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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3대 요부: ● 장녹수, 정난정, 김개시와, 장옥정(장희빈)..
장녹수나, 김개시가; 각각 참형(斬刑, 목이 베어 효시되는 형벌)과, 참수(斬首, 목이 베이는 형벌)라는 극형에 처해진 것과 비교해,
장옥정(장희빈)은; 사약의 형벌인, 사사형(賜死刑)을; 받았다.
당시 세자(20대 경종)의 어머니라는 점도, 고려가; 되었겠지만, 딱히 죄가; 입증되지도 않았고, 숙종 임금의 독단이었다.
1. 장녹수(張綠水. ?~1506)
장녹수는; 아버지가; 1469년(예종 1)에 문과에 합격해 지방 수령까지 지낸, 장한필(張漢弼)이었는데, 궁에 들어가기 전까지, 예종의 둘째 아들인, 제안대군 이현(李?)의 집에서, 여종으로; 있었다.
당시 조선은; 어머니의 출신 성분에 따르는, 종모법(從母法)이 적용되던 사회라, 어머니가; 천인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알려진 만큼 장녹수에 대해 정확하게 밝혀진, 부분은; 그리 많지 않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장녹수가; 가난 때문에 몸을 팔아서 생활했고, 결혼도 여러 번 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그 당시 양인 이하의 사람들이 사실혼 관계를 유지하다가 헤어지는 것은 흔한 일로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여종으로, 고된 일상을 보내던, 장녹수가; 노래와 춤을 접한 것은; 제안대군의 남자 종과 혼인해 아들을 낳은 이후였다.
장녹수가; 궁에 들어간 시점은; 서른 전후로, 노래와 춤에 재능을 보였는데, 노래를; 유난히 잘해, 입술을; 움직이지도 않고, 맑은 소리를; 냈다고, 한다.
예술적 감성이; 풍부하던, 연산군이; 이런 소문을 듣고 기뻐하여, 궁중으로 맞아들였는데, 기록으로 보아, 제안대군의 추천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장녹수는; 연산군의 마음을 쥐고 흔들면서,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를; 한껏, 이용했다.
1503년에, 종3품의 숙용(淑容)으로 품계가 오르면서, 권세를; 과시했고, 여러 방법을 동원해, 재산을; 모으고, 심지어 조정의 선박을 이용해 평안도 미곡을 무역하는 수완까지 보였다.
언제 시해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전전긍긍하던, 연산군에게, 장녹수는; 자신을 깊이 이해해주는 존재이자, 피난처였다.
장녹수는; 왕의 총애를 수동적으로 구하지 않고, 연산군이; 인간적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이해를; 바라는지 간파하여, 신뢰를 얻은, 이 방면의 독보적인 존재였다.
1506년 연산군은; 왕위에서 쫓겨난 지, 두 달 만에, 유배지 강화도 교동에서, 세상을; 떠났고,
왕의 여자로 살던, 장녹수의 운명도; 파국을 맞이했다.
연산군이; 교동으로 유배를 떠난 날. 장녹수의 참형이; 결정되었다.
5년여의 길지 않은 기간 동안, 온갖 부귀영화를 누린 후에 맞이한 비극적 결말이었다.
신분의 한계와, 고단한 삶을 이겨내고, 젊지 않은 나이에, 후궁까지 오른, 장녹수는; 한 개인으로는 성공했을지 모르나, 공인으로서는 당당히 내세울 만한 삶은; 아니였다. 권력을 쥔 후, 공인의 의무를 져버렸기 때문이다.
연산군을 몰아낸 승자의 기록인,『연산군일기』에는,
연산군이; 눈을 감기 직전에, 아무런 다른 말은; 없고, 왕비 신씨가; 보고 싶다 했다고 전하여, 장녹수는; 연산군에게,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격하되고, 만다.
2. 정난정(鄭蘭貞, ? ~ 1565)?
12살의 어린 명종이 즉위 당시 정국은; 윤여필(尹汝弼)의 딸인 중종의 제1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의 친정인, 대윤(大尹. 인종의 외척)과, 윤지임(尹之任)의 딸인 제2계비 문정왕후의 친정인, 소윤(小尹. 명종의 외척)으로; 갈라져, 외척간의 권력투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1545년(명종 즉위) 소윤(小尹)이; 윤임(尹任)의 대윤(大尹) 일파을; 숙청하면서,「을사사화」가; 벌이졌고,
그 중심에,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동생 윤원형(尹元衡)이; 있었다.
정난정의 아버지는; 종2품의 부총관(副摠官) 정윤겸(鄭允謙)이었으나, 어머니가; 관비(官婢) 출신이므로, 종모법(從母法)에 따라, 천인이; 되었다.
