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회 애지문학상 문학비평부문 수상작
고요히 폭발하는 명상, 현대세계의 숨통 뚫기 ― 김기택의 시세계
김 수 이
알아차림,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 사물을 꿰뚫는 통찰. 명상 수행의 대표적인 방법이자 덕목이다. 명상하는 자는 천천히 숨을 쉬면서 자신의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알아차리고, 이윽고 아무런 의지와 노력 없이도 자기 몸이 저절로 숨 쉬고 있음을 알아차리며, 들숨과 날숨을 통해 세계를 호흡하면서 자신이 ‘지금 여기-살아 있음’을 알아차린다.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온갖 잡념에 휩쓸리지 않고 ‘텅 빈 채’로 주위의 모든 것과 하나가 되는 충족감을 체험하며, 이번 숨과 다음 숨 사이의 ‘순식간瞬息間’에 삶과 죽음의 문턱이 있음을 통찰한다. 명상하는 자는 자신과 미묘한 거리를 두고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려는 자, 현재의 모든 순간과 만물에 온전히 집중함으로써 지금 여기에 생생히 살아 현존現存하려는 자다. 숨을 쉴 때마다, 그리고 숨과 숨 사이에서 명상하는 자는 ‘애쓰지 않는 애씀effortless efforts’을 실천한다.
갑자기 몸은 다 없어지고 허공에 멀뚱멀뚱 눈알만 남는 어둠이 되어
나를 둘러싼 거대한 눈알이 한 점 허공인 나를 쳐다보고 있는 어둠이 되어
긴 대롱을 지나야 그 끝에 간신히 숨구멍 뚫린 허파가 있을 것 같은 어둠이 되어
- 「긴 터널 안으로 들어간다」(『갈라진다 갈라진다』, 문지, 2012) 부분
얼마 전까지 고양이였다가 이제 막 고양이를 벗어던진 것이
처음 입은 이상한 몸을 못 참겠다는 듯
반쯤 기화된 발로 허공에 발길질한다.
제 가벼움 몸 없음 투명함이 근질근질하다는 듯
추위 돋친 발톱으로 허공을 할퀸다.
고양이에서 다 벗어났는데도
아직 고양이를 버리지 못해 제 꼬리를 쫓아 빙글빙글 돈다.
- 「눈」(『낫이라는 칼』, 문지, 2022) 부분
김기택의 시를 이끌어가는 주체는 ‘명상하는 자’다. 김기택의 시는 ‘문명의 야만’이 숨통을 조이고 “대가리 없는 명상 냄새”(「치킨고로케」, 『낫』)가 자욱한 죽음의 도시에서 “답답한 숨통과 내장을 시원하게 긁”(「너무」, 『낫』)을 수 있기를 염원하며 명상을 수행한다. 내면에서 일어나는 ‘나’의 경험을 바라보는 알아차림, 특정한 지각 대상에 주의를 집중하며 고요와 평온에 이르는 집중, 지금 여기서 내가 경험하는 모든 것에 폭넓게 주의를 열어놓는 통찰 등 명상의 기술도 풍부하게 활용한다. 가령, ‘숨 쉬는 일’을 위시해 다양한 몸의 다양한 활동을 계속 응시하고 묘사하는 것, “~(하)고 있다”라는 현재 상황 진술의 서술어를 많이 사용하는 것, 드물지만 “기우뚱거리는 몸 안으로 환한 빛과 음악이 기적같이 흘러들어오”(김진석)는 지복至福의 순간을 만나는 것 등은 명상하기로서 김기택 시의 특징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 후략
─ 『애지』, 2022년 여름호에서
제21회 애지문학상 문학비평부문 수상 소감
비평가는 먼저, 읽는 사람입니다. 듣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작품 속에서 언어의 형상으로 나타난 사람들을, 시공간들을, 사물들을 읽고 듣습니다. 저의 경우, 비평을 한다는 것은 오독을 피할 수 없음에도 정독과 완독을 바라는 일이며, 듣기 능력이 허술함에도 경청을 계속해 나가는 일입니다. 작품에, 타인에, 삶에, 세계에 다다르고자 하지만 끝내 다다를 수 없는 ‘빈 곳’에서 허우적거리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 허우적거림이 제가 살아온 이력의 대부분임을 알겠습니다. 1997년에 등단해, 모교로부터의 수혜를 제외하면, 문단에서 처음 받는 상을 통해 비로소 깨닫는 제 글과 삶의 지난날이며 오늘입니다.
