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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복귀섭리시대 (2000년) _
제1절 애급고역시대(400년) _
III .모세를 중심한 복귀섭리
一 모세노정의 의의
인간시조가 타락된 후에 하나님은 한탄하시고 후회하셨다(창 6/6). 하나님은 자기의 몸으로 지으신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의 서러움이 곧 하나님의 서러움인 까닭이다. 그러므로 창조주로서의 원리적 책임을 다하시기 위하여 복귀섭리의 제1책임을 하나님이 친히 져주신 것이다. 탕감복귀의 원칙에 의하여 인간이 타락했으니 인간으로 복귀해야되는 것이 원리이므로 예수께서는 인간으로 탄생하시어 역사하셔야 될 것은 필연적인데 이미 하나님 앞에서도 순종 굴복하지 않았던 사탄이므로 하나님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그를 순종 굴복시키는 전형적 노정을 친히 보여주시기 위하여 노아로부터 아브라함과 모세를 세우시어 하나님적 제1 책임분담 역사를 하여 내려오신 것이다.
이미 위에서도 논술한 바이지만 모세는 야곱이 1대로서 복귀의 기준을 찾아세운 터 위에서 야곱의 근본 목적을 완수하여야한다. 모세는 이 목적을 위하여 야곱의 노정을 본보기로 민족적 복귀섭리노정을 명시함으로써 후일에 예수께서 오셔서 완수해야할 세계적 가나안 복귀 섭리노정을 그대로 예시한 것이므로 예수께서는 모세노정을 본보기로하여 그대로 걷지않으면 아니된다.
그러므로 모세는 다음에 오실 예수님의 모의자로 오셨던 사람이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말씀을 보더라도 「모세가 말하대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다.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는 사람은 다 멸망시키리라」(행 3/22~23)고 하셨으니 이 선지자는 곧 예수님을 가리킴이다. 요한복음 5장 19절 이하를 보면 「······아들이 아버지의 행하신 일을 본 외에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신 것을 다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해 여기게 하시리라」고 기록하여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이 이미 모세를 통하여 보여 주셨고 또 그대로 보여주시고 있는 노정을 따라 역사하심을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모세를 택하심도 그는 아브라함과 같이 사탄 품에서 스스로 뛰어 나왔기 때문이다. 즉 모세는 바로궁중의 영화를 진개와 같이 생각하고 이스라엘민족된 하늘의 혈통적 지조와 충절을 변하지 않고 있었던 까닭이다(히 11/24~26). 모세의 민족애는 이스라엘민족을 학대하는 애급인을 살해(출 2/11~12)함으로 폭발되었으니 이렇듯이 모세의 애급사람에게 대한 적개심의 발로는 모세로하여금 그들과 타협할 수 없는 확고한 입장을 취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이스라엘민족의 인도자로서의 택함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모세는 하나님 대신존재요(출 4/16) 사탄상징인 바로 앞에 신으로서 (출 7/1) 역사하여 하나님적 책임섭리 노정을 보여줌으로써 마치 모세가 애급에서 기사와 이적으로써 이스라엘민족을 빼앗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복지로 복귀하여야될 것같이 예수님도 타락인간을 원수 사탄 품에서 기사와 이적으로써 빼앗아 하나님의 창조이상 세계로 복귀하여야할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모세로 인한 이 본보기노정은 예수께서 걸어야할 노정인 동시에 그를 따르는 성도들도 걷지 않으면 아니될 노정임을 알아야할 것이다.
二 예수의 복귀섭리노정으로 표시된 모세의 출애급노정
이제 우리는 모세노정은 어떻게 예수의 노정을 상징하였는가를 알아보기로하자. 하나님이 모세를 택하여 애급에서 이스라엘민족을 구출할 것을 명하시니 모세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내가 하나님이 보내신 인도자인 것을 무엇으로 알게할 것인가고 반문하였다(출 4/1). 하나님은 이 증거로서 모세에게 세가지 기사의 능을 부여하셨으니 (출 4/1~9) 첫째는 지팡이를 던져 뱀이 되게하는 기적이다. 하나님 대신 신으로서(출 4/16, 출 7/1) 이스라엘민족을 대표하여 사탄의 실체적 대표형인 바로 앞에 서게될 모세의 손에 쥐어있는 지팡이는 하나님 앞에 설 다음에 오실 예수님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지팡이로 사명자로 오신 분이다. 지팡이는 대신 의지자요 대신 보호자며 불의한 것을 쳐 의로 세우며 바른 길잡이의 역할을 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지팡이로 오신 예수님은 바로 이와같은 사명을 가지고 인류 앞에 나타나신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모세가 던진 그 지팡이로 나타난 예수님은 하늘뱀적 사명자로 오셔서 인간시조를 타락시킨 사탄뱀을 멸한다는 것을 보여 주시는 상징역사다. 다시 말하면 뱀이 인간을 타락시켰으니 복귀하는 것도 뱀으로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라」(요 3/14)고 자기를 뱀으로 상징하셨다.
