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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요일 1: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 - 요일 1: 2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서 론
기록자
요한일서의 저자는 사도 요한이다(1: 1).
이 점에 대하여 초대교회의 증거는 일치한다. 저자는 자신을 그리스도의 목격자로 소개한다. 특히, 본서에는 ‘말씀, 빛, 영생, 사랑, 새 계명, 거한다, 생명을 바친다, 죄를 없이하다, 마귀의 행위, 세상을 이기다, 살인자, 죽음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가다, 보혜사, 물과 피, 세상의 구주, 하나님의 독생자, 증언하다.’ 등 요한복음에 나오는 것과 같거나 비슷한 단어들이 많다.
이레니우스는, “주의 제자 요한은 이 믿음을 전파하고 또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게린두스에 의해 사람들 가운데 유포되었고 이전에 오랫동안 소위 ‘지식’의 분파라고 잘못 불리었던 니골라당이라는 사람들에 의해 유포된 오류를 제거하고 그들을 논파하기를 원한다.”고 말하였다.
신약의 다른 편지들과는 달리 이 편지에는 기록자가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지 않다. 그러나 초대교회 대부분의 교부들의 증거에 따라, 전통적으로 학자들은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사도 요한을 저자로 보고 있다. 이것은 요한일서 자체의 내적 증거에 의해서도 뒷받침되는데, 구체적인 증거들은 다음과 같다.
(1) 저자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에 대해 목격한 사실은 언급한 것(1: 1-4)은, 그가 그리스도의 활동 초기부터 그를 따라다녔던 제자였음을 말해준다.
(2) 편지 전체에 흐르는 권위 있는 말투는 사도의 직책에 있는 사람만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예. 명령 – 2: 15, 24. 4: 1. 5: 21 확고한 주장 – 2: 6. 3: 14. 4: 12 잘못의 지적 – 1: 6, 8. 2: 4, 22).
(3) 요한복음과 요한일서의 표현 방식이 매우 유사한데, 이것은 이 둘의 저자가 같은 인물임을 말해준다(예. 빛과 어두움, 생명과 죽음, 진리와 거짓, 사랑과 미움의 예리한 대조).
(4) 많은 구절에서 발견되는 유사성은 요한복음과 요한일서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 준다. (예. 요일 1: 1, 6-7과 요 1: 1. 16: 24. 3: 19-21. 요일 3: 8, 14과 요 8: 44. 5: 24 등).
2세기의 폴리갑은 본 서신을 인용하였고, 또 2세기의 파피아스와 이레니우스, 3세기의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와 터툴리안 등은 본 서신을 사도 요한의 글로 인용하였다. 초대교회의 전통은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의 저자를 사도 요한이라고 본다.
수신자
본서에는 수신자에 대해 구체적인 언급이 없지만, 사도 요한이 말년에(A.D. 70-100년경) 에베소를 중심한 소아시아 지역의 여러 교회에서 활동했던 사실로 미루어 보아, 이 지역에 흩어져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회람서신(回覽書信)으로 보냈을 가능성이 많다. 요한 3서는 가이오이다.
기록 연대와 장소
본 서신의 기록 연대는 요한복음을 썼을 주후 85-90년경이거나 그보다 약간 후일 것이다. 초대교회의 전통에 의하면, 사도 요한은 생애의 후년에 에베소에 거주하며 사역하였다. 요한2서는 그 내용과 상황으로 보아 요한일서와 같은 시기에 쓰여졌거나, 조금 늦게 쓰여진 것으로 본다(A.D. 90년경). 그리고 요한의 세 편지는 모두 에베소에서 쓰여졌을 가능성이 많다
기록 동기와 목적
요한일서 - 사도 요한은 그노시스주의의 거짓된 가르침을 논박하고(2: 26), 믿는 이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5: 13) 이 편지를 썼다.
