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50: 22-26
요셉이 그 아비의 가족과 함께
본문에서 모세는 요셉의 최종 생애와 그의 죽음을 기록합니다.
1. 본문 22-23절은 "요셉이 그 아비의 가족과 함께 애굽에 거하여 일백 십세를 살며, 에브라임의 자손 삼대를 보았으며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도 요셉의 슬하에서 양육되었더라" 입니다.
요셉은 그야말로 만세 전에 택하신 은혜로 된 사람이요, 그 은혜는 요람에서 무덤에 이르는 지상 생애 전반에 걸쳐서 그에게 주어졌습니다.
요셉은 오래 살면서도 자기 아버지 가족들과 잘 지내며 받은 바대로 은혜를 끼쳤습니다(22절). 사람이 권세를 가지면 교만해지고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지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한결 같이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자로써 덕을 지키면서 살았습니다.
모세가 요셉의 수명을 말하는 것은 오랜 기간동안 한결같은 마음을 품었다는 뜻에서입니다. 요셉은 애굽 사회에서 크나큰 영광과 권력을 쥐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요셉으로서는 여전히 살아 계신 하나님께 밀착되어 사는 방식을 취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밀착되어 사는 방식은 곧 하나님의 계시에 접하여 사는 생활이 됩니다.
같은 뜻으로 하나님의 사람 요셉은 자기 부친의 집과 밀착되어 있었습니다.
어려서부터 고난을 당하면서도 여전히 밀착되어 있었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과 그분의 계시를 접어 둘 수는 없었습니다. 그게 고난이었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를 매개하는 사람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요셉께서 점차적으로 궁정의 보화를 뒤로 한 것도 지상적인 위엄이 자기를 하나님 나라로부터 떼어놓는 일이 없게 하려면, 이 모든 것을 멸시하는 것이 상책이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과거에도 자기 마음을 애굽에 묶어 두려 했던 모든 유혹을 기피했던 사람입니다.
여기서는 요셉이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요셉은 자기 영광을 제쳐놓고 천한 신분으로 내려갑니다.
자기 자식들로 하여금 자기 세속적인 지위를 계승하려는 소망을 점차 잊어버리게 합니다.
사람이란 일단 차지한 신분을 그대로 유지하려고 발버둥칩니다.
그리고 자기 행운을 후손에게 물려주려 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60년 동안 자신과 자식들이 천한 처지에 남아 있고자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자신의 지상적인 위대성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의 양 무리로부터 소외되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뜻에서였습니다.
요셉은 마치 옛모습을 벗어버리고 새 힘을 얻으려고 허물을 벗어버리는 뱀을 닮고 있습니다
요셉은 증손자까지 본 사람인데도 왜 불어나는 숫자에 대한 대비책을 강구하지 않고 있는가
요셉이 세상 지위나 풍요를 얕보았던 것은 그의 자손들에게 유목생활에 집착하는 편을 택하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식구로 취급받을 수만 있다면 애굽인들에게 멸시를 받는 편을 택했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이런 정신에서 바른 신앙 생활이 나오는 것입니다.
더욱이 여호와께서는 요셉의 생전에 수많은 자손들을 허용하심으로써 그에게 하나님의 신령하신 복에 대한 맛을 어느 정도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은 이 맛을 통해서 장차 구원에 대한 소망을 품게 하려는 뜻에서였습니다.
그가 여러 가지 유혹을 받는 가운데 거기에 집착하지 않으려면 격려와 힘을 받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2. 본문 24절은 "요셉이 그 형제에게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시고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입니다.
1) 여기서 모세가 말하는 형제들이라는 말속에는 실제 그의 형제들 뿐 아니라 다른 친척도 포함되고 있습니다.
특별히 여기서 요셉에 대한 말씀이 나오는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로, 그들 모두의 눈이 요셉의 높은 권위 때문에 그에게 집중되어 있었던 만큼 자신의 위엄의 광채 때문에 그들 중 누구에게라도 장애물이 되지 않도록 하려면 자신이 그들의 모범이 되어 이 점을 깨우쳐 주는 것이 자신의 임무였습니다.
그 다음 둘째로, 애굽왕국에서 제2인자였던 요셉이 그 큰 명예를 불문에 부치고 그저 단지 약속의 상속자 처지만으로 만족했다는 사실을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깨닫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2) 요셉께서 "나는 죽으나"라고 말씀한 것은 형제들에게 자기가 죽더라도 하나님의 진리는 불멸의 말씀인 만큼 용기를 가질 것을 명령하는 것과 같습니다.
요셉께서는 그들에게 자신의 생명이나 다른 사람의 생명에 의지하는 가운데 스스로 하나님의 능력에 제한을 두는 어리석음을 범할 것이 아니라 고 말씀합니다.
오히려 적절한 시기가 올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릴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장차 구속에 대한 증인이 되고 보증인이 될 정도로 이처럼 확실성을 지니게 된 것은 자기 부친에게 그처럼 배웠기 때문입니다.
성경 어디를 봐도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셨다거나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가 그에게 말을 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야곱이 그에게 위임된 구원의 언약을 자기 후손들에게 양도하는 교사와 선지자로 신령하게 임명되었다는 점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친 증거를 환상이나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의 말보다 더 확고한 것으로 의지하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이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을 경우 우리에게서 그분의 영광을 사취 당하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공손하게 대해 주실 필요가 없게 되고 맙니다.
물론 이것은 신앙이 인간의 입에 의존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입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우리는 인간으로 부터 듣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들의 음성을 통해서 위로 이끌려 올려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을 성령을 통해서 마음 속에 날인해 주십니다. 이처럼 신앙에는 다른 기초가 없습니다.