예수께서 전도를 나가는 제자들을 보시고 「지혜는 뱀과 같이 하고 순하기는 비둘기같이 하라」(마 10/16)고 말씀하신 것도 뱀이 죄없는 인간을 꾀어 타락시킨 것같이 너희들도 타락된 인간을 꾀어서 하나님 편으로 인도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첫 번으로 보여주신 이 기사는 후아담된 예수님을 (고전 15/45) 찾아세운다는 뜻이니 즉 인간시조 아담복귀를 상징한다. 다음으로 하나님은 모세가 첫 번 품어서 문둥병이 된 그 손이 둘째번 품을 때 깨끗이 나아버리게함으로써 치병의 능을 보여주셨다. 첫 번 손을 품어 인간으로는 치료할 수 없는 병에 걸렸다함은 처음으로 천사장이 해와를 품음으로써 인간의 힘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는 입장으로 인간이 타락해버렸다는 것을 표시함이요 그 손을 다시 품어 이 병이 깨끗해졌다함은 예수께서 오셔서 신부된 전 인류를 다시 품음으로써 완전복귀한다는 것을 표시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암탉이 병아리를 품듯이 죄인들을 품었다고 말씀하셨다(마 23/37). 그러므로 이 기적은 신랑으로 오실 예수님으로 인한 신부성복귀를 표시함이니 즉 신부의 신이시오 해와의 신성이신 성신복귀에 의한 전인류의 신부성복귀를 상징하는 것이다. 다음엔 강수를 던져 피가 되는 기적을 보여주셨으니 이것은 생명없는 무기물(물)과 같은 존재가 생명있는 유기물(혈; 피)과 같은 존재가 된다는 뜻이다. 물은 타락되어 생명을 잃은 세상사람을 표시하므로 (계 17/15) 이 기적은 생명을 잃어버린 세상사람을 예수께서 오셔서 생명의 자녀로 복귀시킨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므로 자녀복귀를 상징하는 것이다. 이러한 3종의 기적의 능을 보여주심은 이스라엘민족과 바로 앞에 설 수 있는 조건을 세우기 위함인 동시에 다음 예수 오셔서 행사하실 수 있는 기대의 조성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시기 위함이다. 아담은 하나님을 중심하고 완성되어 신부된 해와를 맞아 하나님의 축복대로(창 1/23) 죄없는 자녀를 번식하여 하나님 아담 해와 자녀 이렇게 사위기대를 조성해야할 것이었는데 타죄로 인하여 이것을 사탄에게 내어주었으므로 이것을 복귀하는 탕감조건으로 모세를 중심한 이 세가지 기적을 보여주신 것이다.
다음으로 모세는 자기는 말씀을 할 줄 모른다고 말씀 대신존재를 요구했으니 이것은 말씀의 목적을 이루지 못한 것이 타락이므로 말씀완성자 예수님을 세워 말씀으로 창조된 대상실체 전부를 복귀한다는 뜻이다.
말씀의 대상실체는 곧 예수님과 성신을 이름이니 모세에게 말씀대신 아론과 (출 4/14) 여선지 미리암(출 15/20)을 주셨다함은 구약시대에 있어서의 구원의 말씀의 상징체인 두 석비와 그의 실체인 예수님과 성신을 보내실 것을 형상적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아론과 미리암이 모세의 뜻을 받들어 이스라엘 대신 속죄사명을 한 것은 다음 예수님과 성신이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이스라엘의 대신 속죄사명을 할 것을 표시한 것이다.
모세는 이러한 조건들을 찾아 세운 기대가 있으므로(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이스라엘은 나의 장자라 내가 너더러 내 아들을 놓아 보내어 나를 섬기게하라 하여도 네가 놓아 보내지 아니하니 내가 네 장자를 죽이리라」(출 4/22~23)고 하시는 하나님의 명을 받고 처자를 데리고 길을 갈 때에 여호와 나타나 모세를 죽이려하니 처 십보라가 자식을 할례함으로 모세가 살아났다(출 4/24~26). 이것도 역시 할례로 인하여 모세를 중심한 이스라엘이 살 수 있었던 것같이 다음에 할례의 근본목적 완수의 실체로 오실 예수님을 중심한 이스라엘민족도 할례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하나님의 근본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표시한다.
예수님으로 인한 할례라함은 물론 율법시대의 그 형식을 말함은 아니다. 이제 할례의 의의를 알아보자. 해와가 사탄과 혈연관계를 맺음으로 영적 타락을 보았고 아담까지 주관함으로써 원리를 위반하여 내적타락까지 성립되었기 때문에 할례가 요구된다. 즉 양부를 통하여서 어둠의 피를 받아 타락되었으므로 하나님의 자녀의 입장을 복귀하려면 양부를 쳐서 어둠의 피를 뽑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러므로 할례는 아브라함의 영원한 규례로 되어있어 이것으로 말미암아 남자의 주관성을 복귀하는 조건을 세운 것이다. 할례에는 마음할례(신 10/16)가 있고 육적할례(창 17/10) 만물할례(레 19/23)가 있다. 더럽힌 피조물로 하여금 그 창조본성을 복귀하자는 것이 그 목적이니 그의 근본의의는 다음과 같다.
(1) 사망의 피를 빼는 표
(2) 남자의 주관성을 다시 찾는 표
(3) 근본 뜻의 자녀의 길을 다시 찾는 약속의 표
바로를 대하여 싸울 수 있는 이러한 제조건을 찾아 세운 모세는 바로와 대립하여 그를 굴복시키는 역사를 시작하였다. 라반이 열 번이나 야곱을 속여 괴롭게 하였으니(창 31/7) 야곱노정을 본보기로 걸어가는 모세도 열 번이나 이적을 행해도 바로는 점점 더 강퍅하여 열 번이나 모세를 속여 괴롭게 하였다(출 7~12). 그러면 하나님도 어찌하여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였는가하면
(1) 택한 백성에 대한 사탄(바로)의 침략의 의사를 근절키 위함
(2) 사탄(바로)으로 하여금 자기의 무력을 자각하고 하나님의 요구대로 순종굴복할 것을 자각케하기 위함
(3) 원수의 모든 것을 멸하기 위함
(4) 하나님을 배반하는 자는 망한다는 것을 자각케 하기 위함
바로를 강퍅케함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알려 주려는 것은
(1) 사탄(바로)에 대하여 적개심을 품게하기 위함
(2) 바로 편은 하나님의 원수라는 것을 알리기 위함
(3) 이스라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같이하심을 알리기 위함
(4) 애급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의 미련을 끊게하기 위함
(5) 이스라엘백성으로 하여금 애급사람과 정을 통하는 자 없게하기 위함
(6) 하나님이 애급을 증오하는 정도로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올라오게하기 위함
이렇듯이 바로를 승리한 이스라엘백성은 소망하던 이상이 이루어지는 곳 가나안을 향하여 출발하였으니 이 노정은 세계적인 가나안을 바라고 나아가는 오늘날의 우리 신앙생활 노정을 표시한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애급 편에 3일 간의 흑암이 있었고 이스라엘민족에게 3일 간의 광명이 있었음은 후일 예수께서 오시면 사탄편은 흑암이요 하늘편은 광명으로 분기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애급의 장자가 육축의 맏것을 쳤으나 이스라엘은 양피로 이것을 면하였다.