요한이서 - 기독 교회의 초창기인 A.D. 1세기와 2세기경에는 순회 전도자들과 교사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이곳저곳을 여행하면서 복음을 전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은 보통 이들을 집으로 맞아들여 가르침을 받았으며, 그들이 떠날 때는 여행을 위한 여비를 마련해주었다. 그런데 그노시스주의 이단과 교사들도 이와 같은 방법으로 그들의 사상을 전하였다. 따라서 본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잘 모르는 가운데 이단사상의 전파에 협조하는 일이 없도록, 이단 전도자들을 잘 분별하라고 권면하기 위해 기록되었다.
요한삼서 - 테메드리오에 의해 전달된 것으로 보이는 요한삼서는 순회 전도자들의 보고에 기초하여 쓰여졌다. 그들은 사도 요한에게 돌아가 가이오와 데메드리오가 베푼 대접에 대해서 보고하였다.
교회의 지도자급에 있었던 디오드레베는 사도 요한의 권위에 도전하고 요한이 보낸 전도자들을 거부하였었다. 심지어 디오드레베는 그들을 받아들이려는 사람들을 교회에서 추방하기도 하였다. 사도 요한은 가이오를 칭찬하고, 디오드레베를 책망하기 위해 이 서신을 기록했다.
요한일서의 특징적 주제는 형제 사랑이다. 이와 함께, 사도 요한은 우리가 미혹의 영을 분별할 것과 중생(重生)한 자가 죄를 짓지 말고 의를 행하고 형제 사랑을 실천해야 할 것을 교훈하였다. 사도 바울 서신들에서는 칭의(稱義)의 교리가 강조되었으나, 사도 요한의 서신에서는 중생(重生)의 교리가 강조되었다.
사도 요한의 첫 번째 편지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더 많은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 서신은 우리가 어떻게 올바른 사랑을 행할 수 있는가를 가르쳐 주고 성도들이 하나님의 계명에 따라 올바로 살도록 도와준다.
요한은 당시의 이단 사상을 가진 거짓 교사들이 파괴해 버린 교리의 올바른 의미를 회복 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이 서신을 통하여 생생한 이미지를 발견하도록 하자. 예를 들면 빛, 어두움, 생명, 진리 그리고 아버지와 자녀 등, 복음의 진리 가운데서 살아가는 법을 익히도록 하자.
영지주의
초대 기독교회가 직면했던 이단들 중에서 가장 위험했던 사상은 그노시스주의였다. 그노시스주의의 중심 사상은 영혼은 절대적으로 선하고 육체는 절대적으로 악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비성경적인 이원론이며,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중요한 오류들이 발생하였다.
(1) 인간의 육체는 물질이기 때문에 약하다. 따라서 순수한 영이시며 선하신 하나님과 상반된다.
(2) 구원은 육체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것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지식 - 헬라 어로 '그노시스'이며, 여기서 '그노시스주의'(靈知主義)라는 말이 나왔음 - 을 통해 얻을 수 있다.
(3) 두 가지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참된 인성(人性)을 부인한다.
① 그리스도는 육체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을 뿐이다. (도케티즘 : 헬라 어로 '...처럼 보이다'라는 뜻의 '도케오'에서 유래됨).
② 하늘의 그리스도는 인간 예수가 세례를 받을 때 그와 결합하였다가, 십자가에서 죽을 때 다시 떠나갔다. (케린투스가 대표적인 인물이었으므로 '케린투스주의'라고 함).
(4) 육체는 악한 것이기 때문에 가혹하게 다루어야 한다.
(5) 영혼, 육체의 이원론은 도덕적 타락을 야기시켰다. 왜냐하면 육체는 악하므로 육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다고 하더라도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약에서 취급한 그노시스주의는 초기 형태의 것으로 이 이단 사상이 완전한 체계를 갖춘 것은 2세기와 3세기 무렵이었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은 사도행전 서론을 참고하십시오.)
제 1 장 : 빛이신 하나님과의 교제
1. 생명의 말씀 ( 1: 1 – 4 )
①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②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이시니라. ③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④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요일 1: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 -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
태초부터 있는[계신]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
사도 요한의 사역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부르시고 세우신 모든 사도들의 사역이었다. 사도 요한은 자신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초부터 계신 생명의 말씀’이라고 증언하였다.
