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CC 웁살라 총회가 열린 1968년은 전 지구적으로 굵직한 사건들이 있었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 진행중이고, 마틴 루터킹 목사가 암살당했으며, 프라하의 봄이라 불리는 체코의 민주화 운동이, 1968년 전체를 관통하는 68혁명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열린 웁살라 총회는 "모든 것(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계21:5)"라는 주제로 이 시대를 새롭게 하실 하나님을 고대한다. 비슷한 시기에 로마 가톨릭은 제 2바티칸 공의회(1962-65년)를 열어 교회의 갱신을 모색한다.
하나님의 관심이 ‘만물’에 있다는 것은 전통적으로 교회가 가져왔던 교회와 세상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을 의미했다. 즉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세상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장소이며 이곳에 교회가 함께 일하도록 요청받고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움은 개인 뿐만이 아니라 역사 전체를 질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격렬하고 또한 극명하게 완전한 인간적 삶을 위하여 부르짖는 인간의 속성에 속해 있다. 그러나 인간의 참다운 인간성과 그의 사회는 전보다 크고 다양한 파괴적 세력들에 의하여 위협받고 있다. 또한 극도로 예민한 도덕적 문제들의 관건은 ‘인간은 무엇인가?’에 관한 질문이다.
‘하나님의 선교’가 묘사하는 오늘과의 긴급한 관련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사람으로서의 온전한 인간성에로 ‘인간’들이 성장케 하기 위한 초청과 옛 것을 급격하게 갱신시키는 새로운 창조의 선물로 우리가 참여하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옛 인간’의 잘못된 삶과 협소한 삶을 뜯어내버려야 한다. 우리는 ‘새 사람’이 되어야 하고 또한 이 변화는 항상 어떤 실재적인 자세의 변화와 관계의 변화에로 구체화 되어야 한다.
선교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저들의 참된 삶을 발견하며 교회의 말씀을 통한 삶과 성례와 성령의 교통하심과 다른 사람을 위한 존재케 하는 열매를 맺게 한다. ‘새로운 인간성’의 징후들은 ‘인류의 모든 것’을 위한 봉사와 증언으로 하나님의 사람들의 단결과 경험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교회의 내향적, 그리고 외향적 성장은 긴급하고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의 궁극적인 소망은 이러한 진전에 두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최후의 결과의 비밀에 있다.
- 웁살라 총회, <선교 갱신RENEWAL IN MISSION > 가운데-
이 총회를 '하나님의 선교'와 '인간화'로 정리하곤 한다. 총회가 열린 전후 상황과 흐름, 그리고 총회 문서를 직접 읽으면서는 왜 저 주제들이 나왔는지 수긍이 갔다. 어지러운 현실 속에 예수 신앙으로 살아가는 존재들의 고뇌가 담긴 선언이요 고백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정치, 경제, 문화, 사회에서 발생하는 불의한 상황을 극복하려면, 생명을 억압하는 힘 아래에서 벗어난 새로운 사람이 있어야 함을 말한다. 이는 성서가 증언하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방식이다. 이 선언이 나오기까지는 치열한 논의가 있었다. '선교 갱신'에 대한 아시아 지역의 주창과 유럽과 미국의 신학자들의 반대하는 구도가 있었다. 웁살라 총회에 정회원으로 참석한 피터 바이어하우스, 존 스토트가 총회의 입장과 노선에 대해서 비판적 입장을 취했다. 이 흐름은 방콕에서 열린 후속 모임에서도 이어진다.
신앙과 삶의 일치라는 면에서 그리스도의 해방시키는 힘에의 이 필연적인 복종은 그것이 수행되어야하는 상황의 분석을 동반해야만 한다. 이런 영역 내에서의 교회의 타협들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힘의 남용적인 잘못된 사용은 솔직히 밝혀지고, 분명히 비난받아야 한다.