사탄편에 있어서는 장자는 가인이나 에서나 세라(태중장자)의 입장이므로 이를 쳐서 아벨이나 야곱이나 베레스(태중차자)의 입장에 있는 차자로 하여금 장자의 입장을 복귀케하기 위함이다. 이 재앙도 예수 오셔서 장자의 입장으로 섭리노정을 먼저 출발한 사탄 편은 멸하고 차자의 입장인 하늘 편은 예수님의 피의 대속으로 구함을 받는다는 것을 표시한다. 모세가 많은 재물을 취하여 온 것도 예수 오셔서 만물까지 복귀한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다. 바로를 굴복시킨 모세는 바로에게 3일기간노정의 거리에 가서 헌제를 한다고 속여서 (출 8/27) 이스라엘민족을 인도하여가지고 나온 것이니 이 3일기간은 이스라엘민족에게 있어서 생사의 분기를 결하는 기간인 것이다.
이 자유허여의 기간이 없으면 이스라엘의 목적은 수포로 돌아가버린다. 이것은 야곱의 가나안 복귀섭리 노정에로 허여된 것이지만 예수 오셔서도 이 3일의 사탄 분립기간이 있어야할 것이다. 예수님은 이스라엘민족의 불신으로 인하여 이 기간을 살아서 넘지 못하고 십자가로 인하여 무덤에서 3일기간을 지남으로 부활하여 영적세계와 가나안복귀만을 완성하였다. 애급을 떠나 3일기간을 잘넘은 후 의 이스라엘민족은 하나님이 친히 인도하는 생활로 들어갔으니 우리 신앙자들도 자기가 넘어야할 3일기간을 잘 넘고나면 이와같이 하나님이 친히 원리에 의한 간섭을 해주시는 권내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민족이 도피하였음을 알게된 바로는 병차를 동원하여 이스라엘민족을 따라갔다. 이 소식을 안 이스라엘민족은 앞에는 홍해가 가로놓이고 뒤에는 바로의 추병차가 따르니 크게 소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출 14/5~10). 모세는 하나님의 명에 의하여 지팡이로 홍해를 쳐 갈라세움으로 홍해를 육지와 같이 건너고 추격하던 애급병차는 전부 수장되었으니 (출 14/21~23) 이것도 예수님을 중심한 신앙생활의 노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신앙자가 사탄 품을 떠나 예수 품으로 들어올 때에는 모세가 바로궁중의 영화와 인연을 끊듯이 우리도 우리의 모든 환경과 인연을 끊어야 하지만 끊어버린 다음에도 사탄은 마치 바로가 병차로 이스라엘을 추적한 것같이 신앙자를 추격하여오는 것이다. 그러나 지팡이된 예수님으로 그를 칠 때 우리 앞에 홍해와 같이 가로놓인 고해는 평탄한 길로 갈라짐으로 갈길이 열리고 따라오던 사탄은 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백성이 홍해를 건넌 후에 호렙산 반석 생수까지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무조건으로 주어서 먹었으니 (출 16/13) 이것도 다음 예수 오셔서 인간의 생명의 요소인 예수님의 살(만나) (요 6/51)과 피(메추라기)를 무조건으로 주실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홍해를 건너는 것과 같은 시험을 거치면 이스라엘민족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무조건으로 주시듯이 우리에게도 무조건 은사를 주시는 것이다. 이렇듯이 무조건 사랑을 받은 이스라엘백성 앞에는 아말렉족속의 공격이 있었던 것과같이 예수님의 생명 소생의 요소를 받은 신앙자에게도 그러한 시험이 또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심이다. 이스라엘백성들이 아말렉을 멸하여 사탄의 공격을 승리하여 사탄 굴복 자격자가 된 후에는 또 낮에는 구름기둥과 밤에는 불기둥으로 시내 광야까지 인도하신 것같이 (민 14/14) 신앙자들도 사탄시험을 승리하여 사탄까지도 주관할 수 있는 자격자가 된 후에야 근본 자녀의 입장을 회복하여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은사가 부여되는 것이다. 모세노정에서 이스라엘민족을 인도한 낮(+)의 구름기둥은 다음에 이스라엘민족을 인도할 예수(+)를 표시함이요 밤(-)의 불기둥은 성신(-)을 말한다.
이스라엘이 르비듬에서 아말렉과 싸울 때에 모세는 여호수아를 시켜 출전케하고 자기는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아론과 훌과 같이 산꼭대기에 섰다.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승리하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승리하였다. 모세의 손이 피곤하여 아론과 훌이 돌을 쌓고 모세를 그 위에 앉히고 저희가 좌우에서 그 손을 붙들어 해가 지도록 흔들리지 않케하였더니 여호수아가 칼로 아말렉왕과 그 백성을 쳐서 파하였다.
