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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탄약창30경비중대 동계훈련 모습 1977년2월,
좌측편 소나무 위쪽 달맞이 산자락에 AID아파트(지금의 두산 힐스테이트위브)가 있었다.
오른편 뒤쪽 산자락에 탄약창고와 고가초소가 보인다, 해운대 신도시 조성시 저 산도 허물어 버렸다.
저 산의 오른편 끝자락 허문 곳 부근에 지금의 지하철 장산역이 들어서 있다.
저 고가 초소에 보초서던 우리소대 병사가 야간에 AID아파트 1층 베란다에서 고추장을 독채로
훔쳐와서 우리소대원들 한달을 고추장으로 밥비벼 먹었는데 민원이 들어와서 창본부에서 조사가
나왔는데 우리소대원들 노란 프라스틱 식기 모두가 빨게져 있는게 증거가 되어 들통이 나버렸다.
우리 중대장 창장한테 조인트 까이고 뿔이 난 중대장 우리 소대원들을 일주일 동안 목봉체조에
피티체조로 얼차려 시키는데 너무 힘들어서 탈영할려고 마음먹기도 했었다. 실천은 못했지만...
동계훈련 모습 1976년2월, 뒤편 산자락이 아래 사진 왼편의 해마루쪽 산자락이다.
'70년대초 좌동마을 모습,
뒤편 산자락 중앙 오목한 곳이 청사포고개이고 그 우측 좀 아래편이 동계훈련장이다.
왼편은 해마루쪽 산자락이고 오른편은 달맞이산자락이다. 달맞이 산자락에 AID아파트가 아직
들어서기전이다.
뒤편 산중턱에 군데 군데 보이는 건물이 포탄창고이다. 포탄창고는 창고간 100미터 이상 거리를 둔다,
유사시 연쇄폭팔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아래편 춘천 다리 위쪽에는 소구경 탄약창고 집합 건물이
보인다. 소총탄은 연쇄폭발 위험이 덜해 집합 건물로 되어있다.
장산 폭포사 계곡에서 좌동,청사포 방향 '80년대 (노란 동그라미 친 곳 동계훈련 장소)
신해운대역, 좌동사무소, 해운대문화회관, 장산역, 해운대백병원,세실마을, 달맞이AID아파트
(두산힐스테이트위브APT)앞쪽, 청사포고개, 구덕포고개 까지 우리중대 경비 관할 이었다. 민간인
접촉이 가장 많은 지역이었다.
대천공원, 53사단 본부, 수영유격대 방면은 다른 중대에서 관할했고 숙영지에서 송정까지 쪽은 또
다른 중대에서 관할 했으며. 경계지역이 40키로가 넘을 정도로 넓은 지역이라서 3개 경비중대에서
경계근무를 섰었다.
해운대백사장 앞 바다 상공에서 본 해운대 지역 모습 1972, 연동개 님이 카페에 올려주신 귀한 사진이다.
구글어스로 본 해운대 지역 모습 2019(노란 동그라미 친 곳 동계훈련 장소)
1975년 해운대 좌동 051탄약창 연병장과 중대 막사 건물들 모습 (지금의 신해운대역 위편 산쪽)
탄약사령부 본부와 051탄약창 본부는 한울타리 안에 있었다. 뒤편 산자락은 장산정상에서 오른편 쪽이고,
중대막사 오른쪽 끝자락 뒤편에 2관구 종합교육대(지금의 53사단 신병교육대)가 있었다.
1976년 중대 막사 건물 옆에서, 뒤편 우측 스라브 건물이 당시 2관구 종합교육대 본관 모습이다,
그 당시에는 방위병 등 비 현역 입소병들을 주로 훈련시키는 부대였다. 그리고 수영유격대도
종합교육대 예하 였다, 1982년도에 2관구사령부가 해체되고 53사단이 창설되면서 종합교육대는
53사단 신병교육대로 개편되었다.
'70년대 좌동마을(중동,오산공원 아래편) 모내기하는 모습
'70년대 좌동마을(중동,오산공원 아래편) 벼베기 하는 모습
1970년대 좌동마을 모습이다. 뒤편에 장산 정상이 보인다.
'80년대 현 대천공원쪽 장산 폭포사계곡에서 내려오는 춘천모습 (다리 건너 오른편, 현 문화회관 사거리)
저 다리 건너편 길 오른쪽에 넓은 공터가 있고 그 오른편에 소구경 탄약창고가 있었는데 그 공터에
지금의 수영로타리 부근 광안3동 사무소앞의 동일아파트 자리에 있던 섬유회사인 삼도물산의 통근차
종점이 있었다.