신앙은 하나님 자신에게 그 기초를 두고 세워집니다.
그렇지만 인간의 전도(傳道)에는 결코 거기에 대한 권위와 존경이 결핍되는 일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제한을 두는 것은 이런 저런 환상을 원하는 나머지 교회의 일상적인 사역을 멸시하는 사람들의 무모한 호기심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3. 본문 25-26절은 "(25)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정녕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26) 요셉이 일백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 입니다.
이 말로 요셉은 그들이 애굽에 사는 동안은 이 말이 망각 속에 묻혀지고 말 것이요, 그들의 유랑은 하나님께서 당분간 그들에게 등을 돌려대신 것과 같이 보일 것이라는 점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계속해서 마음의 눈을 하나님께 고정해 두고 있습니다.
이것은 "야곱 집에 대하여 낯을 가리우시는 여호와를 나는 기다리리라"(사8:17) 하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이 문단이 우리에게 명백히 가르쳐주고 있는 것은, 요셉이 자기 무덤을 이처럼 불안하게 선택하는 의도가 무엇인가 하는 점인데 그것은 그것이 구속의 날인(捺印) 역할을 하도록 하려는 뜻에서입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신실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면 그분께서 약속하셨던 것을 허락하실 것이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렇게 한 다음에 자기 형제들이 자기 유해(遺骸)를 메고 가줄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이 유해는 이스라엘 후손들에게는 유익한 유물이었습니다.
그것을 보고서 후손들은 요셉이 그들에게 안전하게 신뢰하도록 명령한 영원한 언약이 사람의 죽음을 통해서 사장(死藏)되지 않는다는 점을 뚜렷이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셉께서는 그들의 구출에 대한 모든 의심을 말끔히 제거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맹세를 그 실예로 제시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4. 이제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 위에 부으신 은혜와 그 분의 은총에 반응하는 요셉의 신앙을 요약 정리하고 적용함으로써 말씀을 마칩니다.
1) 하나님께 큰 은혜를 입은 자로서 요셉은 철저히 남을 용서하는 신앙의 사람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아버지가 죽은 후에 자기들이 오래 전에 요셉을 팔아 버렸던 죄 때문에 그의 보복을 당할까 두려워하며 그에게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들로서는 그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자 요셉은 그는 형들이 용서를 빌 때에 울었습니다(17절).
요셉이 왜 울었겠습니까?
그가 오래 전에 그 형들에게 팔리웠던 일이 억울하여 울었겠습니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가 그렇게 억울했다면 일찍이 그들을 용서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가 그들을 벌써 오래 전에 용서하였던 사실(45:4-8)이 말씀에서 확증됩니다(18-21).
분명히 그의 울음은 그 형들을 불쌍히 여겼던 까닭입니다.
(2) 하나님의 은혜로 된 그로서는 형들이 자기 앞에 엎드려 자복한 사실을 도리어 황송하게 여겼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면전에다가 자기와 다른 사람을 두고 보는 태도입니다.
이런 모습이 요셉의 일상이 될만큼 그는 남의 잘못을 기억하지도 않았었습니다.
그는 남들을 죄로 정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대신하는 교만한 행동인 줄 알았습니다(18-19).
(3) 하나님의 은혜로만 되어진 그는 자기에게 잘못하였던 자들을 도리어 위로하였습니다.
그 위로는 억지 위로가 아니고 자기가 믿는 진리 그대로 과거 사건을 선하신 하나님께서 주도하신 일로 보고 진정한 마음으로 한 위로였습니다(20-21).
2)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여 주신 그대로 알아모신 요셉은 하나님을 절대로 신뢰하는 신앙의 사람입니다.
우리 본문 24절에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란 말씀은 중요합니다.
이것은 요셉이 자기 죽는 것은 문제시 하지 않고 다만 하나님께서 그분께서 알게 하신 그대로 약속을 지켜 주실 것으로 만족하는 신앙입니다.
그 약속은 이스라엘 민족으로 가나안 땅을 차지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겸하여 택한 백성이 내세(來世)에 들어가도록 하실 것을 포함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그 약속은 하나님 백성의 구원을 내용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내용을 요셉에게 주셨고, 요셉으로서는 이런 모든 것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께 전적으로 반응하였습니다.
요셉은 자기가 죽은 후에도 하나님께서는 이런 약속을 성취해 주실 것이니 만큼 염려 없다는 의미에서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주시는 은혜를 따라 하나님을 알아 모시고 반응하여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앙이 구원을 얻게 하는 신앙입니다.
이런 신뢰심은 우리가 사람에 대해서도 가지는 수가 있습니다.
대수술을 해야 될 병자가 의사를 신뢰하기 때문에 자기 몸을 그에게 내맡기며, 태평양을 건너가는 사람은 선장을 신뢰하기 때문에 자기 몸을 배 안에 싣습니다.
3)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알게 하시고 믿음을 주실 때에 우리가 하나님에게 대해서야 얼마나 더욱 신뢰할 만합니까?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또 우리들의 과거와 현재와 장래를 자세히 아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우리 구원을 완성하실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 뿐 아니라 그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되 독생자를 내어 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이런 분으로 알아 모신 우리는 그를 절대적으로 신뢰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은혜를 주실 때, 이런 신뢰가 생애 전반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4)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향하여 모든 것을 은혜로 주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은혜를 감사히 받고 각양 반응을 하는 자로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참으로 입은 자는 오그라드는 형태가 아니라, 적정과 절도의 원리를 유지하면서 펼쳐지는 자로 있습니다.
출처: 예장 서울노회 원문보기 글쓴이: 최정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