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ttp://www.everyday01.com 제로원(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진짜 교회 IV-진짜 보내심>의 줄거리:
예수님을 진짜 만난 사람은 이 세상에서 오직 예수님과 한 팀으로서만 존재하면서 삶을 영위합니다. 이 한 팀 됨이 예수님이 나를 이 세상으로 보내셨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본성은 삶에서 예수님과 한 팀이 되길 원치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능력과 권세를 사유화해서 나 자신이 큰 자 되기를 원할 뿐입니다. 이러면 보냄 받은 자가 아니라 예수님을 잡아 끄는 자가 됩니다.
진짜 교회IV-진짜 보내심
(눅9:37-48)
37. ○이튿날 산에서 내려오시니 큰 무리가 맞을새
38. 무리 중의 한 사람이 소리 질러 이르되 선생님 청컨대 내 아들을 돌보아 주옵소서 이는 내 외아들이니이다
39. 귀신이 그를 잡아 갑자기 부르짖게 하고 경련을 일으켜 거품을 흘리게 하며 몹시 상하게 하고야 겨우 떠나 가나이다
40. 당신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주기를 구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못하더이다
4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에게 참으리요 네 아들을 이리로 데리고 오라 하시니
42. 올 때에 귀신이 그를 거꾸러뜨리고 심한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예수께서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시고 아이를 낫게 하사 그 아버지에게 도로 주시니
43.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위엄에 놀라니라 ○그들이 다 그 행하시는 모든 일을 놀랍게 여길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44.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리라 하시되
45. 그들이 이 말씀을 알지 못하니 이는 그들로 깨닫지 못하게 숨긴 바 되었음이라 또 그들은 이 말씀을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46.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
47. 예수께서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
48. 그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진짜 교회IV-진짜 보내심>이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진짜 교회의 네 번째 특성, 진짜 보내심.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고, 그 교회의 일원으로서 내가 교인이 된다는 것은 보내심을 받아서 산다는 것을 뜻합니다.
내가 지금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가정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가정으로 보내심을 받은 것이고, 직장이 있으면 직장으로 보내심을 받은 것입니다.
이러한 단체가 아니라도, 인간과 인간의 만남에서도 내가 어머니라면 자식에게 보냄을 받은 것이고, 내가 아내라면 남편에게 보냄을 받은 것이고, 내가 애인이라면 이성에게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를 믿은 다음에 이 땅에서 산다는 것은 보냄을 받은 자로서 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만 보냄을 받았다고 얘기할 뿐이지, 진짜로는 예수님으로부터 이 세상의 삶의 장소와 시간으로 보냄을 받은 자가 아니라, 거꾸로 가정에서 예수님을 잡아끄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가정으로 보냄을 받아야 되는데, 가정에서 예수님을 잡아끌고, 직장에서 사회생활 하면서 예수님을 잡아끌고, 엄마로서 자식과 함께 있으면서 예수님을 잡아끌고, 남편과 함께 아내로 있으면서 예수님을 잡아끄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교인이 아닙니다.
진짜 보냄을 받은 자가 아니라는 거예요.
진짜 보냄을 받은 자는 우리가 세 번째로 진짜 만남을 얘기하지 않았습니까?
변화산에서의 만남의 경험이 있는 자라면 반드시 그곳으로부터 보내지게 돼있습니다.
복음을 들고 보내지게 됩니다.
그런데 보내지지 않고 있는 이유는 아직도 이 세상의 삶의 현장에서 내 배를 불릴 수 있는 기쁨을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산 아래에 있어야 될 모든 일들에 대해서 완전히 망각해버리고, 변화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며 기쁨과 행복의 궁극에 도달해서 그곳에 머물기를 원합니다.
그 상태에서 산 아래로 내려옵니다.
바로 그 상태로부터 보냄을 받은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과 함께 내려옵니다, 이게 무얼 말하는 겁니까?
이 세상에서 우리가 예수 믿은 다음에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은, 진짜 만남을 이룬 자라면 천국을 만난 그 상태로부터 이 세상으로 보내집니다.
보내질 때의 특징은 전혀 이 세상에서 새로운 기쁨과 더할 수 있는 행복을 찾지 않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예수님과 함께 보내집니다.