그래서 출퇴근 시간에 공터 중앙에 있던 초소에 보초나가면 통근차로 가서 먼저 아가씨들에개 최대한
애절한 표정으로 사정이야기를 했다. "애인이 면회오면 무조건 외박을 보내주니까 애인이라 하고 면회
좀 와 달라고" 그렇게 사정하면서 면회실 위치와 소속 계급 이름 적힌 쪽지를 주면 못 이기는 척하고
받아가는 아가씨들이 있었고 실제로 면회도 두어번 와 준적이 있었다. 면회온 아가씨를 만나면서 알게
되었지요
좌동마을에 집세가 싸니까 시골에서 올라온 아가씨들이 두명 또는 세명이 힌방에서 자취를 하면서
삼도물산에 다니는 경우가 의외로 제법 많다는 것을...좌동마을 본토 아가씨들은 군인들 상대를 많이
해서 뺀질이 들이 많은 데.. 회사에 다니는 이 아가씨들은 순박해서 좋았습니다.
그래서 외출 외박나가면 가끔 만났었습니다.
'70년대 좌동사무소, 왼쪽 상단에 장산 정상이 보인다.
'80년대 후반 해운대 좌동 모습 (지금의 해운대 신시가지)
위 사진 오른편 하단 세실마을 오른쪽 끝부분에 경비초소가 있었는데 마을에 구멍가게가 있어서 근무
서다가도 출출하면 라면하나 끓여달라해서 먹고 소주도 한잔하고 했었지요..우리 중대원들 그 집에
거의 외상장부가 있었고 그 집에 고등학교에 다니던 딸도 있고 해서 더 자주 발걸음 하게 되었지요,
좌측 캘리버30탄통, 우측 캘리버50탄통
비가 오고 나면 도로 평탄 작업도 나가고 초소 보수 작업도 나가고 하니까 좌동의 선술집에도 가끔
들락 거렸죠. 좌동 소구경 탄약창고에 보초 설때는 야적지에 지천으로 쌓여있는 캘리버30탄통 하나
가게에 갖다주면서 주인 아주머니에게 라면하나 끓여 달라고 해서 먹었던 기억도 납니다. 당시
캐러버30탄통은 못통,공구통,물 끓이는 통으로도 많이 사용해서 쓸모가 많았습니다.
세실 마을에 소아마비로 다리가 불편해 군에 못간 또래 청년이 있었는데 오래 근무하다 보니 친구가
되어 겨울에 새벽에 보초 나가면 그 친구에게 저녁에 미리 가마솥에 소죽 끓일거 않혀 놓으라고 하고
새벽에 보초 나가면 그 집 부엌에서 소죽 끓여주면서 불 앞에서 추위를 잊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그 친구가 손재주가 있어 내가제대할 때 축하한다면서 나무로 모형배를 만들어 제대 선물로
주고해서 많이 생각이 납니다. 제대하고도 세실마을에 놀러가서 그 구멍가게애서 두어번 만나서 소주
잔도 기울이고 했는데 이제는 연락이 끊겨서 아쉽고 보고 싶기도 하고 가끔 생각이 나는 친구입니다.
위 글로만 보면 편해 보였겠지만 실상은 그렇지만도 않았습니다. 근무하면서 전방지역에 근무했던
군인들 처럼 우리들도 해운대 좌동 방향으로는 오줌도 안누겠다고 이야기들을 했었습니다.
'74년9월중순에 창원훈련소에 입소하여 기본 훈련 6주 받고, 보병 후반기 AR자동소총 교육4주, 도합
10주 훈련받고 탄약사로 보직 명령 받아 수영9보충대(지금의 수영 동원아파트, '77년 제대 할때는
9보충대가 명장동 정수장 쪽으로 옮겼더군요)를 거쳐 병기탄약사령부 051탄약창 30경비중대에 배치
받으니 12월 초순 겨울이 되었더군요. 30경비중대에 배치받아 처음 보초 나가는 날 곤히자고 있는데
밤12시 보초 나가라고 밤11시50분쯤 깨우는데 3년동안 이 짓을 어떻게 하나 하고 억장이 무너지더군요.
