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성진목사/반포되는 새 조서 (에 8:1-17)
주요내용:생명의 성령의 법
(요약)
에스더의 직고로 상황은 대 역전된다. 이는 성령의 열매가 강하게 나타날 때를 예표한다. 하만의 집이 에스더의 것이 됨은 육체가 죄악이 아닌 하나님과 의의 도구됨을, 모르드개가 파사의 총리가 됨은 육체까지도 성령의 지배하에 있게 됨을, 옛 조서를 대항할 새 조서는 죄악의 속성을 이기는 성령의 속성을, 새 조서의 신속한 반포는 신속히 깨달을 줄 아는 마음을, 오랜 동안 준비했다가 칼로 무찌름은 죄악에 대한 강한 저항정신을, 본토인조차 유다인 됨은 잠재의식마저 복음화 됨을 가리킨다.
(설명)
☆ 대 역전
- 변화의 삶 -
① 하만의 집이 에스더의 것이 됨 - 몸 드려 순복의 삶
② 모르드개가 파사의 총리됨 - 성령의 지배
③ 옛 조서를 이길 새 조서가 반포됨 - 생명의 성령의 법
④ 본토인들도 유다인 됨 - 의식변화
☆ 할 일
- 성화의 방편 -
열심히 잔치를 베풀라 - 충실한 은혜생활
(예배, 성례, 기도, 찬송, 말씀, 겸손, 사랑, 기타)
☆ 두 법의 싸움
- 내적 갈등 -
옛 조서 새 조서
옛 법 새 법
율법 복음
죄와 사망의 법 생명의 성령의 법
☆ 총리가 된 모르드개
- 성령의 주장 충만 -
① 푸르고 흰 조복을 입고
② 큰 금 면류관을 쓰고
③ 자색 가는 베 겉옷을 입고
④ 왕 앞에 나아옴
⑤ 유다인에게 영광과 즐거움과 기쁨과 존귀함이 있었음
⑥ 왕의 호출 없이 나가는 권한
(강 해)
오늘은 "반포되는 새 조서"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제 유다인들의 원수 하만은 자기가 세운 장대에 달려 죽고 모르드개가 하만의 자리에 앉혀지고 아하수에로 왕의 옛 조서를 무력화시킬 새 조서가 내려져서 모든 것이 대 역전되는 상황이 벌어지는 장면입니다. 얼마나 통쾌한 장면입니까? 그럼 구체적으로 어떻게 역전됩니까?
1. 하만의 집이 에스더의 것이 됩니다.
1절에 "당일에 아하수에로왕이 유다인의 대적 하만의 집을 왕후 에스더에게 주니라" 했습니다.
고대 중근동 국가에서 범죄자의 모든 소유는 당연히 왕에게 귀속되었습니다(왕상 21:7-16). 따라서 범죄자 하만의 모든 소유는 왕의 것이 되었으며 왕은 다시 그것을 하만의 음모를 드러내는 일에 공로가 큰 에스더에게 넘겨주었습니다(Baldwin). 그런데 하만의 집은 그의 가옥만을 의미하지 않고 하만의 소유됐던 재산 일체 그러니까 부동산 동산 종들과 짐승까지 인적 물적재산을 총망라하는 말입니다(Range, Burrow,창 39:4, 왕상 13:8, 욥 8:15). 그러니까 이제는 소유마저도 의인으로 것으로 거룩해진 것입니다.
여기 하만은 죄악의 상징인데 하만의 집이란 죄악의 도구가 되었던 육체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에스더에게 주어졌음은 이제 육체까지도 영성이 입혀짐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아름다운 에스더가 바로 변화 받은 성화의 영성적인 인격을 암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영육 간에 한 인격 한 성향이 되어 하나님을 섬깁니다. 마치 하나님께서는 남쪽 유다와 북 이스라엘이 손잡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과도 같습니다. 이 일이 이루어진 때는 바벨론 포로 후였습니다. 남북은 각각 다른 세력에 의해 따로 따로 포로 되지만 거기서 연단 받고 결국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가 되어 함께 돌아와 하나님을 섬깁니다. 이것이 영육이 한 성향이 되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의 예표입니다.
그런데 2절에 에스더가 이 하만의 집을 모르드개에게 주어 주관하게 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육체도 영혼과 마찬가지로 성령의 지배하에 들어가는 원리를 가리킵니다. 그 전에 육체는 하만의 지배처럼 세상과 죄의 지배하에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엡2:3). 그러나 이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변화되니까 육체를 포함한 전 인격이 놀랍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은 더 이상 죄악의 집과 그 도구가 아니며 성령께서 지배하시는 의의 병기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으로 영광을 돌리려면 마음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롬12:1-2에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했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충만이 중요합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게 되면 더 이상 육체는 방해물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쓰여지는 귀한 도구가 되어집니다.
롬6:12-18에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했습니다.
2. 모르드개가 파사 나라의 총리가 됩니다.
1절 하 반절부터 2절에 "에스더가 모르드개는 자기에게 어떻게 관계됨을 왕께 고한 고로 모르드개가 왕의 앞에 나아오니 왕이 하만에게 거둔 반지를 빼어 모르드개에게 준지라" 했습니다.
