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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사랑 여행 스크랩 <멋을 알았던 민족> 조선시대에도 단화를 신었어요
天風道人 추천 1 조회 64 14.08.04 19:1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멋을 알았던 민족>

조선시대에도 단화를 신었어요

 

 

 

 

오늘날 여성들의 완소 아이템이 된 단화(플랫슈즈). 이제는 패션에 따라 어울리는 단화를 골라신을 정도로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해졌다. 여자라면 누구나 하나쯤은 갖고 있는 단화. 힐(HEEL)과는 또 다른 매력으로 세계적인 사랑 받고 있는데 ...

그런데 우리는 요즘에만 이렇게 단화를 신는 걸까 ?????

 

 

 

-----------------------------------------------------------------

 

-조선시대에는 남자도, 여자도 단화를 신었어요-

  과거 우리나라 신발은 그 형태에 따라 발목이 보이는 신인 이(履)와 발목 위까지 올라오는 신인 화(靴)로 나뉜다.

 

 

화(靴)

 

조선 시대 사극이나 현대 이전을 다룬 드라마 혹은 영화를 보면, 한복 사이로 살짝살짝 보이는 꽃신 , 관복을 입었을 때는 부츠 같은 신, 혹은 검정 고무신을 만날 수 있는데, 조선시대에는 발목이 낮아 발등이 보이는 신인 이(履)의 한 종류로 비단이나 가죽으로 만든 고급 신발인 혜(鞋)가 대표적인 신발이었다. 혜(鞋)는 재료와 문양에 따라 다양하게 이름지어졌는데 문양에 따라 태사혜(太史鞋), 운혜(雲鞋) , 재료에 따라 녹피혜(鹿皮鞋: 사슴 가죽으로 만든 신) , 용도에 따라 궁혜(宮鞋: 궁중용 신)가 있었다. 마른땅에서는 태사혜, 흑혜, 운혜, 당혜 등을 신었다면, 진땅에서는 진신을 신었다고 일제시기에는 고무신을 신었다.  

 

 

 

-남자-----------------------------------------------------

 

 

*태사혜*

 주로 남자들이 신던 신의 하나로, 여자용, 아이용도 있었다. 굽이 낮고 신의 코 끝 부분에 태사문(太史紋)이 장식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신의 둘레를 비단이나 가죽으로 하고 밑둘레를 밀랍을 칠한 굵은 실로 꿰맸으며 신 코와 뒤축 부분에 흰 줄무늬를 새겼는데, 이 무늬를 태사문이라고 했기 때문에 태사혜라는 이름이 붙었다. 항상 신의 앞부분과 뒤축에 대칭이 되도록 넣었다.

 남자용 신에는 선이 크고 대담하게 하여 검정색 바탕에 흰색의 무늬가 새겨졌고, 여자용에는 작고 아담하게 넣었으며, 어린이용은 녹색 바탕에 다홍색 태사문을 새겼다. 이 신은 조선시대 사대부나 양반 계급의 고령자가 편복(便)에 신었으며 한말에는 왕도 평상복에 착용하였다.

 

 

 

 

 

*흑혜*

 흑피혜(黑皮鞋)라고도 하며 검은 가죽으로 만든 것으로 조선시대 상류층에서 신던 신으로, 문무백관들이 조복과 제복에 신었다. 가죽으로 만들고 장식이 없는 단순한 것이었다.  백관(百官)이 착용한 신은 조복과 제복에는 각 품이 동일하게 흑피혜를 신도록 했는데 조선 말기에는 제복에는 그대로 흑피화[祭靴]를 신었으나 조복에는 화자(靴子)를 착용한 사진이 남아 있다. 한편 조선후기의 초상화를 보면 유학자(儒學者)들이 편복(便服:평상복)과 함께 흑혜를 신기도 하였다. 형태는 일반 혜(鞋)와 같으며, 운두가 낮고 신코가 넓적하며 가장자리에 흰색 선을 둘렀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신이 벗겨지지 않게 양쪽에 끈을 달기도 하였다.

 

 

 

 

 

  -김옥균-

사진이 희미해서 태사혜 인지, 흑혜 인지 확실하진 않지만 이러한 식으로 혜를 신었을 것이다.

검정 부분이 혜이고, 하얀 부분은 버선을 신은 것이다.

 

 -흥선대원군-

-여자------------------------------------------------

*운혜*

 구름무늬(雲)를 장식한 여성용 신의 하나로 조선시대 상류계급의 부녀자가 신었다. 겉은 보통 비단으로 하고 안은 융으로 한다. 신 코와 뒤축에 녹색비단을 대고 그 위에 남색 비단으로 구름무늬를 장식하거나, 신 코와 뒤꿈치에 붉은 비단을 대고 구름무늬를 수놓아 장식하기도 했다. 제비부리 같이 생겨서 ‘제비부리신‘ 또는 온혜(溫鞋) 라고도 했다.