해운대..여름에는 바람이 많이 불어 시원합니다. 반대로 겨울은 찬바람이 많이 불어 생각보다 진짜
춥습니다. 오죽하면 051탄약창을 두고 부산의 103보라고 했을까요..참고로 당시의 103보충대는 춘천에
있었고 강원도 전방지역 보직자들이 모두 103보를 거쳐 전방 자대로 갔으니까 강원도 전방부대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었지요.
경비중대니까 3년 동안 보초만 섰는데 전 중대원을 소대 마다 3개조로 나누어 3시간 근무하고 6시간
쉬는 이른바 3교대 근무를 했지요. 그렇지만 실 근무는 한번 나가면 3시간이 아니라 4시간 근무하게
됩니다. 지역이 넓다보니 보초 교대차를 타고 교대하는 시간이 40분 정도 걸렸지요. 보초 나가기 전
사전 점검 10분, 보초 교대후 점검 10분 해서 보초 교대 하는데만 1시간이 걸리니까 실지로는 4시간
근무 서는 격이었지요.
보초교대 방식은 중대본부 막사앞에서 중대소속 1,2,3 세개 소대의 같은 조 30여명이 보초교대 트럭을
타고 경비지역으로 가면서 보초 근무할 교대자를 초소 주변 큰 도로가 지정 승하차 지점에 내려주면
초소까지 걸어가서 초소에서 교대자들 끼리 인수인계하고 귀대할 교대자 들이 지정 승하차 지점에
와 있으면 보초 교대차가 돌아오면서 싣고 들어오는 방식 이었습니다.
새벽밥 먹고 6시에 근무 출발하면 익일 새벽6까지 3시간 간격으로 근무교대를 하면서 계속 근무를
합니다. 공휴일,일요일,쉬는 날, 주,야간 상관 없습니다. 다람쥐 채바퀴 돌 듯이 제대할때 까지 계속
3교대로 근무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말뚝 근무라고 교대없이 달아 6시간 근무할 때도 있습니다. 부대 안에서 특별한 행사나 사역
교육, 작업 등이 있으면 교대를 한번 빼 먹습니다. 그러면 1개조가 교대 시간 1시간을 절약하고 교대의
번거러움도 없이 다음 근무할 3시간 까지 활용하여 다른 활동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으니까요..
말뚝 근무는 낮시간 6시 부터 18시 까지 에만 섭니다. 밤시간 18시 부터 6시 까지는
하지 않습니다. 식사를 해야하기 때문에 6~12시, 또는 12시~18시 이렇게 말뚝 근무를 서게 됩니다.
경비 중대는 특별한 행사가 없는 한 매일 오후에 오침이 있습니다. 12시 부터 17시 까지 입니다.
그래서 12시에 보초나가면 18시까지 교대없이 말뚝 보초를 섭니다. 그래야 안에 있는 사람들이 교대
없이 계속 오침을 활용 할 수 있으니까요. 다음번에는 자기 조가 그 혜택을 누릴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오침 하는 날보다 오침 못하는 날이 더 많습니다. 오전에만 사역하면 좋은데 급한 일이 있으면
단체 사역, 그리고 단체 훈련, 특별한 행사, 거기다 졸병들은 오침하다 가도 소수인원 사역이나 행사
인원 몇명 뽑을 때면 맨아래 졸병순으로 오침(낮잠)도 못하고 사역이나 행사에 동원되어야 하지요..
탄약창은 워낙 지역이 넓어서 사역이 참 많습니다. 지역안에 도로들이 모두 포장이 안되어 있으니
툭하면 도로 평탄작업에 경비초소가 많다보니 초소보수 및 관리작업도 만만 찮습니다. 그리고 보병이다
보니 병기,탄약병과 사병들 보다 훈련도 많이 합니다. 사격은 기본이고 맨위 사진처럼 매년 겨울에
야외에 텐트치고 몇일 동안 동계훈련도 합니다.
그리고 군기도 참 센 편입니다. 21시에 보초나가서 24시에 들어오면 중대 창고에서 단체로 곡갱이
자루로 엉덩이 많이 맞았습니다. 밤9시에 보초 안나가고 밤12시나 새벽3시에 근무가 있어서
저녁9시나 10시에 점호하고 잠자리에 들다 보면 자는데 깨워서 맞을까 봐 불안해서 잠이 잘 안오니
"이왕 구타할려면 잠자리에 들기전에 빨리 구타해라, 맞고 맘 편하게 일찍 그냥 자게" 이런 심정일때도
있었습니다.
