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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제 막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곧 말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잘 모르는 상태였습니다. 거기다 그가 살고 있는 마을은 불교 영향이 대단한 곳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교회에 출석하는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지켜보았습니다. 그는 하루하루 그들의 따가운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 내야했습니다. 하루는, 그가 저녁 시간에 목사를 찾아왔습니다.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습니다. 목에는 핏대가 서 있었습니다. 목사는 다그치듯 왜 화가 났느냐고, 누구하고 싸우기라도 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오히려 그 반대라고 대답했습니다. 정말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만 예수 믿는 사람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목사의 말이 생각나서 꾹 참았다는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목사를 찾아왔으니 방법 좀 가르쳐 달라고 말했습니다. 목사는 분을 참지 못해서 여전히 씩씩거리고 있던 그를 진정시켰습니다. 자초지종을 물었습니다. 그날, 오후였습니다. 그가 치던 돼지 다섯 마리가 옆집 채소밭으로 들어가서는 남김없이 먹어치웠습니다. 그러자 옆집 사람은 손해 배상을 요구했습니다. 목사는 당연히 배상해 줘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도 당연히 배상할 생각이었다고 대답했습니다. 대답에 자신감까지 묻어났습니다. 진심이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옆집 사람의 요구였습니다. 어미 돼지 다섯 마리 전부를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는 씩씩거리며 “아무리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해도 이럴 때 화가 나지 않는 놈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그의 설명을 들은 목사는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옆집 사람이 그를 시험해 보려는 것 같다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아마도 옆집 사람은 그가 분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화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만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그가 화를 낸다면, 옆집 사람에게는 예수 믿는 사람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온 동네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절회의 기회가 될 것이라는 설명까지 해주었습니다. 옆집 사람이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려면 원하는 것을 다 주어야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물론, 그가 손해를 입게 되더라도 하나님께서 훨씬 많은 것으로 갚아 주실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위로도 잊지 않았습니다. 그는 한동안 고민에 빠졌습니다. 자신은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끓어오르는 화를 삭이기가 정말 어렵지만 모두 접어두고 목사를 통해 주어진 하나님 뜻에 순종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마을로 돌아간 즉시 한 마디 불평도 없이 어미 돼지 다섯 마리 전부를 다 옆집 사람에게 주어 버렸습니다. 깜짝 놀란 마을 사람들은 그가 미친 것 아니냐고 수군거렸습니다. 비웃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더러는 예수 믿는 사람의 행동은 예측하기 어렵다며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도 했습니다. 나뭇잎이 형형색색 아름답게 물들어가는 가을이 되었습니다. 사건은 그렇게 사람들 기억 속에서 잊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그가 목사를 찾아왔습니다. 어미 돼지들을 옆집 사람에게 주던 날, 목사 말에 순종하기는 했지만 속으로는 정말로 분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옆집 사람의 행동이 도무지 잊혀 지지 않았다고 고백했습니다. 계속해서 그날 벌어진 일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옆집 사람의 소들이 자신의 밭에 들어와 채소를 뜯어먹고 있었습니다. 옆집 사람이 난처한 모습으로 찾아왔습니다. 어떻게 배상하면 좋겠느냐고 물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자신의 밭에 들어온 소들을 당장 다 내놓으라고 외치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놓을 수는 없었습니다. 목사의 대답을 듣고 싶어서 한걸음에 달려왔습니다. 목사에게 “돼지 다섯 마리에 황소 일곱 마리라니! 제가 이겼지요?”라고 외쳤습니다.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목사님 말씀대로, 하나님은 정말 제가 잃은 것보다도 훨씬 많은 것으로 갚아 주셨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라고 외쳤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커다란 이익을 얻게 되었다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목사의 반응은 그의 기대와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차분하게 그가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상기想起시켜 주었습니다. 악을 악으로 갚으려 하지 말고 용서하는 마음을 보여주라고 권면했습니다. 들떠 있었던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침울해졌습니다. 올 때와는 달리 한 마디의 반응도 없이 완전히 맥 빠진 모습으로 힘없이 돌아갔습니다.
다음 날 저녁이 되었습니다. 그는 잔뜩 신이 난 모습으로 다시 목사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쉽지 않았지만 목사의 제안대로 옆집 사람에게 어떤 배상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날 오후가 되었습니다. 놀랍게도 옆집 사람은 자신이 배상으로 요구했었던 어미 돼지들과 어미 돼지들이 지난 6개월 동안에 낳은 새끼들까지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두 다 이끌고 그를 찾아왔습니다. 그의 것이니 모두 다 가지라고 말했습니다. 돼지들을 배상으로 요구했었던 자신과는 달리 어떤 요구도 하지 않는 그의 태도 때문에 고민하느라고 밤새 한 잠도 자지 못했다는 말까지 덧붙였습니다.