-방콕선교대회, <교회들을 향한 편지> 가운데-
웁살라 총회에서의 선교갱신의 구체적 전략을 수립하기 위해 1973년 태국 방콕에서 <'오늘의 구원'을 위한 세계대회>가 열린다. 방콕 대회는 미국의 닉슨 정권이 베트남에서의 명분 없는 전쟁을 일으킨 상황에서 베트남의 피난민이 국경을 맞대고 있는 태국으로 몰려들고 있을 때, WCC는 '오늘의 구원'을 위한 선교대회를 이 전쟁의 포화와 아비규환의 절규에 세계가 주목하는 베트남 이웃나라 태국의 수도 방콕에서 모였다. 인간화 선교정책은 서구 식민주의 하에서의 기독교 선교의 제국주의 식민정책과의 유착이 빚어낸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주종 관계가 서구 주인 교회와 식민지 노예 교회 관계였던 것을 뒤집어야 한다는 역사적 반성에 기초한 것이었다. 이 역사적 반성은 올바른 것이지만, 새로운 선교가 기독교 '구원'에 관한 불변적 진리를 죄로부터의 해방이 아닌 궁핍을 초래한 경제 제도와 억압을 가져온 정치적 구조에서의 해방으로 바꾸어버리고자 하는데서 근본적인 오류와 탈선을 범하였다고 비판한다. 1974년에 로잔에서 열린 <세계복음화국제대회>는 그 반작용이라 할 수 있겠다.
내년 한국에서 로잔대회를 앞두고, 로잔의 영향을 받은 이른바 복음주의 운동을 해오거나 그와 관련된 사람들이 현재 한국교회와 복음주의 운동, 로잔선언에 대한 이런저런 의견을 내고 있다. 그 의견들은 [5.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이야기로 수렴한다. 그동안 WCC에서 논의된 흐름을 보면서 한국의 복음주의자들이 아직도 5항을 주목하여 언급하는 것은 참 빈약하다는 생각이 든다. 복음주의 운동의 결과 어떠한 열매를 맺었는지 근원적인 성찰 없이, 그냥 옛 문서를 읇조리는 모습이다. 사회 참여만을 생각했지, 이 사회를 돌아가게 하는 힘에 대한 근원적인 공부가 부족한 가운데, 때마다 떠오르는 새로운 주제들을 쫓아가며 운동해온 형국이다.
“우리가 선교를 위한 바른 구조를 가지고 있는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선교를 위한 전투적인 구조를 이루고 있는가?”를 묻는 것이다.
- 웁살라 총회, <선교 갱신RENEWAL IN MISSION > 가운데-
우리 안의 바른 것에 대한 이해로만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을 한다면, 우리를 애워싸는 힘의 권세에 속수무책 당하고 만다. 착하기만 하면 안된다. 마치 이리 떼 가운데 보내는 양 같은 우리에게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하지 않으셨나. 우리가 무엇과 싸우고 있는지가 분명하면, 그에 대한 대안적 삶은 뚜렷하게 나타날 수 밖에 없다. <로잔언약>이 교회의 세속화에 대하여 심각하게 주목한 것은 그와 다르지 않다. 복음의 총체성이 몸과 관계로 구현된 완전히 달라진 인간들의 시공간에서 선교는 힘 있게 이루어진다. 그 선교를 이루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예수 운동은 갈릴리 사람들이라는 새로운 주체를 호명했다. 새로운 사람들이 새로운 운동을 일으켰다. 새로운 운동은 새 상품 찾듯 변화하는 시대 상황 속에 새로운 의제를 찾는 것이 아니다. 때마다 여러 문제를 만들어 내는 근본적인 문제를 바라보고 대안을 만들어 내는 관계적 주체를 살리는 것이다. 자본주의 질서가 각 사람을 개체화하여 지배하려 들 때, 한 몸 된 관계를 이루어 대응해야 이기는 싸움을 할 수 있다. 구조로 애워싸는 힘 앞에 구조로 대항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