에스더는 사건이 이렇게 된 이상 더 이상 모르드개를 숨길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에스더는 모르드개가 자신의 사촌오빠이자 양아버지임을 왕에게 고했습니다. 그러자 왕은 하만에게서 거둔 반지를 모르드개에게 주어 모르드개로 메대 파사의 제 2인자인 총리대신을 삼았습니다. 이것은 결코 왕후의 후광 때문에가 아니고 그의 두 번에 걸친 왕의 생명과 연결되는 중요한 공로가 인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께서 마음까지도 지배하심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파사 나라란 누구의 것입니까? 아하수에로 왕의 것입니다. 그런데 왕이 자기 나라의 지배권을 모르드개에게 주었습니다. 즉 아하수에로가 혼 즉 마음을 예표한다면 그의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은 성령께서 마음까지도 다스린다는 원리가 되겠습니다. 이것은 곧 자기 주권적인 자아를 처리함을 암시하는 것으로서 이는 놀라운 변화를 암시합니다. 그러니까 모르드개는 하만의 소유까지 나아가 파사 127도까지도 주관하는 막강한 권세가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마음대로 왕 앞에 출입할 권세도 주어졌습니다. 그 만큼 영성이 되면 의로서 입혀져 결재조차 필요 없는 최대의 소원이 됩니다.
이렇게 우리는 전 인격이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영혼을 지배하신 성령께서 육체를 지배하시고 나아가 자아까지도 지배하셔서 주님의 뜻을 온전히 순복할 줄 아는 겸손한 인격으로 바꾸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잔치가 중요합니다. 즉 두 번의 잔치를 통해 아하수에로가 이토록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성령의 내외적인 충만함으로 더욱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3. 옛 조서를 무효화시킬만한 새 조서가 내려집니다.
7-8절에 "아하수에로왕이 왕후 에스더와 유다인 모르드개에게 이르되 하만이 유다인을 살해하려 하므로 나무에 달렸고 내가 그 집으로 에스더에게 주었으니 너희는 왕의 명의로 유다인에게 조서를 뜻대로 쓰고 왕의 반지로 인을 칠지어다 왕의 이름을 쓰고 왕의 반지로 인친 조서는 누구든지 취소할 수 없음이니라"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파사 나라의 법률은 아주 엄하여 한 번 선포된 법은 왕도 바꿀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유다인들을 죽이라는 조서가 반포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3절을 보면 에스더가 왕의 발아래 엎드려 울며 구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만은 이미 처형되고 없었지만 유대인 학살에 관한 왕의 조서는 여전히 유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에스더는 엎드려 울면서 왕에게 탄원을 합니다. 다행히 왕은 금홀(金笏)을 다시 내어미는데 이것은 에스더의 청원은 무엇이든 들어주겠다는 의지의 표명입니다.
그런데 에스더가 얼마나 간절하게 탄원했는지 간청을 하기에 앞서 상대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어구(1:19, 3:9)를 5절에서 무려 네 번이나 반복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에스더가 하만의 음모를 폭로할 때도 두 번 밖에는 사용하지 않았는데 여기서는 네 번이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이 일이 얼마나 들어주기 어려운 일이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한 번 왕의 도장이 찍힌 조서는 변개 되거나 취소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Huey). 이것을 전혀 모르는 바가 아니었지만 에스더는 자기 민족을 구하기 위하여 이렇게 왕의 발 아래 엎드려 눈물로서 탄원했습니다.
실재로 그 공백기를 보면 하만의 유다인 학살조치가 내려진 때가 정월 13이이었으니까 에스더가 하만의 음모를 드러낸 때가 정월 16일(에5:1, 7:1) 그렇다면 새로운 조서가 쓰여진 때가 삼월 23일이니까 약 두 달 10일 정도의 공백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9절에 이 사안이 얼마나 긴급한 것이었으면 왕궁에서 길러서 왕의 일에 쓰는 준마를 타는 자들이 이 조서를 전국에 반포했겠습니까? 그런데 하루라도 방치해서는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는 이런 중대한 사안을 70일을 기다렸다는 것은 그 만큼 왕이 이 문제를 가지고 고민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고민의 결과 좋은 묘안이 생겨납니다. 즉 첫 번째 조서에 위배되지 않으면서도 첫 번째 조서를 무효화시킬 수 있는 다른 조서를 반포하게 됩니다.