옆집 사람의 반응에 흥분한 그는 “하나님께서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많은 돼지들을 되돌려주셨습니다. 지난 6개월 동안 옆집에서 그놈들 전부를 먹인 먹이를 생각하면, 하나님께서는 제가 손해 본 것보다 훨씬 더 많이 갚아 주셨습니다.”라고 외쳤습니다. 동시에, 그의 표정이 진지해졌습니다. “이 모든 것들보다 훨씬 더 좋은 일이 있습니다. 마을 전체가 저를 예수 믿는 사람으로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 받은 최고의 선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열두 명의 제자들을 세우셨습니다.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칠 수 있는 권능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다니면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전파하다κηρύσσω”를 직역하면 “공포하다, 선포하다, 널리 알리다.”입니다. 마치 전쟁의 발발을 알리는 포고문布告文같이 긴박하고도 분명한 어조로 선포하라는 의미입니다. 선포할 내용은 당시 기습적으로 임하여 있었던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이는 세례 요한이 외쳤던 메시지였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임박한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미래적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첫 번째 외쳤던 메시지 역시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인격 안에 완벽하게 깃들어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이 실현된 왕국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와 행동은 생동하는 하나님 나라의 완벽한 표징表徵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낮고 천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타나나셨을 때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반드시 외쳐야할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믿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믿고 있다는 그리스도인들은 죽어서야 들어갈 수 있는 나라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을 배제합니다. 약한 자는 강한 자에게 지배되는 약육강식弱肉强食,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환경에 적응하면 살아남고 그렇지 못하면 도태되어 사라질 수밖에 없는 적자생존適者生存, 조금이라도 나은 자가 이기고 못하는 자는 질 수밖에 없는 우승열패優勝劣敗가 지배하는 세상에 완전히 복속服屬됩니다. 무기력하게 복종합니다. “삶이 무의미하다, 절망이다, 나는 변방 사람이다, 나는 가치 없다.” 등의 말을 끊임없이 쏟아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하루하루 지옥 같은 삶을 삽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셨을 때의 성민 이스라엘 역시 조금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향해서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다고 선포하셨습니다. 따로 구별하여 세우신 제자들에게는 나가서 거리를 다니면서 외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육체적으로 병들어 있는 자들을 고쳐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존재론적으로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자들을 살려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종교적으로나 의식적으로 불결한 문둥병자들을 깨끗이 고쳐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영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귀신들린 자들을 회복시켜 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다는 증거를 확실하게 보여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무엇보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마10:8b)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거저δωρεαν”는 “선물”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δωρεα로부터 파생되었습니다. “선물로, 값없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 구절은 “선물로 받았으니 선물로 주라 또는 값없이 받았으니 값없이 주라”라고 직역할 수 있습니다. “선물로 받았으니 값을 받으려 하지 말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냥 주라.”라고 의역할 수 있습니다.
이는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반드시 기억하고 지켜야할 대단히 중요한 원칙입니다. 사실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를 구원으로 이끌어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다른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그야말로 지상 최고의 선물입니다. 최상의 선물입니다. 치유할 수 있는 권능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원래는 하나님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값없이 허락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인류 구원이라는 위대한 역사가 완벽하게 이루어질 때까지만 맡겨두셨다는 표현이 훨씬 더 정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누구에게나 다 허락해 주지는 않으셨습니다.
창세전부터 구원하기로 작정한 이들에게만 허락해주셨습니다.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맡기신 이들에게만 허락해 주셨습니다. 받은 이들에게는 그야말로 더할 나위 없이 큰 복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귀한 보물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주고도 바꿀 수 없을 만큼 큰 복입니다. 받았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만족할 수 있어야합니다. 무엇보다 재산을 축적하기 위한, 사리사욕私利私慾을 채우기 위한 여러 가지 수단들 가운데 하나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할 수는 없습니다. 복음을 전파한 다음 그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해 달라고 요구할 수도 없습니다.
주면 허락해 주셔서 감사하고, 주지 않아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어야합니다. 혹 굶게 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미물인 까마귀와 한 끼밖에 남지 않은 음식을 먹고 죽으려고 작정했던 여인을 통해서 당신의 종을 먹이셨던 하나님께서 굶기실 때는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종이라고 한다면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해서 재물을 요구하지는 말아야하기 때문입니다. 지나치게 많은 재물을 챙기려고 하지는 말아야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은혜로 받았습니다. 은혜로 베풀어줄 수 있어야합니다.