천국에 계신 승천하신 예수님을 만난 자의 특성은 예수님이 성령님을 통하여 그와 함께 하는 동안에 보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팀을 이루어서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는 것, 이게 바로 보냄 받은 자의 특성입니다.
그러면 보냄 받지 않고 사는 사람의 특성은 뭡니까?
오늘 우리가 마지막에 읽은 부분에 ‘누가 크냐?’라는 것으로 변론합니다.
바로 이 크기를 바라고 있는 사람들, 보내지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세상에서 대통령 되고 큰 부자 되고, 많은 지식을 습득해서 학, 박사 되겠다고 하지 않아도 큰 자가 되고 싶어 하는 욕망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표현되는가 하면 ‘하나님, 내가 하나님의 사명을 잘 감당하게 해주세요, 하나님, 제가 선교하는 데에 큰 꿈을 이룰 수 있게 해주세요,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는 사람 되게 해주세요!’, 이런 기도가 다 지금 제자들 중에 ‘누가 크냐’라고 변론을 하고 있는 이 상황에서의 마음과 똑같은 마음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는 사람 되는 것이 소원인 사람, 하나님의 선교를 크게 하는 것이 소원인 사람, 하나님의 목회를 크게 해보고 싶은 이런 사람, 이게 다 크고자 하는 자들이고, 다 보냄 받지 않은 사람들이고, 보냄 받지 않은 이유는 진짜 만남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승천하신 주님까지 만나므로 진짜 만남을 완성한 사람, 십자가에 달린 주님으로부터 시작해서 죽으신 주님, 부활하신 주님, 승천하신 주님을 제대로 만난 사람은 이 세상에서 자기가 무슨 큰 쓰임 받기를 원하는 마음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단지 주님이 크게 쓰실 수는 있지만, 내 마음에서 내가 크게 쓰임 받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기도가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절대로 주님과 한 팀이 된 사람은 자기가 큰 쓰임을 받겠다는 생각을 할 수가 없습니다.
마치 변화산상에서 예수님의 변화하신 모습을 베드로가 자신 밖에서 보게 됩니다.
왜 밖에서 본다는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부활 후에는 내 마음이 성령님을 통하여 천국을 보게 됩니다.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보게 됩니다, 이게 다른 것이에요.
그렇게 눈으로 보고 있는 가운데, 마음에서 극한 행복에 겨워서 자기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게 한 말이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지읍시다!’라고 예수님께 말씀드릴 때, 구름이 빽빽하게 임하며 구름 속에서 말씀이 들리기를 ‘너는 저의 말을 들어라’라고 합니다.
승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 성령을 통하여 내 마음이 하늘에 계신 그 주님을 만나고 천국을 만나고, 천국에 계신 아버지를 만난 사람의 특징은 생각이 없습니다.
계획이 없습니다, 소원이 없습니다.
만족하고 행복함의 극한에 달했다는 것은 소원이 없어진다는 걸 말합니다.
그런데 소원이 없는 채로 이 세상에 툭 보내질 때에, 그 사람의 특징은 오늘 본문 말씀처럼 가장 작은 어린아이가 됩니다.
내가 스스로 소원함이 없고, 내가 스스로 계획함이 없고, 내가 스스로 쓰임 받았으면 좋겠다는 그런 염원이 없는 사람, 이게 작은 사람입니다.
사람이 철이 든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 인생을 자기 스스로 이끌어가겠다는 것이고, 인생에 대해서 꿈이 생긴다는 것이고, 인생을 한번 멋지게 살고 싶은 욕망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작은 자가 큰 자라는 얘기는 무슨 말씀일까요?
진짜 하늘나라를 만난 사람은, 그래서 하늘로부터 이 땅으로 보냄을 받은 자들은 소원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자, 가장 소원이 없는 자가 돼버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과 한 팀이 되었기 때문에 그래요.
어린아이는 아무런 자기의 계획이 없습니다.
자기 인생에 대해서 어떻게 쓰임 받았으면 좋겠다, 무엇이 되면 좋겠다는 소원이 없습니다.
그런 어린아이기 때문에 엄마가 소원하는 겁니다.
아이의 이름부터, 이 아이는 이러이러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 아이는 건강했으면 좋겠다, 이 아이는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하늘나라를 진짜로 만나서 이 땅에서 죽지 않고 보냄 받은 자로서, 가정으로 보냄 받고 직장으로 보냄 받고 사회로 보냄 받아 살고 있는 이 사람은 너무너무 어리고 작아서, 이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왜 작다고요?
