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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1월9일~10일(土日)晴
▲백두대간28(화령재~윤지미산~신의터재~지기재~백학산~개터재~효곡리)
해봉(30명)
♣참 고
▲백학산[白鶴山]
상주시 공성면, 내서면, 외남면, 모서면
높이 615m
백두대간상의 산으로써 산의 유래는 옛날에 수많은 흰 학들이
이 산 정상에 쉬어 갔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산입니다. [지리정보원]
♣산행 코스
05시00분 화령재
09시00분 신의터재
10시15분 지기재
13시10분 백학산
15시25분 개터재
15시40분 효곡리
총 10시간40분
☞☞☞☞한 겨울답지 않게 포근한 23시,
시민회관 앞을 출발하여 경부고속도로 위로 버스가 달리자
지도를 나누어 주고 임 대장이 마이크를 잡습니다.
이번 구간은 평탄한 코스가 많기 때문에 예정된 코스를
연장하겠다고 합니다.
A팀은 개터재,
B팀은 위왕실재를 날머리로 한다고.
휴게소 한군데를 들리고
곧장 달려 화령재에 도착한 게 03시.
버스는 엔진과 히터를 틀어놓은 체
기사님을 비롯해 전원 계속 취침합니다.
해발 320m인 화령재는 상주시 화서면 신봉리와 상곡리를 연결하는
국도 25호선 인데 한문으로 불 火, 재 嶺으로 불재로 불을 뿜는 재라고
하여 화령재라고 합니다.
지금도 재 부근에는 화산재처럼 보이는 시꺼먼 재들이 남아있고 오색돌이
묻혀있어 다듬으면 멋진 작품이 되기도 합니다.
5시20분전, 불이 켜지고 임 대장이 산행준비 하라고 합니다.
부산한 가운데 밖으로 나오니 북쪽으로 온 탓인가 살을 애이듯
차가운 바람이 뺨을 따리고 인원파악과 상견례를 마치고
5시, 안 대장을 리더로 깜깜한 하늘아래
플래시 불빛만 내려다보며 출발합니다.
도로를 횡단하여 콘크리트 옹벽을 넘어
가파른 등로를 따라 올라갑니다.
이번 구간은 평탄한 코스가 많아 수월하게
종주할 수 있을 거라 예상하고 긴장을 풀고 걷는데
잠시 임도가 나타나 대간 길을 찾지 못해
두어 번 방황하다
왼쪽으로 난 시그널을 발견하고 행진이 계속됩니다.
깜깜한 새벽, 전면 숲 속에
작은 플래시 불빛이 어지럽게 움직입니다.
한 시간 가깝게 수월하게 걷는다싶었는데
윤지미산을 오를 때 급경사로 잡목잡기도
힘들 정도의 된비알이 나타납니다.
대원들이 네발로 기다시피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올라가는데 누군가 어둠속에 한마디 합니다.
“야~ 이 코스가 사람 잡네!”
차가운 날씨에도 등줄기에는 땀이 흥건합니다.
능선에 올라
갈증으로 목을 적시려고 배낭에서 우유병을 꺼내어
마시려는데 우유가 서걱서걱 얼어 있습니다.
7시, 원래 소머리산이였는데 언제 부터인가
四書三經중 大學의 윤집걸중[允執乞中]에서 나온 말로
"세상을 포용, 두루 알아 맞이고 인생전반을 안다"
는 뜻이라는 '윤지미산'은 언제 지나쳤는지...
플래시 불빛이 가물거려 배터리를 교환하고
밝은 불빛 속에 잘 가다 그만 전구가 나가버려 깜깜.
예비전구가 있었지만 동이 터오고
희미한 달빛 속에 낙엽을 밟으며
앞사람의 불빛을 이용하며 그냥 걸어갑니다.
7시25분, 파란 새벽하늘에 하얀 반달과
마음의 여유를 갖고 주변을 캠코더에 담습니다.
잡목 숲 속 길.
뒤따라오는 이진복, 김성수대원들을 촬영하는데
거의 머리와 얼굴은 완전방풍 장치로 중무장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몸이 불편한 조문규군이 나뭇가지로
쌍지팡이를 만들어 짚으며 올라갑니다.