미천한 신분을; 벗어나고자, 기생이; 되어, 윤원형(尹元衡)에게 접근하여, 정실부인 김씨를; 독살하고, 첩이; 되었고, 윤원형의 권세를; 배경으로, 상권을 장악하여, 전매, 모리 행위로 많은 부를; 축적하며, 부귀를; 누렸다.
또한, 어린 명종을 대신해 수렴청정을 하고 있던, 문정왕후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신임을; 얻어, 궁궐을 마음대로 출입하였으며,
1553년(명종 8) 직첩(職帖)을 받아, 마침내, 외명부 종1품 정경부인이; 되었다.
그리고, 윤원형이; 상소하여, 적자와 서자의 신분차별을; 폐지하고, 서자도 벼슬길에 나설 수 있도록 하는, 당시로서는, 신분제도의 근간을; 흔드는, 획기적인 정책을; 내놓아, 신분제도 때문에 좌절한 사람들에게, 큰 호응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성리학자인 사대부들의 반대도 극심하였고, 정난정의 후원자인, 문정왕후가; 1565년에 죽자,
정난정은; 사림의 탄핵을; 받아, 본래 신분인 천민으로, 강등되었다.
이후에도, 사림의 계속적인 탄핵으로, 남편 윤원형과; 함께, 황해도 강음(江陰)으로 유배되었으나,
윤원형의 전처였던, 김씨를; 독살했다는, 의심을; 받았는데, 문정왕후가 승하한지, 5개월 후에, 윤원형의 본부인 연안 김씨의 계모 강씨가; 정난정이; 김씨를 독살했다며, 의금부에, 고발하였다.
이 사건으로, 점차 사대부의 공격이; 심해지자, 정난정은; 1565년 11월 13일 독술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윤원형도; 뒤를 이어, 자결하였다.
3. 김개시(金介屎, ?~1623)
?임진대환란 몽진(蒙塵. 피난) 길에, 선조의 성은을 입어, 상궁이 된, 김개똥.
예전 우리 어르신들은 '여자 아이의 이름이 예쁘면 박명(薄命)하다' 하여 일부러 천한 이름을 짓기도 했는데, 개똥이란 이름도 그런 연유로 지어졌을 것이며, 성은상궁이 된 이후, `개똥`의 한자식 이름인 `개시(介屎)`로, 불렸다.
영조 때의 실학자 이긍익이 지은,『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서, 천예(賤隸. 천민과 노예)의 딸로 기록된 점을; 보아, 노비의 신분이였을 것으로 짐작되며,
어린 나이에 나인으로 입궁해, 광해군이 세자로 있던 동궁전 나인으로 배속되어, 광해군과의 첫 인연을; 맺었다.
이렇게 김개똥은; 광해군이 세자일 때부터, 광해의 곁에서, 광해를 도왔고, 광해의 위협적인 존재인, 영창대군과, 인목대비를; 제거하는데 있어, 당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예조판서 겸 대제학이었던 이이첨과; 함께; 앞장 섰는데,
이로 인해, 이 셋(광해, 김개똥, 이이첨)은; 흥망(興亡)을 같이 하는 운명을 맞이하여, 각기 유배, 참수, 참형이란 결과를; 떠안았다.
장녹수는; 예술적 재능만 있고, 정치적 감각이나 술수에 취약했던 것에 비해, 김개시는; 정반대였다.
김개시는; 노래나 춤이 아니라, 뛰어난 판단력과, 두뇌로, 광해군의 신임을; 얻었다.
게다가, 장녹수는; 입궁 후, 곧바로 후궁이; 되었지만,
김개시는; 어려서 입궁하여, 상궁에까지 올랐을 뿐, 정식 후궁이; 되지는 못했다.
인목대비를; 유폐시키고, 영창대군을; 죽였다는 이유로, 패륜아의 굴레를; 쓴, 광해군도; 집권 초기에는,
명과, 급성장한 후금과의 중립적 외교를 하는, 실리외교와; 함께, 임진왜란의 피해를; 극복하는데, 전력을; 기울이며, 경기 일대에, 대동법을 실시하는 등의, 개혁정치를; 단행하기도 하여, 임금으로서의 열정을; 보이기도, 했다.
광해는; 1623년, 쿠데타 인조반정의 성공으로, 결국. 폐위되어, 유배되었고,
김개시는; 김자점에게서 보장 받은 입지는; 무시된 채, 오히려 요부로; 몰려, 반군 세력에 의해, 참수되었다.
▶ 장옥정[張玉貞, 희빈 장씨(禧嬪 張氏). 1659~1701]
장옥정은 조선의 제19대 왕 숙종의 빈(嬪)으로, 제20대 왕 경종(景宗)의 어머니이다.