소원이 없어요, 자기 인생에 대한 염려가 없어요, 아무런 계획이 없어요.
그렇게 때문에 예수님께서 크게 많이 생각하셔야 되고, 내가 생각이 없고 소원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크게 많이 소원하셔야 된다는 얘깁니다.
어린아이를 낳고서는 그 아이에 대해서 많은 소원을 갖듯이 예수님이 많은 소원을 갖게 되시고, 예수님이 많은 행함을 이루실 수밖에 없게 되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한 팀이 되어있기 때문에 내가 소원이 클수록 예수님의 나에 대한 소원은 자꾸 바깥으로 밀려나게 되고, 내가 나에 대해서 갖는 기대와 계획이 클수록 예수님이 나에 대해서 기대와 계획을 갖고 이끌어 가실 수 있는 영역이 점점 좁아들기 때문에 실제로 그 사람의 삶의 의미는 영적인 기준으로 조명해볼 때, nothing이라는 겁니다, 아주 사소한 것이 돼버린다는 겁니다.
자기 딴에는 큰 소원을 갖고 큰 비전과 꿈을 갖고 이 세상을 멋지게 살아보겠다고 마음을 먹지만, 실제로는 영적인 의미에서 볼 때 하잘 것 없는 인생이 돼버린다는 겁니다.
여러분, 이렇게 진짜 만남이 이뤄지지 않고, 예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게 아니라 예수님을 잡아끄는 삶, 이 삶의 특징은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혹시 은사를 주시고 능력과 권능을 주셔도 그것들을 사유화해버리고 맙니다.
오늘 산에서 내려오셨을 때, 한 아버지가 산 아래에 머물고 있는 9제자들에게 귀신들린 아들을 데리고 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 아이를 고치려고 했는데 못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지 못합니다.
이 내막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바로 앞 9장 처음에 예수님께서 열둘을 불러 그들에게 귀신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과 권세를 주시고 병을 고치는 능력을 주신 다음 전도여행을 보냈을 때, 이들이 진짜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아직도 그 꿈같은 기억 속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래서 귀신들린 아이를 데려왔을 때 예수님과 베드로 요한 야고보가 없는 상태에서 제자들이 능히 자기들이 고칠 수 있을 것으로 알고 달려듭니다.
그리고 아마 아홉 명이 차례대로 귀신을 쫓아내려는 행동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홉 명 모두가 다 실패해버리고 맙니다.
이 제자들이 오해한 일이 있었다는 것이에요.
9장 1절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불러 모으시고 보냈을 때, 분명히 예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아서 갔습니다.
예수님의 보내심을 받아서 갈 때 그들에게 권세와 능력을 주셨습니다.
권세라는 것은 본질에서부터 흘러나오는 힘입니다.
다시 말하면 열둘이 흩어져 있었지만 사실은 그들이 간 모든 곳에서 그들과 함께 계셨다는 얘기에요.
권세라는 것은 암행어사의 마패와 같은 것이라서 암행어사가 저기 충청도 한 고을에 가있어도 그곳에 임금이 가있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는 얘깁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으로부터 보내져서 예수님과 한 팀이 되어서 열두 명이 움직이고 있을 때 귀신이 쫓겨나갔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생각하기에는 그때의 경험에 비추어서 그러한 귀신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 병을 고칠 수 있는 권세가 자기들에게 주어진 자기들의 속성이 된 것으로 착각했던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과 한 팀이 돼서 움직일 때 나타나는 일을 어떻게 생각했는가 하면, 내게 주어진 능력이고 내게 주어진 권세라서 내가 그런 능력과 권세를 지닌 큰 자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는 무기력한 영적 상태에 빠져버리고 맙니다.
이게 바로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유혹 중에 하나라는 거예요.
예수님으로부터 지혜를 받고 예수님으로부터 능력을 받은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고 내가 주체적으로 내 인생에 대해서 꿈꾸고 있는 비전을 이루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기를 원한다고 얘기하지만,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은 구둣방을 해도 쓰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꼭 목회를 크게 해서 쓰임 받는 게 아니고, 선교사로 나가야만 쓰임 받는 게 아닙니다.
