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부터는 위스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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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씨가 꾸미는 술모노가다리
제 43편 위스키의 역사
총론 맥주 소주편을 마치고
오늘부터는 워스키편입니다
위스키의 역사 1
위스키(Whisky, Whiskey)는 동방의 증류기술이 중세 십자군전쟁을 통하여 서양에 전달된 후에 생겨난 술이다. 12C경 이전에 처음으로 아일랜드에서 제조되기 시작하여 15C경에는 스코틀랜드로 전파되어 오늘날의 스카치 위스키의 원조가 된 것으로 본다. 중세기 초 많은 연금술사들의 노력에 의해 금은 만들지 못하였으나 생명의 물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후 18세기에 이르러 재증류법을 시도하게 되었고, 드디어 1826년에 영국의 로버트 스타인(Robert Stein)에 의해 연속식 증류기가 발명되었으나 실용화되지는 못했다. 1831년에는 아일랜드의 아네스 코페이(Aeneas Coffey)가 보다 진보된 연속식 증류기를 발명하여 특허를 내서 Patent - Still로 불리게 되었다. 초기의 위스키는 증류한 직후 바로 마셨기 때문에 무색투명한 것이었으나, 1707년 대영제국이 건설된 후 부족한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주세를 심하게 부과하자 스코틀랜드의 위스키 제조업자들은 스코틀랜드 북부지방(Highland)의 산 속에 숨어들어 달빛 아래서 몰래 위스키를 밀주(Moon Shiner)하기 시작했다. 그때 위스키 증류업자들은 대맥아를 건조시킬 연료가 부족하여 산간에 묻혀 있던 피트(Peat)탄을 사용하였는데, 이로 인해 위스키 특유의 향이 발생되었고 이것이 피트탄의 훈연 때문인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후 증류업자들은 밀주된 술이 많이 누적되자 위스키를 장기간 저장하기 위하여 스페인에서 수입해 온 셰리 와인을 마시고 난 빈 통(그 당시에는 스페인으로부터 포도주를 다량 수입했기 때문에 빈 통을 쉽게 구할 수 있었다.)에 담아 두었다. 나중에 술을 팔기 위해 술통을 열어보니 투명한 호박색의 짙은 향취를 지닌 부드러운 맛의 술이 되어 있었다. 1824년 조지 스미스가 만든 글렌리벳이 영국 정부로부터 스카치위스키 제조면허를 최초로 받았다.
위스키의 역사 2
오늘날 위스키의 원형은 12세기경에 만들어졌다. 켈트(Celt)인들의 우스퀴보(Usquebaugh, 생명의 물)는 아일랜드에 전해졌으며, 1170년 헨리 2세의 잉글랜드 정복에 의해 스코틀랜드에도 전해져 15세기에는 고지대인 하이랜드(Highland)에서 위스키가 제조되었다. 이리하여 위스키는 아일랜드의 아이리시(Irish) 위스키와 스코틀랜드의 스카치(Scotch) 위스키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1660년에 1갤런당 2펜스의 세금이 매겨진 이래 스카치 위스키는 밀조자와 징세관의 경합 중에 발전했다. 1707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합병으로 대영제국이 탄생한 후 정부가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종전보다 높은 세금을 부과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증류업자들이 하이랜드의 산속에 숨어 위스키를 밀제조했다.
밀조자들은 맥아의 건조를 위해 이탄(泥炭, peat)을 사용했는데 이 건조방법이 훈연취(熏煙臭)가 있는 맥아를 사용하여 스카치 위스키를 만들게 된 시발이 되었다. 또한 증류한 술을 은폐하려고 셰리주(sherry)의 빈통에 담아 산속에 은폐시켰는데 나중에 통을 열어 보았더니 증류 당시에는 무색이었던 술이 투명한 호박색에 짙은 향취가 풍기는 술로 변해 있었다. 이것이 바로 목통 저장의 동기가 되었다. 밀조자들이 궁여지책으로 강구한 수단들이 위스키의 주질 향상을 가져왔던 것이다.