방금이라도 태양이 떠오를 것 같아
일출의 순간을 촬영하기 위해 주춤 되며 가는데
이종원군이 앞서가고 김양이 김 대원과 재미있는
대화를 나누었는지 캠코더 앞을 활짝 웃으며 지나칩니다.
모두 가벼운 걸음 거리입니다.
7시45분, 동쪽의 잡목 가지사이로
분홍빛 태양이 떠오릅니다.
와삭와삭 낙엽을 밟으며 가다
7시53분, 잡목속의 가랑잎위에 앉은
주 대원을 비롯한 남녀 대원들이 아침식사를 하고 있습니다.
한 대원이 은박지로 싼 김밥과 뜨거운 커피를 내밉니다.
땀으로 내려간 체온을 김밥과 따끈한 커피로 대웁니다.
8시3분, 등로가 보이지 않는 넓은 공터로 들어섭니다.
시그널을 찾아 2시 방향으로 걸어갑니다.
8시30분, 양지바른 ‘孺人慶州0氏 之墓’의 석비가 서있는 묘지에
선두그룹이 해바라기, 혹은 식사하며 쉬고 있습니다.
8시34분, 안승태 대장이 리더로 선두그룹 4,5명이
먼저 출발하고 나머지는 아침식사를 합니다.
왕눈이 중년 대원이 길을 잘못들어 고생했다며
특유의 표정으로 웃고 있는데 주 대원의 고등학생 아들도
뒤따라 옆길로 빠져 한동안 고생했다며 비틀되며 오드니
쓸어지듯 비석에 기대는데 많이 지친모양입니다.
빵으로 식사하며 한동안 휴식,
임대장이 맡고 있는 후미그룹이 도착하지 않았지만
A그룹에 끼이기 위해 8시48분,
김성수, 신대원등 6,7명의 중간 그룹에 포함되어 출발합니다.
8시58분, 상주시 화동면 어산리와 이소리를 연결하는
지방도로가 지나가는 신의터재 가 내려다보이는 완만한 비탈에서
가볍게 내려오는 대원들을 캠코더에 담습니다.
해발 280m의 이 고개는 금강과 낙동강을 가르는 분수령으로써
임진왜란 이전에는 신은현(新恩峴)으로 불리었으나, 임진왜란 때
김준신이 이 고개에서 의병을 모아 큰 공을 세우고
임진년 4월 25일 순절한 후부터 신의터재로 불립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이 고개 동쪽의 동리 이름을 따 "어산재"로도 불리었으나
광복50주 년을 맞아 제 이름을 찾았다는 신의터재 석비 앞에서
10여명의 대원들이 웃으며 기념촬영 후, 출발하면서
뒤편에 서있는 ‘義士節谷金先生俊臣遺蹟碑’를 발견합니다.
왜 자랑스러운 유적비를 뒤쪽에 두었는지 까닭을 알 수 없습니다.
송전탑 밑으로 빠져 평지를 걷다
논두렁 밭두렁 길을 걷습니다.
9시33분, 일단의 중간그룹이 휴식하고 있는 양지쪽에 당도합니다.
대부분 지기재에서 버스를 타겠다는 B팀입니다.
잠시 의논하더니 신 대원 등 5,6명이 A팀으로 가겠다며
김성수를 앞세워 출발합니다.
9시50분, 가볍게 올라선 암반위에서
대간 길은 90도로 꺾어지는데
신 대원이 마음을 바꾸어 뒤에 오는
B팀과 함께 하겠다며 주저앉습니다.
이제 본격적인 내리막길,
마사토 길이 미끄러워 신경을 씁니다.
10시15분, 작은 마을을 지나,
해발 260m 상주시 모서면 대포리와 석산리를 연결하는
지방포장도로에 올라서는데
옛날, 재 부근에서 도둑이 많이 나왔다하여
적기재라 불리 기도 한 '지기재'를 건너갑니다.
B팀을 태우고 갈 버스가
오른편으로 저만치에서 주차해 있습니다.
김성수를 비롯한 4,5명은 도로를 가로질러
농로를 따라 걷습니다.
곧 가파른 오르막을 탑니다.
서울에서 사정이 있어 중간에 빠뜨린 구간을,
땜질백두대간 종주를 한다는 덩치가 큰,
안경 낀 장년대원이 부피가 큰 배낭에 쌍 스틱을 짚고
느릿느릿 힘들게 올라갑니다.
