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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제 : 요한계시록 강해(41) - 전갈 같은 황충의 권세를 밟으라
본 문 : 계시록8:13, 9:1-12
계8:13, 9:1-12절을 펴십시오. “내가 또 보고 들으니 공중에 날아가는 독수리가 큰 소리로 이르되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화, 화, 화가 있으리로다 이 외에도 세 천사의 불 나팔소리를 인함이로다 하더라 .......................................................................
.......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내가 보니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 하나가 있는데 저가 무저갱의 열쇠를 받았더라
저가 무저갱을 여니 그 구멍에서 큰 풀무의 연기 같은 연기가 올라오매 해와 공기가 그 구멍의 연기로 인하여 어두워지며
또 황충이 연기 가운데로부터 땅 위에 나오매 저희가 땅에 있는 전갈의 권세와 같은 권세를 받았더라
저희에게 이르시되 땅의 풀이나 푸른 것이나 각종 수목은 해하지 말고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 맞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 허시더라
그러나 그들을 죽이지는 못하게 하시고 다섯 달 동안 괴롭게만 하게 하시는데 그 괴롭게 함은 전갈이 사람을 쏠 때에 괴롭게 함과 같더라
그날에는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얻지 못하고 죽고 싶으나 죽음이 저희를 피하리로다
황충들의 모양은 전쟁을 위하여 예비한 말들 같고 그 머리에 금 같은 면류관 비슷한 것을 썼으며 그 얼굴은 사람의 얼굴 같고
또 여자의 머리털 같은 머리털이 있고 그 이는 사자의 이 같으며
또 철흉갑 같은 흉갑이 있고 그 날개들의 소리는 병거와 많은 말들이 전장으로 달려 들어가는 소리 같으며
또 전갈과 같은 꼬리와 쏘는 살이 있어 그 꼬리에는 다섯 달 동안 사람들을 해하는 권세가 있더라
저희에게 임금이 있으니 무저갱의 사자라 히브리 음으로 이름은 아바돈이요 헬라 음으로 이름은 아볼루온이더라
첫째 화는 지나갔으나 보라 아직도 이 후에 화 둘이 이르리로다“
이제 다섯 번째 나팔로 넘어갑니다. 황충, 메뚜기가 나오고 그들이 사람들을 괴롭히는데 그 기간이 다섯 달입니다. 그리고 그 황충들의 생김새가 자세하게 묘사가 되고 있지요? 이게 무슨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인가? 공부하겠습니다.
우리는 지난번에 네 번째 나팔 재앙까지의 내용을 공부했습니다. 그 네 가지 나팔 재앙은 자연계와 생태계의 파괴, 그리고 그로 상징되는 첫 창조를 지탱하고 있는 것과 그 첫 창조의 부산물들을 하나님께서 쳐가시는 재앙 속에서 우리 성도들을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으로 완성이 되어져 가는 역설에 대해 공부를 했습니다.
하나님은 궁극에 가서는 다 없어질 부패한 첫 창조의 것들을 하나하나 처리해 가시는 역창조의 수순을 밟고 계시고 성도들은 그 속에서 새 창조의 아름다운 것들로 지어져 가는 구속사의 다이나믹을 네 가지 나팔 재앙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요한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아니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 paradox를 계8장을 마무리 짓는 13절에서 한 번 확인시켜주고 계9장의 다섯 번째 나팔로 넘어갑니다.
계13:8절을 봅시다. “내가 또 보고 들으니 공중에 날아가는 독수리가 큰 소리로 이르되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화, 화, 화가 있으리로다 이 외에도 세 천사의 불 나팔소리를 인함이로다 하더라”
네 번째 나팔 재앙이 끝나고 갑자기 공중에 날아가는 독수리가 등장합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독수리’하면 무엇을 떠올리게 됩니까? ‘하나님의 보호하심’,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출19:4절을 펴세요. “나의(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신32:10-12절도 봅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우르’ רוּע = 일으켜 세우다)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라하프’, ף = 알을 품다)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
뿐만 아니라 구약 성경에서 ‘독수리’는 심판을 상징하는 동물이기도 합니다.
