장으로 취임하며 벤처 사업가로 거듭났다. 또한 2002년 4월에는 한일 포크 가수 1세대들의 조인트 공연 ‘포크 빅3와 일본 포크의 개척자 모리야마 료코의 캠퍼스 콘서트’를 개최해 주목을 받았다.
사회 봉사의 일환으로 사랑의 집짓기 운동엽합회의 헤비타트 운동 홍보 이사로도 활약하고 있는 그는 2003년 7월에는 미국 카네기 홀에서 6명 온 가족이 가족 콘서트를 개최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편안함을 주는 많은 창작 곡들을 생산해 낸 포크 아티스트 윤형주. 그는 우여곡절이 많은 음악 활동에도 불구하고 성공한 전문직 사업가로 본업을 유지하면서도 통기타를 잡고 노래를 계속, 살아있는 한국 포크의 전설로 모범적인 삶을 꾸려 가고 있다.
최규성 가요 칼럼니스트 kscho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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