숲이 욱어진 가파른 등로가 S자로 이어집니다.
11시, 능선에 올라 김성수가
‘해뜨는봉우리 백두대간종주대’라고 쓴
노란 시그널을 나뭇가지에 묶고 있습니다.
우유를 녹이기 위해 방풍재킷 안 호주머니에 넣어둔
우유병을 꺼냈는데 차가운 바람으로 그냥 녹지 않고
얼음부스러기 그대로 있습니다.
잠시 심호흡을 하고 얼음우유로 갈증을 풉니다.
잡목속의 완만한 내림을 지나
11시12분, 개머리재에 내려섭니다.
오른쪽으로 농로가 보이고
대간 길은 직진입니다.
오른쪽으로 인삼밭을 끼고 시그널을 살피며 가는데
먼저 갔든 또 다른 신대원이 길을 잘못 들어
오른쪽 농로 쪽에서 되돌아오고 있습니다.
11시20분, 인삼밭과 폐비닐이 나뭇가지에 걸려
바람에 깃발처럼 나부끼는 잡목 숲을 지날 무렵
11시30분, 되돌아온 신 대원이 뒤따라와 합류합니다.
11시55분, 이름을 알 수 없는 작은 재를 지나
중턱에 올라 뒤돌아서서
멀리 지나온 속리산 주능선을 촬영한다.
평지는 계속 이어집니다.
12시40분, 임도에 내려서서 조금 올라가다
시그널이 있는 대간 길을 찾아
이제 본격적으로 백학산을 오릅니다.
작은 바위와 적당한 경사의 오름.
13시10분, 가볍게 정상에 올라섭니다.
상주시청산악회에서 자그마한 자연석에다
‘白頭大幹 白鶴山 615m’라고
음각한 정상비가 서있습니다.
옆으로
지나온 야트막한 백두대간을 천천히 캠코더와 캐논에 담고
김성수대원과 정상비를 사이에 두고 기념촬영,
후미에서 너무 처진 것 같아 바쁘게 하산 길로 접어듭니다.
13시45분, 쌍 스틱이 등산로 변에서 간식을 하고 있고
14시, 일직암치 앞서 간 줄로 알았든
또 다른 신 대원이 헐떡이며 옵니다.
또 길을 잘못 들어 되돌아 나와
뒤쫓아 온 것입니다.
“오늘 길을 많이 걷네요!”
김 대원의 한마디에 함께 크게 웃습니다.
그리고 다시 앞장서 부지런히 가는 신 대원.
보통 주력이 아닙니다.
14시10분, 음지에 잔설이 있는 윗왕실 도착.
김 대원이 무전기로 교신하는데
버스로 효곡리에 먼저 도착한 임대장이
아직 시간이 많다며 개터재로 하산하라고 합니다.
그 와중에 무전기로 회원 6명을 태우고
국수봉에 일일산행을 왔다는
백두대간 종주 도중하차한 M산악회의 B대장과
주파수가 맞았는지 김 대원이 교신하고
다시 직진으로 오릅니다.
14시45분, 좌로 이름을 알 수 없는 산자락이
석재 채취를 하는지 벌겋게 까발려 놓고 있는 걸
캠코더에 담습니다.
15시27분, 쌍 스틱, 김 대원과
해발 355m, 상주시 공성면 효곡리와 봉산리를 연결하는 농로인
천지개벽 당시에 그 쪽으로 물길이 터졌다하여
개터재에 내려섭니다.
김성수대원이 노란 시그널을 달고
오른쪽으로 난 임도를 따라 내려갑니다.
15시40분, 아담한 효곡리(孝谷里) 도착.
1590년 임진왜란 당시 여산(礪山)송씨(宋氏)가 피난 왔다가 정착하였으며
마을 이름을 왕신(旺信)이라 하였다가
1912년 행정구역 개편시 효자와 열녀가 많다 하여
효곡(孝谷)이라 불렀다 합니다.
시간은 조금 길었지만 평탄한 코스에
아무런 어려움 없는
10시간40분의 산행이 끝납니다.
먼저 도착해있든 대원들이 손을 흔들며 마지해 줍니다.
임대장이 구멍가게에 부탁해 마련한
김이 무럭무럭 나는 따끈한 어묵과 소주로
피로와 허기를 풀고
16시, 부산으로 출발합니다.