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아닛시(나의 기)라 하고 가라대 「손을 들어 여호와의 보좌(기)를 대적함이 있으니 여호와 아말렉을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출 17/15~16)고 하셨다. 하나님을 대신한 인도자로 나선 모세가 손을 드는 것은 하나님이 품으신다는 뜻이요 아론과 훌이 두 손을 붙든 것은 하나님의 품에 품길 수 있도록 협조한다는 뜻이다. 이 사실도 예수 오신 이후의 섭리의 경로를 상징하신 것이다.
여호수아는 신앙자를 대표함이요 여호수아 앞에 있는 아말렉은 신앙자 앞에 있는 사탄세계를 표시하는 것이며 아론과 훌은 예수와 성신을 표시한다. 그러므로 아론과 훌이 모세의 손을 붙들고 섰는 앞에서 싸운 여호수아가 아말렉을 멸하였다는 것은 예수님과 성신의 역사로 인하여 하나님의 품에 품기울 수 있는 은총을 받고 있는 신앙자는 모든 사탄을 멸할 수 있다는 것을 상징하신 것이다.
이러한 역사는 예수 오셔서 우리 인간에게 무조건으로 사랑을 세워주셨으니 예수님의 생명을 받아 산 자로 하여금 원수 사탄과 대립케하여 그 자체는 다시는 원수와 합하지 않게하려하심이 그 목적이다. 후일에 제1차 하나님적 책임분담 섭리의 기대 위에 제2차 책임분담 사명자로 오시는 예수와 성신이 신앙자와 하나되어 하나님을 중심한 사위기대를 복귀하여야 아담 해와로 인하여 못이루신 사위기대를 조성하여 복귀섭리를 완성한다는 것을 모세를 중심한 아론과 훌 또 그 앞에서 역사한 여호수아로써 미리 보여주신 것이다. 이렇듯이 하나님이 직접 품으심으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함을 받은 이스라엘민족이 시내 광야에 이르렀을 때에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 새 언약을 하셨다.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잘 지키면 열방 중에서 너희로 나의 보배를 삼아 제사장나라와 거룩한 백성이 되게하리라」(출 19/5~6)고 하셨으니 이 말씀도 다음 예수 오셔서 대제사장으로 서실 때에 그의 말씀을 믿고 따르면 다윗왕의 위를 가지고 오신 예수님은 평강의 왕으로 군림하여 공평과 의로움으로 영영세세토록 통치하실 약속을 (사 9/6~7) 모세로써 보여주신 것이다.
모세는 장로 70인을 거느리고 시내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 보이셨다(출 24/9). 하나님은 모세를 시내산상에 부르시사 석판에 기록한 십계명을 받도록 명하시었다. 말씀으로 창조된 인간이 말씀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타락되었으니 이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뜻이 모세에서 민족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기대를 조성하게 되었으므로 여기에 십계명의 말씀을 주셔서 재창조의 역사를 시작하시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창조의 기간인 6일동안을 여호와의 영광의 구름이 시내산 위를 덮었고 안식일에 해당하는 제7일에 여호와 구름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시었으니 산 위에 나타난 여호와의 광영의 형상이 이스라엘백성의 눈에 불꽃같이 보이더니 모세가 구름 속으로 들어가 40주야를 금식하였다.(출 24/15~18) 모세에게 주신 이 계명의 말씀은 타락인간에게 처음으로 주시는 재창조의 말씀이다. 인간 재창조의 역사는 노아 홍수심판과 같이 사탄을 분립시킨 기대위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심판 40수의 사탄 분립기대를 조성하기 위하여 40일간 금식기도를 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러므로 이 기간은 이스라엘에 있어서는 가장 인내를 요하는 기간이었으나 이스라엘이 사느냐 죽느냐를 결하는 중요한 기간이었다.
이러한 하나님의 크신 섭리가 이루어지는 때는 그만치 사탄의 역사도 큰 것이다. 가인 아벨의 헌제 시에도 사탄이 문 앞에서 그들을 침범할 틈만을 엿보고 있었고(창 4/7) 노아 홍수 때도 물 위를 왕래하는 까마귀같이 사탄은 노아의 가정에 무슨 침범할 조건이 있는가고 찾고 있다가 함이 타락행위를 하자 곧 침범하였고 아브라함 헌제시에도 대기하고 있던 사탄은 제물을 쪼개지 않을 때 곧 침범하였으니 이와같이 사탄의 태도는 항상 집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선이자 사탄 일선임을 알아야 한다. 잘 믿는 성도들은 이와같이 하나님의 일선에서 항상 사탄과 싸워야하므로 고난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아 새로운 섭리의 역사를 시작할 때에도 사탄은 더욱 이스라엘백성의 불신과 불순종의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스라엘민족들은 이것을 깨닫지 못하였으므로 모세가 금식 기도하는 기간 지도자 모세를 잃었다고 소동하면서 아론을 사주하여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급에서 인도하여 낸 신이로다」(출 32/4)하며 그렇게까지 기사와 이적의 권능으로 나타나 보호하셨고 사랑으로 인도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배반하고 그들은 또다시 사탄 품으로 들어간 것이니 무릇 인간이라는 것은 사탄에게 이끌리게 되면 이와같이 교활해지고 배은망덕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그렇게까지 애쓰시어 불러세우신 세례요한이 이 이스라엘민족과 같은 입장에 서게되었다함도 가히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기간은 지도자 모세를 잃어버린 이스라엘 민족 자신이 지혜로 찾아 나아가야할 5%의 책임분담을 완수하지 않으면 아니될 기간이었다.