일등병때 한번은 밤12시에 보초나갔다 와서 독한 고참 상병한테 군기 빠졌다고 일등병 우리 또래들
몇 명이 난로 불소시게 철근으로 10대씩 맞다보니.. 엉덩이가 터지고 멍이 시퍼펗게 들었는데 복장
점검시 소대 선임하사(고참중사)가 그걸 보고 누가 그랬는가 묻길래 대답을 못했더니 대답안한다고
주먹으로 여기저기 또 때리더만. 보다 못한 인사계(고참상사)가 말리는 바람에 그냥 넘어갔는데..
그때 처음으로 억울해서 중대 막사 밖 화장실 옆에가서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날 모진 마음도 먹었었습니다.
외박 나가면 사상 동네에서 한가닥 하는 선배들과 후배들 데리고 와서 청사포에 사는 선임하사 조져
버릴려고 마음을 먹기도 했었는데.. 바쁜 일상에 세월이 지나니 마음이 식혀 지더군요..
우리를 자주 구타한 충청도 독한 상병도 조져 버릴려고 했는데.. 또 세월이 지나니 잊혀 지더군요..
그 충청도 독한 고참은 제대할때 우리 동기들 눈치를 많이 보더군요..
조져 버릴려다가 그 꼬라지를 보니 불쌍한 생각이 들어서 그냥 보내 줬습니다.
세월이 흘러 고참이 되다보니 군대 생활도 할 만 하더군요..
졸병때 억울하게 맞은 기억이 있어서 아주 특별한 일이 아닌 한 구타를 안했습니다.
우리 집이 부산이다 보니 이런 저런 이유로 외박을 많이 나오게 되고 우리 동기들도
외박나오면 우리집에서 자고 가기도 하다 보니까, 내 말을 잘 들어주기도 했고요..
타 지역 출신 졸병들 처음 외박나갈때 같이 데리고 나가 이것 저것 가르쳐주고
우리집에 재워서 같이 귀대한 적도 두어번 있었지요..
그런 말이 있지요.. "???는 불어도 세월은 간다"..
그렇게 하루도 모자라지도 않고 더 하지도 않은 34개월 군대생활 하고 제대했습니다.
그 추억의 051탄약창 근무지역이 해운대 신시가지가 되어 천지개벽 상전벽해가 되어 버렸지요 좌동
마을은 흔적이라도 남아있지만 지금의 해운대 백병원 부근에 있던 세실마을은 아예 없어져 버렸습니다..
현재의 해운대신시가지 모습, 뒤편 좌측이 해마루쪽산자락, 중앙은 청사포고개, 우측은 달맞이산자락이다.
달맞이 산능선에 두산힐스테이트위브APT("구"AID아파트)가 보인다. 아래편은 대천공원과 53사단
중간쯤 이다.
그 당시 사상은 사상공단 조성으로 땅값이 많이 올라있는 편이었는데...
좌동은 완전 시골에다 농사짓고 짐승키우고 하니까
땅값이 정말 헐값이었습니다. 또 군 접경지역 이다보니 팔려고 내 놓아도
살려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때 선견지명이 있었다면 사 두었을 텐데..
지나간 이야기 였습니다.
첫댓글 71년경으로 기억합니다 중학생시절 학교는 수정동에있지만 멀리 해운대에서 오는 친구도있었습니다 그래서 두어번 친구집에갈 기회가 있었습니다 친구집은 좌동 맨 위 탄약창 초소부근 외딴집이었습니다
친구집에 가서 그 동네 아이들이랑 공차기도하였는데 경사가 완만한 넓은 개활지가 있었습니다
친구네는 농사도 지으면서 탄약창 병사들에게
간단한 물건 판매나 음식정도를 조리해주곤 하더군요
친구집에서 군용 스푼 하나 얻어왔습니다
지금의 53사단 부근지역이나 대천공원 지역 같네요..
그쪽은 다른 경비중대에서 근무했지요..
내가 근무한 지역에선 그런 곳이 생각나지 않네요.
추억담이라 그런지 사진보다 글에 더 집중을 하게 됩니다.
잘 읽었습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해운대 신도시 옛모습이네요 .
빛바랜 사진입니다....
45년전 이야기를 주절 그렸지요. ㅎ.
47년전 훈련했던 동료들 사진보니 새롭습니다. 사진에 나오는 분들이나 그무렵 근무하신분들 소식올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