신28:49절을 보지요. “곧 여호와께서 원방에서, 땅 끝에서 한 민족을 독수리의 날음 같이 너를 치러 오게 하시리니 이는 네가 그 언어를 알지 못하는 민족이요”
호8:1절입니다. “나팔을 네 입에 댈지어다 대적이 독수리처럼 여호와의 짐에 덮치리니 이는 무리가 내 언약을 어기며 내 율법을 범함이로다”
이렇게 독수리는 하나님의 심판과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을 동시에 나타내는 동물입니다. 그 독수리가 ‘화, 화, 화가 있도다’하고 ‘화’를 선포하고 날아갑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재앙이 세상에는 ‘화’이지만 하나님 백성들에게 ‘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이라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공부한 일곱 재앙이 주는 메시지가 전부 이 구절 안에 용해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원리는 성경 전체에 용해되어 있는 진리입니다. 구약에서 한 군데 찾아보고 넘어갑시다.
출12:12-13절을 찾습니다. “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과 짐승을 무론하고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에게 벌을 내리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죽음의 천사가 애굽의 장자들을 죽이는 심판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인방과 문설주에 피가 발려져 있는 집, 오늘 본문의 표현대로 하자면 머리에 하나님의 인을 받은 사람은 그 죽음의 천사가 그냥 갑니다.
여기서 넘어간다는 말 히브리어 ‘파싸흐’(ח)는 ‘hovering’이라는 뜻입니다. 조금 전에 설명해 드린 ‘독수리가 날개로 새끼를 품다’, ‘하나님의 신이 수면 위에 운행하신다’의 ‘운행하신다’(‘라하프’, ף=알을 품다)와 같은 의미의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무시무시한 심판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인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품어서 보호하신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구원이라는 것은 타락한 첫 창조의 것들을 멸하시는 무시무시한 하나님의 역 창조 속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품어 안으시고 그들을 새롭게 재창조해 내시는 모습으로 이 역사 속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땅의 역사는 창조 때부터 종말 때까지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악인들은 계속 심판을 당하고 있는 것이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속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구원으로 받는 것입니다.
그게 역사입니다. 그 독수리가 어디로 날아갑니까? ‘공중’으로 날아갑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공부하신 요한계시록에는 두 가지 세계관이 등장합니다. ‘하늘과 땅’, ‘하늘에 완성된 교회와 지상의 불완전한 교회’, 곧 이 두 가지 세계관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와 성도들의 삶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 요한계시록입니다.
그런데 여기 계8:13절에 또 다른 세계관이 등장하는데, 곧 ‘공중-메수라네마’(μεσουράνημα=midheaven)입니다. 하늘과 땅의 중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레엄 골즈워디의 ‘복음과 요한계시록(The Gospel in Revelation)이라는 책에 보면 그 개념에 대해 잘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인간 중에는 타락한 인간 아담의 후손인 ‘옛 세대’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옛 세대에 속해서 율법을 따라 정죄를 받고 사망으로 떨어집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세대가 등장했습니다. 그들은 땅에 속한 옛 세대와는 달리 하늘에 속한 새 세대입니다.
그런데 그 하늘에 속한 새 세대가 바로 하늘에 살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 옛 세대가 살고 있는 땅에서 역사와 인생이라는 시간을 살아내야 합니다.
그들은 그 역사와 인생이라는 시간을 통해서 다른 말로 신앙생활을 통해서 새 세대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그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와 방식을 배우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늘에 속한 사람들이면서도 땅을 살아야 합니다. 그들은 땅에서 하늘을 맛보며 하늘의 원리를 살아내야 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땅의 옛 세대가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 아래 놓이게 될 때 그 재앙에 함께 노출이 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 속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속에서도 안전합니다. 안전할 뿐 아니라 그 재앙 속에서도, 그 화 속에서도 오히려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배워가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그들의 삶은 세상에 화를 선포하는 삶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늘도 아니고 땅도 아닌 공중이라는 또 다른 세계관이 여기에 등장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바로 그 공중이라는 세계관 속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 나팔로 넘어갑니다. 다섯 번째 나팔을 부니까 하늘에서 떨어진 별이 무저갱의 열쇠를 받습니다. 그가 무저갱을 엽니다. 그랬더니 그 구멍에서 연기가 나와서 해와 하늘이 어두워집니다.