19세기 중반부터 유럽의 포도가 휘로키세라 충에 의해 전멸되었기 때문에 당시 명성을 떨치고 있던 코냑(Cognac)의 제조가 불가능하게 되자 이 틈을 타 듀워(Dewar), 워커(Walker) 등이 노력한 결과 스카치 위스키는 세계적인 술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1880년 카피(A. Coffey)에 의해 연속식증류기가 발명되어 그레인위스키(grain whisky)가 제조되었는데 오랜 논쟁 끝에 그레인 위스키도 위스키로 인정되어 종래의 몰트 위스키(malt whisky)와 조합하여(blending) 제조하게 되었다.
이 사이에 6개의 큰 회사가 DCL(영국증류자협회)을 설립, 제조업자를 합병하여 큰 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블렌디드 위스키(blended whisky)의 출연은 스카치의 보급에 한층 박차를 가하게 되었으며, 순수한 몰트 위스키(pure malt whisky)의 애호가도 있어 양적으로는 많지 않지만 현재도 시판되고 있다.
아일랜드 위스키는 스카치 위스키만큼 신장은 되지 않고 있으나 아이리시 위스키로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한편 미국에서는 켄터키를 중심으로 아메리칸 위스키가 만들어지고 있으며 그중에서도 버번(bourbon)은 세계적인 술로 성장했다. 또한 캐나다에서는 캐나디안(Canadian) 위스키로 독특한 발전을 이루었다.
위스키의 역사 3
스코틀랜드에서 증류주의 제조가 처음으로 공문서에 나타나는 것은 1494년의 스코틀랜드 재무성 기록이다. 거기에는 수도사 존 코우에게 생명의 물을 만들기 위한 발아 대맥(malt) 8볼(bolls)을 주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1707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통합되어 대영연합왕국이 되었는데, 그로부터 6년이 지난 1713년 영국 정부는 스코틀랜드에 대하여 잉글랜드와 마찬가지로 맥아세를 과세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스코틀랜드는 글래스고우와 에딘버러에서 이법안에 반대하는 대규모 폭동을 일으켰다. 한편, 잉글랜드의 세리가 발을 들여놓지 못했던 하일랜드 지방에서는 밀조주가 성해져 갔다. 이에 따라 영국 정부는 1814년 소규모 업자를 근절시키기 위하여 500겔론 이하의 증류기 사용을 금지했다. 이와 같은 조치가 있자, 소형 증류기를 사용하고 있던 증류업자들은 이 조치가 자신들의 생사가 달린 문제라고 보고 크게 반발, 줄을 지어 하일랜드의 밀조 그룹에 합류해갔다. 그들은 대맥의 맥아를 건조시키는 연료로써 땅에 묻혀 있던 피트를 사용했으며, 위스키를 담는 통으로 셰리의 빈 통을 이용했다. 1823년 하일랜드의 대지주로서 상원의원이었던 알렉산더 고든은 밀조시대에 종지부를 찍기 위하여 소규모의 증류소에서도 싼 대금으로 증류를 할 수 있도록 하는 세제안을 제안, 이것이 통과되어 새 위스키 법이 공포되었다. 이때에 면허취득 제1호가 된것이 글렌리벳의 조지 스미스이다. 그렌리벳은 스페이 강 상류의 계곡에 위치한 위스키 제조에 적합한 기후 풍토를 갖춘 고장이다. 스미스가 면허를 취득했을 당시에는 밀조의 중심지로서 200여 개가량의 무면허 증류소가 있었다고 한다. 오늘날도 글렌리벳은 훌륭한 양조지역으로 이름 높은데, 정관사 the를 붙이는 것이 허용되어 있는 것은 스미스의 더 글렌리벳뿐이다. 1826년, 스코틀랜드의 증류업자 로버트 스타인이 연속식 증류기를 개발했다. 또 1813년에는 아일랜드 더블린의 세리인 아네스 코페이가 코페이식 연속식 증류기를 완성, 특허를 취득했다. 