‘태초’는 우주의 시작을 가리킨다. ‘있는’[계신]이라는 원어(엔, 미완료과거)는 ‘있었던[계셨던]’이라는 뜻이다.
‘태초부터 계셨던 자’라는 말씀은 우주가 시작될 때 이미 존재하고 계셨던 자, 우주의 시작 이전부터 계셨던 자, 곧 신적인 존재를 가리킨다. ‘태초부터 계셨던 생명의 말씀’은 영원한 신적인 존재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에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 1: 1-4)고 증언했다.
거기서도 ‘계시니라’(엔, 미완료과거)는 본문의 ‘있는’이라는 말과 동일하다. 태초부터 계셨던 그 분, ‘말씀’(로고스)이라고 불리는 그는 하나님과 구별되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으로 증거 되는 분이시다.
우주의 시작 때에 이미 존재하고 계셨던 그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그때 존재하고 계셨을 수 없다. 태초부터 계셨던 그 분, 말씀으로 불리신 그는 하나님과 구별되면서도 그 본질과 본체에 있어서 한 하나님이시다. 여기에 삼위일체의 신비가 있다.
사도 요한은 2절에서 그를 ‘영원한 생명’이라고 표현하였고 또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되었다’,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라고 표현하였다.
태초부터 계셨던 그 분, 모든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 특히 죄로 인하여 죽은 모든 인생들에게 참 생명이 되시는 분,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계시다가 육신으로 나타나신 그는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신’(요 1: 1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되신다. 그러므로 그는 친히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고(요 14: 6), 또 ‘창세전에 아버지와 함께 영화를 누렸다’고 말씀하셨다(요 17: 5).
요한은 본 서신 끝부분에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고 증언했다(요일 5: 20). 예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가진 하나님이시다.
요한이 전한 예수님에 대한 내용은 믿을 만한가? 이에 관해 요한은 자신이 그에 대한 목격자임을 고백한다. 그는 1절에서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고 하였고, 2절에서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라고 했고, 3절에서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 전함은”이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 요한은 자신이 전하는 분에 대하여 그의 신적 능력과 영광을 직접 자기 눈으로 보았고 들었다고 반복하여 증언한 것이다. 이런 증인의 증언은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신약성경은 바로 이런 목격자의 증언들의 기록이다. 여기에 기독교 복음의 확실함이 있다. 기독교 복음은 목격자들의 증언들에 근거하고 있다. 신약성경에 기록된 그 증언들은 2천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복음 진리의 확실성을 증언한다.
1] 태초부터 있는.
이것은 1: 1과 병행된 표현으로 생명의 말씀이 영원 전에 선재하였음을 암시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하나로 영원 전부터 선재하셨으며, 복음이 하나님께 속하여 태초부터 존재하였음을 시사한다. (Smalley, Barker).
* 요 10: 30 -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 요 13: 3 -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2]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헬라어 본문에는 본 절은 주절이 문장의 맨 끝에 오는 일종의 도치문으로 네 개의 관계절, 즉 '태초부터 있던 것', '우리가 들었던 것', '우리가 눈으로 보았던 것', '우리가 주목하고 손으로 만진 것'이 '생명의 말씀'을 수식하고 있다. 요한은 이러한 매우 복잡한 표현을 통하여 자신의 격렬한 감정을 적절히 언어화시키고 있다. (Barker).
본문에서 가장 핵심을 이루고 있는 '생명의 말씀'은 두 가지로 해석된다. (Stott, Smalley, Westcott, Dodd).
Ⓐ 영원하시고 인격적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현현을 의미한다. 즉 성육하신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 요 1: 1 -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복음을 의미한다.
'생명의'(조에스)는 '말씀의 내용'을 의미하기도 하고,
* 행 5: 20 -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 빌 2: 16 -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
* 요 8: 12 -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 요 6: 35, 48 - (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 요 4: 10-11 - ⑩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⑪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 계 21: 6 -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 계 22: 1 - 또 그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이러한 두 가지 의미는 서로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이다. 복음은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신 예수에 대한 본질적인 선포이기 때문이다. (Smalley, Houlden, Westcott, Marshall).