여기에서 하늘에서 떨어진 별이 무엇인가에 대한 의견이 아주 분분합니다. 카톨릭에서는 무저갱의 문을 여는 하늘에서 떨어진 별을 ‘마틴 루터’라고 해석합니다.
종교개혁자인 마틴 루터는 카톨릭에서 보면 만고의 역적이지요. 그래서 그 별을 ‘마틴 루터’라고 해석합니다.
반면에 「해리 아이언 사이드」 박사는 그 별은 ‘교황’이라고 주장합니다. 교황이 무저갱의 문을 열어서 타락한 교리, 뉴 에이지 사상 같은 것이 나온다고 해석했습니다.
이처럼 서로에 대해서 감정을 갖고 성경을 해석하게 되면 서로 사이만 나빠지지 결코 우리에게 유익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 어떤 분들은 그 떨어진 별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해석합니다. 아주 많은 분들이 그 떨어진 별을 그렇게 봅니다. 왜냐하면 음부의 열쇠를 가지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그러한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공부한 계1:18절에도 예수님께서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갖고 계십니다. 게다가 요한계시록 20장에 보면 오늘 본문의 내용과 아주 흡사한 부분이 있습니다.
계20:1-3절을 여십시오.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 손에 가지고 하늘로서 내려와서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 잡아 일천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다가 그 후에는 반드시 잠간 놓이리라“
맞지요? 무저갱의 열쇠를 가지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그 떨어진 별은 무저갱의 열쇠를 받습니다. 무저갱의 열쇠를 가진 자가 아니라 누군가로부터 무저갱의 열쇠를 받은 자입니다.
그러니까 무저갱의 열쇠를 그 떨어진 별에게 주신 분이 그 열쇠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그 열쇠를 받은 자는 다른 존재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별이 땅에 떨어지다’의 ‘떨어지다’는 헬라어 ‘핍토’(πίπτω)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성경에서 악한 천사, 사단이 떨어질 때 쓰이는 단어입니다.
눅10:18절을 보지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이 구절을 좀 더 원어에 맞게 번역하면 ‘하늘에서 번개 같은 사단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Εθεώρουν τὸν Σαταναν ὡς ἀστραπὴν ἐκ του οὐραν
ου πεσόντα) I beheld - Satan as lightning out of - heaven fall 입니다. 여기서 쓰인 단어도 ‘핍토’(πίπτω)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땅에 내려오실 때는 다른 단어가 쓰입니다. 우리가 조금 전에 보았던 계20장의 ‘무저갱의 열쇠를 가지고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예수님’이 땅에 내려오실 때는 '핍토‘가 아니라 ‘카타바이노’(καταϑαίνω=come down)라는 다른 단어가 쓰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진 별은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쓰이는 사단으로 보는 것이 옳은 것 같습니다.
한 가지 더 근거를 보여 드린다면, 오늘 본문 계9:1절에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진 별’에서 ‘떨어진-페프토코타(πεπτωκότα)’는 완료 능동태 분사입니다. 즉 ‘이미 떨어졌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 별은 ‘이미 떨어진 존재’입니다. 사단이 언제 하늘에서 떨어졌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 때 사단은 떨어졌습니다.
그 떨어진 사단이 하나님 나라의 완성 때까지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쓰이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그가 무저갱의 열쇠를 받았다는 표현을 쓰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개념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는 이중적 의미가 들어 있다고 했잖습니까?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는 그 십자가는 구원의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택함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심판의 십자가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다면 이제 그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택함을 받지 못한 자들은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출애굽기에 나오는 유월절에 심판을 행했던 죽음의 천사가 상징했던 세상을 재앙 속으로 떨어뜨리는 무저갱의 천사가, 사단이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서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계9:11절을 봅시다. “저희에게 임금이 있으니 무저갱의 사자라 히브리 음으로 이름은 아바돈(Αβαδδὼν)이요 헬라 음으로 이름은 아볼루온(Απολλύων)이더라”
여러분, 출애굽기에 나오는 그 죽음의 천사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무저갱의 임금 무저갱의 천사(아바돈, 아볼루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직접 죽이시는 일을 하지 않으시고, 그 사망이라는 천사, 사단을 도구로 써서 악한 세상을 심판하십니다.