그러므로 그렇게도 기사와 이적과 교시로써 소상히 가르치시고 인도하신 여호와이시지만 이 기간만은 마치 아담 해와의 타락행위를 간섭 못하신 것같이 이 민족의 타락행위도 간섭할 수 없는 것이다. 자기 지혜를 찾아 맞추어야할 책임을 못할 때 하나님은 다시 그들에게 벌을 주시게되었으니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지라 너는 잠잠하라 내가 진노하여 저희를 멸하고 너로 큰 족속이 되게하리라」(출 32/9)고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이 때에 모세는 우상을 만들어 놓고 춤추는 백성들을 보고 대노하여 손에 가진 두 석판을 던져 파하였으므로 (출 32/19) 이스라엘을 중심한 하나님의 새로운 섭리는 다시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게된 것이다. 말씀으로 받은 두 석판은 말씀완성의 실체로 창조된 아담과 해와를 표시한다. 그러므로 잃어버린 말씀을 다시 모세가 두 석판으로 찾았다는 것은 잃어버린 아담 해와를 다시 실체로 찾을 수 있다는 표시이니 다시 찾은 이 두 석판은 곧 예수와 성신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에는 말씀이 기록된 두 석판을 믿어 구원을 얻었지만 신약시대에는 두 석판의 실체로 오신 예수와 성신을 믿어야 사는 것이다. (참고 중생의 의의) 이스라엘의 불신으로 인하여 예수와 성신을 상징하는 두 석판을 파했다는 것은 다음에 오실 예수와 성신의 역사도 이스라엘이 믿지 않으면 예수님을 보내신 본래의 뜻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알려주신 것이다.
그러나 모세가 다시 40일을 금식함으로 준비한 두 석판에 다시 말씀을 받았으니 (출 34/4, 27~28) 이것은 예수 이후에 저를 믿는 성도들에 의하여 메시아를 다시 맞을 수 있는 준비를 한 터 위에 말씀의 실체적 완성자이신 예수께서 다시 오셔서 구원의 섭리를 하신다는 것을 예시하신 것이다.
두 석판을 복귀한 모세는 다시 그 광채도 복귀하여 그 얼굴에서 찬란한 빛을 발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백성이 이미 우상을 만들어 사탄 품으로 들어갔던 조건이 있으므로 사탄은 항상 미련을 갖고 이 백성의 뒤를 따르게된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백성은 모세를 반역하여 애급에서 나온 것을 한탄하게 되었다. 「회중이 물이 없으므로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대적할 새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말하여 가로되 우리 형제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을 때에 우리도 죽었다면 좋을 번하였도다 너희는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를 인도하여 이 광야에 이르러 우리와 우리 짐승으로 다 여기서 죽게하느냐 너희는 어찌하여 우리를 애급에서 나오게하여 이 악한 곳에 인도하였느냐 이곳에는 종자나 무화과나 포도나 석류가 다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민 20/2~5) 하고 백성들이 모세를 원망할 때에 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떠나 회막 내에 이르러 엎드리니 여화와의 광채가 저희에게 나타나 형 아론과 더불어 지팡이를 들어 반석을 쳐서 물을 내어 회중과 짐승들을 먹이라고 명하시었다(민 20/7~8). 모세는 명대로 지팡이를 들어 반석을 두 번 쳐 물을 내어 먹였는데 여호와는 곧 이르기를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를 거룩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인도하여 내가 너희에게 준 땅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민 20/12)고 모세의 실수로 인하여 약속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을 선언하셨다.
다른 성구를 인용하면 「아론이 그 열조에게 돌아가고 내가 이스라엘에게 준 땅에는 들어가지 못하리니 너희가 므리바 물에서 내 말을 거역한 연고라」(민 20/24)고 하셨고 또 「여호와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 아바림산에 올라가 내가 이스라엘자손에게 준 땅을 보라 본 후에는 네 형 아론이 이 조상에게로 돌아감과 같이 너도 돌아가리니 신 광야에서 회중이 분쟁하매 물 가에서 저희 목전에 나를 거룩케할 것이어늘 너희가 내 명을 거역함이라 이 물은 신광야에 있는 가데스의 므리바 물이라」(민 27/12~14)고 기록한 것을 보면 므리바물에서 모세가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사실을 분명히 밝히었다.
그러면 이 실수는 무엇인가하면 한번 쳐야할 반석을 두 번 친 연고다. 반석을 두 번 친 행위가 왜 그다지도 중대한 범죄행위가 되었는가하는 것도 모세의 행사는 탕감복귀섭리의 전체적 표시로 된 중심역사임을 이해하지 못하면 해명되지 않는다.
고린도전서 10장 4절을 보면 「반석은 곧 그리스도」라고 말씀하셨고 그리스도는 제2 아담으로 오신 분이시다(고전 15/45, 롬 5/14). 그러므로 반석은 제2의 아담을 상징하는 동시에 제1 아담도 표시한다.