비평을 한 편 쓰고 나면, 제가 읽고 들은 그 작품과 가까워진 동시에 멀어집니다. 당혹스럽고 허전합니다. 작가에게는 늘 미안함이 남습니다. 쓴 것과 쓰지 못한 것 혹은 쓰지 않은 것, 간신히 쓸 수 있었던 것과 어쩌면 영원히 산다 해도 쓸 수 없는 것의 거리는 아득하고 한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어찌할 수 없는 광활한 간극이 제가 계속해서 쓸 수 있고 살아갈 수 있는 역설의 공간임을 이제는 이해합니다. 제 자신을 위로하려는 마음이었는데, 어느새 감사한 마음이 샘솟는 것은 왜일까요. 문학이 주는, 삶이 주는 ‘축복’이라고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겠습니다.
좋은 소식을 듣기 며칠 전, 크고 아름다운 집의 뜰에서 맑은 샘물이 솟아나는 꿈을 꾸었습니다. 제 존재와 삶에 샘물이 되어준 소중한 가족과 친구들,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뜻깊은 상을 주신 심사위원 이형권 선생님과 『애지』에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는 ‘서른 살’(최승자)을 앞두고 문학을 그만두려던 저를 다독여 비평의 길로 이끌어 주신 하응백 선생님께는 오랜 세월을 묵혀 온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변함없이 따뜻하게 함께 공부하고 함께 걸어주신 민승기 · 김병진 선생님, 막다른 길들의 끝에 늘 환하게 서 있어 주신 이사라 선생님과 김미현 · 신수정 · 한원균 선배님, 시골서 함께 자란 친자매들 같은 홍양순 · 김별아 소설가와 이정민 시인께도 다함 없는 사랑과 감사를 보냅니다.
이 글을 쓴 직후 하늘로 가신 고故 김미현 선생님의 평화로운 안식을 기도합니다. 언니, 언니 덕분에 누린 기쁨과 빛나는 삶의 순간들에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너무 보고싶고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김수이(金壽伊)
1968년 충북 제천 출생.
1990년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1997년 경희대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문학박사).
1997년 <문학동네> 제1회 신인공모에 평론 「타자와 만나는 두 가지 방식」 당선.
2000년 평론집 『환각의 칼날』(청동거울) 출간.
2002년 평론집 『풍경 속의 빈 곳』(문학동네) 출간.
2006년 평론집 『서정은 진화한다』(창비) 출간.
2011년 평론집 『쓸 수 있거나 쓸 수 없는』(창비) 출간.
2019~2022년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 이사.
2022년 『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 - 26가지 키워드로 다시 읽는 김수영』(공저, 한겨레출판) 출간.