중소기업에 다니는 직장인으로도 쓰임을 받는 겁니다.
그런데 말이 좋아 쓰임을 받는 것이지, 우리 마음대로 내가 주님을 쓰는 것이지요.
내가 갖고 있는 꿈과 내가 갖고 있는 소원과 내가 갖고 있는 계획을 위해서 주님을 쓰는 거지, 내가 쓰임을 받는 게 아니에요.
내가 쓰임을 받고 싶으십니까?
그러면 아무런 계획이나 아무런 소원이 없는 어린아이가 되세요!
지금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주신 권세와 능력을 사유화하게 된 이유가 뭡니까?
자기가 큰 자라고 오해하게 된 이유가 뭡니까?
이 세상에서 자기 스스로 자기 인생에 대해서 꿈이 있고 계획이 있고 비전이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우린 이 계획을 만들어놓고, 꿈과 소원을 가져 놓고 십자가에서 죽어요, 그런 다음에 내가 세운 그 꿈을 주님께서 이루어주시나 안 이루어주시나 샛눈 뜨고 보고 있는 거예요.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진짜 주님을 만난 자만이 보냄을 받습니다.
그런데 진짜 주님을 만난 자의 특성은 이 세상에서 어떤 꿈도 계획도 소원도 갖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계획도 소원도 생각도 갖고 있지 않지만 결과적으로 이 세상 기준으로 볼 때는 가장 어린아이가 되는 거예요, 자기 인생에 대해서 아무런 생각이 없으니까.
이렇게 가장 어린아이가 되었을 때에 예수님과 한 팀을 이루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생각과 계획이 가장 크게 나타나서 그자가 가장 큰 자가 되는 것이고, 이렇게 예수님과 한 팀이 되어있기 때문에 그 사람을 영접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통하여 하나님아버지와 한 팀이 되어있기 때문에.
그러니까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을 영접하게 돼버리는 거죠.
우리가 예수님과 한 팀이 돼있기 때문에 나를 영접하는 자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게 되는 것이고, 예수님과 한 팀이 되어있기 때문에 내 생각이 가장 작을 때 예수님의 생각이 가장 크게 되고, 내 능력이 가장 작게 나타날 때 예수님의 능력이 가장 크게 나타납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를 지나 갓난아이처럼 될수록 예수님의 능력이 크게 나타나므로 그 사람에게서 영적인 결실의 의미에서 볼 때 큰 일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큰 일이 나타나도 그 당사자는 그 일을 자기 일로 만들지를 못합니다, 만들 필요도 없는 것이고.
왜냐하면 진짜 만남을 이루었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린아이처럼 살지 못하는 이유는 뭡니까?
진짜 만남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진짜 만남을 이루어서 내가 진짜로 만족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생각이 많은 거예요, 이루고 싶은 소원이 많은 것이고.
다 어른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큰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완전히 오해요, 넌센스라는 겁니다.
하나님과 주님과 성령님을 통하여 마음이 천국에 올라가서 그분들을 진짜 만난 사람만이 이 세상에 남아있는 삶이 보냄을 받은 삶이 되고, 보냄 받은 자의 특징은 주님과 한 팀을 이루고 있는 상태에서 가장 작은 자가 됨으로 주님의 생각과 소원이 가장 크게 나타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얘기이고, 또 크게 나타나건 안 나타나건 그것은 진짜 만남을 이룬 자들에게는 관심이 될 수 없는 거예요.
시골에서 화전민 남편과 평생을 살아갈 수도 있지요, 아무도 못 만나고 그냥 밭 일구면서.
아브라함이 전도했습니까?
야곱이 전도했습니까?
그래도 복의 근원이 되는 거예요.
그러므로 진짜 보내심은 진짜 만남으로부터만 가능해지는 것이고, 안 그러면 보냄 받은 자가 아니라 이 땅에 배붙이고 부동의 자세로 앉아서 예수님을 잡아끄는 이상한 교인 아닌 교인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진짜 주님을 만나서 이 세상에서는 아무런 소원도 계획도 없는 어린아이로 보냄 받아 살 수 있게 해주시고, 그럼으로써 저와 한 팀이 되어있는 주님이 크게 크게 나타나시는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어린 아이처럼 아버지를 온전히 누리는 복된 삶이 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