그러면 어찌하여 아담된 반석을 한번 치는 것은 허락하셨는가하면 사탄은 반석된 아담을 쳐서 타락시켰기 때문에 하나님도 타락한 아담을 표시하는 반석을 한번 쳐서 탕감복귀할 수 있는 조건이 성립되었으므로 한번 치는 것은 허락하셨다. 그러므로 모세가 치기 전 샘물 내지못하는 반석은 타락한 아담을 표시하는 것이요 이것을 하늘 편에서 한번 친 후의 샘물 나는 반석은 복귀한 아담 즉 제2 아담된 예수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반석을 두 번 쳤다는 것은 샘물 나는 반석을 또 한번 쳤다는 것이니 즉 생명수 샘물을 내는 반석으로 오신 복귀한 아담된 예수님을 다시 쳤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불신으로 인한 이 모세의 행동은 곧 다음 오실 예수님도 이스라엘이 불신의 입장에 서게 되면 그를 다시 칠 수 있다는 표시적 행동이 된 것이다. 이렇듯이 잃었던 반석을 다시 찾는 탕감조건을 세우기 위하여 한번 칠 것을 허락하신 것인데 한번 침으로 찾아진 반석을 다시 침으로써 다음에 반석의 실체로 오시는 예수님 앞에까지 사탄이 침범할 수 있는 조건을 허락한 바가 되어 아브라함의 제물실수와 같은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모세는 반석을 한번 쳐도 샘물이 나온다는 것을 과거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두 번 친 것은 이스라엘의 원망으로 인하여 그의 혈기로써 하나님의 뜻을 반하여 친 것이므로 모세가 친 행동이지만 결국 그것은 사탄이 친 것과 같은 결과가 되어버렸다.
이렇게되어 돌은 사탄이 가지게 되었으므로 이스라엘이 불신의 입장에 서게 될 때 예수님은 이 돌을 찾으려고 광야로 나가신 것이다. 사탄은 이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돌은 찾지말고 돌로 떡이나 되게해 먹으라는 시험을 예수님에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받은 광야의 시험은 이와같이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친데 그 원인이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볼 수 있는 몸으로 나타나신 분이므로 그리스도를 표시하는 석판은 하나님의 볼 수 있는 몸을 표시하는 것이요 석판의 뿌리되는 반석은 그리스도에게 현현된 하나님의 내적성상과 형상을 말한다. 그러므로 두 석판은 다시 찾을 수 있으나 석판의 뿌리되는 반석을 치는 행동은 하나님 자신을 침범하는 표시적 행동이 되어 만회할 수 없는 것이므로 이 행동은 사탄 침입을 허락하지 않을 수 없는 조건으로 남아진 것이다.
모세노정은 예수님의 표시적 노정이므로 이스라엘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모세가 반석을 쳐야할 입장에 놓여 반석을 두 번 치는 결과가 초래된 것같이 반석된 예수님도 이스라엘이 불신하면 사탄이 그를 쳐 십자가에 돌아간다는 것을 상징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십자가의 원인은 모세노정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바로 앞에서 행한 열 재앙을 비롯하여 홍해를 갈라서 건너게 하였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그들의 기아를 멈추었으며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갈길을 인도하신 등등 이루 말할 수 없이 소상히 지도해주신 하나님이셨지만 모세가 반석을 치는 일에 관하여서만은 간섭치 않으셨으니 이것은 모세 자신이 지혜로 넘어야할 책임분담이었기 때문이다. 모세 자신이 이 5%의 책임분담을 완수함으로써만 믿음의 기대는 조성되어 아브라함의 믿음의 조상의 입장을 복귀하여 메시아를 맞을 수 있을 것이었으나 이제 모세가 이 책임분담을 완수치 못하여 사탄이 재침범케되니 400년 애급고역의 사탄분립 기대 위에서 이루어 나오던 이스라엘의 가나안 복귀노정에도 사탄이 재침범하고만 것이다(민 20/12). 그러므로 모세를 비롯한 이스라엘백성의 이러한 불신의 행동으로 인하여 하나님은 그들을 다시 사탄에게 내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여호와께서는 불뱀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하셨다」(민 21/6)고 말씀하셨으니 이 뱀은 해와를 타락시킨 옛 뱀(계 12/9)을 말한다. 아무리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이시라 하더라도 인간에게 사탄이 침범할 조건만 성립되면 사탄에게 내어 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뱀을 보내어 백성을 물게하심이 자녀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본의는 아니지만 사탄이 취할 수 있는 조건이 성립되어있으므로 하나님도 할 수 없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뱀으로 말미암아 죽었으나 모세의 말을 믿고 그가 장대 끝에 단 구리뱀을 바라본 사람은 누구나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으니 이것도 역시 앞으로 예수께서 오실 때에 저를 믿지 않으면 이스라엘 백성에는 다시 사탄뱀이 침범할 것이요 이 백성이 다시 살려면 십자가에 달린 하늘뱀된 예수님을 믿고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상징한 것이다.
이렇듯이 불순종의 백성들은 전부 광야에서 쓸어지고 애급에서 나온 사람 중에는 믿고 따른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모세를 대신하여 이스라엘의 후손을 인도해 가지고 가나안으로 들어갔다. 그런고로 이 사실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은 믿고 순종하는 자만이 기업으로 받을 곳이라는 것을 표시하며 또 우리 이상천국도 믿고 따른 자만의 소유라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여기에 젖과 꿀이 흐른다는 것은 사랑이상의 행복이 넘친다는 것을 표시하는 것이다.
이스라엘민족이 가나안 땅으로 복귀하여 기업을 받게된 것은 가나안족속을 멸한 후에야 완성된 것이니 이것 역시 예수 오셔서 하늘나라를 건설함에도 그렇게 원수와 싸워야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을 표시한 것이다. 모세노정이 다음에 오실 예수님의 표시적노정이라 했으니 모세는 예수님의 전형이다(행 7/37). 모세는 그의 출생부터 벌써 예수님의 출생의 본보기로써 예시하신 것이다. 모세는 출생하자 바로왕의 손에 죽을 수 밖에 없는 입장에 있었으므로 그 모친이 그를 숨겨 3개월을 키운 후에야 바로궁중에 들어와 원수의 손에서도 완전히 성장한 것이다. 모세의 출생부터 그의 출애급노정 전체가 그러했지만 모세의 말로도 역시 예수님의 말로를 표시하는 것으로 끝났다.