제21회 애지문학상 문학비평부문 심사평
올해 애지문학상 평론 부문의 본선에서 오른 작품은 김수이의 「고요히 폭발하는 명상, 현대세계의 숨통 뚫기」, 황치복의 「끌어당김Attractive과 접문接吻의 시학」, 임지훈의 「가상(들), 그리고 현실이라는 가상」 등 세 편이었다. 김수이의 글은 김기택의 시가 보여주는 미세한 감각의 언어를 나와 타자의 발견이라는 명상적 수행의 차원에서 분석하고 있다. 황치복의 글은 이영식의 시집 『꽃을 줄까 시를 줄까』를 사랑 혹은 끌어당김과 온기의 시학으로 분석하고 있다. 임지훈의 글은 서호준의 시집 『엔터 더 드래곤』을 중심으로 시적 공간으로서의 가상 세계가 지니는 의미를 전향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우리 시의 전통적인 영역과 새로운 영역을 두루 대상으로 삼고 있는 이들 세 편의 글은 나름의 장점을 지니고 있다. 다만 상대적으로 김수이의 글이 비평적 밀도, 사유의 깊이와 상상의 넓이, 언어 감각 등에서 앞서 있다고 판단되어 수상작으로 선정했다.
김수이의 「고요히 폭발하는 명상, 현대세계의 숨통 뚫기」는 김기택의 시에 나타나는 명상적 특성이 각박한 현대사회에서 마음의 숨통을 여는 시적 장치라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필자는 그의 시가 고요한 명상을 통해 ‘나’의 내면을 바라보고, 그것을 매개로 사물이나 타자와 더불어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얻는 과정이라고 본다. 그동안 김기택의 시를 규정해온 미세한 관찰자적 시선을 수긍하면서, 그것이 자아와 세상의 의미를 개진하는 명상적 지혜와 관련된 것임을 새로이 주창한 것이다. 이는 “한 생명체나 사물, 어떤 사건이나 현장 등에 대해 고통스러울 만큼 집요한 몰입과 의도적인 더딘 필치로 언어화를 수행하는 과정은 곧 명상 수행의 과정이 되었다.”라는 문장으로 요약된다. 이러한 주장은 대상 작품을 꼼꼼하게 분석하고 다른 작품들과의 상호텍스트성을 폭넓게 살핌으로써 설득력을 확보하고 있다.
김수이는 시에 대한 정치한 분석을 통해 비평의 가치를 공고하게 다져온 현장 비평가이자 강단비평가이다. 김수이의 비평이 갖는 미덕 가운데 하나는 자신의 논리를 확보하기 위해 이념이나 관념을 시에 앞세우지 않는다는 점이다. 김수이의 비평 작업에서 주인공은 언제나 시이고, 비평은 시의 언어적 수행을 고양하는 동반자의 역할에 충실하다. 또 하나, 김수이의 비평은 이즈음 비평에 자주 보이는 맹목적인 찬사나 무비판적 해설과 거리가 멀다. 비평의 본래 역할인 분석과 비평을 통해 공정하게 평가하는 일에 충실할 뿐이다. 특히 김수이는 시가 품고 있는 이면적 문맥을 정확히 분석하여 독자들과 공감하는 능력에서 다른 비평가들보다 앞서 있다. 비평의 본연성을 지켜내면서 특유의 섬세하고 따뜻한 시선을 통해 독자들에게 시 읽는 즐거움을 선사해 왔다.
시 비평이 일반 독자들의 독서 목록에서 이미 사라졌다는 말이 심심찮게 들린다. 전문 독자마저도 자기와 관련되는 작품 외에는 읽지 않는다는 탄식도 없지 않다. 물론 시 비평은 어느 시대인들 일반 독자나 전문 독자들의 전폭적인 주목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시 비평이 언어 예술의 최고最古/最高 장르인 시와 동반자로서 존재 가치가 매우 크다는 점이다. 시 비평은 시가 그러하듯이 물질적 현실에서 소외되면 될수록 현실 너머의 정신세계에서는 환대받아왔다. 따라서 시 비평가는 독자들의 외면을 탓할 것이 아니라, 그 역설적 가치를 고양하면서 속악의 시대 현실에 전적으로 응전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김수이는 이 응전의 앞자리에서 시 비평의 쓸모(없는 쓸모)를 더욱 예리하게 벼려줄 것으로 기대해 본다.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 심사위원 이형권, 반경환 (심사평: 이형권)
첫댓글 김수이선생님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