그 조서의 내용이 11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즉 "조서에는 왕이 여러 고을에 있는 유다인에게 허락하여 저희로 함께 모여 스스로 생명을 보호하여 각 도의 백성 중 세력을 가지고 저희를 치려하는 자와 그 처자를 죽이고 도륙하고 진멸하고 그 재산을 탈취하게 하되" 했습니다. 즉 이 말은 왕이 자신의 이전 조서를 취소치 않는다는 대 원칙 아래서 유대인 보호를 위한 것이라면 어떻게 하든 임의로 작성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조서가 쓰여지는데 이 조서는 한 마디로 유다인들에게 자기들을 정당 방위할 권리를 가지라는 조서입니다. 그래서 유다인들이 중무장하고 모여 있다가 만약 해치려고 한 자가 있다면 가차없이 처단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두 법의 싸움입니다. 그러니까 하만의 아말렉 족속들은 옛 조서를 가지고 12월 13일에 유다인을 죽이려고 하고 반대로 유다 민족들은 왕의 새 조서를 가지고 그 날에 자기를 해하려는 자들을 대항하여 싸우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성도들이 성령의 지배를 받아도 죄악의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약해지면 이 잠재한 죄악의 법이 또 머리를 드러냅니다. 그러나 이제는 전과는 다른 것은 모르드개가 왕이 입혀주는 푸른 제복과 왕의 붉은 겉옷까지 입었던 것처럼 그리스도 안의 승리의 확신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다인들이 집단으로 모여 중무장하고 대적자들을 즉시 응전할 수 있도록 한 것처럼 언제든지 죄악의 잔재가 나타나기만 하면 그것을 처리하고자 하는 강력한 저항정신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새 조서를 전국에 반포할 때 왕궁에서 길러서 왕의 일에 쓰는 준마를 사용합니다. 이 말은 '왕의 종마'(種馬)로서(Paton, Keil) 종자에 쓰려는 말이니 얼마나 좋은 말이겠습니까? 그런데 또 다름 아닌 왕이 쓰려고 사육되는 종마이니 얼마나 더 훌륭하겠습니까? 그래서 왕의 조서가 신속하게 전국에 반포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성장한 사람의 영적인 특징을 보여주는 예표입니다. 즉 영성이 된 사람도 실수할 수 있지만 내가 왜 이렇지 하면서 즉시 깨닫고 회개합니다. 그 깨닫는 속도가 아주 빠릅니다. 화가 나도 머리에만 살짝 스치는 것같다가 끝나버립니다. 마음까지 안 내려갑니다. 그리고 모인 유다인들처럼 육신적인 것이 나타나기만 하면 그 때마다 마음을 다하여 말씀의 칼로 죄악을 물리쳐 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으로 성장한 자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유대인들에게는 대적들을 진멸할 준비 기간이 거의 9개월씩이나 주어졌다는 점입니다(9절). 13절에 "유다인으로 예비하였다가" 란 9달 동안이나 철저히 준비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온갖 체력과 무술을 연마하며 힘을 기르는 기간이었습니다. 이처럼 영에 속한 사람이 되면 죄와 자아와 세상과 사단을 처리하는 선한 싸움에 철저할 뿐 아니라 익숙한 전문가가 됩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으면 죄악과 사단을 가만 두지 않는 강한 저항정신이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우는 저항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입혀주신 마음입니다.
또한 영에 속한 사람의 아름다움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15-17의 모르드개의 모습에서 알 수 있습니다. 15-17절에 "모르드개가 푸르고 흰 조복을 입고 큰 금 면류관을 쓰고 자색 가는 베 겉옷을 입고 왕의 앞에서 나오니 수산성이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고 유다인에게는 영광과 즐거움과 기쁨과 존귀함이 있는지라 왕의 조명이 이르는 각 도,각 읍에서 유다인이 즐기고 기뻐하여 잔치를 베풀고 그 날로 경절을 삼으니 본토 백성이 유다인을 두려워하여 유다인 되는 자가 많더라" 했습니다.
여기 푸르고 흰 '조복'이란 문자적으로도 '왕의 옷'을 뜻합니다. 또 큰 금 면류관을 씌워졌고 겉에 자색 가는 베옷이 입혀졌습니다. 이는 역시 왕의 영광이 입혀짐을 암시합니다. 이것은 성령의 주장 충만함을 가리킵니다. 그 때 우리에게 예수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제는 전에 하만이 그랬던 것처럼 모르드개는 왕의 호출 없이 왕에게 나아갈 수 있는 권한까지 주어졌습니다. 이것은 이제 성령께서 우리 앞에서 역사하시는 것을 암시합니다. 우리가 기도하기도 전에 벌써 성령께서 우리 속에서 우러나셔서 역사하십니다.
이것을 본 수산 성 백성들은 모두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고 심지어는 본토 백성들까지 유다인 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것은 할례를 받고 여호와를 섬기기로 하는 개종을 말하는 것입니다(스6:21). 이것은 그 만큼 유다인들의 영광이 컸음을 반영합니다. 이처럼 성령의 지배를 받게 되면 우리의 인격과 생각과 삶이 구체적으로 변화되어집니다. 할례란 정결과 아울러 하나님과의 불변의 언약의 표시입니다. 그런데 본토인들이 할례를 받으며 개종을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잠재의식 생각 가치관 등이 복음화 되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러니까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새로워져 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지상에서의 성화란 되어져 가는 것이지 완성은 없습니다. 그러나 되어져 가는 성화라 할지라도 귀한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우리 인격의 근본이 복음화 됨이야말로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릅니다.
<결론>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통제 불능할 것만 같던 우리의 육적인 죄의 세력이라 할지라도 결국은 십자가의 공로로 깨뜨려질 수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날마다 새로워져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온전히 성령의 지배 아래 있어 조금의 머리 드는 죄의 권세라고 처단하시는 승리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