M산악회의 B대장과 다시 교신하든
안승태 대장이 큰재에서 내리고
버스는 일로 김천으로 달려
16시48분, 김천 나들목으로 빠져
평사휴게소에 들렸다
19시5분, 부산T/G를
가뿐한 기분으로 통과합니다.
산 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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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追 記
[지명유래 문의에 대한 상주시의 전병순님의 답변]
1. 화령재
화령재는 한문으로 불화 재령으로 그 뜻풀이를 하면 불재로 불을 뿜은
재라고 하여 화령재라고 합니다. 지금도 재 부근에는 화산재처럼 보이는 시꺼먼
재들이 남아있고 오색돌이 묻혀있어 다뜸으면 멋진 작품이 되기도 합니다.
이 재의 높이는 해발 320m 이고 상주시 화서면 신봉리와 상곡리를 연결하는 국도
25호선입니다.
2. 신의터재
신의터재는 임진왜란때 상주의 의병장 김준신 의사와 신의 있는 충신
열사들이 왜적과 싸우다가 이 곳에서 많은 항의군이 순직 했다고 하여 신의터재라
고 부릅니다. 김준신 의사 사당과 낙화담이 인근의 화동면 판곡리에 있고 주변에는
철새 도래지와 판곡 저수지가 있습니다. 이 재의 높이는 해발 320m로써 상주시 화동
면 어산리와 이소리를 연결하는 지방도입니다.
3. 지기재
지기재는 옛날에 재 정상 부근에서 도둑이 많이 나왔다고 하여 적기재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언제 어떠한 이유로 지기재라고 부르게 된 이유를 아는 사람이 없는
것이 유감 입니다. 이 재는 해발 260m로써 상주시 모서면 대포리와 석산리를 연결하는
지방도입니다.
4. 백학산
백학산은 해발 615m로써 상주시 공성면, 내서면, 외남면, 모서면에 걸쳐있는
백두대간 상의 산으로써 산의 유래는 옛날에 수많은 흰(하얀)학들이 이 산 정상에 쉬어
갔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산입니다.
5. 개터재
개터재는 천지개벽 당시에 그 쪽으로 물길이 터졌다고 하여 개터재라고 합니다.
이 재는 해발 355m로써 상주시 공성면 효곡리와 봉산리를 연결하는 농로입니다.
6. 큰재
큰재는 재가 크다고 하여 큰재라 부릅니다. 이 재는 해발 350m로써 상주시 공성면
신곡리와 도곡리를 연결하는 지방도입니다.
[윤지미산]문의에 대한 상주시장의 답변[2006.2.5.]
김근수 님의 답변입니다.
우리시의 시정과 백두대간에 관심을 가져 주신데 대하여 감사 드립니다.
먼저 남도생 님께서 문의하신 윤지미산에 대한 산명유래에 대하여 관련 문헌자료를 모두
찾아보았으나, 상세한 유래를 찾을 수가 없음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윤지미산에 대해 알고 계신 분(정옥근, 화서면 거주)이 계셔서 그분의 증언을 토대로
답변을 드리고자 합니다.
화동면 판곡리와 화서면 신봉리에 걸쳐 위치한 윤지미산(538m)은 원래 소머리산
(현재 화서면 밤원 옆의 산)이라고 하였으나, 정확한 시기와 유래는 알수 없으나
언제 부터인가 윤지미산으로 불려지게 되었으며, 일부 설에 의하면 윤집걸중(允執乞中)
이라는 단어에서 나온 말로써
“인생전반을 다안다, 세상을 포용한다, 세상을 두루 알아맞히다”
라는 의미를 가진 산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참고로 윤집걸중이라는 말은 四書三經중 大學에 나오는 단어로써 일상생활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말이 아니라 그 단어에 많은 뜻이 숨어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시 관할의 지명유래에 대해서는 해당 읍면동 홈페이지에 접속
(상주시청 홈페이지의 배너 활용) 하셔서 “우리마을 소개-마을유래”에 들어 가시면 읍면동별로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음을 알려 드립니다.
우리시에 관심을 가져주신데 대하여 다시한 번 감사드리며, 백두대간과 관련하여 더 자세한
사항은 우리시 산림과 산림자원담당(☎530-6313)으로 문의하시면 친절하게 안내하여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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