그때부터 코페이식 연속식 증류기가 널리보급되어 로랜드의 여기저기에 여러 개의 그레인 위스키 공장이 설립되었다. 1850년대에 들어서면서, 에딘버러의 위스키 상인으로서 글렌리벳의 대리점을 하던 앤드루 엇셔가, 글렌리벳의 몰트 위스키에 그레인 위스키를 블렌드한 블랜디드 스카치 위스키를 발매, 런던 등지에서 크게 호평을 얻었다. 한편, 난립한 그레인 위스키 제조업자들은 과당경쟁을 되풀이하여 도산하는 업자가 속출했다. 그래서 1877년 로랜드 지방의 유수한 그레인 위스키 업자 6개 사가 모여서 d.c.l(distillers company limited)을 주식회사 조직으로 발족시켜 조업을 관리토록 했다. 주재자는 존 헤이그 사의 존 헤이그가 맡았다. 1880년경 프랑스의 포도밭에 필로키세라 충해가 번져 와인과 브랜디의 생산이 큰 타격을 입었다. 그 때문에 영국은 와인, 브랜디를 수입할 수가 없게 됐다. 당시 런던의 상류계급에서는 위스키를 마시지 않았으며, 레드 와인과 브랜디를 주로 애용하고 있었다. 어쨌든 프랑스에서의 흉작으로 런던 시장에서는 바닥이 난 브랜디를 대신하여 블렌디드 위스키가 크게 부상하게 됐다. 1885년에는 그레인 위스키 업자의 모임인 d.c.l에 대항하여n.b.d(north british distillers)가 발족, 1890년경에 이르자 런던 시민 전체에 번져 그때까지 진이 누리고 있던 인기를 침식하기에까지 이르렀다. d.c.l도 이런 움직임을 재빨리 알아차리고 블렌디드 위스키 제조에 필요한 몰트 위스키 증류소의 매수와 건설에 힘을 기울였다. 남.북 아메리카를 위시하여 영국령 식민지들에도 적극적으로 수출하여 커다란 시장으로 키워나갔다. 빅 화이브라 불리는 상표인 헤이그, 화이트 레이블, 조니 워커, 화이트 호스, 블랙&화이트 등이 크게 부상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1898년, 급성장한 스코틀랜드 리스에 있는 패터슨 회사가 설비투자 과잉으로 파산, 붐을 맞고 있던 스카치 위스키 업계는 공황의 구렁텅이로 빠졌다. 군소 위스키 업자들은 잇달아 문을 닫았다. 이미 강력하고 견고한 기반을 구축하고 있던 d.c.l은 거대한 기업으로서 스카치 위스키 독점에의 탄탄대로를 돌진해 갔다. 제1차 세계대전을 거쳐 1925년 헤이그 헤이그 사(1888년에 설립된 헤이그 사의 수출업무를 전문으로 하는 자회사), 워커 사(조니 워커), 브캐넌 사(블랙&화이트), 듀워 사(화이트 레이블)를 흡수했고, 1927년에는 매키 사(화이트 호스)도 접수, 스카치 위스키의 거인으로서 군림하였다. 호황기 시절의 d.c.l은 전체 위스키의 60%, 영국 전체 알코올 생산의 80%를 점유했다.
위스키의 어원
위스키의 어원은 켈트(Celt)어의 우스개바하(Uisge Beatha)에서 시작되었으며, 이 말은 라틴어의 ‘Aqua Vitae’와 같이 ‘생명의 물’ 이란 의미이다. 우스개바하는 우스개베이야(Usque baugh)로, 이후 우스키(Usky)로 불리었다. 오늘과 같이 위스키로 부르기 시작한 것은 대략 18C말부터이다. 위스키는 보리(Barley), 호밀(Rye), 밀(Wheat), 옥수수(Corn), 귀리(Oat) 등 곡류를 주원료로 곡물에 싹을 내거나 갈아서 발효하여, 증류, 숙성의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술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무색 투명한 알코올을 참나무(Oak)와 같은 목재 통에 수년 동안 저장하여 숙성시키면 나무의 성분이 우러나와 짙은 호박색의 훌륭한 맛과 향기를 지닌 완숙한 위스키가 된다.
배종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