그런데 출11:5절에서 보면, “하나님이 바로의 장자로부터 모든 생축의 처음 난 것이 죽을찌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의미는 무엇입니까?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습니다.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대로 역사는 운행되어져 갑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내가 한다. 내가 죽인다’라는 표현을 쓰십니다.
그러나 그 모든 재앙과 심판들은 우리의 죄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버린 타락한 인간들의 죄, 그 죄가 스스로 우리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것을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무저갱의 천사에게 무저갱의 열쇠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제 세상을 심판해야 하는데 너희들이 그 역할을 해야 겠다’ 이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 무저갱은 사단 마귀가 거주하는 곳이면서 갇혀 있는 감옥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풀어서 세상을 치게끔 허락하시는 것은 이제 심판 받을 자들에게 그 심판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 기간은 다섯 달입니다.
다섯 달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바로 노아의 홍수에서 나왔습니다. 홍수 때 비가 며칠간 왔습니까? 150일 곧 5개월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심판의 기간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 기간 동안 세상은 심판의 비로 다 죽었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방주 안에서 보호를 받고 살아나는 기간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일관성이 있습니다.
계속해서 보지요. 계9:2절을 보시면 그 하늘에서 떨어진 악한 천사가 무저갱의 문을 여니까 연기가 납니다. 성경에서 연기는 어디에 자주 등장합니까? 하나님의 거룩과 하나님의 현현을 표현할 때 연기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무저갱을 열었는데 그냥 연기가 아니라 ‘연기 같은 연기’가 올라옵니다. 뭡니까? 이건 속임수이지요. 사단은 하나님의 흉내를 내어서 하나님의 인을 받지 않은 자들을 미혹해서 심판의 자리로 데려간다는 것입니다.
그 연기 같은 연기가 해와 하늘을 어둡게 만듭니다. 진짜 하나님의 현현, 진짜 하나님의 거룩의 연기는 창조의 연기요, ‘빛이 있으라’의 연기입니다.
그런데 이 ‘연기 같은 연기’인 가짜 연기는 오히려 해와 하늘을 어둡게 만들어 버리는 연기 같은 연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을 받지 않은 사람들은 그 연기 같은 연기에 속아서 결국 사망으로, 심판으로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 연기 속에서 나오는 것들이 있는데 그게 황충입니다. 메뚜기지요. 라일 같은 신학자는 그 메뚜기가 미국의 아파치 헬기라고 설명합니다. 나중에 종말 때 미국의 아파치 헬기가 구름 떼처럼 몰려 와서 폭탄을 퍼붓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말합니다.
코메기 같은 해석이라 재미있기는 하지만 성경은 성경을 근거로 해서 푸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구약 성경에 나타난 메뚜기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를 사용해서 그 재앙의 엄청난 파괴력을 주지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아파치 헬기 같은 것을 이야기 한 것이 아닙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에 출몰했던 메뚜기 떼는 태풍 토네이도의 파괴력에 버금가는 피해를 주었습니다. 메뚜기 떼가 지나간 자리는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메뚜기 떼는 그 수가 엄청나게 많아서 하늘을 덮으면 해가 가려져서 먹구름이 낀 것같이 보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갑자기 나타났다가 갑자기 사라지는 신출귀몰한 곤충이라고 합니다.
마귀의 세력이 그러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메뚜기가 등장하는 몇 구절만 찾아봅시다.
삿6:3-5절을 찾습니다. “이스라엘이 파종한 때면 미디안 사람, 아말렉 사람, 동방 사람이 치러 올라와서
진을 치고 가사에 이르도록 토지소산을 멸하여 이스라엘 가운데 식물을 남겨두지 아니하며 양이나 소나 나귀도 남기지 아니하니
이는 그들이 그 짐승과 장막을 가지고 올라와서 메뚜기 떼같이 들어오니 그 사람과 약대가 무수함이라 그들이 그 땅에 들어와 멸하려 하니“
엄청난 수를 가리킬 때 메뚜기 떼 같다고 합니다.
