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새소망교회[상왕십리]
카페 가입하기
 
 
 
카페 게시글
다석 류영모 스크랩 성공회 청주 수동성당 윤정현 신부님의 "다석의 하느님"(9)
조해강 추천 0 조회 43 15.08.01 22:2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성공회 청주 수동성당 윤정현 신부님의 "다석의 하느님"(9)


다석 유영모(1890-1981) 
다석(多夕) 유영모는 1890년에 태어나 어려서부터 천자문과 사서오경(四書五經)을 배우고, 1905년 기독교청년회관(YMCA)에서 행한 개화기의 명사들의 강연을 들으러 다니다가 초대 YMCA 총무 김정식(金貞植)의 인도로 연동교회에 나갔다. 

그리스도교에 입교한 후 경신학교를 다니며 서양의 신학문을 배웠다. 
1910년부터 1912년까지 오산학교 교사로 활동하면서 이승훈을 도와 오산학교를 그리스도교 학교로 만들었다. 
1912년 일본의 도쿄(東京) 물리학교에 입학하였다가 귀국하였으며, 1921년 조민식 선생의 후임으로 1년 동안 오산학교 교장으로 있었다. 
YMCA 총무 현동완의 부탁으로 1928년부터 1963년까지 35년간 연경반(硏經(班)에서 성서와 동양고전을 지도하였다. 
유영모는 그리스도교에 입교한 후 7년 동안 교회주의 정통 신앙인으로 살다가 비정통신앙인이 되었다. 
톨스토이의 저서를 통해서 그리고, 오산학교에서 신채호, 여준 선생의 조언으로 한국사상과 불교 경전과 도덕경(道德經)을 읽고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불교경전과 노장사상(老莊思想), 사서오경 (四書五經)과 서구의 과학정신을 함께 받아들여 성서를 다석 나름대로 독특하게 해석하였다. 
순수 우리말로 성서를 해석한 다석은 서구 그리스도교를 한국화하였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여 한국적 그리스도교 사상을 펼쳤다고 할 수 있다. 

다석 유영모는 한국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손꼽히는 종교 사상가이다. 
160㎝의 단구의 몸으로 서울 구기동에서 농사를 짓고 벌을 치며 전깃불도 없이 살던 다석은 1942년 그의 나이 쉰둘이 되자 간디처럼 아내와 해혼(解婚, 부부 성관계를 그만둠)을 선언한 뒤 늘 무릎을 꿇고 생활하였다. 
다석은 하루에 한 끼만 먹고, 널빤지에서 잠을 자면서 철저히 수행하며 ‘하나’에로 귀일(歸一)하는 삶을 살았다. 
1955년에는 1년 후 1956년 4월 26일에 죽는다고 선언을 하고 하루하루를 철저히 사는 신앙인으로서 늘 생각이 깨어 있는 삶을 살았다. 
다석은 탐진치(貪瞋癡)를 극복하여 참 나를 깨달아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깨달음의 신앙을 강조하였다. 
태일(太一)인 ‘하나’는 ‘하늘’과 ‘나’가 하나가 된다고 다석은 해석하였다. 

다석 유영모 연보

1890년(0세); 
1890년 3월 13일(경인년 2월 23일) 태어남.

1896년(6세); 
서울 흥문서골 한문서당에 다니며 통감(通鑑)을 배움.

1900년(10세); 
서울 수하동(水下洞) 소학교에 입학, 2년 다니고 다시 한문서당에 다님.

1902년(12세); 
자하문 밖 서당에서 3년간 공부, 『맹자(孟子)』를 배움.

1905년(15세); 
YMCA 한국인 초대 총무인 김정식(金貞植)의 인도로 기독교에 입신(入信),

1907년(17세); 
서울 경신학교에 입학 2년 간 수학(修學).

1909년(19세); 
경기 양평에 정원모가 세운 양평학교에 한 학기 동안 교사로 일함.

1910년(20세); 
남강 이승훈의 초빙을 받아 평북 정주(定州) 오산학교(五山學敎) 교사(2년간). 
1912년(22세); 
오산학교에서 톨스토이를 연구. 일본 동경에 가서 동경 물리학교에 입학(1년).

1915년(25세); 
김효정(金孝貞, 23세)을 아내로 맞이함. 

1917년(27세); 
최남선(崔南善)과 교우(交友)하며 잡지 「청춘(靑春)」에 '농우(農友), '오늘' 기고.

1919년(29세); 
남강 이승훈이 3·1운동 거사 자금으로 기독교 쪽에서 모금한 돈 6천원을 맡아 아버지가 경영하는 경성피혁 상점에 보관함.

1921년(31세); 
고당(古堂) 조만식(曺晩植) 후임으로 정주 오산학교 교장에 취임(1년간).

1928년(38세); 
중앙 YMCA 간사 창주(滄柱) 현동완의 간청으로 YMCA 연경반(硏經班) 모임을 지도함. 1963년 현동완 사망(死亡) 시까지 약 35년 간 계속함.

1935년(45세); 
서울 종로 적선동에서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구기리로 농사하러 들어감.

1937년(47세);
「성서조선」잡지에 삼성 김정식 추모문을 기고함.

1941년(51세); 
마음의 전기(轉機)를 맞아 예수정신을 신앙의 기조로 함. 일일 일식(1日 1食)과 금욕생활. 이른바 해혼(解婚)을 선언. 잣나무 널위에서 자기 시작함.

1942년(52년); 
「성서조선」 사건으로 종로경찰서에 구금, 57일만에 서대문 형무소에서 풀려남.

1943년(53세); 
2월 5일 새벽 북악 산마루에서 첨철천잠투지(瞻徹天潛透地)의 경험을 함.

1945년(55세);
해방된 뒤 행정 공백기에 은평면 자치위원장으로 주민들로부터 추대됨.

1948년(58세); 
함석헌(咸錫憲) YMCA 일요집회에 찬조 강의를 함.

1950년(60세) 
YMCA 총무 현동완이 억지로 다석 2만 2천일 기념을 YMCA회관에서 거행함.

1955년(65세); 
1년 뒤 1956년 4월 26일 사망 선포함. 일기(『多夕日誌』)를 쓰기 시작함.

1959년(69세);
『노자(老子)를 우리말로 완역하고 다른 경전의 중요 부분을 순수 우리말로 옮김.

1972년(82세); 
5월 1일 산 날수 3만 일을 맞이함.

1977년(87세) 
결사적인 방랑길을 떠나 3일 만에 산송장이 되어 경찰관에 업혀 옴. 3일 간 혼수상태에 있다가 10일 만에 일어남.

1981년(91세); 
1981년 2월 3일 18시 30분에 90년 10개월 21일 만에 숨지다.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