하나님이 모세를 택하심은 모세로 하여금 이스라엘백성을 인도하여 가나안 복귀를 완성케 하기 위한 것이 예정이었으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지 못하므로 모세와 그 백성은 전멸되어 영적으로만 복귀하고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영육 아울러 실체로서 모세의 뜻을 계승하여 이스라엘의 후손을 인도하여 가나안으로 복귀했으니 이것도 다음 예수 오실 때 될 일을 예고한 것이다.
즉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심은 모세와 같이 예수로 하여금 전인류를 영육 아울러 복귀케함으로 세계가나안 복귀를 완수코자함이 예정이었으나 이스라엘백성들이 저를 믿지 아니하면 예수님도 십자가에 돌아가시어 모세와 같이 영적 복귀만을 완수하고 육적 복귀사명은 다하지 못하게 되므로 마치 모세의 뜻을 여호수아와 갈렙이 계승하여 가나안복귀를 완성한 것같이 예수께서도 재림하셔서 초림시의 뜻을 신부와 더불어 계승하여 영육구원을 완수함으로 후손된 인류의 세계가나안 복귀를 완수한다는 것을 상징하였다.
그러므로 모세의 뜻을 계승한 여호수아와 갈렙은 예수님의 뜻을 계승완성할 재림주와 신부를 상징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모세노정을 보아서도 아무리 하나님이 예정하신 뜻이라할지라도 그 뜻을 받드는 인간들의 잘못으로 인하여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는 기정사실이 아니라는 것과 재림 예수는 육신 쓰고 땅으로 탄생하셔야된다는 논거가 확실하여지는 것이다.
三 40일 복귀섭리로 본 모세노정
노아의 가정은 40일 심판으로 사탄을 분립하여 복귀섭리의 기대를 조성할 수 있는 40일 사탄 분립기준선상에 처하게 된 것이었으나 함의 타락행위로 말미암아 이 40일에는 사탄이 재침범하게되어 이것은 사탄에게 내어준 40일로 돌아갔으므로 노아의 입장과 같은 섭리의 기대를 다시 조성하려면 잃어버렸던 40일을 탕감복귀하여 하늘 40일로 세우지 않으면 아니된다. (참고 노아가정 중심한 복귀섭리)
복귀섭리노정으로 보아 심판 40일로 인하여 제2 인간 조상이요 제1 믿음의 조상의 입장에 처했던 노아의 입장을 복귀한 아브라함을 찾아세우기 위하여 400년을 요한 것도 함으로 인하여 침범한 사탄을 재분립키 위한 40일을 하늘 편으로 다시 찾아세우려는 것이 그 목적이 었다.(참고 아브라함 중심한 복귀섭리)
아브라함은 제물 실수로 인하여 함의 실수로 인한 노아가정과 같이 40일 기대를 사탄에게 내어준 입장에 다시 서게되어 노아로부터의 400년 기대를 파하였으므로 함 실수전 노아의 입장을 다시 복귀하려면 40일을 찾기 위한 400년 기대를 다시 조성치 않으면 아니되게되었다.
이스라엘민족의 애급 400년 고역은 이렇듯이 필연적 노정으로 남아진 것이다. 아브라함의 제물실수가 없었다면 노아 중심하고 경륜하시려던 하나님의 복귀섭리는 아브라함을 중심하고 이루어졌을 것인데 제물실수로 인하여 사탄 재침입을 보게되니 부득기 이스라엘백성은 400년이란 기간을 다시 사탄과 싸워 그를 완전히 분립하지 않으면 400년 전 노아의 입장을 복귀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애급 400년의 고역기간을 경과한 이스라엘민족을 중심한 모세의 입장은 바로 아브라함의 제물 실수 전의 입장이요 따라서 40일 심판기대 위에 섰던 함의 실수 전의 노아의 입장이었다. 그러므로 모세는 노아의 가정적 입장을 민족적으로 복귀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노아가정은 노아를 중심하고 하나되어 지혜로 찾아 세워야할 자기 책임분담을 완수해야 될 것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백성들로 모세를 중심하고 하나되어 그들의 지혜로 찾아세워야할 책임분담을 완수해야할 것이었다. 그런데 이 백성들이 우상을 받들고 하나님을 반역하는 행동을 취했으며 모세 역시 반석 2타라는 중대한 범행을 하게되어 이 백성은 함의 실수로 인한 노아가정과 같은 입장으로 다시 돌아갔다.
즉 모세를 중심한 12지파의 이스라엘 백성은 함실수 전 노아의 입장을 복귀한 기대였던 애급고역 400년을 다시 사탄에게 내어준 결과로 돌아갔으므로 이 입장을 다시 복귀키 위해서는 삼손을 중심한 12사사를 세워 40일의 기대를 재조성하기 위한 사사 400년의 사탄 재분립기간이 또 필요하게된 것이다.
40일을 중심하고 모세 한 사람을 찾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는 어떠했는가를 알아보자. 1대 복귀노정을 출발하기 위한 야곱이나 민족복귀노정을 출발키 위한 모세나 부활하여 영적 세계복귀노정을 출발한 예수님은 마치 아브라함이 모리아산상에서 이삭헌제로서 사탄을 분립키 위한 3일 기간이 필요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독자적으로 사탄과 싸우는 3일 기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모세 역시 이 3수를 찾기 위한 3개월 기간을 모친이 사탄 바로의 눈을 속여 양육하는데서 그 생애는 시작되었다. 즉 사탄과 싸우는 이 기간을 경과한 후에야 모세는 바로궁중으로 들어가 이스라엘민족의 가나안복귀 완성자로서의 생애가 시작된다. 모세가 바로궁중에서 40년 간 자라게되는 것도 모세는 아브라함이나 노아를 세워 아루시려다 못이룬 하나님의 뜻을 완성해야할 존재이므로 모세를 사탄에게 내어주어서 잃어버렸던 아브라함이나 노아의 입장에 모세를 세워놓고 그를 다시 찾아오는 복귀노정을 걷게함으로써 잃어버렸던 노아나 아브라함을 다시 찾아올 수 있는 탕감조건을 세우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40일을 복귀한 기대 위에 섰던 아브라함이나 노아의 입장을 다시 찾기 위해서는 모세도 40년 간 사탄 바로와 싸워 사탄을 분립하는 기간을 탕감복귀치 않고는 바로궁중을 박차고 나올 수 있는 기대가 조성되지 않는다(행 7/21~23).