그러므로 창세 이전에 성부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 분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신 말씀(로고스)으로(요 1: 1) 그 분 안에 참되고 영원한 생명(조에)이 있었다(요 1: 4).
* 요 1: 1, 4 –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이 생명이 우리에게 나타나신바 된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이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태어난 성육신이다.
말씀(로고스)라는 단어는 헬라인이나 유대인들에게 모두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헬라 철학자들은 발설된 말뿐 아니라 마음 속에 있는 말, 즉 이성을 나타낼 때도 말씀(로고스)를 사용하였다. 이 용어가 우주에 적용될 때에는 만물을 다스리시는 이성적인 법칙을 의미하였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말씀을 하나님과 관련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능동적인 간섭을 나타낼 때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유대인과 헬라인에게 말씀을 인격체로 사용하여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실 때에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시켰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분으로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인 것이다.
3]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들은 바요'(아케코아멘)와 '본 바요'(헤오라카멘)는 완료시제이다. 이것은 생명의 말씀이 예수 안에서 마침내 실현되었으며 그것을 사도들이 예수께서 설교하셨을 때 듣고, 예수께서 사역하셨을 때 눈으로 보고 확인하였음을 의미한다.
* 히 1: 1-2 - ①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②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 '듣고'와 '본'은 요한복음에서 '믿음'과 연결된다.
* 요 10: 27 -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 요 20: 29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만진 바라'(여살라페산')은 부정과거 시제로 과거 한때 직접 만져서 느낀 것을 가리킨다. 요한은 이러한 관계절, 즉 '들은 바요'. '본 바요', '만진 바라'는 표현을 통해서 생명의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셔서 역사 속에 현현하신 하나님을 드러내셨으며 그의 사역과 설교를 통해 자신 안에 실현될 복음을 전파하셨음을 강조한다. (Stott, Smalley).
요일 1: 2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이시니라. (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 )
본 절은 일종의 삽입어구로 앞 절의 내용을 확대시킨 것이다.
헬라어 본 절 처음에 나타나는 접속사 '카이'(그리고)는 이어지는 3, 4절을 소개하는 데에 사용되고 있으며, 본서 내에 자주 나타나는 표현 방법이다. (Smalley).
요일 2: 27 -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요일 3: 19-24 – 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20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 21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22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23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24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1]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생명'(헤 조에)는 1절에서처럼 예수 자신의 존재와 그의 복음을 가리킨다. (Westcott).
'나타내신바'는 예수의 지상 사역을 의미한다. 즉 그의 성육신과 십자가상의 죽음과 부활을 가리킨다. 이는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인 생명이 역사적으로 예수 안에서 계시되었음을 시사한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계시하시지 않는 한 인간이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음을 암시하고 있다. (Stott, Smalley).
2]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고 너희에게 전하노니.
본문은 세 동사, 즉 '보았고', '증거하고', '전하노니'를 통하여 경험의 세 측면을 부각시키고 있다(C Smalley).
'보았고'(헤오라카멘)은 그 진의와 중요성 정도를 파악하기 위해 '살펴본다.'는 의미로서 요한의 개인적 경험을 시사한다.
'증거하고'는 요한 자신이 경험한 내용을 개인적으로 전할 뿐만 아니라 사도로서 공적으로 선포하였음을 나타낸다(Law, Brooke).
3]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
헬라어 본문에는 바로 앞에 '영원한 생명'(텐 조엔 텐 아이오니온)이 자리 잡고 있어서 본 절 처음에 나타난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와 같은 의미의 반복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보다 발전된 표현으로 '생명'을 '영원한 생명'으로 부각시키고 동시에 생명의 결정적인 근원으로 '아버지와 함께'를 제시한다. (Smalley).
이러한 사실로 보아 '영원한 생명'은 생명의 길이가 영원함을 뜻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생명이 갖고 있는 신적인 성격을 나타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Barker, Wilder).