선물로 받았습니다. 선물로 베풀어줄 수 있어야합니다. 값없이 받았습니다. 값없이 베풀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거저 받았습니다. 거저 베풀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빈부의 차별 없이, 남녀노소의 차별 없이, 인종의 차별 없이, 배운 자와 못 배운 자의 차별 없이 누구에게나 베풀어 줄 수 있어야합니다. 마치 장사꾼처럼 반드시 이윤을 남기고야 말겠다는 어떤 계획이나 의도도 가지지 말고, 아낌없이 베풀어줄 수 있어야합니다. 딱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는 유한한 인생, 나 하나 구원 받고, 내 한 가족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남은 소중한 인생을 허비하지는 말아야합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야하는 그리스도인의 본질적 삶에 충실할 수 있어야합니다. 한 청년이 집 앞에서 자전거를 열심히 닦고 있었습니다. 소년 하나가 가던 길을 멈추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번쩍번쩍 윤이 나는 자전거가 몹시 부러운 듯 바라보았습니다. 꽤나 비싸겠다고 말했습니다. 청년은 자신이 산 것이 아니라 형이 사줬다고 대답해주었습니다. 자전거를 닦으면서 소년이 틀림없이 자신도 이런 멋진 자전거를 사주는 형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런 형을 가진 자신은 정말로 행복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소년에게 이런 자전거를 갖고 싶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자전거를 사 줄 정도의 형이 있느냐는 의미가 암시되어 있었습니다. 소년은 즉시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자신도 동생에게 자전거를 사줄 수 있는 형이 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조금만 뛰어도 숨을 헐떡이는 심장이 약한 동생에게 이런 멋진 자전거를 사주고 싶은데 자신에게는 돈이 없다는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소년은 멋진 자전거를 받고 싶은 소원이 아니라, 아끼는 동생에게 멋진 자전거를 사 주고 싶은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에는 누군가로부터 도움을 받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만큼 충분히 받지 못했다고 판단될 때는 거침없이 원망과 불평을 쏟아놓습니다. 반면 누군가에게 도움을 베풀어주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더 많이 베풀어주지 못해서 늘 미안합니다. 늘 안타까워합니다. 줄 수 있는 방법을 하나라도 찾게 되면 조금도 망설이지 않습니다. 곧 실천에 옮깁니다. 마찬가지로 남들처럼 부모로부터 제대로 된 유산하나 받지 못했다며 노골적으로 원망하고 불평하는 자식이 있습니다. 부모를 자신의 근원이라고 생각하며 더 많이 해드리지 못해서 늘 죄송스러워하는 자식이 있습니다.
다른 남편이나 아내와 비교하면서 불평을 늘어놓으며 상처를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의 남편과 아내가 되어 주어서 너무 감사하다며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베풀어주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떻습니까? 어떻게든 받아내려고 애쓰는 사람입니까? 어떻게든 베풀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사람입니까? 오늘 우리는 사순절 다섯 번째 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허물과 죄로 죽은 저와 여러분의 구원을 위해서 당신 자신을 아낌없이 거룩한 희생 제물로 내놓으셨습니다. “사이에 나 있으니”라는 시가 있습니다.
내 뒤에는
나를 보내시는 분이
내 앞에는
나를 맞이하는 이가
그 사이에
나 있으니
나를 보내시는 분이
나를 맞이하는 이를
나를 통해서
만날 수 있도록
나를 맞이하는 이가
나를 보내시는 분을
나를 통해서
만날 수 있도록
그 사이에
나 있어야 하지만
나는 작을수록 좋다
나는 사라지면 더 좋다
악보는 연주될 때 비로소 진정한 음악이 될 수 있습니다. 종은 울릴 때 비로소 진정한 종이 될 수 있습니다. 은혜는 값없이 나눌 때 비로소 진정한 은혜가 될 수 있습니다. 나눌수록 커집니다. 풍성해집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과 이웃 사이에 반드시 끼어 있어야 하는 존재지만 작아질수록, 흔적도 남기지 않고 아주 지워질 때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롯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나라는 저와 여러분이 값없이 거저 받은 은혜와 축복을, 값없이 거저 나누어줄 때 비로소 시작됩니다. 자신을 드리고, 소유를 아낌없이 내놓을 때 비로소 드러납니다.
그Fritz Kreisler는 세계에서 가장 탁월한 바이올린 연주자인 동시에 낭만주의 작곡가입니다. “저는 몸속에 음악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저는 ABC를 배우기 이전에 본능적으로 악보를 알아보았습니다. 그것은 신神의 선물이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후천적으로 이루어낸 것이 아닙니다. 그런 까닭에 저는 음악에 대한 사례를 받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음악은 값으로 계산되기에는 너무 신성합니다. 그리고 오늘날 음악인들이 요구하는 엄청난 가격은 실로 사회에 대한 죄악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일군이라면 반드시 마음에 새겨두어야 할 엄청난 도전입니다.
당장, 물질 없이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겠느냐는 항의와 공격이 마치 거대한 쓰나미처럼 밀려들 수 있습니다. 실제로, 어떤 식으로든 물질이 제거된다면 하나님의 일이라고 자부하며 벌여놓은 엄청난 양의 사역들이 즉각적으로 중단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물질이 없다고 해서 반드시 이루어져야할 진짜 하나님의 일이 아주 중단되지는 않습니다. 여전히 충성스러운 하나님의 종들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수고의 대가가 전혀 주어지지 않는 상황에서도 자신에게 남아 있는 마지막 힘과 열정이 완전히 다 소비될 때까지는 결단코 쉬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값없이 거저 받은 은혜를, 값없이 거저 나누어주는 일에 최선을 다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위대한 사역은 저와 여러분의 흘리는 피와 땀과 눈물, 힘에 지나는 수고와 헌신과 봉사가 아니라 주고 또 주시다가 마침내 당신의 몸까지 거룩한 희생 제물로 내놓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완성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장 수고에 대한 열매가 나타나지 않을지라도, 수고에 대한 대가가 전혀 주어지지 않을지라도 값없이 거저 받은 복음과 은혜를 값없이 거저 나눠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온전히 드러내는 복된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