암7:1-2절(표준 새 번역)입니다. “주 하나님이 나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보여 주셨다 주께서 재앙에 쓰실 메뚜기 떼를 만드신다 두벌갈이의 씨가 움돋을 때, 곧 왕에게 바치는 곡식을 거두고 나서, 다시 두 번째 뿌린 씨가 움돋을 때이다
메뚜기 떼가 땅 위의 푸른 풀을 모두 먹어 버리는 것을 내가 보고서 “주 하나님, 용서하여 주십시오! 야곱이 어떻게 견디어 낼 수 있겠습니까? 그는 너무 어립니다하고 간청하니“
엄청난 파괴력입니다. 모두 먹어버립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엄청난 파괴력 있는 심판임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계9:5, 10절을 보시면 그 메뚜기가, 마귀들이 땅에 있는 전갈의 권세와 같은 권세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그 권세를 이용해서 하나님의 인을 받지 못한 자들만을 쏩니다.
계9:5절을 봅니다. “그러나 그들을 죽이지 못하게 하시고 다섯 달 동안 괴롭게만 하게 하시는데 그 괴롭게 함은 전갈이 사람을 쏠 때에 괴롭게 함과 같더라”
그 메뚜기들이 전갈이 사람을 쏠 때의 아픔 같은 무지무지한 고통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 쏟아 붓습니다. 그럼 또 구약에서 전갈이 가지는 메시지를 찾아 봐야겠습니다.
성경에서 전갈이 등장하는 곳은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 영역밖에 있는 자들, 혹은 그들이 사는 세상을 가리킬 때 전갈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겔2:3-4, 6절을 찾으세요.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자손 곧 패역한 백성, 나를 배반하는 자에게 보내노라 그들과 그 열조가 내게 범죄하여 오늘날까지 이르렀나니
이 자손은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강팍한 자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내노니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 인자야 너는 비록 가시와 찔레와 함께 처하며 전갈 가운데 거할지라도 그들을 두려워 말고 그 말을 두려워 말지어다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도 그 말을 두려워 말며 그 얼굴을 무서워 말지어다“
패역한 족속, 죄인들을 가리켜 전갈이라고 표현합니다.
신8:14-15절도 보지요.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는 가나안과 비교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 밖의 세상을 상징하는 광야를 전갈이 있는 곳이라고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황충이 전갈이 쏘는 것처럼 믿지 않는 자들을 괴롭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 영역 밖에 있는 세상의 삶의 원리로 사는 자들을 그 세상의 삶의 원리 즉 죄가 스스로 그들 자신을 고통스럽게 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죄인들의 궁극적 목표는 ‘내 배를 살찌우는 것’입니다. 그게 세상의 삶의 원리지요. 저마다 내 배를 위해 살게 되면서 생기는 것이 뭡니까?
물질주의를 추구하는 인간들이 낳은 열매들이 무엇입니까? 미움, 다툼, 시기, 질투, 전쟁, 경쟁, 분 냄 등 이런 것들입니다.
이것이 전갈이 쏘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만들어 낸 것들입니다. 자기 안에 있는 죄의 결과들입니다. 사도 바울도 똑같은 경고를 합니다.
딤전6:9-10절을 봅시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여기서 돈을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히 ‘부자가 되려는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 자신의 존재의 안전과 행복의 근거로 삼으려고 하는 죄인들을 총칭해서 ‘부하려 하는 자들’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어떻게 산다고 말합니까?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찌르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섯 번째 나팔입니다.
엉터리 철학과 이념, 교육, 엉터리 교리 이런 것들은 인간을 하나님보다 위에 올려놓습니다.
인본주의, 뉴 에이지, 기복주의, 물질주의 이런 것들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야 할 인간들을 오히려 신으로 추켜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제일 잘나야 하고, 모두 나를 존경해 줘야 하고 모두가 나를 부러워해야 한다는 삶의 목표를 세우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삶이 결국은 자기를 찌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리해 보면 사단이 무저갱의 문을 열어서 마귀들을 땅으로 쏟아 부어서 하나님의 흉내를 내면서 믿지 않는 자들을 미혹하여 공격하는데 그 공격 방법이 거짓 가르침으로 그들의 마음과 정신을 빼앗아서 엉뚱한 것을 추구하게 만들어서 스스로 올무에 빠지고 시험에 빠지고 근심으로 자기를 찌르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으면 여러분의 모든 소원이 이루어지고, 부자가 되고, 병도 낫게 된다는 가르침은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주시겠다’ 하셨던 복들입니다. ‘너희가 내 말을 듣고 지키면 주시겠다’고 하셨던 것들입니다.