그러므로 모세는 40세에 애급에 대한 증오감이 극도로 비등하여 애급인을 쳐 죽이고 미디안 광야 40년 생애로 들어가 40년 바로궁중에서 사탄에게 내어주었던 사탄 40일 기대를 미디안 광야에서 하늘 40일 기대로 탕감복귀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러므로 모세는 80세에 출애급하게 된다(출 7/5~7). 애급에서 사탄과 싸워 400년 고역을 마친 이스라엘백성과 40년 바로궁중 생활을 거쳐 40년 미디안 광야생활을 마친 모세는 400년 기대 위에 섰던 아브라함이나 40일 심판기대 위에 섰던 노아와 같은 입장에 처 하게 되었던 것이므로 가나안복귀의 출애급노정을 출발할 수 있는 것이다.
기사로써 홍해를 건넘으로 바로의 병차를 완전히 괴멸한 이스라엘민족은 홍해를 분기선으로 하여 사탄을 완전 분리한 것이다.
이제 이스라엘백성은 모세를 중심하고 하나님 뜻만을 완전히 받들어 사탄이 침범할 조건을 만들어서는 아니될 입장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백성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비난하여 정탐 40일의 결과를 믿음으로 넘지 못하였다.
12지파의 대표로 선출된 12인의 정탐보고를 듣도 놀란 이 백성의 태도는 하나님의 심정을 더욱 아프게한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과 그 가호의 은총을 입어 오직 기사와 이적으로 인도된 이 백성이 가나안족을 두려워하거나 여리고성의 견고함에 놀랄 필요는 없을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 정탐보고를 듣고는 대성통곡하여 「어찌하여 여호와는 우리를 이 땅에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힐진대 애급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않으리오」(민 14/1~4)하면서 한 두령을 세워 애급으로 돌아갈 의논을 한 것이다.
이로써 여호와 하나님을 원망한 20세 이상의 백성들을 전멸하고 하나님의 뜻을 받들기에 강하고 담대했던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모세의 뜻을 계승하여 후손을 이끌고 허락된 가나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이 백성은 불신으로 말미암아 정탐 40일을 믿고 넘지못한 결과로 돌아가 사탄침범의 조건이 생겼으므로 하나님은 정탐 40일의 1일을 1년으로 계산하여 그 후손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죄악을 담당케하고 40년 간 유리고객시킴으로써 그들의 광야의 고난은 하나님을 싫어 버린 죄값임을 알게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민 14/29~34).
이와같이 이스라엘민족이 야곱 가나안복귀 21년의 수를 맞추기 위한 21일이면 넘을 수 있었던 광야를 40년이나 유리한 것도 불신으로 잃어버린 정탐 40수를 탕감복귀키 위함이었다.
다음으로 모세의 금식 기도 40일의 원리적 근거를 알아 보기로 하자. 말씀의 실체인 아담 해와가 타락됨으로 인간은 말씀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복귀원리란 인간으로 하여금 잃어버린 말씀의 목적을 복귀키 위한 재창조 역사인 것이다. 모세가 40일 금식기도로써 받은 말씀은 재창조의 말씀이다. 말씀이 두 석판에 기록되었음은 말씀의 실체인 아담과 해와를 상징키 위함이다. 다시 말하면 잃어버렸던 아담과 해와를 복귀섭리로써 재창조한다는 상징으로서 두 석판의 말씀의 기록을 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복귀섭리는 반드시 사탄 분립의 40일 기대 위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원리이므로 재창조의 말씀도 이 기대를 조성치 않고는 부여될 수 없는 것이다. 40일 금식기도 후에서만 말씀(계명)을 받을 수 있다는 원리적 근거는 여기에 있다(출 24/18).
그러므로 모세가 받은 석판을 파함과 동시에 이 40일 기대수가 무너져 사탄을 내어준 결과가 되었으므로 다시 석판을 받기 위하여서는 재차 40일 금식기도를 반복함으로써 이 40일을 탕감복귀치 않으면 아니된다(출 34/27~28). 예수님의 40일 금식기도도 이러한 원리로서 불가피한 것이다.
즉 모세가 40일 금식으로 말미암아 말씀을 찾았다함은 이것도 다음 오실 예수께서 40일 금식으로 말미암아서 말씀의 실체된 자신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표시함이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은 것도 이스라엘민족의 불신으로 인하여 바로궁중에서의 열 번의 기사와 이적으로 세워야할 기준을 상실하였음으로 이 기준을 복귀하는 탕감조건으로 십계명을 주신 것이다. 이스라엘민족이 다시 사탄과 짝하지 않았으면 십계명은 필요없는 것이다. 사탄이 재침범하였기 때문에 이 사탄을 재분립하기 위한 방법으로 계명을 주신 것이다.
세례요한을 중심한 이스라엘민족들이 찾아 세워야할 40일 기대가 그들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조성되지 못하였으므로 이 기대를 예수님 자신이 조성하기 위해 40일 금식을 단행하신 것이다. (후편 제7장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