아버지는; 역관(驛官) 출신인 장형(張炯)이고, 어머니는; 장형의 후처인 윤씨로, 조선 왕조 역사상 유일하게 궁녀 출신으로, 왕비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여인이다.
그녀의 오빠 장희재는;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희빈 장씨가 숙종의 후궁이 되기 7년 전인 경신년(1680년)에 키가 크고 외모와 무술이 뛰어난 명문가의 자제만으로 구성된 내금위에 재직하였으며, 1683년에는 좌포청 부장으로 있었고, 아버지 장형의 사촌형인 장현은; 효종 8년에 이미 정2품 자헌대부를 제수받고, 숙종 1년에는 이미 종1품 숭록대부에 올라 공을 세워도 더이상 품계가 올라갈 수 없어 자식과 조카가 대신 승봉되어야 했던 거물 역관으로, 재산은; 국중거부의 명성을 얻을 정도였으며, 장현 형제의 자식들은; 무관 및 역관, 혹은 의관으로 고위직에 있었다.
그녀의 일족이; 비록 문신 사대부 가문은; 아니었지만, 조선에서 손 꼽히는 대부호였으며, 사회적 위치 또한 결코 떨어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장옥정은; 11살 때, 아비 장형이 죽어, 가세가; 기울어 입궁하였다는 설이 있지만, 입궁 시기와 사유는; 불분명하다.
「숙종실록」에 머리를 스스로 땋아 올리기 전에 입궁하였다고 기록를 보아, 어린 나이에 입궁하여 나인이 된 것으로, 여겨진다.
대왕대비전의 궁녀가 된, 장씨는; 인조의 계비이자, 숙종의 증조모 뻘인 자의대비 조씨를 웃전으로 모시고 있던 중, 1680년(숙종 6)에 숙종의 초비(初妃) 인경왕후 김씨가; 천연두로 요절했다.
장씨가; 숙종을 모시게 된, 시기는; 불분명하지만,
숙종실록에 인경왕후가 죽고난 후에 숙종을 모셨다는 기록이; 여럿 존재하며, 11월 이후 혜성이 나타났는데,
장씨가; 숙종의 총애를 받기 시작한 무렵이; 이때라는, 기록이; 존재하니,
그녀가; 숙종의 성은을; 입은, 시기가; 인경왕후의 죽음 후 임을; 짐작할 수 있다. 中略
이「옥교사건」은; 그때까지 장씨에 대한 서인의 공격에 소극적으로 대응하던 숙종을; 강하게 자극하였다.
1689년 1월 11일, 숙종은; 아들 윤에게 원자(元子: 왕의 큰아들) 명호를 내릴 뜻을; 알린다.
왕자 윤이; 후궁 소생이라는 사실에 방심하고 있던, 서인은; 숙종의 선언에 당황했지만, 제대로 반대를 하거나 저지를 할 준비도 되지 않은 상황 속에,
숙종은; 불과 닷새 후인 1월 15일에 왕자 윤에게 원자 명호를 내려, 종묘 사직에, 고했다.
또한, 숙종은; 원자 윤의 생모 소의 장씨를; 정1품 빈(嬪)으로 책봉하여, 귀인 김씨를 제치고, 후궁 1위로 만들었다.
5월 2일, 숙종은; 당시 사대부 여성으로선 입에 담을 수 없는 발언을 했던 중전 민씨의 언사를; 낱낱이 폭로하여 공개적으로 망신을 시킨 후, 폐서인하여, 강제로 출궁시키고,
숙종은; 새로이 계비를; 간택하지 않고, 원자의 생모인, 희빈 장씨를; 왕비로 삼을 것을; 선포하였다.
5월 13일, 희빈 장씨의 왕비 명호가; 정해졌다. 中略
숙종은; 먼저 제주 유배 중인 장희재에게 처형의 명을; 내리고, 그에 이어 희빈에게 자진을 명하는 비망기를 내린다.
이때에, 소론은; 희빈의 결백을; 주장했지만, 이미 희빈을 죽일 결심을 한, 숙종의 뜻이; 단호하였다.
이에 영의정 최석정과, 소론은; 희빈에게, 죄가 있다고 치더라도, 세자(20대 경종)의 어미이니, 처우에 관대하게 하자고 주장을; 바꿨지만, 이 역시 기각되었다.
1701년 10월 7일, 숙종은; 빈어(嬪御:임금의 첩)에서, 후비(后妃:임금의 정실)로 승격되는 일을; 금지하는 법을; 만들었고,
다음날 10월 8일에 승정원을 통해, 공식적으로, 장씨에게, 자진의 명을; 내렸다.
10월 10일, 숙종은; 희빈 장씨가 이미 자진하였음을; 공표하였다. 향년 43세였다.
출처 :blog.daum.net
첫댓글 배우고갑니다 감사합니다
MBC옥중화가 히트예감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