그런데 앞의 ‘내 말을 듣고 지키면’이라는 말은 쏙 빼고 뒤의 ‘주시겠다’고만 강조하는 것이 바로 기복신앙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으면 만사형통이다’, 만일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고 그러한 복을 원하신다면 여러분은 다시 구약으로 돌아가시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 잘 믿어 드릴테니 내가 원하는 것을 충분히 주세요’ 이게 구약이 아닙니까?
그렇게 되면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전부 사망입니다. 우리 인간은 그 율법을 지켜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고전15:55-56일 펴십시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여러분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그 구약의 복을 원하신다면 여러분은 다시 구약의 율법 아래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고, 그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사망에 의해 쏘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것들로 만을 좇는 사람들의 인생이 얼마나 고단합니까? 얼마나 괴롭습니까? 많이 가져도 괴롭고 없어도 괴롭고 참 만족이 없습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너희는 절대 거기에 빠지면 안 된다고 경고하고 가셨습니다.
눅10:19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하나님의 인생을 받은 사람들이 맞는다면 우리는 그 전갈에 쏘이는 것이 아니라 그 전갈을 밟는 자들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렇게 우리에게 그 황충의 전갈을 밟을 권세를 주셨다고 하는데 여전히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들이 그 전갈의 쏘임에 당하고 있다면 그건 말도 안 되는 거지요.
마귀는 언제나 그 거짓 가르침을 가지고 우리를 쏘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쏘이면 잡히지도 않는 신기루 같은 목표를 향해 시간을 허비하고 에너지를 허비하며 고단하게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절대 거기에 넘어지지 않는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전갈을 밟을 권세가 있다’라고 말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인을 맞지 않은 자들은 자기가 붙들고 있는 세상 것들을 조금만 흔들어도 괴로워서 죽습니다. 전갈에 쏘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러한 것들이 떠나가면 하나님께로 돌아옵니다. 주위를 돌아보면 망해서 하나님 앞으로 돌아온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이 아는 사람 중에 돈을 너무 많이 벌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는 사람을 얼마나 만나보셨습니까? 전부 망해야 돌아온다니까요?
그 말은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절대 전갈이 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절망하고 자포자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 돌아온다니까요?
그래서 계9:4절에 "하나님의 인 맞지 않은 사람들만 해하라“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 그런 것으로 해를 받지 않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 나라에 있기 때문에 그까짓 것들 좀 떠나가도 기뻐할 수 있고 평안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빌4:4-7절을 펴세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하나님의 백성들은 절대 전갈이 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직까지 그 전갈의 쏘임에 당하고 계신다면 여러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정말 하나님의 백성이 맞는지, 첫 창조의 부산물들을 좇아 사는 사람들, 세상의 가치를 좇아 사는 사람들의 삶 속에는 절대 평안이 없습니다. 절대 만족이 없습니다. 늘 부족합니다.
내가 올라가기 위해서는 늘 다른 사람을 밟아야 합니다. 그 삶이 괴롭습니다. 거기를 지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계9:6절을 보면, “그 날에는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얻지 못하고 죽고 싶으나 죽음이 저희를 피하리로다”
그렇습니다. 이 말씀은 나중에 최후의 종말 때는 사람들이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뱀파이어가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죽기를 구하여도 죽지 못하는 곳이 어디입니까? 지옥입니다.
세상 가치를 추구하는 죄인들은 이 땅에서 그 지옥을 미리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전쟁과 살인과 다툼이 왜 존재합니까? 세상의 가치, 내 배를 위한 죄인들의 욕심 때문이 아닙니까? 그게 지옥이겠지요?
그러나 분명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전갈을 밟을 수 있는 권세를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마음속에 그러한 욕심과 교만이 솟구쳐 올라올 때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해서 밟아버리십시오.
그래야 진짜 하나님의 인을 받은 사람입니다. 절대 그 메뚜기의 꼬리에 달린 전갈의 독에 중독되지 마시고 하늘 소망을 바라시며 늘 기쁨과 평안을 잃지 않으시는 복된 성도의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첫댓글 하나님은 우리가 전갈을 밟을수있는
권세를 주심' 우리 마음속에 교만과
욕심이 올라올때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밟으십시요~ 계시록41강해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