 

 

*당혜*

 당혜 ·궁혜() ·운혜() 모두 형태가 같고 안은 융 같은 폭신한 감을 쓰며 겉은 여러 색의 화사한 비단을 배악비하여 만들었고 양가집 부녀자들이 신었다.

 아래 사진은 영친왕비(英親王妃)가 신었던 당혜이다. 홍색 모란문 은직단(銀織緞: 문양을 은실로 직조한 비단류)으로 겉을 했고, 신코와 뒤축에는 연두색으로 장식하고 같은 색의 가는 선으로 신테를 둘렀다. 신바닥과 신울이 이어지는 부분은 백피(白皮: 흰 가죽)로 하였고 바닥은 솜을 이겨 붙여 폭신하게 했다.

 

-남자 여자-------------------------------------------------

 

*진신(징신)*

 진 땅에 신는 가죽신. 진신은 기름에 생가죽을 절여서 만든 신으로 유혜(油鞋), 이혜(泥鞋)라 하기도 했고 징을 박았다 하여 '징신'이라 하기도 했다. 진신은 조선시대 양반 계층에서 비가 올 때나 땅이 젖었을 때 신었다. 신발 모양은 남자신은 태사혜(太史鞋) 모양이며, 여자신은 당혜(唐鞋)나 운혜(雲鞋)와 같았다. 생가죽을 들기름에 절여 물이 스며들지 않고 오래 견디도록 여러 겹을 겹쳐서 바닥을 만들고, 신등의 가장자리는 가죽으로 백비를 쳐서 안으로 감쳤으며, 실로 견고한 박음질법을 썼다. 사용되는 가죽은 탄탄한 소가죽, 말가죽, 개가죽 등이었다. 또한 밑창에 징을 박기도 하였는데, 은 지름 0.7cm정도의 원형 돌기로 만들어 밑창의 둘레에 촘촘히 박고, 앞바닥 가운데와 뒤꿈치 중간에는 세로 1cm, 가로 2cm정도의 반원형이나 사분원 모양의 얇은 쇠붙이 징을 박았다. 이 징은 방침(防浸)이 잘되어 신의 수명을 길게 하고, 진흙이 달라붙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을 했다.

 

 

*고무신*
 고무신을 최초로 신은 사람은 순종이었다. 우리나라에 고무공업이 시작된 시기는 1919년으로 이하영(李夏榮)이 대륙고무주식회사를 처음 창설하였고, 1921년 김성수(金性洙)가 중앙상공주식회사를, 김동원(金東元)은 정창고무공장을 평양에 설립하였다. 폭이 넓고 굽이 낮으며 덮개가 반만 되어 있으며 남자 고무신은 갖신을 본떴고, 여자의 것은 당혜를 본떠서 만들었다. 당시 당혜,운혜, 짚신, 나막신 등을 신을 때 방수가 잘 되어 실용적이었던 고무신이 생산되어 크게 인기를 끌었다. 1922년대에는 우리나라에도 고무신공장이 난립하여 고무신이 대량 생산되었다. 1920년대부터는 고무신이 나와 당혜, 운혜,진신 등 혜와 짚신, 나막신의  대용이 되기 시작했다. 고무신은 1945년 이후 한국전쟁(6.25)까지 전성기를 이루었다가, 1960년경부터 발의 피부와 위생적인 면을 고려하여 만든 운동화의 대중화 및 구두의 생활화로 그 선호도가 날로 저하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아래 사진은 검정고무로 만든 여성용 고무신이다. 당혜 혹은 운혜를 본 떠 앞쪽 코가 오똑하게 올라와 있고 앞쪽 전체가 들려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우리 고무신은 발등이 없어 신고 벗기에 편했다. 아래와 같은 검정 고무신의 경우, 색상이 양반의 품격과 맞지 않는다고 하여 표백 처리를 하여 흰 고무신으로 만들어 신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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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디자인에 소재를 달리해서 신으면 요즘 신는 심플한 단화가 되고

 

 

 

 소재를 달리하여, 같은 디자인에 리본을 하나씩 달아주면 이러한 모습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옛 사람들의 신발 디자인은 요즘 우리의 신발에서도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어, 그들의 멋스러움을 느끼게 해준다.

 신발이 패션의 완성이라고 말하는 오늘날 많은 이들이 단화를 통해 멋을 내고 있다. 물론 요즘의 단화와 조선시대의 신발은 다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의 단화가 조선시대의 신발과 닮아 있음은 그 시대에 이러한 멋진 신발을 신고 다녔던 옛 사람들의 멋스러움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가 아닐까 ? 

 

 

▲ 문화재청 대학생 블로그 기자단 김윤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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